봄꽃은 가을단풍을 알 수 없는가

 

 

   

 

  상처 난 나알개를 접어야하는, 외로운 사아람아.

  당신은 내 사랑, 영원한 내 사람, 외에로워 마아세요.

  이제는 내 품에서 다시 태어날, 바람 같은 여어어어자.

 

  마이크를 두 손으로 부여잡은 소형의 허리가 활처럼 뒤로 휘었다.

 

  우린 소형을 김운도라 부른다.

  눈을 감고 마이크를 삼킬 듯이 입술에 갖다댄 채 부르는 소형의 노래는 구성지다. 지나치게 감정에 젖어 있는 모습은 웃음을 자아내게 하지만 듣고 있으면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다. 트로트를 잘 부른다고 성만 바꿔 김운도라 별명을 붙였지만 소형은 그 별칭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트로트를 제일 맛있게 부르는 가수는 조용필이라고, 자기는 조용필 창법을 추구하므로 차라리 조용팔이라 불러 달라 한다. 물론 조용필이 트로트만 잘 부르는 게 아니라 트로트까지 잘 부르는 가수라고.

  조용필 이야기만 나오면 소형이 할 말이 많아진다.

  조용필 외에 어느 가수의 음반도 그 한 장을 다 듣는 건 몹시 지루한 일이라고, 노래가 괜찮아서 사보면 한두 개 외엔 들을 게 없다고 했다. 예찬은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다른 가수가 불렀다면 차마 끝까지 들어주기도 힘들었을 노래를 그나마 그가 부르면 들어줄만한 노래로 변한다고도 했다. 참 한심하다 싶은 곡도 들어줄만한 노래로 부를 수 있어야 진짜 가수라고, 그러니까 자기가 알고 있는 진짜 가수는 조용필 뿐이란다.

  잊어버리지도 않고 했던 말을 한다. 오죽하면 우리가 레퍼토리를 다 욀 정도다. 소형이 얘기를 시작하면 수자는 오냐 네 팔뚝 굵다는 표정이고 미경은 웃기만 한다. 어쨌든 노래 고문을 당하고 핀잔주고 비웃고 하는 동안 우리도 준 마니아 정도는 되어버렸다. 잘 부르지는 못하지만 그 많은 노래를 다 알고 있으니.

  자식에게 눈멀지 않은 어머니가 어디 있겠는가. 팬이 스타에게 빠져있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겠지. 그래, 네 사랑 네가 지켜라. 소형이 열을 뿜을 때마다 그렇게 웃고 만다.

 

  소형의 노래가 끝났다.

  그녀는 자기 노래에 자기가 취해 흐뭇한 웃음을 흘리며 마이크를 탁자 위에 놓았다. 팡파르를 울리며 화면에 점수가 나왔다. 요란한 팡파르 소리가 아깝게 점수는 76. 소형은 실망한 표정으로 의자에 털썩 앉는다.

  <하여튼 기계하고는 상대 못 하겠어. 왜 감정 점수는 안 주느냐 말이야.>

역시 불만을 터뜨리는 것도 잊지 않는다.

  노래는 어떤 감정으로 어떤 맛이 나게 부르느냐가 제일 중요하다고 여기는 소형의 노래는, 넘치는 감정 때문에 늘 박자가 늦거나 빠르다. 특히 트로트를 부를 땐 더욱 감각적이고 구성지게 불러 우릴 즐겁게 하지만 노래방 기계는 그걸 알아주지 못한다. 그래서 노래방 올 때마다 하는 불평을 오늘도 했다.

  기계는 인간의 불평 따위에 기죽지 않는다.

  화면엔 다음 예약 노래가 떠올랐다. ‘실연이라는 제목 밑에 작곡 김종서, 작사 김종서, 노래 김종서라는 글자가 나란히 적혀 나왔다. 참 재주도 많은 가수다. 저런 멋진 노래 작곡에, 직접 가사를 붙이고, 타고난 목소리까지 갖췄으니.

 

  김종서 공연에 간 적이 있다. 가사를 다 따라 부르던 팬들의 기억력과 열정 속에서 약간 주눅이 들었던 기억도 난다. 늘 목이 말썽인 내가 공연 끝까지 생생했던 그의 목소리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선생을 하려면 목소리도 타고 나야 한다고 중얼거리며.

  처음부터 끝까지 음반과 다름없이 터져 나오던 아름다운 목소리와 섬세한 감정 표현. 직접 본 이후론 음반을 들을 때마다 공연이 떠올라 노래가 더 생생하다. 자꾸 그 날의 감동으로 노래를 듣게 된다.

