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이 책의 구성은 특이하다. 사랑의 다양한 모습들을 알파벳 순서에 따라 우연적으로 배열하고 있다. 그러나 단지 우연적이지만은 않다. 우연적 배열들로부터 드러나는 사랑의 모습은 사랑이 성숙해 나가는 연대기이며 서사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여기에서 묘사되는 사랑의 양태는 권태에서 변태까지 감정의 바닥에서부터 시작하여 낭만과 주저와 폭력과 담담함과 여유로 이어진다. 가히 사랑의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바르트는 사랑의 담론이 지극히 외로운 처지에 놓여 있다는 의식으로부터 이 책을 시작하고 있다. 사랑이 흔해지면 실로 사랑은 외로워지는 법이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자이고 바르트는 구조주의자라고 평할 수 있다. 사르트르는 주체의 자유와 선택을 강조했고 바르트는 주체를 해체한다. 문학적인 맥락에서 볼 때 사르트르와 바르트는 대립적 입장에 서 있다. 바르트는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라고 하면서 저자의 죽음을 말한다. 마치 주체의 죽음처럼 느껴지는 대목이다.

 

 

 

 

 

 

 

 

 

 

 

 

 

 

사르트르가 능동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저자의 기능이나 저자의 의미가 담겨 있는 작품을 강조했다면 바르트는 수동적으로 의미를 경청하고 음미하는 독자의 능력과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이 담긴 텍스트를 강조했다. 그에게서 텍스트는 저자의 의미를 해독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주이상스(jouissance, 향유, 즐김)의 대상일 뿐이다.

나의 스타일에 꼭 맞는 책이었기에 바르트의 생각대로 이 책은 읽는 내내 바르트의 의도를 해독해야할 작품이 아니라 내가 향유했던 텍스트였다. 내가 놀란 것은 바르트의 문장 속에 감추어진 중국의 향내들이다. 게다가 그의 사고는 매우 도가(道家)적이었다는 사실!

나는 롤랑 바르트를 스타일리스트라고 평가한다. 단지 문학적인 측면에서의 문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가 이룬 독특한 스타일은 문체가 아니라 삶 자체의 스타일이 아닐까. 그의 문장 사이사이에는 어떤 어조, 뉘앙스, 리듬, 침묵이 담겨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 눅진한 감성을 읽어내지 못했다. 그것을 불어로 읽지 못하는 나의 무능력을 통탄할 뿐이다. 어쩌면 나에겐 이 책 사랑의 단상은 직접 불어로 읽어야만 하는 유일한 책인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각의 쾌락을 빼앗고 성적 쾌락을 빼앗고 듣는 쾌감을 빼앗고 모든 감각적 쾌락을 빼앗는다면 인간의 행복의 본질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은가. 행복을 감각적 쾌락이 아니라면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 쾌락주의로 알려진 에피쿠로스(Epicurus, 기원전 341271)는 이런 의구심을 던졌다. 영어 에피큐리언(epicurean)이란 사치스럽다는 의미이고 식도락 등의 미식가를 의미하며 향락을 즐기는 뜻으로 풀이한다.

 

 

 

 

 

 

 

 

과연 에피쿠로스의 생각대로 현대인은 모두 에피큐리언이 되었지만 에피쿠로스의 진정한 쾌락과 행복의 의미를 깨닫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미식가가 되었고 성적 자유와 여행의 자유 등 감각적 쾌락을 향유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행복하지 않고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보통 쾌락하면 뭔가 성적인 의미와 함께 풍족한 향유를 떠올린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에게서의 쾌락이란 고통이 제거된 상태 속에서 자족감과 같은 것이다. 소박한 자기만족(autarkeia)을 의미한다. 에피쿠로스는 죽을 때까지 정원공동체에서 활동하면서 동료들과의 우애를 강조했다. 그가 말하는 쾌락이 단지 개인적인 차원의 감각적 쾌락의 향유를 의미하지 않다는 점을 몸소 삶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핵심은 소박함과 우애에 있다.

