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 문학과지성 시인선 439
윤병무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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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

 

인적 없는 밤

보도블록만 내려다보며 걷는데

마주 오는 사람과 부딪힐 뻔했네

그는 무슨 생각에 잠겨 하필

이 고요한 길에서

닮은 사람을 만났을까

 

그러니 주위 사람들 내 맘 같지 않다고

비탄해할 것 없네

외로운 길 가다 보면

전혀 모르는 사람이지만

나 닮은 이는 곳곳에 있고

우연히 마주치는 것이네

 

그래서 마음은 닫혀도

길은 열려 있는 것이네

 

가끔 마음이 닫혀 있을 때조차 길은 열려 있구나

나를 닮은 이를 만나기보다 아는 사람을 닮은 이를

많이 만난다. 그럼 '아! 내가 그를 그리워하나'

하고 잠시 그를 생각하곤 한다.

 

 

맥주

 

신의 갈증을 인간이 풀어준

맥주(麥酒)를 마셔요

그 덕에 인간은 가끔 행복해요

 

황금빛 맥주의 기원

필스너우르켈을 마시는 날이 그래요

체코에 가보고 싶은 이유이기도 해요

 

황금을 녹여 마신다고 이 맛이 날까요

윗입술  담그기 딱 좋은 삼 센티미터의

잔거품에 코끝이 살짝 닿는 순간 감미로워요

 

이어지는 첫 한 모금은 기쁨 그 자체

진지한 삶처럼 처음은 달고 나중은 써요

느낄 만큼만 달다가

아쉽지 않을 만큼만 써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있지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필스너우르켈만 같아라라고 말하고 싶어요

정말이지 우리 삶이

간절한 만큼만 달고

견딜 만큼만 쓰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일손 놓은 우리는 밤이면

보리차에 소주 타고 탄산 섞은 듯한

한국산 맥주를 돈 주고 사 마셔요

어쩌지 못해 잘 참고 마시는 우리는

금세 사라자는 맥주 거품을

말맛으로 대신 채워요

 

맥주를 마시던 날들이 많았지

호프집에서, 민박집에서, 친구집에서

바닷가에서

그 많은 순간들과 그 많은 사람들은 지금 그 맥주맛을 기억할까

지금도 끼니때마다 맥주잔을 기울이는 그리운 사람들에게

모두 건배!

 

하얀 돌

 

이제 사랑 노래는 끝났습니다

듣지도 부르지도 않겠습니다

 

울음 그친 자리

가구에 남은 손길

상복(喪服) 같은 빨래 사이로 비치는 햇살

시선 돌리면 어느새

텅 빈 밤이 혼자 와 있습니다

 

가장 믿을 만한 하얀 돌을 골라

속내를 털어 놓고 저도 돌이 되겠습니다

 

빨래가 어느새 상복이 되었구나, 상복을 입은 마음처럼

마음이 줄줄 흘러내리는구나

믿을 구석이라곤 하얀 돌이라니

속내를 털어놓을 곳도 없는 사람들이

여기에도 득실거린다.

그 속내를 들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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