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과 자긍심 - 교차하는 퀴어 장애 정치학
일라이 클레어 지음, 전혜은.제이 옮김 / 현실문화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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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과 자긍심 : 교차하는 퀴어 장애 정치학

                                           일라이 클레어

"젠더는 장애에 다다른다. 장애는 계급을 둘러싼다. 계급은 학대에 맞서려 안간힘을 쓴다.

학대는 섹슈얼리티를 향해 으르렁댄다.

섹슈얼리티는 인종 위에 포개진다......

이 모든 것이 결국 한 사람의 몸 안에 쌓인다. 정체성의 그 어떤 측면에 대해서든, 몸의 그 어떤 측면에 대해서든, 글을 쓴다는 것은 이런 미로 전체에

대해 쓴다는 뜻이다."

(p25, 아우로라 레빈스 모라레스의 추천사 중)

저자 일레이 클레어는 선천적 뇌 병변 장애인, 젠더 퀴어, 페미니스트, 친족 성폭력 생존자 로서 장애, 환경,퀴어, 노동운동가이자 시인, 에세이 작가로서 활동하고 있고 망명과 자긍심』은 1990년 출간된 저자의 대표작이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장애학, 퀴어학, 여성학 분야에서 필독서로 사용되고 있다.

이 책은 경계 위에서의 사유라고 할 수 있다.

단일 쟁점 정치가 아닌 교차성에 주목하여 젠더, 섹슈얼리티, 성폭력, 퀴어, 장애, 계급, 환경, 노동 등 현대 사회의 문제를 사유하며 오늘날 사회 저변의 모든 문제들은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퀴어와 환경이 어떤 관련성이 있느냐 물을 수 있겠지만, 매우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생태계의 순환처럼, 대두되는 사회적 문제들을 파고 들어가면 서로 동떨어진 채 발생하는 문제들은 없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 앞에 놓인 한 잔의 커피는 계급과 폭력, 환경 그리고 노동과 관련되어 있고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은 서로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많은 경우 더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지금의 안락함이 깨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그 안락함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런 관계를 모른 채 외면하고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저 적당히 모르는 척 살아가는 것이 세상이고 삶이라, 주장하리라.

그러나 상처는 통증이 심하더라도 소독을 하고 꿰매야 하는 것이다.

그냥 놓아두면 상처는 덧나고 치료의 시간을 더하고 낫더라도 그 상처는 보기 흉한 모습이 된다.

전도서 3장 7절의 구절처럼.

망명을 강요받은 몸들,

망명할 수밖에 없었던 몸들,

망명이 곧 삶이었던 몸들,

그 몸들의 언어를 되찾고, 집을 되찾고,

자긍심을 회복하는 것에 관하여

이 책은 이야기하고 있다.


"백인 우월주의·자본주의·가부장제·제국주의·비장애 중심주의"


일라이 클레어와 함께, 망명을 끝내고 자긍심을 회복해야 할 몸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그 몸들이 부딪히는 세계는 망명할 필요가 없었던 몸들, 집을 잃어본 적 없는 몸들, 장애를 겪지 않았던 몸들, 상처받지 않고 여자와 남자로 살았던 몸들 중심으로 설계된 세계일 것이다.

학창 시절 학급 내에서는 또렷한 목소리와 주장, 준수한 외모, 뛰어난 운동신경, 학습능력, 사고력으로 학급의 중심이 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그 학생을 추종하며 어쩌면 학급 주류(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세력에 편승하는 '평범하고 일반적인' 학생들이 있다.

그리고 다른 학생들과는 조금 달라 보이는 학생들도 당연히, 그 교실 안에 속해있다. 그것은 다르다는 것일 뿐인데 그 다름을 통해 서로 다른 역할을 키우고 장려해야 할 곳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한 반'이라는 공동체의 운명으로 묶여 단합을 요구당하며 하나라는 체제를 강요당하는 한 교실의 문명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

뇌 병변 장애를 앓은 저자는 학교를 다니며 장애인이기에 구별되었던 경험에 관해 이야기한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어떤 활동에 지장이 있을 것이라서, 교육에 있어 다른 방법이 필요해서, 비장애 학생들이 '인재를 만들기 위한' 교육을 받는데 방해가 되거나 불필요한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서 비장애인 학생들로부터 구별된 교실, 구별된 관심, 구별된 시간과 공간 속에 놓여야 했던 것들은 장애인을 위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모습은 장애인과 비장애인 학생들이 한 교실 내에서 살아가는 것,

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일라이 클레어는 1969년 '특수교육'을 받길 원하는 학교 당국과의 싸움 끝에 '일반'학급 1학년에 들어간다.

