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이라는 이름으로

 

    

 

  1교시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장선생이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넘겨주었다. 쪽지를 받아들며 얼굴을 쳐다보자

  <누군지는 말 안하구요, 그냥 메모만 좀 전해달라고, 그 번호로 전화 좀 해 달래요. 모르는 번호에요?>

  장선생은 내 표정만 보고도 그렇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해 보세요. 분명히 선생님 찾았으니까요.>

  뒤돌아서서 가려던 장선생에게 물었다.

  <여자야, 남자야?>

  <여자예요. 남자라면 집히는 데라도?>

  <아니.>

  반대였다. 여자라면 집히는 데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키지 않았지만 수화기를 들고 번호를 눌렀다. 역시 애신 언니였다. 애신 언니는 지나치게 반가워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애신 언니의 지나친 호들갑은 내 감정을 더 딱딱하게 만들었다.

 

  애신 언니는 큰언니 고등학교 동기다. 학교 다닐 땐 언니 단짝으로 우리집에 자주 드나들었고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심심찮게 놀러왔다. 그러다 어느 날 결혼을 했고 그 후론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십 년이 넘도록 한 번도 못 본, 더구나 언니 친구인 그녀는 나와 그렇게 정이 나서 호들갑을 떨 사이가 아니었다. 언니와는 친했기 때문에 우리 집에 자주 왔고 같이 밥도 먹었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언니 친구였고, 자기들끼리 무슨 할 말이 그렇게도 많은지, 나랑은 별로 이야기도 하지 않았었다. 물론 나도 눈치 없이 아무 데나 끼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제 밤에 드라마를 보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한 번도 빼먹지 않고 보아왔던, 대사를 하나도 놓칠 수 없어 텔레비전 속에 들어갈 판이었던 나는 전화를 받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얼마나 끈질기게 울리던지, 그러자 갑자기 무슨 급한 전환가 싶은 불안감이 확 들어 수화기를 들었다.

나 애신이 언닌데하는데 도대체 그 이름의 주인공이 누군지 얼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섭섭하다며 자기는 그래도 나를 늘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까맣게 모를 수 있냐고, 같이 튀김 해먹던 이야기며 크리스마스이브에 카드 치며 밤새 놀았던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았다. 거기까지 이야기하자 그 이름과 얼굴이 결합이 되면서 아하하고 내 입에서 감탄사가 나왔다. 그리고 내가 너무 무심했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미안하기까지 했다. 나는 미안한 마음을 상쇄할 목적으로 목소리를 바꾸어 다시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런데 무슨 일일까.

  10년도 넘게 연락도 없던 사람의 갑작스런 전화.

  더구나 난 그녀의 친구가 아니라 친구의 동생이다. 친구라면 그래도 예측이 가능하다. 결혼을 하고 생활에 쫓기다 친했던 친구랑 오랜 세월 연락도 없이 보지 못한다. 전화 한 번 해봐야지, 미루던 세월이 몇 년이나 흐르고, 어쩌다 생각과 여유가 동시에 생긴 어느 날, 전화를 해 볼 수도 있다. 궁금하고 보고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애신 언니는 내 친구가 아니다. 언니를 통해서만 보았던 사람일 뿐이다. 내 안부라면 우리 언니한테 물어보는 게 일반적이지 않는가.

  난 이런 생각을 하며 전화의 목적을 유추하려 애썼다. 내가 너무 인정머리 없는 걸까, 하는 자책이 살짝 들기도 했다. 그래도 한 때는 집을 드나들며 밥도 같이 먹던 사이인데. 그래서 정이 많이 들었던 것일까. 안부가 궁금해진 걸까.

  내 자책은 오래 갈 필요가 없었다. 언니는 분명한 목적이 따로 있었다. 적어도 내 안부가 궁금했던 건 아니었다. 서로 인사를 끝내고 난 뒤에 한 그녀의 인정어린 어투의 말. 말은 정다웠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적어도 내겐.

전화를 끊고 난 뒤, 난 한참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다.

**

  <사실은 말이야 단비야. 너 우리 오빠 알지? 우리 오빠 정말 착하고 괜찮거든? K고 나오고 K대학 나오고, 학교 땐 수재란 소리 들었다?>

그래 알고는 있다. 우리 집에 자주 드나들 때, 우리 언니에게 자랑만 하고 소개해줄 마음은 없었던, 그 자랑스러운 오빠 이야기는 나도 여러 번 들었었다. 그런데 다짜고짜 오빠 얘기는 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다. 나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언닌 사실 그 오빠에게 관심이 많았다. 애신 언니가 오빠 이야길 할 땐 언니랑 엮을 마음이 있는 걸로 생각했다. 나도, 언니도. 그런데 아니었다. 애신 언니는 순전히 수재 오빠 자랑이 목적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다 애신 언니는 그 오빠보다 먼저 결혼을 했고 그리곤 모든 소식이 끊겼다.

  <그래서요, 언니.>

  <너 아직 결혼안한 거 맞지?>

  <.>

  이쯤에서 전화한 이유를 눈치 못 챈다면 그건 너무 둔감한 거 아닐까. 물론 난 눈치를 챘다. 그리고 피곤했다. 결혼을 하지 않은 모든 여자가 결혼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사고도 존재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많다.

