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니체의 이런 말을 신뢰한다. “너희는 사자가 먹이를 갈구하듯이 그렇게 지식을 갈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지혜에 대한 사랑, 철학을 통해 우린 진리 그 자체를 그렇게도 목말라 갈구했던가? 회의적이다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이 점에 대해서 냉소적이다. 그는 철학이 임종의 순간을 맞이했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그 임무를 다하지도 못해서 죽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임종을 맞은 철학은 이렇게 고백한다. 거창한 주제들은 모두 핑계였고 신이나 우주, 주체나 객체, 의미나 무 등의 추상적 주제들은 모두 사실 아무 것도 아니라고. 우리는 헛된 노력을 기울였던 것일까.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이 출간된 지 200주년이 되는 해에 슬로터다이크는 냉소적 이성 비판에서 칸트의 사유, 아니 철학적 사유 자체와 접촉할 때 안게 되는 위험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격렬하고 급작스러운 노화 현상." 철학을 한다는 것은 급격하게 늙어간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그리곤 이렇게 묻는다. “과연 지식에 대한 혈기왕성한 젊은 의지는 지금 철학에 어느 정도 남아 있는가?”

 

 

 

 

 

 

 

 


 그렇다면 왜 슬로터다이크는 이 책을 쓰게 되었는가? 문화에 대한 불쾌감이 비판을 충동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성과 비판의 힘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계몽의 신화는 무너지고 있다. 전통적 이데올로기 비판은 냉소주의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이 시대는 냉소주의로 가득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냉소주의를 계몽된 허위의식으로 규정하고 있다. 계몽주의는 종교적 환상을 비판했고 형이상학적 허구를 비판했고 도덕적 허구를 비판했고 관념론적인 상부 구조 등을 비판했다. 이제 계몽된 의식은 바보가 아니다. 그러나 계몽되었지만 무감각해졌을 뿐 아니라 냉소적이 되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이 책을 통해 하버마스로부터 극찬을 받으면서 일약 철학계의 스타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그는 현대인들의 냉소주의에 맞서 유머, 욕설, 아이러니, 반항적 몸짓 등 고대적 냉소주의의 선구자인 디오게네스의 미덕들을 제시한다
고대적 냉소주의는 키니시모스(kyinsmos)라 하여 견유주의(犬儒主義)라 번역된다. 개처럼 행동한다는 것이다. 디오게네스는 개처럼 살았다. 하지만 이것을 단지 위선적인 개 같은 놈들에게는 개처럼 굴어야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개는 개새끼라고 욕을 먹어야할 대상이 아니다. 개새끼로 욕을 먹어야할 대상은 자연스러움을 상실한 위선적인 인간이고 개는 자연의 원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개답게 사는 개일 뿐이다
슬로터다이크는 철학을 이렇게 정의한다. “이해를 바탕으로 한 몸(physis)와 정신(logos)의 상호작용이 철학이지, 그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철학은 아니다.” 슬로터다이크는 비판정신과 저항정신을 잃은 근대인들은 실제로 저항도 못하면서 그저 머리로만 사회적 부정의를 냉소하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닐까? 근성도 오기도 없이 너무도 허약해졌다는 것이다.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저하는 허약한 사유가 아니다. 개같은 곤조다.

 

 

 

 

 

 

 

 

 

 

 

 

 

 

빅토리안시대의 그림이다. 알렉산더와 디오게네스 
누가 알렉산더이고 누가 디오게네스일까. 모두 개다.

 

Sir Edwin Henry Landseer
Alexander and Diogenes- exhibited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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