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왔었니? 벌써? 나는 오늘 당장 할 줄은 몰랐네. 애신이가 전화하기 전에 내가 먼저 하려 했는데……. 그러면 다 알고 있겠네. 마음 상했겠다. 어쩌니 단비야. >

  <언니가 전화 번호 가르쳐줬어? 언니까지 이러기야?>

  나는 모자라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전화번호 가르쳐 준 건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그걸 알면서도 언니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생짜로 어리광이 나왔다. 내편이라는 푸근해진 마음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래 미안하다. 내가 안 그래도 안 될 거라 했거든.>

  <요즘도 애신 언니하고 연락해? 난 연락 끊긴 줄 알았는데.>

  <나 결혼식 때 온 게 마지막이야. 그리곤 본 적도 없어. 전화도 얼마 전에 처음 연결됐지. 1주일 됐나? 전화가 왔더라고. 그냥 안부 전환 줄 알았지. 잊지 않고 전화를 했구나 싶어 얼마나 반갑던지. 그런데 네 이야길 묻잖아. 결혼을 안 했다고 하니까 왠지 전화를 해보고 싶더라 하면서 오빠 얘길 꺼내더라. 나도 기분이 나빴지.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그래도 제 딴에는 친구라고 전화했는데 화를 낼 수는 없잖아. 그리고 단비야, 걔가 원래 꽁 막힌 데가 있잖아. 다른 방식으로 생각 못하는 애거든. 네가 이해해라. 나도 속으로는 턱도 없다 했지. 그래도 겉으로는 그런 내색 어떻게 하니. 그냥 네가 안할 거라고, 결혼할 마음 없는 애라고만 했지. 그런데 막무가내로 그건 네가 모르는 소리라고,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단 말 들어보지도 못 했냐고, 본인한테 이야기 한 번 해보라고 얼마나 끈질기게 졸라대는지, 하도 조르기에 내가 이야기 해 본다고 했지.

  그런데 오늘 저녁에 또 전화가 와서 이야기 해 봤냐고 묻는데 안 해봤다는 이야기 못하겠더라. 너무 성의 없어 보일 것 같기도 하고 섭섭해 할 것 같기도 해서. 그래도 친구로 지낸 세월이 얼만데. 그래서 전활 하긴 했는데 네가 마음이 없다더라고 둘러댔다. 그랬더니 자기가 직접 해봐야겠다고, 할 수 없이 네 전화번호를 가르쳐줬지. 나는 설마 밤에 당장 전화 할 줄은 몰랐네. 내가 내일 아침에 너한테 먼저 전화해 놓으려 했는데, 알고는 있으라고. 본인이 직접 거절하는 게 맞겠다 싶기도 하고..... 그래, 애신이가 뭐라던데?>

  <오빠 자랑 무지 하대?>

  <옛날부터 오빠라면 끔찍했잖아.>

  <자기가 끔찍하다고 나도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하나봐. 나한테 연락한 걸 영광으로 알아라, 하는 투였어.>

  <네가 이해해라. 걔 어떤 면에선 생각 좀 짧은 거 알지? 그래도 마음은 착하다. 뒤끝도 없고.>

  <착하기는, 착한 사람이 자기 조카는 귀하고 남의 자식은 안 귀해? 애 딸린 과부하고는 재혼 못 시킨대. 과부가 자기애만 귀여워하고 조카들 푸대접 할까봐. 머리 돌아가는 것 보면 모자란다는 말도 못 해. 모자라는 사람이 자기 이익 될 일에 그렇게까지 머리가 돌아가? 하긴 모자랄수록 자기한테 잘하는 건 기차게 안다더라. 어린애도, 짐승도 자기 귀여워하는 건 기차게 알아보니까.>

말이 좀 심했나? 그런 생각도 했다. 물론 언니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아이구 얘, 너처럼 그렇게 따지면 세상 골치 아파 못 산다. 그냥 그런 사람도 있고 이런 사람도 있겠거니 하고 살아라. 거절했으면 됐지 뭐. 좀 부드럽게 하지 그래. 제 딴에는 네 생각도 많이 하던데.>

  ‘네 생각도 많이 하던데?’ 그 말에 또 엄청 자극을 받는다.

