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이 왜 없어. 남맨데 다 컸어. 작은애는 초등학교 육 학년, 큰 애는 중학교 이 학년. 뭐 걔들은 신경 쓸 거 없어. 제 할 일 알아서 잘 하는데, 뭐. 할머니도 계시고. 단비 넌 그냥 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들어와 살기만 하면 돼. 애들도 아빠 닮아서 착해.>
보지도 못한 오빠보다 애신 언니가 더 싫어졌다. 뒷골이 당겼다. 그런 이야기를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나에게 전달하는 그녀의 사고방식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혼자 된 남자의 자식쯤은 아주 당연하고, 다른 여자의 자식은 안 된다? 나이 들도록 시집 못간 나에게 선심이라도 쓰겠다? 안하면 그 뿐이라고, 흥분하지 말자고 다짐을 하는데도 눈이 아파 오며 눈물까지 나려했다. 감정을 자제하기가 힘들었다. 격한 감정이 담긴 목소리를 숨기려고 듣고만 있었다. 아니 더 이상 아무 말도 하기 싫었다. 하지만 나를 볼 수 없는 애신 언니는 설득이 되는 걸로 짐작하는 모양이었다. 다 된 밥에 뜸을 들이는 심정으로 사설을 더 늘어놓았다.
<우리 엄마도 며느리 시집살이 시킬 사람 아니다. 너 나 잘 알잖아. 나보면 우리 엄마 어떤 사람인지 짐작될 거 아니니? 올케 언니도 이혼하면서 우리 엄마는 좋은 분이라고 했다. 시어머니 원망은 안 한다고. 오빠하고 성격이 안 맞아서 그렇지. 우리 오빠 작년에 부장 됐다? 주변에 탐내는 사람 많아 얘. 그래도 애 딸린 여자는 좀 그렇잖니? 자기 애 있으면 아무래도 남의 애한테는 소홀할 테고.>
난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언니가 너무 싫었다. 본래 저런 사람이었던가. 정말 싫다.
<언니, 그러면 탐내는 사람들 중에서 골라 보세요.>
나는 그녀의, 내 머리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이기적인 발상을 참을 수가 없어 날카로워진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드러내고 말았다.
<어머 얘, 그건 내가 하느라고 한 소리고. 오빠가 그만큼 괜찮다는 뜻으로 말한다는 게 네 자존심을 건드렸구나. 우리 엄마는 다른 데는 관심도 없어. 네 얘기 들은 후로는 아주 널 며느리 본 것처럼 너만 보자고 졸라. 어때? 이제 마음이 풀렸니? 내일이라도 당장 보자. 우린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너도 애들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정 붙이는 게 나을 테고.>
졌다. 완전히 졌다.
그녀는 내가 어디에서 화가 났는지도 모르고 소설을 섰다. 나는 너무 황당한 적을 만나 싸울 힘을 잃었다. 무슨 말로,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아득했다. 어떤 말을 해도 통할 것 같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기도 겁이 났다. 그녀는 내 말을 자기 좋을 대로 해석했다. 할 말은 떠오르지 않고 얼굴만 달아올랐다. 그저 전화부터 끊고 싶었다.
<언니, 나 내일 출근해야 해요. 전화 끊을 게요.>
<아, 그래. 내가 피곤한 너를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네. 알았어. 푹 자.>
언니는 내가 벌써 자기 집 식구가 된 양 다정하게 인사를 했다. 나는 수화기를 놓기 직전에 한 마디를 하고는 얼른 수화기를 놓아 버렸다.
<오빠 이야기는 안 들은 걸로 할게요.>
수화기를 놓고도 다시 전화벨이 울릴까 조마조마 했지만 전화가 다시 오지는 않았다. 나는 초조하게 10분을 더 전화기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벌렁 누웠다. 가슴이 펑펑 뛰었다. 진정시키려고 하면 할수록 새록새록 화가 도로 피어올랐다.
‘내가 뭐 쓰다버린 짚신짝인가.’
몸을 뒤집어 엎드리는 순간 눈물이 쏟아졌다. 어디에 숨어 있던 눈물이었나. 화가 났지 울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눈물은 주책도 없이 쏟아졌다. 엎드린 채 한참을 울었다.
‘싫다면 싫은 줄 알지, 왜 자꾸 난리야.’
‘혼자’라서 불편하고 서러운 점이 또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다. 내가 죽을 때까지 혼자라면, 아마 죽을 때까지도 이런 일에선 못 벗어날 것이다. 관습 앞에 개인의 가치관은 종종 무시된다. 의사 무시된 채 추진되는 ‘짝 지워주기’라는 엽기적인 인정. 어떤 동물도 개인의 의지 밖에서 짝이 지워지는 법은 없다.
그들은 그걸 인정이라 할지 모르지만 내 의사가 조금도 존중되지 않는 인정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인정이란 말인가. 나를 위한 인정이라면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적어도 나를 할퀴지는 말아야 할 것이 아닌가. 난 생각이 모자라는 어린애도 아니고 후견인의 동의를 얻어 행동해야 하는 한정치산자도 아니다. 직업을 가지고 나의 생계를 꾸려나가는 당당한 사회인이다. 그런데 왜 아직 나의 정신을, 마음을, 몸을, 그들의 계획 속에 짜 맞추려 하는가. 단지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가르치고 바꾸려 하는가.
애신 언니가 어떻게 내 전화번호를 알았지?
눈물을 거두고 고개를 들었다. 내가 질문하고도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물이 말라붙은 얼굴이 거칠거칠 했다. 나는 당기는 얼굴을 손으로 비비며 수화기를 들었다. 늦었지만 그냥은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전화는 형부가 받았다. 엉뚱하게 그 밤에 ‘저녁 드셨어요?’는 왜 나왔는지 모르겠다. 형부는 웃으며 언니를 바꿔주었다. 애신 언니 이야기를 꺼내자 언니는 기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