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명창이 있어야 명창이 나온다는 말이 있다. 명창이 없다고 불만하기 전에 먼저 귀명창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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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언어학 카페 말들의 모험] <7> 촘스키 혁명  

 

소쉬르 얘기를 여러 차례 했으니, 오늘 하루는 겉핥기로라도 촘스키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군요. 촘스키는 소쉬르 이후 가장 중요한 언어학자라 할 만하니까요. 촘스키가 한국에 소개된 것은 꽤 일렀습니다. 출세작 <통사구조론>(Syntactic Structuresㆍ1957)이 <변형생성문법의 이론>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게 1966년입니다. 

뒤이어 1971년에는 <데카르트 언어학>(Cartesian Linguisticsㆍ1966)이, 1975년에는 <통사이론의 양상>(Aspects of the Theory of Syntaxㆍ1965)이 한국어판을 얻었습니다. <통사이론의 양상>은 흔히 '표준이론'(standard theory)이라 부르는 촘스키 초기언어학을 응집한 책입니다. 이 책이 번역된 1975년 이후, 한국에서 '촘스키'라는 이름은 현대언어학의 최전선을 가리키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날, 세계 여러 곳에서 그렇듯 한국에서도, 이 이름은 지식인의 양심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한국인들의 '촘스키 소비'는 시간축을 따라가며 크게 다른 양상을 보여왔습니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촘스키의 한국인 독자들은 주로 영어영문학과의 영어학 전공 대학원생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촘스키의 언어학 책들만 게걸스럽게 읽었습니다.

촘스키의 또 다른 영역, 다시 말해 정치비평에 그들은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어요. 지식인의 책임을 거론하며 베트남전쟁을 매섭게 비판한 촘스키의 첫 정치서 <미국의 힘과 새 지배계급>(American Power and the New Mandarins)이 나온 게 1969년이었고, 그 세 해 뒤에는 두 번째 정치서 <아시아와 전쟁 중>(At War with Asia)이 출간됐는데 말이죠.
 

정치참여적 글쓰기는 촘스키가 언어학의 제위(帝位)를 얻고 나서야 손댄 장년 이후 호사취미가 아니었습니다. 촘스키 언어학은 그 시작부터 정치학과 나란했지요. 물론 촘스키가 '혁명'을 일으킨 것은 언어학 특히 통사론에서고, 그 혁명은 주로 언어학의 다른 분야나 심리학, 논리학, 인류학, 인지과학 같은 인접과학으로 수출됐습니다. 정치학은 촘스키 혁명의 핵심인 수학모델을 수입하기엔 너무 '무른' 과학이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어로 소개된 촘스키가 오직 '언어학자'였다는 사실은 그 즈음 한국사회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보게 합니다.

1980년대 말 이후 한국인들의 '촘스키 소비'는 완연히 달라졌습니다. 이제 촘스키 독자들은 일반언어학이나 영어학 세미나에 참가하는 대학원생들이 아니라 일반인들이었습니다. 독서인이라면 누구나 촘스키를 거론할 만큼 그는 한국에서도 대중적 지식인이 됐습니다. 그런데 이들 일반 독서인이 읽는 촘스키는 오직 정치비평일 뿐입니다. 그래서 언어학자 촘스키는 한국인들에게 점차 잊혀지고 있습니다. 아니 요즘의 한국 독자들 대부분에게 촘스키는 처음부터 '논객'으로, '지식인'으로 각인됐는지도 모르죠.

오늘은 '언어학자' 촘스키를 살짝 들여다봅시다. 사실 살짝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것이, 촘스키혁명을 자세히 들여다보자면 어지간히 두툼한 텍스트로도 모자랄 텁니다. 흔히 촘스키 언어학을 '변형생성문법'(transformational generative grammar)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변형생성문법이란 뭘까요? 그리고 그것이 극복했다고 주장하는 구조주의 언어학과는 어떻게 다를까요? 다음 두 문장을 봅시다.

(1) 존경하는 선생님께서 감격스럽게도 제게 꽃을 이만큼이나 보내 오셨어요.

(2) 존경하는 제자들이 기특하게도 선생님께 꽃을 이만큼이나 보내 왔어요.

