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죽음’을 보는 두 시선
최고은 작가가 남긴 상처가 깊다. 그녀의 죽음은 우리 사회에 아픈 고민거리를 던져주었다. ‘살림’과 ‘돌봄’의 문제를 고민해온 조한혜정 교수와 <시사IN> 필자 허지웅씨가 그녀의 영전에 부쳐온 두 편의 글.
그가 떠난 후 안타까운 마음에 별 생각을 다 하게 된다. 만일 스필버그 작품 한 편이 현대자동차 일년 수입의 몇 배를 벌어들인다며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면, 만일 그가 문화예술계에서 걸출한 인재를 배출한다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면, 만일 그가 26세에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타지 않았다면, 만일 우리나라 감독들이 줄줄이 국제 영화제를 휩쓸며 최우수상을 받지 않았다면, 만일 사냥꾼의 후각을 가진 영화 제작사 사람들이 청년 작업자들을 쫓아다니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 우리 곁에 머물러 있지 않을까? 아니, 그가 남에게 피해 주기를 싫어하는, 자기 문제는 스스로 풀어야 한다는 근대적 시민정신을 그렇게 철저하게 내면화시키지 않았더라도 그는 우리 곁에 머물러 있지 않았을까?
|
 |
|
조한혜정 (연세대 교수·하자센터 창의 허브 주민) |
그가 집주인에게 마지막 보낸 쪽지에는 ‘저 쌀이나 김치를 조금만 더 얻을 수 없을까요? …2월 중하순에는 밀린 돈들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전기세 꼭 정산해드릴 수 있게 하겠습니다. …항상 도와주셔서 정말 면목 없고 죄송하고… 감사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쌀과 김치. 그것은 747 공약을 한 대통령과 그의 정부가 당연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밤낮없이 시나리오를 쓴 그에게도 ‘자활 의지’가 부족하고 눈높이가 높아서라고 말하면서 그에게 책임을 묻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집주인과 이웃에게 쪽지를 쓰면서 미안해하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분노한다. 아, 그가 왜 그렇게 미안해야 하는가?
안 그래도 나는 최근 대학가에서 ‘미안해하는’ 학생이 급격히 늘어난 것에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조금만 늦어도 ‘죄송’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부모에게 감사하다 못해 죄송하기 그지없다는 학생들, 그들의 몸짓 자체가 점점 예의 바른 일본 사람들을 닮아가고 있다. 비싼 등록금과 날로 늘어가는 학원비를 대주는 부모에게 미안하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것이 그들이 미안해할 일일까? 그것은 기본적으로 갑자기 하늘 모르고 치솟은 대학 등록금 때문이고, 취업 준비용이라면서 온갖 잡다한 상품을 만들어 불안한 청년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있는 상혼 때문이 아닌가? 딱히 책임의 양을 말하라면 그들의 잘못은 1%도 안 될 것이고 99%는 세금을 잘 사용하지 못하는 국가, 청년들을 위해 새로운 직장이나 사회경제 활동의 장을 열어주지 못하는 정부, 그리고 청년들과 그 부모의 주머니에서 마지막 한 푼까지 빼내가는 시장일 것이다.
G20 개최국이며 선진국인 대한민국 국가는 이제 모든 예술가 국민을 위해 ‘쌀과 김치’를 제공하도록 하라. ‘거르는 장치만 있고 키우는 장치는 없는’ 사회는 막장 사회이다. 정말이지, 이제 미안해야 할 사람이 미안해하게 하자. 그들이 청년 작가들을 위한 해법을 내놓게 하자. 비정규직 예술인을 위한 실업급여제, 예술인 사회보험제, 예술인 최저 생활보장제 등 어떤 이름을 붙여도 좋다(공기 좋은 어딘가에 모여 살 장소를 제공한다면, 그들은 채전도 일구고 밥과 예술을 나누면서 그곳을 아름다운 마을로 만들어낼 사람들이다. 서울 도심부 이곳저곳에 국가 소유 빈집도 적지 않다. 그런 곳에 그들이 모여 살 수만 있어도 서울 도성의 르네상스 시대는 금방 도래할 것이다).
당부하건대, 그때 정부는 누가 예술가인지 아닌지를 가려내느라 또 무수한 시간을 끌고 돈을 쓰지 말기 바란다. 사실상, ‘문화의 시대’에서 자란 지금의 청년들은 거의가 ‘예술가들’이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공장 노동이 아니라 창의적인 비물질 노동을 하면서 자랐다. 후기 근대적 사회와 경제를 살려나갈 청년들에게 창의적 활동의 공간과 자원을 돌려주라.
그리고 친구들이여, 홀로 삶을 개척해야 한다는 근대의 명령을 마음속에서 지우고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상상하자. 우리 안에 퍼져 있는 미안한 감정의 근원이 어디인지 응시하면서 정서적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상태에서 벗어나자. 활기 있는 삶을 위한 시공간을 우리 안에 마련할 때다. 내 친구, 내 학생, 내 선배, 내 후배, 또한 과거와 미래의 나 자신이었을 최고은 작가의 명복을 빌며 그 영전에 이 글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