  <언니도 순진하기는. 내 생각을 하다니. 애신 언니 딸이 그런 결혼을 한다고 해도, 아니 그런 소릴 들었어도 애신 언니가 그렇게 말할 수 있었겠어?>

  <그거야 다르지 뭐.>

  <그러니까 내가 화가 더 나지. 제발 언니도 입장 바꿔서 좀 생각해보고 얘기해. 그게 어떻게 내 생각을 해주는 거야. 순전히 이기적인 생각이지. 그런 이기적인 발상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지 몰라. 아니 다 좋아. 그건 또 그렇다고 쳐. 사람이란 원래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니까. 내 생각해주는 거 바라지도 않아. 나도 애신 언니 생각해준 적 없으니까. 그런데 사람 말을 왜 그렇게 못 믿어? 내가 싫다고 하면 싫은 줄 알아야 할 거 아냐. 왜 말을 제 멋대로 해석해?>

  <싫다고 했는데도 계속 그래?>

  <말도 마. 내가 일부러 그러는 줄 알아. 도대체 자기가 결혼을 원했다고 모두 다 원할 거라고 단정지어버리는 그 무서운 결론은 왜 흔들리지도 않는 거지? 내가 뭐 자기 굳은 결심 보고 뭐라 그래? 자기 결심이 굳으면 내 굳은 결심도 인정해줘야 될 거 아냐. 내가 따라다니며 자기들보고 독신이 좋으니까 결혼하지 말란 적 있어? 이혼하란 적 있어? 난 결혼하기 싫어도 친구들 결혼식장에는 축하해주러 간다고!>

  한밤의 연설.

  결국 격앙된 나의 연설로 끝나버리고 만 통화.

  언니는 하소연 들어주는 셈 치자 싶었는지, 아님 대꾸할 가치를 못 느꼈는지, 마지막엔 잠자코 내 말만 들어주었다. 언니 역할도 고달프다. 적절할 때 결혼 하지 않은 동생을 둔 죄다. 결혼하지 않은 건 진정 죄가 되는지. 언니도 그래서 연좌를 입은 게 아닌가.

  하루 종일 수업으로도 모자라 또 열강이라니. 목이 아프다. 흥분하면 목소리가 커지는데. 그래서 목이 더 아픈데. 흥분할 때마다 그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린다. 왜 목소리가 커지는 걸 당시엔 느끼지 못할까. 정말 자신이 싫다.

  전화를 끊고 목욕을 하고 누웠다.

  잠은 천길 만길 달아났다.

  밤새 몸은 파김치, 정신은 초롱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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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식이 왜 없어. 남맨데 다 컸어. 작은애는 초등학교 육 학년, 큰 애는 중학교 이 학년. 뭐 걔들은 신경 쓸 거 없어. 제 할 일 알아서 잘 하는데, . 할머니도 계시고. 단비 넌 그냥 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들어와 살기만 하면 돼. 애들도 아빠 닮아서 착해.>

  보지도 못한 오빠보다 애신 언니가 더 싫어졌다. 뒷골이 당겼다. 그런 이야기를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나에게 전달하는 그녀의 사고방식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혼자 된 남자의 자식쯤은 아주 당연하고, 다른 여자의 자식은 안 된다? 나이 들도록 시집 못간 나에게 선심이라도 쓰겠다? 안하면 그 뿐이라고, 흥분하지 말자고 다짐을 하는데도 눈이 아파 오며 눈물까지 나려했다. 감정을 자제하기가 힘들었다. 격한 감정이 담긴 목소리를 숨기려고 듣고만 있었다. 아니 더 이상 아무 말도 하기 싫었다. 하지만 나를 볼 수 없는 애신 언니는 설득이 되는 걸로 짐작하는 모양이었다. 다 된 밥에 뜸을 들이는 심정으로 사설을 더 늘어놓았다.

 

  <우리 엄마도 며느리 시집살이 시킬 사람 아니다. 너 나 잘 알잖아. 나보면 우리 엄마 어떤 사람인지 짐작될 거 아니니? 올케 언니도 이혼하면서 우리 엄마는 좋은 분이라고 했다. 시어머니 원망은 안 한다고. 오빠하고 성격이 안 맞아서 그렇지. 우리 오빠 작년에 부장 됐다? 주변에 탐내는 사람 많아 얘. 그래도 애 딸린 여자는 좀 그렇잖니? 자기 애 있으면 아무래도 남의 애한테는 소홀할 테고.>

  난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언니가 너무 싫었다. 본래 저런 사람이었던가. 정말 싫다.