  <우리 오빠 한 번 만날 마음 없나 해서. 아니 참 마음 없나가 아니고 내일 당장 만나라. 만나 봐야 사람을 알지. 말로는 백 번해도 소용없다.>

여기까지 들었을 때만 해도 , 맞선했다. 그러다 순간 나이가 꽤 많을 텐데,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았던 말인가? 설마?’ 하면서도 신경은 팽팽해졌다.

  <오빠가 아직 결혼을 안 하셨어요?>

  애신 언니는 내 질문에 펄떡 뛰었다. 같은 말도 얼마든지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걸 너무나 잘 보여주었다.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게 아니라 준비해둔 말 중 하나를 꺼내놓은 것 같은 답이었다.

  <무슨 소리, 얘는 우리 오빠가 얼마나 괜찮은데 아직 결혼을 못 해. 인물이 빠지나, 키가 작나, 머리는 또 얼마나 좋은데.>

나는 노골적으로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지긋지긋한 가족 이기주의와 맹목. 그 맹목이 휘두르는 타인을 향한 칼날.

  ‘누군 인물 빠지고 머리 나빠서 결혼 안 했나?’

  하지만 미혼이건 기혼이건 그건 나랑 상관없었다. 선을 볼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기 때문에 완곡하게 거절할 생각이었다. 선은 절대로 보지 않으리라고 마음먹은 지 오래다. 마치 시장에 나앉는 듯한 그런 기분은 두 번 다시 느끼고 싶지 않다. 하지만 상대는 언니 친구다. 감정을 상하게 할 수는 없다. 사실은 내 마음 상하는 것도 겁이 났다. 농담처럼 웃으면서 거절하고 싶었다.

  <결혼한 오빠를 내가 왜 만나요?>

  농담은 실패했다. 애신 언니는 내가 조건을 내세우는 것으로 알아들었다.

  <단비 너 정말 결혼 안 갈 거니? 결혼은 해야지. 여자 나이 서른 후반이면 이젠 총각하고 결혼하긴 어렵다?>

  결국 난 칼에 베이고 말았다. 맹목이 휘두르는 칼을 피할 방법은 많지 않다. 이 싸움은 정해진 규칙이 없다. 그래서 연습도 의미가 없고 조심도 방패가 되는 건 아니다. 사고의 맹목은 어떤 재앙보다 무섭다.

  내 감정이 어떻게 전달됐을까.

  정말 전혀 못 느낀 걸까.

  그녀는 몹시 안타깝다는 투로 목소리를 낮춰 부드럽게 뒷말을 끌었다. 전화한 목적이 너무나 뚜렷하게 드러났다. 정말 깨끗하게 거절하는 일만 남았다.

  <언니, 난 결혼할 마음이 없거든요.>

  그 때까지도 말에 웃음을 띠었다. 난 그랬다고 생각했다.

  <아이구 야야, 3대 거짓말도 모르니? 노인 빨리 죽고 싶다는 말하고, 장사 밑진다는 말하고, 처녀 시집가기 싫다는 말이란다. 그러지 말고 일단 한 번 보기나 봐라. 보기나 보고 싫어하든 좋아하든 그 때는 네 맘대로 하고. 우리 오빠 정말 착하고 괜찮다. 그래도 내가 옛날에 너 봤던 기억이 나서 너한테 전화했구만. 안 그래도 너 얘기했더니, 집에서는 좋다고, 우리 엄마가 빨리 보게 해달라고 나를 볶아 못 살겠다.>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도대체 오빠가 어떤 보물이길래 저리도 당당한가. 나는 빨리 전화를 끊고만 싶었다. 오빠에 대해 더 이상 알고 싶지도 않았고 정말 할 말이 없었다.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거절을 하고 전화를 끊어야 했다. 그런데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머리에 떠오르는 건, 결혼 마음이 없어요, 만나고 싶지 않아요, 뿐이었다. 하지만 그건 같은 말이고 또 같은 대답이 나올 것 아닌가. 통화만 길어질 지도 몰랐다. 참으로 난감했다.

  <오빠는 왜 혼자되신 거예요?>

  내 질문에 그녀는 반색을 했다. 질문을 잘못 한 것 같았다. 끝까지 결혼할 마음 없다,로 버틸 걸. 하지만 이미 늦었다.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 불편하고 피곤했다.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앞섰다. 그래서 미처 적당한 질문을 찾아내기도 전에 말이 나와 버렸다. 정말 그냥 질문이었을 뿐인데, 언니는 내 마음이 드디어 움직이는구나 싶었는지 신이 나서 떠들었다.

  <이혼했지. 여자하고 마음이 안 맞아서. 이혼한 지 벌써 4년이다. 빨리 재혼해야 되는데. 좀 괜찮다 싶으면 애가 딸려 있고. 우리 어머니도 그렇고 오빠도 그렇고 그건 좀 싫다고.>

  <오빤 자식 없어요?>

  나로선 너무 당연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애신 언니의 대답은 내 질문보다 더 당연하고 당당했다. 내 의문의 이유를 짐작도 못하는 듯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