현대인은 가진 것이 부족해서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아니라 현재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제대로 누릴 줄 모르기 때문에 만족하는 방법조차 모르는 것이 아닐까. 감각적 쾌락이 풍족한 시대다. 풍족함에도 불구하고 풍족함을 사람들과 함께 우애롭게 향유하지 못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풍족함에도 만족을 모르는 사회다.

사실 주목해야할 부분은 에피쿠로스의 이런 말이다. “자연학이 없다면 우리는 순수한(akeraios) 쾌락을 얻을 수 없다.” 여기에서 표현된 아케라이오스(akeraios)는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쾌락을 의미한다. 에피쿠로스는 자유와 행복을 얻기 위해서 자연학을 권하고 있다. 그의 인생과 행복에 대한 사고는 그의 자연학에 기반하고 있다. 과학이다.

 

 

 

 

 

 

 

 

 

 

 

 

 

아직 우리에게 에피쿠로스의 자연학이 제대로 소개되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 에피쿠로스의 권고에 의한다면 행복을 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과학을 공부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에게 철학을 탐구해야만 한다고 충고하는 에피쿠로스의 말에는 당연히 과학이 포함되어 있다.

젊은이건 늙은이건 철학을 탐구해야 한다. 그가 나이를 먹음에 따라 지나간 일들에 감사하면서 축복 속에서 젊게 되도록, 또한 그가 미래의 일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지 않음으로 인해, 비록 나이가 젊지만 노련하게 되도록 ......”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난 니체의 이런 말을 신뢰한다. “너희는 사자가 먹이를 갈구하듯이 그렇게 지식을 갈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지혜에 대한 사랑, 철학을 통해 우린 진리 그 자체를 그렇게도 목말라 갈구했던가? 회의적이다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이 점에 대해서 냉소적이다. 그는 철학이 임종의 순간을 맞이했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그 임무를 다하지도 못해서 죽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임종을 맞은 철학은 이렇게 고백한다. 거창한 주제들은 모두 핑계였고 신이나 우주, 주체나 객체, 의미나 무 등의 추상적 주제들은 모두 사실 아무 것도 아니라고. 우리는 헛된 노력을 기울였던 것일까.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이 출간된 지 200주년이 되는 해에 슬로터다이크는 냉소적 이성 비판에서 칸트의 사유, 아니 철학적 사유 자체와 접촉할 때 안게 되는 위험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격렬하고 급작스러운 노화 현상." 철학을 한다는 것은 급격하게 늙어간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그리곤 이렇게 묻는다. “과연 지식에 대한 혈기왕성한 젊은 의지는 지금 철학에 어느 정도 남아 있는가?”

 

 

 

 

 

 

 

 


 그렇다면 왜 슬로터다이크는 이 책을 쓰게 되었는가? 문화에 대한 불쾌감이 비판을 충동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성과 비판의 힘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계몽의 신화는 무너지고 있다. 전통적 이데올로기 비판은 냉소주의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이 시대는 냉소주의로 가득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냉소주의를 계몽된 허위의식으로 규정하고 있다. 계몽주의는 종교적 환상을 비판했고 형이상학적 허구를 비판했고 도덕적 허구를 비판했고 관념론적인 상부 구조 등을 비판했다. 이제 계몽된 의식은 바보가 아니다. 그러나 계몽되었지만 무감각해졌을 뿐 아니라 냉소적이 되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이 책을 통해 하버마스로부터 극찬을 받으면서 일약 철학계의 스타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그는 현대인들의 냉소주의에 맞서 유머, 욕설, 아이러니, 반항적 몸짓 등 고대적 냉소주의의 선구자인 디오게네스의 미덕들을 제시한다
고대적 냉소주의는 키니시모스(kyinsmos)라 하여 견유주의(犬儒主義)라 번역된다. 개처럼 행동한다는 것이다. 디오게네스는 개처럼 살았다. 하지만 이것을 단지 위선적인 개 같은 놈들에게는 개처럼 굴어야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개는 개새끼라고 욕을 먹어야할 대상이 아니다. 개새끼로 욕을 먹어야할 대상은 자연스러움을 상실한 위선적인 인간이고 개는 자연의 원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개답게 사는 개일 뿐이다
슬로터다이크는 철학을 이렇게 정의한다. “이해를 바탕으로 한 몸(physis)와 정신(logos)의 상호작용이 철학이지, 그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철학은 아니다.” 슬로터다이크는 비판정신과 저항정신을 잃은 근대인들은 실제로 저항도 못하면서 그저 머리로만 사회적 부정의를 냉소하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닐까? 근성도 오기도 없이 너무도 허약해졌다는 것이다.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저하는 허약한 사유가 아니다. 개같은 곤조다.