  <언니, 그러면 탐내는 사람들 중에서 골라 보세요.>

  나는 그녀의, 내 머리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이기적인 발상을 참을 수가 없어 날카로워진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드러내고 말았다.

  <어머 얘, 그건 내가 하느라고 한 소리고. 오빠가 그만큼 괜찮다는 뜻으로 말한다는 게 네 자존심을 건드렸구나. 우리 엄마는 다른 데는 관심도 없어. 네 얘기 들은 후로는 아주 널 며느리 본 것처럼 너만 보자고 졸라. 어때? 이제 마음이 풀렸니? 내일이라도 당장 보자. 우린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너도 애들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정 붙이는 게 나을 테고.>

졌다. 완전히 졌다.

  그녀는 내가 어디에서 화가 났는지도 모르고 소설을 섰다. 나는 너무 황당한 적을 만나 싸울 힘을 잃었다. 무슨 말로,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아득했다. 어떤 말을 해도 통할 것 같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기도 겁이 났다. 그녀는 내 말을 자기 좋을 대로 해석했다. 할 말은 떠오르지 않고 얼굴만 달아올랐다. 그저 전화부터 끊고 싶었다.

  <언니, 나 내일 출근해야 해요. 전화 끊을 게요.>

  <, 그래. 내가 피곤한 너를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네. 알았어. 푹 자.>

  언니는 내가 벌써 자기 집 식구가 된 양 다정하게 인사를 했다. 나는 수화기를 놓기 직전에 한 마디를 하고는 얼른 수화기를 놓아 버렸다.

  <오빠 이야기는 안 들은 걸로 할게요.>

 

  수화기를 놓고도 다시 전화벨이 울릴까 조마조마 했지만 전화가 다시 오지는 않았다. 나는 초조하게 10분을 더 전화기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벌렁 누웠다. 가슴이 펑펑 뛰었다. 진정시키려고 하면 할수록 새록새록 화가 도로 피어올랐다.

내가 뭐 쓰다버린 짚신짝인가.’

몸을 뒤집어 엎드리는 순간 눈물이 쏟아졌다. 어디에 숨어 있던 눈물이었나. 화가 났지 울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눈물은 주책도 없이 쏟아졌다. 엎드린 채 한참을 울었다.

  ‘싫다면 싫은 줄 알지, 왜 자꾸 난리야.’

  ‘혼자라서 불편하고 서러운 점이 또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다. 내가 죽을 때까지 혼자라면, 아마 죽을 때까지도 이런 일에선 못 벗어날 것이다. 관습 앞에 개인의 가치관은 종종 무시된다. 의사 무시된 채 추진되는 짝 지워주기라는 엽기적인 인정. 어떤 동물도 개인의 의지 밖에서 짝이 지워지는 법은 없다.

  그들은 그걸 인정이라 할지 모르지만 내 의사가 조금도 존중되지 않는 인정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인정이란 말인가. 나를 위한 인정이라면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적어도 나를 할퀴지는 말아야 할 것이 아닌가. 난 생각이 모자라는 어린애도 아니고 후견인의 동의를 얻어 행동해야 하는 한정치산자도 아니다. 직업을 가지고 나의 생계를 꾸려나가는 당당한 사회인이다. 그런데 왜 아직 나의 정신을, 마음을, 몸을, 그들의 계획 속에 짜 맞추려 하는가. 단지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가르치고 바꾸려 하는가

 

  애신 언니가 어떻게 내 전화번호를 알았지?