지능지수 검사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고, 아버지가 교장과 아는 사이였으며, 이웃집 교사가 일라이 클레어의 가족을 좋아해서 지지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라이 클레어는 교실 안에서 방치된 상태로 유년기를 보내게 된다.

그가 사소한 행동들에 어려움을 겪을 때 아무도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지 않았고, 미완성된 과제를 교사들은 그냥 가져갔으며 학급 학생들이 그를 조롱하고 놀릴 때에도 누구도 그를 위로하지 않았다.

그는 따돌림을 받았고 어른들은 알아서 하라며 내버려 두었다고, 고백한다.

세상은 그곳이 그의 자리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라이 클레어는 '특수교육'을 받는 학생들과 거리를 두려고 한다.

그는 '정상인'이 되고 싶었기 대문이다.

그는 '비슷한 사람에게 향하는 적개심'을 '이해'한다.

"게이와 레즈비언은 바이섹슈얼을 싫어하고, 트랜스 섹슈얼 여성은 드랙퀸을 깔보고, 노동계층은 빈곤층과 싸운다. 많은 공동체에서 주변화된 사람들은 자기들만의 내적 긴장과 적개심을 만들어내며, 장애인도 예외는 아니다.

···

오늘날까지도 가까운 친구들, 내가 "선택한 가족"이라 부르는 사람들은 비장애인이다.

나는 장애에 대한 글을 쓸 때면, 종종 내가 사기꾼처럼 느껴지곤 한다. 내가 종이에 이런 단어들을 적기에 충분할 만큼 장애인이 아니고, 장애 공동체에 깊게 몸담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수치심, 침묵, 고립이 내게 남긴 유산이다."

어떤 이들은 자기들의 주도권과 기득권을 놓기 싫어해서 일부러 불을 붙인다.

그 불이 알아서 저 멀리서 잘 타고 있기를 바라며 그 불이 타는 동안, 모두가 그 불에 시선을 파는 동안, 그들은 어떤 일을 도모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각성해야 할 것은, 그 불에서 눈을 돌려 불의 진원지를 파악하고 물을 뿌려야 하는 일이다. 일라이 클레어가 자기와 비슷한 사람에게 적개심을 갖게 된 근원은 그가 알게 모르게 뿌리 깊게 심어진 내면화된 억압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면 그 억압은 종양 덩어리처럼 스스로 생겨나는가?

억압을 형성하는 사회가 있다.

장애인 학생들의 교실과 교육이 구별 지정되어야 했던 것은 진정 누구를 위한 결정이었을까?

비장애인 학생들을 위한 선택이다.

비장애인에 비해 조금 부족한 그들을 참아주지 못하고, 기다려 주지 못하는 사회의 풍토 속에 특별이라는 단어를 앞세워 그들의 분리를 꾀했지만 그것으로 그 책임을 다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인재 좀 키워보겠다는데, 우리 아들딸 공부 좀 하겠다는데, 애들이 공부 좀 하겠다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이라는 비장애인 학생 학부모의 원성이 귀에 들려오지 않는가?

최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학교 가는 길'은 서울 강서구의 장애인 특수학교인 서진 학교가 설립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전국 특수학교를 다니는 장애인 학생들은 매일 왕복 1-4시간의 거리를 통학하며 학교를 다닌다고 한다.

그리고 장애학생 수에 비해 학교는 턱없이 부족하다.

나는 어떤 비장애인 학생들을 위한 초등학교가 설립되는 과정에서, 단지 학생들이 스쿨버스로 통학 15분 거리를 감당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교육권의 침해, 학생들의 안전성 문제에 대해 시위하는 현수막을 본 적이 있다.

사회는 다수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다수와 함께 소수의 목소리가 존재한다.

일라이 클레어는 시골 소도시의 중산층이 되고 싶었던 부모 밑에서 태어났고 뇌 병변 장애인이었으며, 젠더 퀴어였다.

그는 사회에서 이보다 더 취약할 수 없는 위치에 서 있다.

그는 교육받았고 대도시로 나와 세상과 부딪힌다.

그는 빈곤한 시골 도시의 환경에서 장애인으로서 어린 시절과 학교에서 겪었던 차별을 이야기하고 젠더 퀴어로서 대도시로 나왔을 때 목격한 상류층 젠더 퀴어들의 시골과 소도시에 대한 무지를 이야기하며 장애가 있는 몸으로서 사회적 억압과 대면하고 치열하게 부딪히며 싸워야 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쩌면 그의 이야기가 다른 누군가들의 이야기보다 더 와닿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당사자이며, 교차지점에 있고, 직접 그 몸으로 부딪쳐 살아온 삶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일라이 클레어는 말한다,

"여기서 돌아가자. 이 산은 내 발엔 너무 가파르고 미끄러우니까."

p 62

만일 당신의 몸이 이 산을 넘기 어렵다면, 돌아가도 된다, 내려가도 된다.

