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왔었니? 벌써? 나는 오늘 당장 할 줄은 몰랐네. 애신이가 전화하기 전에 내가 먼저 하려 했는데……. 그러면 다 알고 있겠네. 마음 상했겠다. 어쩌니 단비야. >

  <언니가 전화 번호 가르쳐줬어? 언니까지 이러기야?>

  나는 모자라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전화번호 가르쳐 준 건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그걸 알면서도 언니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생짜로 어리광이 나왔다. 내편이라는 푸근해진 마음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래 미안하다. 내가 안 그래도 안 될 거라 했거든.>

  <요즘도 애신 언니하고 연락해? 난 연락 끊긴 줄 알았는데.>

  <나 결혼식 때 온 게 마지막이야. 그리곤 본 적도 없어. 전화도 얼마 전에 처음 연결됐지. 1주일 됐나? 전화가 왔더라고. 그냥 안부 전환 줄 알았지. 잊지 않고 전화를 했구나 싶어 얼마나 반갑던지. 그런데 네 이야길 묻잖아. 결혼을 안 했다고 하니까 왠지 전화를 해보고 싶더라 하면서 오빠 얘길 꺼내더라. 나도 기분이 나빴지.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그래도 제 딴에는 친구라고 전화했는데 화를 낼 수는 없잖아. 그리고 단비야, 걔가 원래 꽁 막힌 데가 있잖아. 다른 방식으로 생각 못하는 애거든. 네가 이해해라. 나도 속으로는 턱도 없다 했지. 그래도 겉으로는 그런 내색 어떻게 하니. 그냥 네가 안할 거라고, 결혼할 마음 없는 애라고만 했지. 그런데 막무가내로 그건 네가 모르는 소리라고,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단 말 들어보지도 못 했냐고, 본인한테 이야기 한 번 해보라고 얼마나 끈질기게 졸라대는지, 하도 조르기에 내가 이야기 해 본다고 했지.

  그런데 오늘 저녁에 또 전화가 와서 이야기 해 봤냐고 묻는데 안 해봤다는 이야기 못하겠더라. 너무 성의 없어 보일 것 같기도 하고 섭섭해 할 것 같기도 해서. 그래도 친구로 지낸 세월이 얼만데. 그래서 전활 하긴 했는데 네가 마음이 없다더라고 둘러댔다. 그랬더니 자기가 직접 해봐야겠다고, 할 수 없이 네 전화번호를 가르쳐줬지. 나는 설마 밤에 당장 전화 할 줄은 몰랐네. 내가 내일 아침에 너한테 먼저 전화해 놓으려 했는데, 알고는 있으라고. 본인이 직접 거절하는 게 맞겠다 싶기도 하고..... 그래, 애신이가 뭐라던데?>

  <오빠 자랑 무지 하대?>

  <옛날부터 오빠라면 끔찍했잖아.>

  <자기가 끔찍하다고 나도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하나봐. 나한테 연락한 걸 영광으로 알아라, 하는 투였어.>

  <네가 이해해라. 걔 어떤 면에선 생각 좀 짧은 거 알지? 그래도 마음은 착하다. 뒤끝도 없고.>

  <착하기는, 착한 사람이 자기 조카는 귀하고 남의 자식은 안 귀해? 애 딸린 과부하고는 재혼 못 시킨대. 과부가 자기애만 귀여워하고 조카들 푸대접 할까봐. 머리 돌아가는 것 보면 모자란다는 말도 못 해. 모자라는 사람이 자기 이익 될 일에 그렇게까지 머리가 돌아가? 하긴 모자랄수록 자기한테 잘하는 건 기차게 안다더라. 어린애도, 짐승도 자기 귀여워하는 건 기차게 알아보니까.>

말이 좀 심했나? 그런 생각도 했다. 물론 언니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아이구 얘, 너처럼 그렇게 따지면 세상 골치 아파 못 산다. 그냥 그런 사람도 있고 이런 사람도 있겠거니 하고 살아라. 거절했으면 됐지 뭐. 좀 부드럽게 하지 그래. 제 딴에는 네 생각도 많이 하던데.>

  ‘네 생각도 많이 하던데?’ 그 말에 또 엄청 자극을 받는다.

  <언니도 순진하기는. 내 생각을 하다니. 애신 언니 딸이 그런 결혼을 한다고 해도, 아니 그런 소릴 들었어도 애신 언니가 그렇게 말할 수 있었겠어?>

  <그거야 다르지 뭐.>

  <그러니까 내가 화가 더 나지. 제발 언니도 입장 바꿔서 좀 생각해보고 얘기해. 그게 어떻게 내 생각을 해주는 거야. 순전히 이기적인 생각이지. 그런 이기적인 발상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지 몰라. 아니 다 좋아. 그건 또 그렇다고 쳐. 사람이란 원래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니까. 내 생각해주는 거 바라지도 않아. 나도 애신 언니 생각해준 적 없으니까. 그런데 사람 말을 왜 그렇게 못 믿어? 내가 싫다고 하면 싫은 줄 알아야 할 거 아냐. 왜 말을 제 멋대로 해석해?>

  <싫다고 했는데도 계속 그래?>

  <말도 마. 내가 일부러 그러는 줄 알아. 도대체 자기가 결혼을 원했다고 모두 다 원할 거라고 단정지어버리는 그 무서운 결론은 왜 흔들리지도 않는 거지? 내가 뭐 자기 굳은 결심 보고 뭐라 그래? 자기 결심이 굳으면 내 굳은 결심도 인정해줘야 될 거 아냐. 내가 따라다니며 자기들보고 독신이 좋으니까 결혼하지 말란 적 있어? 이혼하란 적 있어? 난 결혼하기 싫어도 친구들 결혼식장에는 축하해주러 간다고!>

  한밤의 연설.

  결국 격앙된 나의 연설로 끝나버리고 만 통화.

  언니는 하소연 들어주는 셈 치자 싶었는지, 아님 대꾸할 가치를 못 느꼈는지, 마지막엔 잠자코 내 말만 들어주었다. 언니 역할도 고달프다. 적절할 때 결혼 하지 않은 동생을 둔 죄다. 결혼하지 않은 건 진정 죄가 되는지. 언니도 그래서 연좌를 입은 게 아닌가.

  하루 종일 수업으로도 모자라 또 열강이라니. 목이 아프다. 흥분하면 목소리가 커지는데. 그래서 목이 더 아픈데. 흥분할 때마다 그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린다. 왜 목소리가 커지는 걸 당시엔 느끼지 못할까. 정말 자신이 싫다.

  전화를 끊고 목욕을 하고 누웠다.

  잠은 천길 만길 달아났다.

  밤새 몸은 파김치, 정신은 초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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