이 두 문장은 구조적으로 완전히 같습니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말이죠. 전통문법에서 흔히 주부(主部)라고 부르는 부분만 살핍시다. 동사의 현재관형형('존경하는')이 명사('선생님/제자들')를 수식하고, 이렇게 만들어진 명사구에 주격표지('께서/이')가 붙어 주어 노릇을 합니다. 그런데 '존경하는 선생님'과 '존경하는 제자들'은 정말 같은 구조를 지녔을까요?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그렇다는 것은 그 둘 다 현재관형형 동사(어간-'는') 뒤에 수식되는 명사가 이어진다는 점에서입니다. 명사(구)를 'NP'로 나타내고 동사의 현재관형형을 'V-는'으로 나타내면, '존경하는 선생님'과 '존경하는 제자들'은 둘 다 [V-는 NP]라는 구조를 지닌 NP(명사구)입니다. 이렇게 겉으로 드러나는 구조를 촘스키는 표면구조(surface structure)라고 불렀습니다. 촘스키에 따르면 표면구조는 음성해석 정보를 지녔습니다.

그런데 촘스키는 이런 표면구조 '저 아래에 누워있는(underlie)' 또 하나의 구조를 가정합니다. 촘스키가 심층구조(deep structure)라고 부르는 이 층위에서는 '존경하는 선생님'과 '존경하는 제자들'의 구조가 서로 다릅니다. 심층구조에서 '존경하는 선생님'은 '선생님을 존경한다'입니다. 다시 말해 [NP 목적격표지 V-ㄴ다]의 구조를 지닌 S(문장)입니다. 그러나 '존경하는 제자들'은 심층구조에서 '제자들이 존경한다'입니다. 다시 말해 [NP 주격표지 V-ㄴ다]의 구조를 지닌 S입니다. 즉 심층구조에서 '선생님'은 '존경하다'의 목적어인 데 비해, '제자들'은 '존경하다'의 주어입니다. 촘스키에 따르면 심층구조는 의미해석 정보를 지녔습니다.

서로 다른 심층구조를 지닌 '존경하는 선생님'과 '존경하는 제자들'이 동일한 표면구조를 지니게 되는 것은, [NP 목적격표지 V-ㄴ다] 구조의 문장과 [NP 주격표지 V-ㄴ다] 구조의 문장을 [V-는 NP]라는 동일한 NP(명사구)로 유도하는 규칙이 한국어에 있기 때문입니다. 심층구조에서 표면구조를 유도하는 과정을 '변형'이라 하고, 그 변형에 쓰인 규칙을 변형규칙이라 합니다.

촘스키 문법을 변형생성문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변형규칙이라는 장치를 사용하는 생성문법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생성문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유한한 규칙들의 집합(구조)을 통해서 무한한 적격(well-formed) 문장들을 생성해내는 모국어 화자의 능력에 이 이론이 관심을 쏟기 때문입니다.

촘스키에 따르면 구조주의 언어학자들은 "존경하는 선생님"과 "존경하는 제자들"의 구조적 다름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잘해 봐야 그 다름을 '관찰'하거나 '기술'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일반언어이론은 이런 관찰적 타당성(observational adequacy)이나 기술적 타당성(descriptive adequacy)을 넘어서는 설명적 타당성(explanatory adequacy)을 지녀야 한다고 촘스키는 말합니다. 물론 자신의 변형생성문법이야말로 그런 설명적 타당성을 지녔다는 거지요.

표면구조가 다른데 심층구조는 같은 경우도 있습니다. "나는 노무현이 바보라고 생각했어"와 "나는 노무현을 바보로 생각했어"는 표면구조가 다르지만 심층구조는 같습니다. 영어에서도 마찬가지죠. "I believed Roh was an idiot"와 "I believed Roh (to be) an idiot"를 견줘보면 그렇습니다. 한국어에서고 영어에서고, 이 문장의 심층구조는 앞쪽 표면구조에 가깝습니다. 그 심층구조에 인상변형(Raising transformation)이라는 규칙이 적용되면 뒤쪽 표면구조가 유도됩니다. 또 능동문과 피동문도, 동일한 심층구조가 서로 다른 표면구조로 유도된 대표적 예입니다.

촘스키의 변형생성문법은 초기의 표준이론에서 확대표준이론(EST), 지배결속이론(GB), 최소주의프로그램(MP) 등으로 정교화하면서 한 세대 이상 세계 언어학계를 풍미했습니다. 영어권 학계만이 아니라 서유럽, 일본, 중국, 대만, 한국 등지에서 촘스키는 거의 동시에 읽혔습니다.