  눈물을 거두고 고개를 들었다. 내가 질문하고도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물이 말라붙은 얼굴이 거칠거칠 했다. 나는 당기는 얼굴을 손으로 비비며 수화기를 들었다. 늦었지만 그냥은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전화는 형부가 받았다. 엉뚱하게 그 밤에 저녁 드셨어요?’는 왜 나왔는지 모르겠다. 형부는 웃으며 언니를 바꿔주었다. 애신 언니 이야기를 꺼내자 언니는 기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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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정이라는 이름으로

 

    

 

  1교시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장선생이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넘겨주었다. 쪽지를 받아들며 얼굴을 쳐다보자

  <누군지는 말 안하구요, 그냥 메모만 좀 전해달라고, 그 번호로 전화 좀 해 달래요. 모르는 번호에요?>

  장선생은 내 표정만 보고도 그렇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해 보세요. 분명히 선생님 찾았으니까요.>

  뒤돌아서서 가려던 장선생에게 물었다.

  <여자야, 남자야?>

  <여자예요. 남자라면 집히는 데라도?>

  <아니.>

  반대였다. 여자라면 집히는 데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키지 않았지만 수화기를 들고 번호를 눌렀다. 역시 애신 언니였다. 애신 언니는 지나치게 반가워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애신 언니의 지나친 호들갑은 내 감정을 더 딱딱하게 만들었다.

 

  애신 언니는 큰언니 고등학교 동기다. 학교 다닐 땐 언니 단짝으로 우리집에 자주 드나들었고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심심찮게 놀러왔다. 그러다 어느 날 결혼을 했고 그 후론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십 년이 넘도록 한 번도 못 본, 더구나 언니 친구인 그녀는 나와 그렇게 정이 나서 호들갑을 떨 사이가 아니었다. 언니와는 친했기 때문에 우리 집에 자주 왔고 같이 밥도 먹었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언니 친구였고, 자기들끼리 무슨 할 말이 그렇게도 많은지, 나랑은 별로 이야기도 하지 않았었다. 물론 나도 눈치 없이 아무 데나 끼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제 밤에 드라마를 보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한 번도 빼먹지 않고 보아왔던, 대사를 하나도 놓칠 수 없어 텔레비전 속에 들어갈 판이었던 나는 전화를 받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얼마나 끈질기게 울리던지, 그러자 갑자기 무슨 급한 전환가 싶은 불안감이 확 들어 수화기를 들었다.

나 애신이 언닌데하는데 도대체 그 이름의 주인공이 누군지 얼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섭섭하다며 자기는 그래도 나를 늘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까맣게 모를 수 있냐고, 같이 튀김 해먹던 이야기며 크리스마스이브에 카드 치며 밤새 놀았던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았다. 거기까지 이야기하자 그 이름과 얼굴이 결합이 되면서 아하하고 내 입에서 감탄사가 나왔다. 그리고 내가 너무 무심했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미안하기까지 했다. 나는 미안한 마음을 상쇄할 목적으로 목소리를 바꾸어 다시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런데 무슨 일일까.

  10년도 넘게 연락도 없던 사람의 갑작스런 전화.

  더구나 난 그녀의 친구가 아니라 친구의 동생이다. 친구라면 그래도 예측이 가능하다. 결혼을 하고 생활에 쫓기다 친했던 친구랑 오랜 세월 연락도 없이 보지 못한다. 전화 한 번 해봐야지, 미루던 세월이 몇 년이나 흐르고, 어쩌다 생각과 여유가 동시에 생긴 어느 날, 전화를 해 볼 수도 있다. 궁금하고 보고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애신 언니는 내 친구가 아니다. 언니를 통해서만 보았던 사람일 뿐이다. 내 안부라면 우리 언니한테 물어보는 게 일반적이지 않는가.

  난 이런 생각을 하며 전화의 목적을 유추하려 애썼다. 내가 너무 인정머리 없는 걸까, 하는 자책이 살짝 들기도 했다. 그래도 한 때는 집을 드나들며 밥도 같이 먹던 사이인데. 그래서 정이 많이 들었던 것일까. 안부가 궁금해진 걸까.

  내 자책은 오래 갈 필요가 없었다. 언니는 분명한 목적이 따로 있었다. 적어도 내 안부가 궁금했던 건 아니었다. 서로 인사를 끝내고 난 뒤에 한 그녀의 인정어린 어투의 말. 말은 정다웠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적어도 내겐.

전화를 끊고 난 뒤, 난 한참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다.