 

 

 

 

 

 

 

 

 

 

 

 

 

 

빅토리안시대의 그림이다. 알렉산더와 디오게네스 
누가 알렉산더이고 누가 디오게네스일까. 모두 개다.

 

Sir Edwin Henry Landseer
Alexander and Diogenes- exhibited 184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제 상황

들뢰즈는 독특하게 철학을 연구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나도 이런 말을 중시한다. 그 철학자의 개념 이전에 감정적 뉘앙스를 중시하라. 어떤 사람은 위대한 철학자를 연구할 때 항시 그 철학자의 성적인 경향성이 어떠했을까를 상상한다고 했다. 그럴 듯하지 않은가. 소크라테스의 성적인 취향과 경향성은 어떠했을까? 사디스트? 공자는? 마조키스트? 들뢰즈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철학자는 새로운 개념을 야기하고 그것을 제시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개념이 어떠한 문제에 응답하는 것인지, 그 문제 자체를 말하지 않는다. ...... 철학사는 어떤 특정 철학자가 기술한 것을 또 한번 기술하는 것이 아니며, 철학자에게는 반드시 언외(言外)로 암시하는 것이 있지만 그것은 무엇인지, 철학자 본인은 기술하고 있지 않으나 그가 말하는 것 속에 나타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말해야 한다.

중요한 지적이다. 책을 읽을 때 항시 언외지의(言外之意)를 읽어야 한다는 것은 시 뿐만 아니라 고전을 읽는 핵심이기도 했다. 철학자 자신이 스스로 무엇을 사고하고 있는지 그 스스로도 그 전부를 완전히 알고 있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들뢰즈는 문제(problem)과 질문(question)을 구별한다. 질문에도 진짜 질문과 가짜 질문이 있다. 
질문 이전에 항시 문제 상황이라는 것이 있다. 문제 상황이 명확하지 않은 질문은 가짜 질문이다. 고쿠분 고이치로는 <들뢰즈 제대로 읽기>라는 책에서 “철학자에게 사유를 강제하는 어떠한 질문, 그 철학자 본인에게조차 명석하게 의식되고 있지 않은 그 질문을 그려 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들뢰즈는 그것을 ‘사유의 이미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사유는 사유해야만 한다고 의지해서 실행되는 것이 아니다. 문제 상황에 빠져 사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부득이함 때문에 사유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는 사유는 어쩌면 위선이다. 문제 상황에서 일어나지 않는 질문은 가짜 질문인지도 모른다. 과시와 유희일 뿐인 질문들. 따지고 보면 문제 상황의 미세한 결들과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유는 사치일 수 있다. 처절한 문제 상황이 아닐 수도 있다. 
인문학의 유행이란 어찌 보면 사치스러운 질문들에 대한 매끄럽고 맛깔스런 답변들에 대한 기대가 아닐까. 자신의 문제 상황에서 나오지 않은 언어들은 그래서 부박하고 달콤하다. 물론 사람들은 그것을 또 기가 막히게 간파하기도 한다. 
질문 이전에 그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는 문제 상황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은 철학자의 사고가 그 철학자의 의식을 넘어서는 보다 넓은 범위를 묻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철학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도 그러하지 않은가.

사람들은 타인의 말을 경청하는 듯하지만 자신의 관심과 이익과 관련된 것만을 들으려 하고 자신의 문제와 질문을 투사하여 타인의 설명들을 이해하려고 한다. 들뢰즈의 이러한 태도는 단지 철학자를 이해하는 방법일 뿐 아니라 타인을 이해하는 방법일 수도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