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사람들은 무엇이든 믿었고 지금처럼 이성적 사고와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달랐던 사람들, 조금의 이해와 배려가 필요했던 사람들이 쉽게 마녀로 몰렸고 모진 고문과 강요 끝에 결국 불에 태워지거나 물에 빠지거나 목이 베어져 죽었다.
지금은 어떨까? 마녀재판으로부터 수백 년이 흘렀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산업적으로 문화적으로 모든 것이 뒤바뀐 오늘을 살아간다.
과학과 논리, 이성이 지배한다고 여겨지는 사회.
얼핏 보면 이 시대는 '야만적이고' '미신적이고' '구시대적인' 과거와 결별한 듯 보인다.
그러나 수백 년이 흐른 지금도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여전히 이름만 바뀐 마녀사냥이 횡행한다.
사람들은 서로를 일부러 오해하고, 이해하지 않고, 싸우고, 부수고, 파괴한다.
밀어내고, 부추기고, 못 들은 체 하고, 알려 하지 않는다.
알은척하고 모른 채 해버리기 일쑤다.
수백 년 전보다 더 교묘하고 악독한 마녀사냥이 우리 시대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는 그것에 대해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것이다.
애디의 백과사전에 입에 담지 못할 말을 써놓고 갈기갈기 찢어놓은 에밀리,
그리고 에밀리의 행동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이 오로지 애디에게만 잘못을 뒤집어 씌우려 하는 머피 선생님,
이들 같은 존재들은 여전히 다수로 존재하며 그 옆에는 침묵하며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에밀리와 머피 선생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에밀리에게는 책을 잘 읽지 못해 또래보다 훨씬 어린 유아책 밖에 읽을 수 없는 아픔이 있고, 피 선생에게는 남편과 사별하고 아픈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아픔이 있다.
그러나 그 자신이 가진 결핍과 고통 때문에 타인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은 정당화될 수 없다.
자기 자신의 상처를 돌보지 않은 채 외부에 더 큰 상처를 입힘으로써 자기 자신의 상처를 작게 만들려는 일은 그 스스로를 위해서도 멈춰져야 한다. 그것은 타인을 파괴시킬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파괴시키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 또한 각자에게 놓인 상황으로부터 회복되어야 함은 분명하다.
결론은 우리 모두 우리 자신을 그대로 바라봐야 하고 우리 자신 스스로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 안에서 우리는 그 누구와 특별히 다르지 않다.
애디를 다른 학생들로부터 격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머피 선생의 말에 대항했던 애디 엄마의 말처럼,
'제대로 이끌어 주기만 한다면 문제없을 것'이라고 했던 것은,
단지 자폐 성향이라거나 기타 다른 질병과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내면의 문제를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격리와 수용으로부터 모든 것을 껴안는 품이 절실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 마디는,
'우리는 그냥 우리 모습 그대로 있을 수 있다'(p12)
는 것이다.
저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자폐 성향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차별과 멸시, 혐오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존재들의 이야기를 꺼내고 있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특정 사람들에 대한 나의 인식과 생각의 변화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온전한 존재로 설 수 있었던 애디와 그의 가족, 친구, 이웃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나 자신의 회복을 경험할 수 있었다.
결국 저자는 단지 특정한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인류가 하나의 공동체로서 사람과 사람들이 그리고 나아가 사람과 자연, 생태계가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이야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
작은 불꽃이 어둠 속에서 얼마큼 환하게 비쳐질 수 있을지, 지금 이 순간 어둠 속에 불꽃을 튀길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