촘스키를 곧이곧대로 따르지 않은 이론(가)들도 촘스키를 준거로 삼은 다음에야 제 좌표를 확정할 수 있었지요.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정치팜플렛으로 한국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레이코프(George Lakoff)의 생성의미론(generative semantics), 동사를 중심에 놓고 표준이론의 결함을 보완하려 한 필모어(Charles Fillmore)의 격문법(case grammar), 언어학 너머 형식논리학의 전통을 계승한 몬터규(Richard Montague)의 범주문법(categorial grammar) 따위가 다 그렇습니다.

촘스키 언어학이 이렇게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이유 하나는 그 이론의 보편지향성에 있을 겁니다. 촘스키는 수많은 자연언어들의 문법이 표면구조에서는 달라도 심층구조에서는 같으리라 예상했습니다. 말하자면 그의 두드러진 욕망 하나는 보편문법을 수립하는 것이었지요. 이탈리아어나 프랑스어를, 일본어나 중국어나 한국어를 모국어로 삼은 언어학자들이 촘스키 이론을 자신의 가장 익숙한 언어에 적용해보고 싶어했던 것이 이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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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에 난 기사인데 요즘 내가 이런 모습이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고등학생때에도 상당한 자폐증에 걸렸다가 대학과 군 생활에서 좀 나아지는가 싶었는데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회식 빠지는 김 대리, 아무리 뛰어나도 박수 쳐줄 사람 없네 


초등학생부터 직장인까지…  '자기만의 城' 쌓고 스스로 고립 


상처받기 싫어 만든 회피 수단… 혼자 행복해도 조직눈엔 '비정상'

 

 서울 A초등학교 3학년 지수(9·가명)는 교실에서 혼자 앉는다. 지수네 반은 학생 수가 홀수여서 제비뽑기로 혼자 앉을 사람을 정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지수가 자진해서 담임 선생님에게 "혼자 앉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지수의 학업성적은 중상위권. 공부도 곧잘 하지만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귀찮아 '자기만의 세상'으로 들어갔다.

대기업에 다니는 이정민(34·가명)씨는 혼자 점심 먹는 게 익숙하다. 마주 보고 앉는 동료에게 용건이 있을 때도 말로 하는 대신 이메일이나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 팀장이 업무 때문에 불렀을 때를 제외하고 사무실에서 이씨의 목소리를 듣기란 힘들다. 자연히 동료들도 멀어졌다.

타인과 어울리기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이른바 '스따(스스로 따돌림)'가 신종 사회 현상으로 우리 사회 곳곳에 퍼지고 있다. 이미 사회 현상으로 굳어진 '왕따'가 타인으로부터 소외당해 비자발적으로 혼자 지내는 경우인 반면, '스따'는 자발적으로 외톨이를 선택하는 사람들. 적극적으로 타인과의 관계 맺기를 회피한다는 점에서 그저 혼자 놀기 좋아하는 '나홀로족'과도 다르다.

스따는 초등학생부터 직장인까지 다양한 세대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의정부초등학교 오평진 교사는 "왕따에 비해 스따 아이들의 수가 많은 건 아니지만 고학년의 경우 한 반에 2~3명은 있다"며 "왕따는 심리적·육체적으로 피해를 입어 공론화되지만 스따는 다른 아이들과의 표면적인 마찰이 없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대학 실험실에서 3년간 생활한 뒤 대기업 연구원으로 취직한 정진민(29·가명)씨. 입사 초기 점심식사를 같이 하자는 팀장에게 "조금 있다가 밥 먹을게요"라고 말했다가 '혼자 놀기 좋아하는 놈'으로 찍혔다. 그 후 정씨는 관계를 회복할 엄두가 나지 않아 동료와 거리를 두고 일에만 몰두했다. 하지만 동료들은 그를 '암초'로 생각했다. 아이디어는 반짝였지만 팀워크가 이뤄지지 않아 그와 일하기를 꺼렸다. 지난해 입사한 윤진현(28·가명)씨는 회식 자리에 아예 안 간다. "다른 약속이 있어서…"라고 얼버무린 뒤 그가 향하는 곳은 집. 소모적인 수다에 시간을 허비하느니 스따가 돼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게 생산적이라 믿는다.