그것은 패배가 아니다, 절망도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과 자긍심이다.

일라이 클레어의 장애로 인한 증세는 조롱과 멸시의 표적이 되지만 그의 연인 루리는 클레어의 떨리는 손과 몸의 감각을 관능적인 선물로 받아들인다.

클레어에게는 수치와 괴로움, 고통이었던 것이 사랑의 대상이 된다.

일라이 클레어는 사랑받을 수 있는 몸의 가능성-자긍심을 찾게 된다.

그것이 우리가 찾을 수 있고 또 회복해야만 하는 자긍심이다.

이 리뷰는 『망명과 자긍심』을 온전히 리뷰할 수 없다.

그의 문장 하나하나가 철심을 심듯 정교하며 정곡을 정확하게 지적하기 때문이고 광범위한 사유를 종횡무진하며 속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는 통찰력 때문이다.

『망명과 자긍심』은 앞으로를 살아가야 할 우리들에게 당신 자신이 서있는 그 땅이 어떤 경계 위에 있으며

그 교차지점에서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정치와 문화는 어떤 방향으로 향해야 할지 알려줄 것이다.

우리는 어떤 몸의 지배자도 될 수 없다.

일라이 클레어는 책의 도입부에 이렇게 써놓았다.

"바위와 나무, 언덕과 해변에게"

그것은 곧 우리 자신이다.

어떠한 위해를 가하지 않고, 억압을 가하지 않고, 그저 바람과 비와 태양열을 받으며 존재하는 몸들.

그 자체로 존재해야만 한다.

자연적 모습 그대로의 아름다움과 긍지로.

인류가 존재하는 이 세상에는 많은 소수자들이 있다. 그들은 사람들의 멸시와 무관심 속에 그늘진 곳의 소외자들이었지만 이제는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 그들의 목소리는 침묵을 뚫고 나와 세상을 향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차별에 맞서고 있다.

이제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를 이루어야 할 때라고 인정할 뿐이다.

인류의 모든 것은 자의적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단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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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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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올가 토카르추크

2017년 '흔적'이라는 제목으로 각색, 영화가 제작되어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했고 그 이듬해 2018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스웨덴 한림원은 그의 작품 세계에 "삶의 한 형태로서 경계를 넘어서는 과정을 해박한 열정으로 그려 낸 서사적 상상력"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부러울 뿐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라는 책의 제목은 윌리엄 블레이크의 연작시 『천국과 지옥의 결혼』중에서 『지옥의 격언』(1793)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올가 토카르추크 는 지금까지의 글들과는 전혀 결이 다른 작품을 이 책을 통해 나타내었고 범죄 스릴러이면서 전통적인 추리소설과는 차별화된 추리 장르를 보여주었다.



1. 자, 모두 주목하세요.

체코와 국경이 가까운 폴란드의 한마을.

그녀와 괴짜 오늘 죽은 통발은 이 고원의 마을에서 유일하게 일 년 내내 살는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들은 10월이 되면 파이프의 물을 빼고 문단속을 한 뒤 도시의 자기들 집으로 돌아가 겨울을 나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느 사이에 잠이 들기 전 발을 꼼꼼히 씻고 자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한밤중에 언제 구급차가 와서 그녀를 실어 갈지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그날도 홉과 수면 유도제인 발레리안을 두 알이나 먹고 잠이 들어 있는 중에 어두움 가득한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와 비몽사몽간에 긴장감마저 들어 창밖을 내다보니 옆집에 사는 괴짜가 이리저리 오가는 것이 보였다.

그날 통발이 죽었다. 통발은 늘 술에 조금 취한 상태로 생활을 했는데 아마 그는 태어날 때부터 살짝 취한 상태였던 듯하다. 통발의 죽음은 동물의 뼈가 기도를 막아 질식사한 것으로 결말이 났다.

자신이 죽음에 이르게 한 무엇인가로부터 죽음을 당한 것이다.

그녀는 늘 통발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통발은 숲에 올가미를 놓고 동물들을 밀엽 했고 자기가 기르는 개를 좁은 창고에 가두고는 항상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그러면 개는 하루 종일 짖어댔다.

