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이 끝나간다. 나는 마지막 4학기를 놔두고 포기한다. 애초에 내가 따라갈수 없는 것들이였지만, 그래도 마칠수 있었는데. 결국에는 포기한다. 핑계는 많지만, 핑계는 핑계일뿐. 내능력에 비해 너무 많은 것을 해야된다는 부담감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작했고, 그 한계를 계속 맛보면서 그 길을 걸었다. 내가 갈수 있을거라고, 변해야 된다고 하는 나의 절박성은 벽에 막혀서 계속 뒷걸음치는 관성을 유지한테, 나의 패턴을 반복한채, 나는 그렇게 루저가 되었다. 하지만 나 자신에 대한 실망을 때문에 무너지지는 않는다. 그간의 나의 관성으로 미루어볼때, 나는 그 자신에 실망과 실패를 부여잡고, 그 안에서 결코 나오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문제로서 나는 나의 삶을 채워가는 것이다. 이렇게 잘 알면서 나오지 않는 것은 나오고 싶지 않기 떄문에, 이러한 고통마저 없다면 나를 지탱줄 그 무엇인가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어린애같은 것이다.  

이렇게 잘 알면서도 나의 신체적 욕망이 나를 이렇게 만드는가,, 아니다 신체, 중독도 아닌 불행감에의 중독이다.  상쾌하고 신선한 삶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내가 잘살면 안된다는 죄의식이 불러온 걸까. 근원을 생각해보면 삶의 대한 허무감이겠지만, 그 허무감이 나를 지탱해주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차이 없는 반복이 문제다. 차이는 조금 있겠지만, 나는 노예다.   

시간이 과거가 나를 지배하고 있다. 과거와 미래가 나를 지배하고 있다. 과거나 미래가 나를 지배하는것은 맞지만 이렇게 나를 지속하는 있는 것은 매순간의 나이다. 매순간의 내가 진다. 어떻게 해야될까... 나는 나에게 계속 진다. 나와의 싸움을 계속 지고 있다. 이긴 나의 모습을 상상해보지만, 그건 왜인지 꼭 나같지 않다. 나라는 주체를 설정해 놓고 이래야지 저래야지 생각하는 것들, 그런것들을 생각하는 현재의 나는 무엇일까. 내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 나는 부단히 유치하게 잡념에 빠져서 산다. 그래서 주체를 버리라고 했다. 동양에서는.  

 근대가 만든 주체라는 개념이 우리를 이렇게 피곤하게 한다. 나는 흐름이고 이 흐름 속에 자연스럽게 살면 되는것을 끊임없이 생각은 떠돈다. 주체를 설정하는 이 작업이야 말로, 이 주체, 정체성이라는 것 조차 모든 것들의 조합인것을.  우리는 집착을 한다.  어떻게 해야 나의 주체아닌 주체를 버리고 그냥 살아갈 수 있을까... 나를 통과하는 모든 것들을 그저 지나가게 바라보야할까. 그것도 아니다...  

시간.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우리가 물리적으로 정형적으로 생각하는 시간은 그림이 있다. 많은 철학자들이 근대에 넘어오면서 시간을 다시 새롭게 해석한다. 베르그손은 시간이 농밀한 과거의 이빨자국이라고 까지 말한다. 들뢰즈는 현재에서 과거는 흔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건 그냥 쉽게 내가 얘기한 것이다. 수평적인 시간에서 수직적인 시간을 사유하는 것.... 그것이 말처럼 쉽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시간이라 것..  

내 사유가 짧아서 무엇이 들어와도 그저 한마디의 말 밖에 할 수 없다. 소화가 안된다는 얘기다. 소화를 하려면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 노력조차도 하지 않고  무엇을 바라는가...  