2001년 삼성전자를 시작으로 LG전자·동부화재 등 대기업에 잇따라 생긴 사내 심리상담실에서는 요즘 스따 상담이 많아졌다. 8년 동안 B대기업에서 직원 상담을 맡고 있는 심리상담사 C씨는 "젊은 사원 중에 자신이 조직에 부딪혀 '실패자'로 낙인 찍히는 걸 두려워 방어 전략으로 스따를 택하는 이들이 있다. 과거엔 보기 힘들었던 유형"이라고 했다. D대기업 인사담당자는 "과거엔 업무 능력이 가장 중요했지만 요즘은 조직 적응력을 보는 인성검사를 강화하고 있다"며 "몇 차례에 걸쳐 조직 부적응자를 솎아내지만 그래도 팀워크를 거부하는 스따들이 나온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스따를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하지현 건국대 신경정신과 교수는 "자아가 너무 강해 '쇄국정책'처럼 자신을 타인으로부터 유리시키는 경우와 타인으로부터 상처받기 싫어 스따를 회피 수단으로 삼는 경우가 있다"고 설명했다.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 박진생 원장은 "과거엔 집단에 속하지 못하면 고립된다는 두려움이 있었지만, 요즘엔 게임기·인터넷 등 혼자 소통의 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많아졌다"며 "굳이 에너지를 써서 친구를 만들지 않아도 되는 사회 환경이 스따를 부추긴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한국 사회가 집단주의에서 개인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단계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는 "어려서부터 혼자가 익숙하고, 혼자서도 아쉬울 게 없는 상황에서 자란 신세대에겐 혼자 노는 게 전혀 외롭거나 힘들지 않다"며 "스따 자신들은 지극히 행복한데 집단주의를 기반으로 형성된 사회의 눈이 이들을 비정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스따 자가 진단 체크 문항

주위 사람들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데 대해 너무 과민하고 다음과 같은 증상 가운데 4가지 이상에 해당되면 스따일 가능성이 높다.

▲비판받거나, 인정받지 못하거나 거부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필요한 대인관계나 활동을 피하고 스스로 고립한다.

▲자신을 좋아한다는 확신 없이는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하지 않는다.

▲창피를 당하거나 놀림을 받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극히 제한된 관계 이외에는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

▲비난받거나 거부당하는 상황에 대해서 지나치게 집착을 한다.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결여돼 있거나, 스스로 부적절하다는 생각 때문에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는 것을 힘들어한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스스로 매력이 없다거나 열등하다고 느낀다.

▲위와 같은 감정들 때문에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것을 주저하거나 회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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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언어학 카페 말들의 모험]<6> 랑그는 형식이지 실체가 아니다 

 

소쉬르의 <일반언어학강의>(CLG)를 들추기 시작하다 이야기가 번역 쪽으로 번지며 기다란 에움길을 걸었습니다. 어떤 이름을 자주 들어 귀에 익숙해지면 그 실재를 아는 듯한 착각이 듭니다. 칸트의 책을 한 줄도 읽지 않은 처진데, 그 이름을 하도 거듭 듣다 보니 칸트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니게 되는 것처럼 말이죠. CLG도 독자들에게 그럴지 모르겠습니다. CLG라는 책이 그간 너무 자주 거론됐으니까요.

실상 우리가 CLG에 관해 얘기한 것은 많지 않습니다. 그 책에 나오는 몇몇 용어들, 곧 랑그, 파롤, 랑가주, 시니피앙, 시니피에, 포놀로지 따위의 개념을 훑고 그 말들을 예로 들어 번역이라는 행위의 어려움을 살핀 것뿐이지요. 이대로 CLG를 떠나려니 아쉬움이 남네요. 그래서 오늘 하루만 CLG 얘기를 더 하려 합니다.

맨 첫날, CLG의 지성사적 의의는 언어를 하나의 구조로 파악함으로써 구조주의의 시동을 건 데 있다고 말씀드린 것 기억하세요? 또 거기서 구조란 '유기적 관계들의 더미'를 뜻한다는 말씀도 드렸죠? 그렇지만 이 정도 가지곤, 언어가 구조라는 게 무슨 뜻인지 잡히지 않을 듯합니다. 게다가 이미 말씀드렸듯, 소쉬르가 CLG에서 '언어는 구조다'라고 선언한 것도 아니고요. 소쉬르의 후배 언어학자들, 그리고 인접과학 연구자들은 CLG의 어떤 대목에 홀려 그 책을 구조주의의 수원지로 여겼을까요? 이 책을 내처 들춰봅시다.