**

  <사실은 말이야 단비야. 너 우리 오빠 알지? 우리 오빠 정말 착하고 괜찮거든? K고 나오고 K대학 나오고, 학교 땐 수재란 소리 들었다?>

그래 알고는 있다. 우리 집에 자주 드나들 때, 우리 언니에게 자랑만 하고 소개해줄 마음은 없었던, 그 자랑스러운 오빠 이야기는 나도 여러 번 들었었다. 그런데 다짜고짜 오빠 얘기는 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다. 나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언닌 사실 그 오빠에게 관심이 많았다. 애신 언니가 오빠 이야길 할 땐 언니랑 엮을 마음이 있는 걸로 생각했다. 나도, 언니도. 그런데 아니었다. 애신 언니는 순전히 수재 오빠 자랑이 목적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다 애신 언니는 그 오빠보다 먼저 결혼을 했고 그리곤 모든 소식이 끊겼다.

  <그래서요, 언니.>

  <너 아직 결혼안한 거 맞지?>

  <.>

  이쯤에서 전화한 이유를 눈치 못 챈다면 그건 너무 둔감한 거 아닐까. 물론 난 눈치를 챘다. 그리고 피곤했다. 결혼을 하지 않은 모든 여자가 결혼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사고도 존재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많다.

  <우리 오빠 한 번 만날 마음 없나 해서. 아니 참 마음 없나가 아니고 내일 당장 만나라. 만나 봐야 사람을 알지. 말로는 백 번해도 소용없다.>

여기까지 들었을 때만 해도 , 맞선했다. 그러다 순간 나이가 꽤 많을 텐데,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았던 말인가? 설마?’ 하면서도 신경은 팽팽해졌다.

  <오빠가 아직 결혼을 안 하셨어요?>

  애신 언니는 내 질문에 펄떡 뛰었다. 같은 말도 얼마든지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걸 너무나 잘 보여주었다.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게 아니라 준비해둔 말 중 하나를 꺼내놓은 것 같은 답이었다.

  <무슨 소리, 얘는 우리 오빠가 얼마나 괜찮은데 아직 결혼을 못 해. 인물이 빠지나, 키가 작나, 머리는 또 얼마나 좋은데.>

나는 노골적으로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지긋지긋한 가족 이기주의와 맹목. 그 맹목이 휘두르는 타인을 향한 칼날.

  ‘누군 인물 빠지고 머리 나빠서 결혼 안 했나?’

  하지만 미혼이건 기혼이건 그건 나랑 상관없었다. 선을 볼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기 때문에 완곡하게 거절할 생각이었다. 선은 절대로 보지 않으리라고 마음먹은 지 오래다. 마치 시장에 나앉는 듯한 그런 기분은 두 번 다시 느끼고 싶지 않다. 하지만 상대는 언니 친구다. 감정을 상하게 할 수는 없다. 사실은 내 마음 상하는 것도 겁이 났다. 농담처럼 웃으면서 거절하고 싶었다.

  <결혼한 오빠를 내가 왜 만나요?>

  농담은 실패했다. 애신 언니는 내가 조건을 내세우는 것으로 알아들었다.

  <단비 너 정말 결혼 안 갈 거니? 결혼은 해야지. 여자 나이 서른 후반이면 이젠 총각하고 결혼하긴 어렵다?>

  결국 난 칼에 베이고 말았다. 맹목이 휘두르는 칼을 피할 방법은 많지 않다. 이 싸움은 정해진 규칙이 없다. 그래서 연습도 의미가 없고 조심도 방패가 되는 건 아니다. 사고의 맹목은 어떤 재앙보다 무섭다.

  내 감정이 어떻게 전달됐을까.

  정말 전혀 못 느낀 걸까.

  그녀는 몹시 안타깝다는 투로 목소리를 낮춰 부드럽게 뒷말을 끌었다. 전화한 목적이 너무나 뚜렷하게 드러났다. 정말 깨끗하게 거절하는 일만 남았다.

  <언니, 난 결혼할 마음이 없거든요.>

  그 때까지도 말에 웃음을 띠었다. 난 그랬다고 생각했다.

