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각의 쾌락을 빼앗고 성적 쾌락을 빼앗고 듣는 쾌감을 빼앗고 모든 감각적 쾌락을 빼앗는다면 인간의 행복의 본질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은가. 행복을 감각적 쾌락이 아니라면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 쾌락주의로 알려진 에피쿠로스(Epicurus, 기원전 341271)는 이런 의구심을 던졌다. 영어 에피큐리언(epicurean)이란 사치스럽다는 의미이고 식도락 등의 미식가를 의미하며 향락을 즐기는 뜻으로 풀이한다.

 

 

 

 

 

 

 

 

과연 에피쿠로스의 생각대로 현대인은 모두 에피큐리언이 되었지만 에피쿠로스의 진정한 쾌락과 행복의 의미를 깨닫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미식가가 되었고 성적 자유와 여행의 자유 등 감각적 쾌락을 향유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행복하지 않고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보통 쾌락하면 뭔가 성적인 의미와 함께 풍족한 향유를 떠올린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에게서의 쾌락이란 고통이 제거된 상태 속에서 자족감과 같은 것이다. 소박한 자기만족(autarkeia)을 의미한다. 에피쿠로스는 죽을 때까지 정원공동체에서 활동하면서 동료들과의 우애를 강조했다. 그가 말하는 쾌락이 단지 개인적인 차원의 감각적 쾌락의 향유를 의미하지 않다는 점을 몸소 삶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핵심은 소박함과 우애에 있다.

현대인은 가진 것이 부족해서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아니라 현재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제대로 누릴 줄 모르기 때문에 만족하는 방법조차 모르는 것이 아닐까. 감각적 쾌락이 풍족한 시대다. 풍족함에도 불구하고 풍족함을 사람들과 함께 우애롭게 향유하지 못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풍족함에도 만족을 모르는 사회다.

사실 주목해야할 부분은 에피쿠로스의 이런 말이다. “자연학이 없다면 우리는 순수한(akeraios) 쾌락을 얻을 수 없다.” 여기에서 표현된 아케라이오스(akeraios)는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쾌락을 의미한다. 에피쿠로스는 자유와 행복을 얻기 위해서 자연학을 권하고 있다. 그의 인생과 행복에 대한 사고는 그의 자연학에 기반하고 있다. 과학이다.

 

 

 

 

 

 

 

 

 

 

 

 

 

아직 우리에게 에피쿠로스의 자연학이 제대로 소개되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 에피쿠로스의 권고에 의한다면 행복을 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과학을 공부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에게 철학을 탐구해야만 한다고 충고하는 에피쿠로스의 말에는 당연히 과학이 포함되어 있다.

젊은이건 늙은이건 철학을 탐구해야 한다. 그가 나이를 먹음에 따라 지나간 일들에 감사하면서 축복 속에서 젊게 되도록, 또한 그가 미래의 일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지 않음으로 인해, 비록 나이가 젊지만 노련하게 되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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