CLG 중간쯤에서, 소쉬르는 뒷날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문장을 발설합니다: "언어는 형식이지 실체가 아니다(La langue est une forme et non une substance)." 

이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소쉬르는 이 점을 또렷하게 하기 위해 언어를 서양장기(체스)에 비유합니다. 동양장기를 떠올려도 마찬가지입니다. 장기놀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규칙입니다. 이를테면, 장기말끼리의 상호관계(예컨대 포ㆍ砲는 포를 넘을 수 없다거나 졸ㆍ卒은 후진할 수 없다거나)를 통해 결정되는 각 장기말의 기능이나 가치(위치)가 가장 중요합니다. 상(象)이 가는 길('상'의 가치)과 마(馬)가 가는 길('마'의 가치)은 다릅니다.

다시 말해 대립합니다. 물론 규칙(그러니까 형식)만으로 장기를 둘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장기를 두려면 장기판이나 정해진 수의 장기말 같은 물리적 실체가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이 실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장기판이 크든 작든, 장기말이 나무로 만들어졌든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든 상관없습니다.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어활동은 말소리라는 음향적 실체를 사용하지만, 소리 자체가 언어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 소리들이 생각과 결합해 만들어내는 기호들의 가치입니다. 그리고 한 기호의 가치는 다른 기호들과의 관계를 통해, 주로 대립을 통해 생겨납니다. 그 대립이 낳는 가치들의 체계(그것을 소쉬르의 후배들은 '구조'라고 고쳐 불렀습니다)가 언어입니다.

머리의 앞면을 표현하려고 한국인들은 [ㅓ] [ㄹ] [ㄱ] [ㅜ] [ㄹ]이라는 음향적 실체를 사용합니다. ('얼굴'의 'ㅇ'이 소릿값 없는 장식품인 건 아시죠?) 그러나 소쉬르에 따르면 이것 자체는 언어가 아닙니다. 똑같은 목적으로 영국인들은 [f] [ei] [s]라는, 전혀 다른 음향적 실체를 사용합니다. 언어는 그런 음향적 실체가 아니라, {얼굴}이나 {face}라는 기호들의 가치들로 이뤄진 체계입니다. 그것은 규칙의 세계 곧 형식의 세계입니다.

{얼굴}이라는 기호의 가치는 예컨대 이 기호가 {낯}이라는 기호와 맺는 관계, 정확히는 차이나 대립을 통해 생겨납니다. 한국어 '얼굴'과 '낯'의 가치는 다릅니다. "볼 낯이 없다"라는 숙어에서 '낯'을 '얼굴'로 바꾸면 자연스러움이 덜합니다. 만약에 한국어 어휘목록에서 '낯'이 사라진다면, '얼굴'이 '낯'의 가치를 남김없이 빨아들일 겁니다. 그 땐 "볼 얼굴이 없다"라는 말이 자연스레 쓰일 테지요.

또 한국어에서 /t/와 /th/와 /t'/는 서로 대립하며 제 나름의 가치를 지닙니다. '달(月)'과 '탈(假面)'과 '딸(女息)'에서처럼 말이죠. 그래서 한국어에선 이 세 소리들이, 서로 다른, 다시 말해 대립하는 음소들을 이룹니다. 영어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style'의 둘째 자음을 /t/로 소리내든 /th/로 소리내든 /t'/로 소리내든 아무 상관없습니다. 물론 /t'/로 내는 것이 표준발음에 가깝긴 하지만 말입니다. 영어에서는 /t/와 /th/와 /t'/가 대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은 서로 다른 음소를 이루지 못합니다. 그 소리들의 실체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은 여기서 아무런 중요성을 지니지 못합니다. 대립하지 않는 것은 다르지 않다는 뜻이니까요.

이것이 대략 소쉬르의 설명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결론을 내립니다. "체스놀이가 상이한 말(馬)들의 결합 안에서 전적으로 이뤄지듯, 언어도 체계라는 특성이 있으며, 이 체계는 완전히 그 구체적 단위들의 대립에 바탕을 둔다."