  <아이구 야야, 3대 거짓말도 모르니? 노인 빨리 죽고 싶다는 말하고, 장사 밑진다는 말하고, 처녀 시집가기 싫다는 말이란다. 그러지 말고 일단 한 번 보기나 봐라. 보기나 보고 싫어하든 좋아하든 그 때는 네 맘대로 하고. 우리 오빠 정말 착하고 괜찮다. 그래도 내가 옛날에 너 봤던 기억이 나서 너한테 전화했구만. 안 그래도 너 얘기했더니, 집에서는 좋다고, 우리 엄마가 빨리 보게 해달라고 나를 볶아 못 살겠다.>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도대체 오빠가 어떤 보물이길래 저리도 당당한가. 나는 빨리 전화를 끊고만 싶었다. 오빠에 대해 더 이상 알고 싶지도 않았고 정말 할 말이 없었다.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거절을 하고 전화를 끊어야 했다. 그런데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머리에 떠오르는 건, 결혼 마음이 없어요, 만나고 싶지 않아요, 뿐이었다. 하지만 그건 같은 말이고 또 같은 대답이 나올 것 아닌가. 통화만 길어질 지도 몰랐다. 참으로 난감했다.

  <오빠는 왜 혼자되신 거예요?>

  내 질문에 그녀는 반색을 했다. 질문을 잘못 한 것 같았다. 끝까지 결혼할 마음 없다,로 버틸 걸. 하지만 이미 늦었다.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 불편하고 피곤했다.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앞섰다. 그래서 미처 적당한 질문을 찾아내기도 전에 말이 나와 버렸다. 정말 그냥 질문이었을 뿐인데, 언니는 내 마음이 드디어 움직이는구나 싶었는지 신이 나서 떠들었다.

  <이혼했지. 여자하고 마음이 안 맞아서. 이혼한 지 벌써 4년이다. 빨리 재혼해야 되는데. 좀 괜찮다 싶으면 애가 딸려 있고. 우리 어머니도 그렇고 오빠도 그렇고 그건 좀 싫다고.>

  <오빤 자식 없어요?>

  나로선 너무 당연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애신 언니의 대답은 내 질문보다 더 당연하고 당당했다. 내 의문의 이유를 짐작도 못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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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은 학문일 뿐인가.

  다양한 철학은 글 속에서나 외칠 수 있는 가치관인가.

  철학과 생활은 별개로 취급받는 이 나라에서 남과 다른 철학을 갖고 사는 건 편치 않다. 머리 속은 다르더라도 몸은 그들과 같은 방법을 택해야 한다. 그래야 머리 속 생각도 인정받는다.

  과부도, 홀아비도 팔을 벌려 인정하지만 독신을 인정하는 데는 인색하다. 결혼이란 강물에 발을 담그기만 해도 마치 세례를 받은 것처럼 동류 취급을 하고, 실패한 사람들은 동정까지도 받는다. 백년해로의 운이 따르지 않은, 결혼에 실패한 그들의 하루는 24시간으로 인정받고, 그들의 휴일은 쓸쓸함으로 위로받으며 그들의 병은 처량함으로 동정 받는다. 그러나 우리의 하루는 남는 시간으로 넘쳐나고 휴일은 마냥 노는 날이며 우리가 앓는 병은 아플 일이 뭐 있냐식의 비난 어린 눈길이기 십상이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이 이 사회에 어떤 피해를 주고 있는 것일까. 피해를 준다면 어떤 피해일까. 가정이 없어서? 그래서 어떤 해를 끼친다는 것일까. 우리는 가정 없는 사람이다. 맞는 말인가. 내가 만든 가족만 가정인가? 나는 아직도 우리 부모가 만든 가정에 속해 있는 가족일 뿐이다. 내가 이룬 가정이 없다는 이유로 받아야 하는 관심치고는 너무 잔인하다. 가정이 없다니. 마치 사람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내가 이룬 가정의 구성원도 영원히 나와 함께 살아준다는 보장이 없다. 그들이 조금 일찍 갔다거나 아직 못 만났다고 생각해주면 안 될까. 그냥 살아가는 방식으로 봐주면 안 되는 걸까.