그녀에게도 딸처럼 키우던 개가 두 마리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참다못한 어느 날은 창고의 잠금쇠를 부수고 개를 그녀의 집으로 데려와 우유를 먹이고 따뜻한 난로 옆에서 잠을 재웠는데 개 짖는 소리에 잠이 깨어보니 통발이 그녀의 집 주변을 돌며 개를 찾는 모습이 보였고 그 모습을 본 개는 주인에게 가려는 몸부림으로 문에 뛰어오르며 짖고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가두어 놓고 먹이도 제때 주지 않는 주인, 툭하면 발길질을 해대는 주인을 그래도 주인이라고 반기는 모습에...

그렇게 개는 서둘러 자신의 감옥으로 돌아갔다.

그런 통발이 죽었으니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그녀는 스스로 마음을 추슬렀다.

개는 괴짜가 맡기로 했기에 이제 남은 일은 신고를 받은 경찰이 오기만 하면 되었다.

내 생각에 죽음은 물질의 전멸로 이어져야 한다.

p 21

나는 우리가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대로 타인을 바라본다고 믿는다.

p 34

친숙함의 특별한 단계에 이르면, 상대를 부를 때 이름은 생략되어도 괜찮다.

실제로 우리가 뭔가와 정면으로 맞설 때 '이마'가 아니라 '아래턱'을 내밀며

호전적인 자세를 취한다.

p 36

그녀는 사람들을 부를 때 이름으로 부르는 것보다 처음 본 느낌 대로 사람들을 부른다.

통발은 펠트 부츠를 신고 걸은 눈 위의 발자국의 크기 때문에 통발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괴짜는 느낌 그대로 괴짜여서, 그는 그녀에게 결코 먼저 말을 걸어온 적이 없고 무엇인가를 물을 때면 화난 사람처럼 대답을 했다. 그것도 아주 짧게...

어쩌면 감옥은 바깥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게 아닐까...

어느 틈엔가 우리는 감옥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p 52

그녀는 점성술을 신뢰한다. 생년월일로 별자리를 찾아 그 풀이를 보면 죽음에 이를 날까지 알아낼 수 있다고 그녀는 늘 사람들에게 말을 하곤 했다.

통발도 그렇게 죽을 운명이었다.

"나는 점성학으로 죽음을 예측한다. 출생에 질서가 있는데 죽음이라고 질서가 없겠는가?"

그녀는 겨울이 되면 모두 떠나고 없는 빈 집을 겨우내 관리해 주며 받는 작은 돈으로 생활을 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일은 동물을 밀엽하고 자연을 해치며 숲을 돌아다니는 사냥꾼들을 경찰에 신고하는 일이다. 그녀는 자연을 훼손하면 안 된다고 모두에게 주장하지만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경찰도 그녀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았고 그녀는 더 열심히 경찰서에 신고하는 편지를 보낸다.

그녀는 생각했다.

밀렵과 사냥의 차이를.... 결국 모두가 다 동물을 해치는 것임을...

통발의 죽음, 이후 경찰서장의 죽음, 여우 농장 주인인 브넹트 샥의 죽음, 회장의 죽음, 사냥꾼의 사제인 신부의 죽음. 시체 주변에 어지러이 찍혀 있는 동물의 발자국.

이들 모두 알 수 없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누구일까? 왜?

그녀는 생각한다. 어쩌면 사슴들의 복수일지도 모른다고.

총에 맞아 피를 흘리면 죽어가는 멧돼지를 보며 사냥꾼들은 크게 웃으며 떠들어 댔다.

자연의 관점에서 볼 때는 그 어떤 생물도 유용하거나 무용하지 않아요.

그것은 그저 사람들이 적용하는 어리석은 구별일 뿐입니다.

건강하다는 것은 불 확실한 상태이기에 좋은 징조가 아니다.

조용히 병을 앓는 편이 낫다. 그러면 적어도 우리가 무엇 때문에 죽을지는 알 수 있으니까.

본문 중

여우 농장 주인인 브넹트 샥은 밀엽을 위해 설치한 올가미에 걸려 죽은 채 발견되었다.

그녀의 조그만 로맨스

결국 기도는 이런 것일 테니까, 조용히 평화롭게 생각에 잠기고,

아무것도 바라거나 요구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리라.

p 320

이야기는 가벼운듯하지만 가볍게 넘길 수 없는 것들에 말하고 있다.

우리도 조금만 귀를 기울이거나 허리를 숙여 바라보면 듣거나 볼 수 있는 것들이지만 ....

먹기 위해 키워지는 동물들, 보이기 위해 훼손되는 자연. 즐기기 위해 행해지는 행위들....

이 세상은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다.

세상을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으로 나누는 것은 누구의 생각이며....

p 340

이 책의 주된 주제가 자연과 동물에 대한 것만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그 이야기만이 마음에 남았다. 나 또한 자연을 훼손하며 살아가는 한 사람이어서 일까?