'상이하다' '대립' 같은 말에 주의를 기울입시다. 다름으로써 대립해야만 가치가 생산되고(그것이 소쉬르의 생각이었습니다), 그 가치들의 집합, 그 가치들을 낳은 내적 관계들의 그물이 곧 형식이고 체계이고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언어는 형식이지 실체가 아니다" 할 때의 '언어'가 일상용어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언어활동의 사회적 측면을 가리키는 소쉬르 특유의 '언어', 곧 '파롤'과 대립하는 '언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뜻을 또렷이 하기 위해, 소쉬르의 저 유명한 선언을 "랑그는 형식이지 실체가 아니다"로 옮기는 것이 더 나을 듯합니다. '랑그'를 사용하는 개인적 행위인 '파롤'은 다분히 실체일 수밖에 없지요.

랑그가 실체가 아니라 형식이라는 것을 일러주기 위해 소쉬르는 또 '제네바발-파리행 열차'를 끌어대기도 합니다. 24시간 간격으로 떠나는 제네바발 파리행 저녁 8시45분 급행열차 두 대를 우리는 '같은' 기차라고 말합니다. 승무원들이나 객차가, 다시 말해 그 실체가 완전히 다를 수도 있는데 말이지요. 그것을 '같은' 기차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발차시각이나 운행노선 등 형식이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매일 운행되는 제네바발 파리행 저녁 8시45분 급행열차들은 모두 동일한 랑그인 것입니다.

랑그가 실체가 아니라 형식이라는 걸 설명하기 위해 소쉬르가 끌어온 체스놀이나 제네바발-파리행 급행열차의 비유가 적절했는지에 대해서는 적잖은 의문이 제기됐습니다. 심지어는 랑그가 과연 형식이기만 할 뿐인가에 대해서도 반론이 나왔습니다. 그 가운데 유명한 것 하나는 앙드레 마르티네라는 프랑스인 언어학자가 거론한 영어 /h/ 소리와 /ng/ 소리의 예입니다. 영어에서 /h/ 소리와 /ng/ 소리는 별개의(그러니까 서로 다른) 음소로 간주됩니다. 그렇다는 것은 영어라는 '랑그' 체계 안에서 /h/ 소리와 /ng/ 소리가 대립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영어에서 /h/ 소리와 /ng/ 소리는 대립하지 않습니다. 이 두 소리를 서로 교체해서 달라지는 단어쌍이 영어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영어에서도' /h/ 소리와 /ng/ 소리는 다릅니다. '대립하지 않는데도' 다릅니다. 이 두 소리는 영어에서 서로 다른 음성(파롤)일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음소(랑그)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어라는 랑그 안에서 '대립하지 않는' /h/와 /ng/을 구별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두 소리의 '실체'가 '너무나' 다르다는 점일 수밖에 없을 것 같군요. 결국 랑그는 때로 실체이기도 한 것입니다.

마르티네의 반례가 "랑그는 형식"이라는 소쉬르의 정식을 완전히 무너뜨렸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일일 겁니다. 모든 규칙이 지니게 마련인 예외 정도로 넘깁시다. 랑그가 형식이라는 걸 설명하기 위해 소쉬르가 끌어온 비유들은 '구조'(소쉬르의 용어로는 '체계')라는 것의 개념을 제 나름대로 명료히 드러냅니다.

CLG 얘기는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더러 거론은 하겠지만, 이 책 자체를 소재로 삼는 일은 없을 겁니다. 언어학 개론서로서 CLG가 그리 좋은 책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낡은 책이고, 그 안에 수많은 모순을 담은 위태로운 책입니다. 그러나 이 책은 동시에 고전이기도 합니다. 소쉬르는 CLG를 통해, 당대 언어학의 주류였고 그 자신 깊이 개입했던 비교문법과 결별함으로써, 언어학의 역사에서 하나의 인식론적 단절이라 할 만한 것을 이뤄냈습니다. 여러분도 짬을 내 한 번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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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트워크 자본주의의 천민이여 단결하라

(20) 마누엘 카스텔 Manuel Castells

마누엘 카스텔(Manual Castells)은 1942년에 스페인 바로셀로나에서 태어났다. 대학 시절 프랑코 독재 반대운동에 연루돼 프랑스 파리로 망명한 뒤 1967년 파리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79년까지 파리대 교수를 거쳐 1979~2003년 캘리포니아대 사회학과 교수를 지냈다. 지금은 카탈루냐개방대 교수로 있으면서 여러 대학의 방문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도시문제-마르크스주의적 접근>(1972), <도시, 계급 그리고 권력>(1978), <도시와 민중>(1983), <정보도시>(1989), <정보시대-경제, 사회, 문화>3부작,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1996), <밀레니엄의 종언>(1998), <커뮤니케이션 파워>(2009) 등이 있다.