이 땅에선 결혼만 했다고 해서 호기심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니다. 결혼을 하면 자식을 낳아야하고 자식을 둔 부모는 자식을 결혼까지 시켜놓아야 군말을 듣지 않는다. 아직도 결혼 말만 나오면 죄지은 사람처럼 가슴 철렁해야 할 어머니. 변명 아닌 변명을 해야 하는 어머니. 말수가 적은 어머니도 항상 내 이야긴 길게 해야 한다. 나는 긴 변명으로 보호를 받아야 하는 죄인이 아니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무거움이 서글픔으로 변하고, 어머니가 떠올랐다.

미안했다. 나는 어머니 앞에서 죄인이 되었다.

그리고,

정말 이젠 미경에게 왜? 냐고 물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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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경에게로 마이크가 넘어갔다.

  수자는 기분이 완전히 풀려있었다. 좋은 점이다. 나처럼 똥 밟은 신을 신고 주변에 냄새를 풍기며 계속 걷지는 않는다. 그 자리에서 신을 벗어 씻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가는 친구다. 부럽고 얄밉다. 난 내가 터뜨린 화를 짊어지고 있고 공격받은 수자는 오히려 멀쩡하다.

  앉아서 부르려는 미경을 억지로 세워 놓고 수자는 다른 마이크를 빼 든다. 그리고 미경의 어깨에 한 손을 얹는다. 제법 다정한 연인처럼 이중창을 할 모양이다. 미경을 번번이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는 사람은 수자다. 수자식 의리는 노래방에서도 발휘된다. 앉아서 노래 부르는 걸 이해할 수 없는 그녀다. 노래는 못 불러도 신나게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자기의 신나는철학을 당연히 친구도 가져야 한다. 그래서 기어이 미경을 자리에서 끌고 나간다. 미경도 수자의 설레발엔 어설프지만 동참해준다. 어쩌면 차츰 수자의 철학맛을 알아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수동이 습관이 되어버린 사람이라면 수자 같은 사람이 천생인연일지도.

  어느 지나간 날에 오늘이 생각날까.

  그대 웃으며 큰소리로 내게 물었지.

  ……

  하루를 너의 생각하면서

  걷다가 바라본 하늘엔,

  흰구름 말이 없이 흐르고

  푸르름 변함이 없건만

  이대로 떠나야만 하는가.

  너는 무슨 말을 했던가.

  어떤 의미도, 어떤 미소도

  세월이 흩어 가는 걸

 

  미경이 자꾸 웃으며 노래를 멈추는 바람에 정작 수자 소리만 들린다. 어쨌든 수자는 신났다. 미경이 목소리는 혼자 부를 때도 반주 소리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았다.

 

  노래방을 나왔을 때,

  도로에는 차가 무섭게 달리고 있었다. 밤에는 달리는 속도가 더 빠르게 느껴진다. 길에 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은데, 자동차는 오히려 늘어난 것 같았다. 헤드라이트 빛과 달리는 타이어에서 나는 마찰음이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1시간 30분만 하고 나오려는데 노래방 주인이 덤으로 처음엔 30, 20 분을 더 주었다. 공짜 시간은 참으로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다.  유혹의 손길을 덥석 문 덕분에 그만 12시를 훌쩍 넘기고 노래방을 나오게 되었다. 노래방 손님이 우리밖에 없었던 모양이었다. 우리가 가고 나면 적막해질 노래방을 지키고 있기가 싫었던 주인은 손님이 한 팀 들어오고야 마수에서 우릴 놓아주었다. 수자는 노래방에서 12일을 했다고 떠든다.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다

  <나는 내일 강의 없는데, 수자도 오후에나 나가면 될 테고. 미경이하고 단비는 좀 피곤하겠다.>

  소형이 차에 오르자마자 걱정했다. 나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피식 웃었고, 미경은 걱정에 대한 대답치고는 엉뚱하고 긴 대답을 했다.