  수자가 마이크를 들고 일어선다.

  유행하는 노래치고 수자가 집적이지 않은 노래는 없다. 인기 가요 순위에 올라 방송을 탄 노래는, 수자에게 한 번씩 유린을 당해 만신창이가 되어야 수자의 기차 화통 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수자가 즐겨 듣는 노래는 정해져 있다. 은은한 해바라기노래에서 시작하여 한창 활동하던 때의 정태춘 박은옥의 들꽃같은 고요한 노래들. 그 다음엔 왠지 중년의 사랑이 느껴지는 조성모의 노래를 많이 들었다. 그래서 소형이 수자에게 붙여준 별명이 발라드의 여왕이다. 그리고 또 발라드를 부를 때 수자의 노래가 제일 들을만하기도 하다.

  그러나 노래방에서는 취미고 뭐고가 따로 없다. 장르 불문, 능력 불문하고 떴다 하는 노래는 다 섭렵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 수자가 새로운 노래를 골라 그 노래를 망칠 때마다 우리는 그 노래를 수자의 금지곡 목록에 추가시킨다. 금지곡이 늘어나는 만큼이나 수자의 노래 편력은 심해진다.

오늘 수자가 망칠 노래는 실연이다. 김종서의 매력적인 고음은 화통이 폭발하는 것 같은 째지는 소리로, 그 빠른 박자에 맞춰 불러내야 할 가사는 입술을 제대로 간추리지도 못한 상태에서 튀어나와 죽 끓는 소리로 바뀌었다. 수자는 음이 높아질수록 소리를 질러댔다. 그녀의 고음은 高音이 아니라 굉음이었다. 그 빠르게 계속되는 환상적인 고음 부분에서 우린 전부 귀를 막아야 했다. 신나는 건 수자 혼자였다.

  드디어 그 목청 좋은 수자의 목소리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참고 있던 미경이가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차마 못 웃고 있던 소형이가 미경의 웃음에 용기를 얻어 손뼉까지 치면서 큰소리로 웃어댔다. 악을 쓰던 수자도 결국 웃고 만다. 웃느라 마이크에 콧김을 킁킁 불어넣어 가면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끝까지 불렀다. 김종서의 멋진 노래 실연은 수자에 의해 완벽하게 유린당한 채 우리들의 야유를 받으며 금지곡 명단에 첨가되었다.

  그러나 가해자인 수자는, 정작 우리들의 비난에는 끄떡도 않은 채 기계의 심판만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로 화면만 바라보았다. 충실한 하인처럼 기계는 수자의 기대에 답을 보냈다. 팡파르가 울리며 떠오른 점수는 84, 가수의 소질이 있네요, 였다. 소형이 또 한 번 기계에 대고 야유를 퍼부었다.

  <엉터리다. 목소리만 크면 다냐?>

  수자도 지지 않았다.

  <다다. 억울하면 너도 크게 불러라.>

  두 사람이 떠드는 동안에도 기계는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화면이 바뀌고 내 예약곡 제목이 떠올랐다. 스콜피언스의 홀리데이’. 나는 마이크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목을 본 미경이가 나를 보고 웃었다. ‘또 팝송을이란 웃음일 수도 있고, ‘야유를 각오하라는 웃음일 수도 있다.

 

  발음도 좋지 않고 노래도 잘 못하면서 종종 팝송을 부르는 내게 수자와 소형이 비난의 탄성을 지르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귀에 익은 전주가 흘러나오자, 둘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눈을 크게 뜨고 ?’하는 얼굴로 나를 본다. 나는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못 본 체한다. 이젠 비난도 놀이의 일부가 된 마당이다. 그게 없으면 싱겁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나는 야유를 환성으로 즐기며 도도한 웃음을 입가에 띠고 열대의 숲에 부는 바람 같은 기타 소리에 내 청각을 몽땅 바치고 있었다. 그들의 애정 어린 야유는 이젠 칭찬보다 정겹고 즐거운 것일 뿐, 아무런 그늘을 지우지 못한다. 세월과 신뢰가 우리 사이를 그렇게 아름답게 만들었다.

  Let me take you far away

   You'd like a holiday

  ……

  노래가 시작되자 그들은 묵연히 음악을 들었다. 내 노래를 듣고 있는 게 아니라 순전히 멜로디를 즐긴다는 걸 안다. 아름다운 멜로디다. 가사 없이도 진한 감동을 준다. 내 매끄럽지 못한 발음과 불안한 음정에 상관없이 노래는 흘러간다.

  그들은 지금 스콜피언스의 청아한, 하늘로 쏘아진 불꽃같은 목소리를 상상으로 듣고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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