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경에게로 마이크가 넘어갔다.
수자는 기분이 완전히 풀려있었다. 좋은 점이다. 나처럼 똥 밟은 신을 신고 주변에 냄새를 풍기며 계속 걷지는 않는다. 그 자리에서 신을 벗어 씻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가는 친구다. 부럽고 얄밉다. 난 내가 터뜨린 화를 짊어지고 있고 공격받은 수자는 오히려 멀쩡하다.
앉아서 부르려는 미경을 억지로 세워 놓고 수자는 다른 마이크를 빼 든다. 그리고 미경의 어깨에 한 손을 얹는다. 제법 다정한 연인처럼 이중창을 할 모양이다. 미경을 번번이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는 사람은 수자다. 수자식 의리는 노래방에서도 발휘된다. 앉아서 노래 부르는 걸 이해할 수 없는 그녀다. 노래는 ‘못 불러도 신나게’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자기의 ‘신나는’ 철학을 당연히 친구도 가져야 한다. 그래서 기어이 미경을 자리에서 끌고 나간다. 미경도 수자의 설레발엔 어설프지만 동참해준다. 어쩌면 차츰 수자의 ‘철학’맛을 알아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수동이 습관이 되어버린 사람이라면 수자 같은 사람이 천생인연일지도.
어느 지나간 날에 오늘이 생각날까.
그대 웃으며 큰소리로 내게 물었지.
……
하루를 너의 생각하면서
걷다가 바라본 하늘엔,
흰구름 말이 없이 흐르고
푸르름 변함이 없건만
이대로 떠나야만 하는가.
너는 무슨 말을 했던가.
어떤 의미도, 어떤 미소도
세월이 흩어 가는 걸
미경이 자꾸 웃으며 노래를 멈추는 바람에 정작 수자 소리만 들린다. 어쨌든 수자는 신났다. 미경이 목소리는 혼자 부를 때도 반주 소리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았다.
노래방을 나왔을 때,
도로에는 차가 무섭게 달리고 있었다. 밤에는 달리는 속도가 더 빠르게 느껴진다. 길에 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은데, 자동차는 오히려 늘어난 것 같았다. 헤드라이트 빛과 달리는 타이어에서 나는 마찰음이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1시간 30분만 하고 나오려는데 노래방 주인이 덤으로 처음엔 30분, 또 20 분을 더 주었다. 공짜 시간은 참으로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다. 유혹의 손길을 덥석 문 덕분에 그만 12시를 훌쩍 넘기고 노래방을 나오게 되었다. 노래방 손님이 우리밖에 없었던 모양이었다. 우리가 가고 나면 적막해질 노래방을 지키고 있기가 싫었던 주인은 손님이 한 팀 들어오고야 마수에서 우릴 놓아주었다. 수자는 노래방에서 1박 2일을 했다고 떠든다.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다.
<나는 내일 강의 없는데, 수자도 오후에나 나가면 될 테고. 미경이하고 단비는 좀 피곤하겠다.>
소형이 차에 오르자마자 걱정했다. 나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피식 웃었고, 미경은 걱정에 대한 대답치고는 엉뚱하고 긴 대답을 했다.
<누가 우리 중에 글 잘 쓰는 사람 있으면 우리 이야기 글로 좀 써라. 사람들은 결혼 안하고 혼자 사는 여자는 도대체 뭘 하고 사는지 되게 궁금한가 보더라. 우리가 만나서 논다고 해 봐야 차 마시고, 가끔 야외 나가 바람쐬고 기껏 노래방에나 간다는 게 안 믿기는 갑더라. 우리 시간은 하루 24시간이 아니고 48시간은 되는 줄 아나봐. 나만 보면 묘한 눈길로, 퇴근하면 뭐 하냐, 노는 날 뭐하냐,고 묻는 사람 있어 기분 나빠 죽겠다. 그대로 설명해주기도 싫고. 내가 왜 친하지도 않은 사람한테 내 사생활 보고 다 해야 돼?>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그 같은 기분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도 없고. 단지 미경의 입에서 나왔다는 게 뜻밖이었다. 그 말이 미경의 입에서 나오자 무게가 달라졌다. 미경은 표현을 잘 하지 않으니까. 비슷한 이야기로 우리들이 열 뿜을 때도 미경은 듣고만 있었지 같이 열을 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미경은 대담하게 대처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 아님 소위 긍정적 사고의 소유자로 판단해 버린 걸까.