  <누가 우리 중에 글 잘 쓰는 사람 있으면 우리 이야기 글로 좀 써라. 사람들은 결혼 안하고 혼자 사는 여자는 도대체 뭘 하고 사는지 되게 궁금한가 보더라. 우리가 만나서 논다고 해 봐야 차 마시고, 가끔 야외 나가 바람쐬고 기껏 노래방에나 간다는 게 안 믿기는 갑더라. 우리 시간은 하루 24시간이 아니고 48시간은 되는 줄 아나봐. 나만 보면 묘한 눈길로, 퇴근하면 뭐 하냐, 노는 날 뭐하냐,고 묻는 사람 있어 기분 나빠 죽겠다. 그대로 설명해주기도 싫고. 내가 왜 친하지도 않은 사람한테 내 사생활 보고 다 해야 돼?>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그 같은 기분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도 없고. 단지 미경의 입에서 나왔다는 게 뜻밖이었다. 그 말이 미경의 입에서 나오자 무게가 달라졌다. 미경은 표현을 잘 하지 않으니까. 비슷한 이야기로 우리들이 열 뿜을 때도 미경은 듣고만 있었지 같이 열을 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미경은 대담하게 대처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 아님 소위 긍정적 사고의 소유자로 판단해 버린 걸까.

  미경이 어떤 이유로 저런 이야길 꺼냈을까.

  마음 상할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그러나 갑자기 생각지도 않은 때, 더구나 불평이라곤 모르던 미경의 입에서 나온 말인지라, 아무도 무슨 일이냐고 묻지를 못하는 사이에 시간이 흘러가버렸다.

  그녀는 늘 잔잔한 호수 같던 여자였다. 그 호수에 파도가 일었다. 정말 무슨 일일까. 물어야 했지만 미경의 분노엔 익숙하지 않았다. 질문을 해야 하는 건지, 들어만 주어야 하는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서로 눈치 보며 머뭇거리다 시간이 지나고 새삼 묻기도 어색해졌다.

  미경은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진 않은 모양이다.

  아님 우리가 질문을 놓쳐버렸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말이 없다고 생각이 끊어진 건 아닐 것이다.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을까.

  그 날 그 시간에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모두 각자의 창밖을 바라보았고 수자는 큰 눈이 더 커져 앞만 뚫어지게 보며 운전을 했다.

 

  그렇다.

  우리의 하루도 24시간이다. 결혼하지 않았다 해서 밥을 안 먹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생계를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건 아니다. 우린 혼자가 아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부모도 없고 형제자매도 없는가. 그 모든 걱정에 대한 면죄부라도 받았는가. 그런 자유는 이 세상엔 없다. 오직 자기 한 몸만을 위해 살 수 있는 인생은 없다. 혼자선 살 수 없다. 그건 세상의 이치 아닌가. 그걸 부정하진 못할 것이다. 오히려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모도, 형제도 쉽게 손을 내밀 수 있고 눈치 봐야 될 배우자가 없는 우릴 편하게 부릴 수 있다. 인간을 수단으로 취급할 순 없지만 그런 쓰임새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인정이나 받고 있을까. 가치라고 하기엔 우습지만 가치가 평가절하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지 않을까.

  우린 주변으로부터 너무 가볍게 취급받고 있다.

 가볍게 취급하고 가볍게 부탁하고 가볍게 기대고 그리고 아주 가볍게 잊어버린다.

  생각이나 할까.

  그 생각의 무게가 얼마나 될까.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을 본다. 자기를 벗어난다 해도 순위가 있다. 남편과 아내, 자식, 손자, 부모……. 그것만 해도 벅차다. 그들은 정말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할 그들의 가족이 있기 때문에 타인에게 오래 관심 기울이고 있을 시간이 없다.

  어쩌다 바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우릴 생각하는 시간이 있겠지. 그리 긴 시간은 아닐 것이다. 상대가 가까운 형제자매나 친지가 아니라면 시간은 더 짧아지겠지. 그냥 스치듯 지나갈 지도 모른다. 도대체 그들은 뭘 하고 시간을 보낼까. 무슨 재미로 살까. 자식과 남편과 아내의 관계 속에서 생활을 하는 그들의 머리 속엔 그게 아닌 다른 관계는 의미가 없는 지도 모른다. 생각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들과 똑같은 형태로 살지 않는 우리 생활은 그냥 별종일지 모른다. 별종은 별난 취미도 갖고 있지 않을까 생각할 지도 모른다. 길게 생각할 여유는 없다. 남의 일이니까. 오랜 수고도 하지 않고 떠오르는 대로 쉽게 호기심을 채워버린다. 사랑이 없는 관심은 단순한 호기심으로 끝나버린다.

  그런 호기심 어린 눈길을 친구들도 모두 받아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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