「그녀는 오두막 주변을 서성이면서 여기저기 발자국을 찍어 샛길을 만들어 보곤 한다.

하지만 가끔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을 못 알아보고 이렇게 묻는다.

누가 이 길을 지나갔을까? 이 발자국은 누가 만든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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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 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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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흰

                                     한 강


"흰 것에 대 해 쓰겠다고 결심한 봄에 내가 처음 한 일은 목록을 만든 것이었다."


흰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흰 눈이다.

흰 눈

하늘 아래 모든 공간을 가득 채우고 내리는 눈

이 땅에 내려서는 온 대지를 희게 가득 덮는 눈

그러다 어느 순간 태양빛을 받으면 흰 눈은 투명한 액체로 변한다.

흰 것이 투명한 무의 형태로 변하는 모습을 보면

이 세상 모든 것이 무의 형태로 태어나 제각각의 모양을 지니고 살다가

소멸 앞에 서면 무의 형태로 돌아가는 것은 아닌지.


통증을 견디어 내는 동안,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는 시간은 면도날을 뭉쳐 만든 구슬같다.

P 11


태에서부터 시작된 선택하지 않은 어린 삶의 시작은 여리고, 믿을 수 없을 만큼의 고통 후에 세상을 맞이한다.

첫 허파의 호흡, 시선이 머물지 못하는 눈동자는 죽은 자의 것과 같은 듯 다르다.

이제 막 시작한 눈동자에는 설렘, 희망, 생명의 시작 다운 결의가 있다.


작가의 소설을 번역 중이던 폴란드 번역가 유스트나 나이 바르 씨를 처음 만난 2013년 그날 그녀는 작가에게 물었다. 내년에 바르샤바로 초대하면 오겠느냐고...

길게 생각하지 않고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바르샤바에서 작가는 무작정 버스를 타고 구시가지로 나가 골목들을 배회했다. 

공원을 목적 없이 걸으며 '흰 ' 이란 책에 대해, 그렇게 걸으며 생각했다.

오래된 아파트는 문은 색이 바래고 칠이 벗겨져 녹이 슬어 있었고 녹물은 번지고 흘러 오래된 핏자국처럼 굳어 있었다.

작가가 처음 한일은 흰 페인트 한 통을 사서 문을 칠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문은 새롭게 부활했다.


흰에 대해 생각했다.

강보, 배내옷, 달떡, 인 게, 눈에 가려진 흰 도시, 어둠 속에 모든 사물이 희게 보였다.

빛이 있는 쪽, 젖, 초

흰 초는 흰 불꽃으로 소멸되어갔다.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 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P 81


우리의 생명이 희끗하고 분명한 형상으로 허공에 퍼져 나가는 기적 그것은 우리의 흰 입김

침묵을 가장 작고 단단하게 응축시킨 사물 흰 돌


언니

언니가 있었다면 하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오해로 화가 나 어둠 속에 웅크려 앉은 나에게 다가와 내 얼굴과 어깨를 쓰다듬던 흰 손


모든 흰


언젠가 빙하를 볼 것이다. 각진 굴곡마다 푸르스름한 그늘이 진 거대한 얼음을, 생명이었던 적이 없어 더 신성한 생명처럼 느껴지는 그것을 올려다볼 것이다.

P135


자작나무의 흰 침묵

침묵은 그 어떤 말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침묵은 용서이고

침묵은 끊임없이 쏟아내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한다.

우리는 흰 종이 위에 까만 글씨가 쓰이는 것처럼 우리의 삶을 쓰고 있다.

그것은 흰 것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흰 것을 완성시키기 위한 몸부림이고 더 희게 살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아무것도 없는 흰 종이처럼 이 세상에 와 그 위에 무엇이든 써야만 하는 것이 삶이고 쓰이는 것이 어떤 글이 되는가는 나만의 책임이기에 그 책임이 너무 무겁다.


아름다움을 쓰고

용서를 쓰고

사랑을 쓰고

위로를 쓰고

격려를 쓰고


한강 작가의 흰

그녀의 오늘도 빛나는 흰 이 되길....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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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도 증세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건강하다는 것은 불확실한상태이기에 좋은 징조가 아니다. 조용히 병을 앓는 편이 낫다. 그러면 적어도 우리가 무엇 때문에 죽을지는 알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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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한 울부짖음이 사방을 온통 불안감으로 채웠다. 나는 죽음이 항상 문 앞에 있다고, 즉 가까운 곳에 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죽음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언제나 우리의 대문 앞에 도사리고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가장 좋은 대화는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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