 

 

 

 


카스텔은 종교적 근본주의, 여성운동, 환경운동, 반세계화운동 등 ‘저항적 정체성’을 가진 공동체를 주목한다. 그러나 이들은 상호 소통을 결여하고 있다. 따라서 ‘네트’와 ‘자아’를 아울러 ‘문화정치’에 기반한 상호 소통의 형태를 띠는 새로운 종류의 정체성 기획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두 번째 천년의 끝자락에 일어난 정보기술혁명이 세계를 바꾸고 있다. 반도체와 컴퓨터, 유비쿼터스, 이동통신, 유전공학, 전자적으로 통합된 지구적 금융시장…. 이것이 곧 우리의 세계이며 ‘정보시대’의 세계다. 마누엘 카스텔의 관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연구 주제는 우리에게 친숙하다. 정보시대의 정보적 환경은 지금, 여기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적 삶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 마누엘 카스텔
 
카스텔은 창조성과 소통의 무한 지평을 연 정보기술혁명이 우리의 자아와 경험들을 관통하는 구조적인 사회 변화의 중심에 있다고 파악한다. 따라서 그는 새로운 정보기술의 등장과 발전에 따른 광범위한 역사적 전환의 맥락에서 경제 재구조화에 관한 분석에서부터 정보시대의 사회운동과 정치, 문화변동, 자아정체성의 형성에 이르기까지 총체적 분석을 시도한다. 특징적인 것은 세계 도처에서 수집한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정교한 분석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그는 총체론자이면서 경험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많은 포스트모던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카스텔 역시 초기의 사상적 지반은 마르크스주의였다. 초기 저작인 <도시문제>(1973)를 펴낼 당시 그는 알튀세르의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와 풀란차스의 국가론을 바탕으로 도시문제를 분석했다. 그러나 <도시와 민중>(1983)에 와서는 마르크스주의적 사고에 균열을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서 그는 사회운동을 계급적 관점이 아닌 정체성·젠더·자기 확신 등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는데, 아마도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인식하고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방법론과 주제 모두에서 큰 변화를 보이는 <정보도시> <정보시대> 3부작에 이르러서는 포스트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이 한층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저작에서 카스텔은 <도시와 민중>에서 보여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한층 정교화한다. 그러나 그가 창안해낸 개념들에서, 그리고 총체적인 연구방법을 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그의 사고에는 마르크스주의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보사회’ 또는 ‘지식사회’를 ‘네트워크 사회’로

카스텔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정보사회’ 또는 ‘지식사회’라는 용어를 ‘네트워크 사회’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식과 정보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생산성과 권력의 필수적인 근원이라는 점에서 그것들의 중요성이 우리 시대만의 특별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네트워크에 대한 접속이 필수가 되고 있는 사회에서 네트워킹 능력은 조직과 기관, 사회적 행위자의 생산성·경쟁력·창조성과 연결되고, 궁극적으로는 권력과 권력의 공유를 가능케 하는 핵심 조건이 된다. 따라서 ‘정보시대’는 생산·경험·권력, 그리고 문화적 과정이 네트워킹 논리에 따라 작동되고 조정이 일어나는 네트워크 사회라는 게 카스텔의 주장이다.

그런데 네트워크 사회를 추동하는 힘은 무엇보다 새로운 정보기술의 능력이다. 특히 인터넷의 창조는 전자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모든 활동 영역과 맥락, 장소에 네트워킹 논리가 적용될 수 있게 했고, 무한한 소통의 지평을 열어젖힘으로써 기업뿐 아니라 조직·제도·노동 과정 등 사회 전반이 거대한 변동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했다.