미경이 어떤 이유로 저런 이야길 꺼냈을까.
마음 상할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그러나 갑자기 생각지도 않은 때, 더구나 불평이라곤 모르던 미경의 입에서 나온 말인지라, 아무도 무슨 일이냐고 묻지를 못하는 사이에 시간이 흘러가버렸다.
그녀는 늘 잔잔한 호수 같던 여자였다. 그 호수에 파도가 일었다. 정말 무슨 일일까. 물어야 했지만 미경의 분노엔 익숙하지 않았다. 질문을 해야 하는 건지, 들어만 주어야 하는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서로 눈치 보며 머뭇거리다 시간이 지나고 새삼 묻기도 어색해졌다.
미경은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진 않은 모양이다.
아님 우리가 질문을 놓쳐버렸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말이 없다고 생각이 끊어진 건 아닐 것이다.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을까.
그 날 그 시간에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모두 각자의 창밖을 바라보았고 수자는 큰 눈이 더 커져 앞만 뚫어지게 보며 운전을 했다.
그렇다.
우리의 하루도 24시간이다. 결혼하지 않았다 해서 밥을 안 먹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생계를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건 아니다. 우린 혼자가 아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부모도 없고 형제자매도 없는가. 그 모든 걱정에 대한 면죄부라도 받았는가. 그런 자유는 이 세상엔 없다. 오직 자기 한 몸만을 위해 살 수 있는 인생은 없다. 혼자선 살 수 없다. 그건 세상의 이치 아닌가. 그걸 부정하진 못할 것이다. 오히려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모도, 형제도 쉽게 손을 내밀 수 있고 눈치 봐야 될 배우자가 없는 우릴 편하게 부릴 수 있다. 인간을 수단으로 취급할 순 없지만 그런 쓰임새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인정이나 받고 있을까. 가치라고 하기엔 우습지만 가치가 평가절하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지 않을까.
우린 주변으로부터 너무 가볍게 취급받고 있다.
가볍게 취급하고 가볍게 부탁하고 가볍게 기대고 그리고 아주 가볍게 잊어버린다.
생각이나 할까.
그 생각의 무게가 얼마나 될까.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을 본다. 자기를 벗어난다 해도 순위가 있다. 남편과 아내, 자식, 손자, 부모……. 그것만 해도 벅차다. 그들은 정말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할 그들의 가족이 있기 때문에 타인에게 오래 관심 기울이고 있을 시간이 없다.
어쩌다 바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우릴 생각하는 시간이 있겠지. 그리 긴 시간은 아닐 것이다. 상대가 가까운 형제자매나 친지가 아니라면 시간은 더 짧아지겠지. 그냥 스치듯 지나갈 지도 모른다. 도대체 그들은 뭘 하고 시간을 보낼까. 무슨 재미로 살까. 자식과 남편과 아내의 관계 속에서 생활을 하는 그들의 머리 속엔 그게 아닌 다른 관계는 의미가 없는 지도 모른다. 생각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들과 똑같은 형태로 살지 않는 우리 생활은 그냥 별종일지 모른다. 별종은 별난 취미도 갖고 있지 않을까 생각할 지도 모른다. 길게 생각할 여유는 없다. 남의 일이니까. 오랜 수고도 하지 않고 떠오르는 대로 쉽게 호기심을 채워버린다. 사랑이 없는 관심은 단순한 호기심으로 끝나버린다.
그런 호기심 어린 눈길을 친구들도 모두 받아봤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