이런 네트워크 개념을 카스텔은 “상호 연결된 노드들(nodes)의 집합”으로 정의하는데, 이는 서로 다른 지점에 있는 노드들이 상호소통을 통해 새로운 노드들을 통합해 무한히 뻗어나갈 수 있는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구조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네트워크는 개방성·유연성·종합성·복잡성·네트워킹의 특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상호소통성과 다중노드 원리를 특징으로 한다. 이런 네트워크 발달에 핵심적 동력을 제공한 정보기술은 위기에 처한 산업 자본주의를 재구조화하는 데 강력한 도구로 활용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 곧 정보화 자본주의의 출현을 야기했다.


새로운 자본주의의 블랙홀, ‘제4세계’의 출현

자본주의의 재구조화와 정보기술 패러다임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 신경제는 산업주의에 기반한 자본주의와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경제체제라는 것이 카스텔의 입장이다. 지구적 정보화 경제에 기반을 둔 정보화 자본주의는 그 어느 시기보다 한층 자본주의적인 체제다. 그러나 지금의 자본주의는 과거 자본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데, 작동 범위가 전 지구적이란 점이 한 가지 이유라면, 자본의 축적과 가치의 창출이 정보네트워크에 의해 운영되는 지구적 금융시장을 무대로 이뤄진다는 점이 둘째 이유다.

결국 정보화 자본주의는 네트워킹 능력에 기반하면서 유연하고 적응력 있는 노동력에 의존하는데, 이때 정보를 특정한 지식으로 가공할 수 있는 자율적인 능력은 가치 창출의 핵심 요건이다. 문제는 그런 능력을 갖추지 못한 대다수의 일반 노동자들은 역할이 그만큼 축소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대다수 노동자들은 기업의 필요에 부응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거나, 기계 또는 대체 노동력에 의해 해고를 당해야 할 처지에 놓이기 십상이다.

대다수 노동자들은 가치 창출의 주된 역할을 담당하는 소수의 ‘정보 노동자’들의 주변을 전전하면서 근근히 생존하는 하층계급, 새로운 배제계급이 되는데, 이들은 생계를 위해 유랑하는 ‘잡 노마드’(job nomad)로 전락하거나 때로는 범죄경제의 사슬에 연루되기도 한다. 카스텔은 이를 ‘제4의 세계’인 새로운 세계의 출현으로 개념화하고, 지구적 정보화 자본주의의 블랙홀이라 일컫는다.


‘정보정치’의 새 공유지, 미디어 공간 디자인하기

카스텔에 따르면 정보화 자본주의의 형성은 단순한 기술 변화의 결과가 아니다. 다양한 문화적 조건들과의 상호 작용의 결과이며, 그것의 ‘정치적’ 결과다. 카스텔은 이런 관점에서 새롭게 등장한 사회운동을 검토하는데, 그가 주목하는 것은 종교적 근본주의, 여성운동, 환경운동, 반세계화운동 등과 같은 공동체의 출현이다. 이들은 자율적인 정체성 구축의 형태를 취하는 ‘저항적 정체성’을 가진 공동체들인데, 카스텔이 볼 때 이 ‘저항적 정체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동체들은 저항만 할 뿐, 상호 소통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명확하다. 따라서 새로운 종류의 정체성 기획으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한데, 이때의 정체성 기획은 ‘네트’와 ‘자아’를 아우르면서 ‘문화정치’에 기반한 상호 소통의 형태를 띠어야 한다고 카스텔은 역설한다.

전자적 미디어 공간은 현대 사회의 공유지가 되었다. 미디어 공간이 ‘정보화 정치’의 장소가 된 것이다. 카스텔은 정보를 제공받고, 의도적이고 단호한 사회적 행동을 한다면 무엇이든 변화시킬 수 있다고 단언한다. 전세계 어느 곳이든 능동적으로 의사소통하는 것,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 언론이 메시지가 아닌 메신저가 되는 것, 정치가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회복하는 것, 인류가 지구상의 인간과 연대감을 갖는 것,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는 것, 세대 간에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것, 자아를 탐구하는 것. 카스텔은 이런 실천들이야말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프로젝트들이라고 단언한다.

김남옥/한국성서대 강사


 




 

» 김남옥/한국성서대 강사
 
김남옥 교수는 고려대에서 사회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정보기술패러다임과 몸(body)’을 주제로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경기대와 배재대에서 강의했고, 지금은 한국성서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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