나의 나약함. 의지와 욕망을 구분을 하지 못했다. 쓰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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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대해서 깊게 사유해본적이 없는데 이번 베르그손을 공부하면서 갑자기 이 시공간의 혼란이 왔다. 이 시공간에 대한 다른 감각은 근대로 넘어오면서 생겼으며, 각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지금 시간과공간의 문화사를 읽고 있는데.. 이거 읽고 나면 좀 이해가 되려나,.. 조광제의 강의도 듣기 시작했다..결국 혼자서 공부하게 되었다.  

조광제1장
제1강 시간의 세양상
플라톤: 카오스/코스모스와 시간

1. 시간에 대한 무모한 도전

시간은 수평이 아닌 수직으로 서있는 시간.
철학에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 시간.
하나님의 존재증명에 대한 고민. 시간문제에 걸려 하나님의 존재증명에 실패했다..

하나님의 존재하려면 시간적인 양상이 있어야 한다... 기독교에서 시간을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지속성. 신의 존재가 공간을 넘어설수 없

지만 시간을 넘을 수는 없다.
하이데게'존재와 시간' 하이데거의 시간은 인간의 존재와 연결. 후설 현상학- 역시

시간문제에 걸려있다. 후설이 시간론에 있어 근본적인 사유를 펼침.
시간이 인간의 의식 때문에 생겨남.
- 시간..후설은 시간은 생생한 현재.
- 후설의 시간 ; 의식위주의 시간. 객관적인 시간과 다름. -메를로퐁티 ; 몸의 관심.

 

1. 시간에 대한 무모한 도전
시간은 가장 익숙하면서도 가장 기괴합니다. 심지어 공포를 느끼게 만듭니다. 시간

은 가장 익숙합니다. 일체의 삶이 시간에 의거해서 영위되기에 삶의 깊숙한 바탕에

서부터 순간적인 삶의 편린에 이르기까지 시간은 늘 그리고 이미 한 치 빈틈도 없이

삶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시간은 가장 기괴합니다. 전혀 사유의 손에 잡히지 않습니

다. 마치 발로 밟으려고 하면 발 위로 올라와 발을 뒤덮어버리는 그림자처럼, 사유의

손 안팎을 완전히 채우면서 뒤덮어버리는 것이 바로 시간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시

간이 사유를 통해 스스로를 사유하는 꼴이 되는 지경을 떠올릴 정도입니다.--> 시간

은 아주 익숙하면서 도저히 붙들 수 없는 것이다. 사유를 통해서 시간을 사유할 때

오히려 시간자체가 스스로를 사유하는 꼴. 시간이 사유한다... 우리가 내마음대로 사

유하는 것 같지만, 마음대로가 아니다. 사유를 하지않을려고 할 때 엄청난 잡념이 떠

오르고 우리의 정신을 장악한다. 시간을 우리를 통해서 사유한다고도 볼 수 있다, 

시간이라고 하는 것. 

여러 방식으로 시간을 사유합니다. 물리학적으로 사유할 수도 있고, 생리심리학적으

로 사유할 수도 있고, 철학적으로 사유할 수도 있습니다. 신화학적으로나 신학적으

로 사유할 수도 있고, 사회학적으로 사유할 수도 있습니다. 시적으로나 회화적으로

즉 예술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물론입니다. 라는 식으로써 시간은 거리를 속도

로 나눈 것이라는 식으로 간단하게 사유할 수 있습니다. 생체 리듬이나 생체 시간을

바탕으로 시간의 분할과 지속을 생각할 수도 있고(모든 동식물들의 생체시간을 보

라 철새, 달맞이 꽃), 의식 활동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생성된

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결단에 의해 생성(하이데거)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

습니다. 시간을 신(크로노스)으로 여겨 생각할 수도 있고, 신의 섭리가 펼쳐지는 과

정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시간에 대한 사회적인 규정에 따라 사회

가 어떻게 변하는가를 따질 수도 있습니다. 감각의 더없는 응축이 일어날 때 시간이

얼굴을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전기의 발명- 밤이 없어지고,  본래의 리듬이 사라짐. 시간이 바뀌는 것은 사회학적

인 접근. 이진경 -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 시간의 자본화. 데이비스 하비 - 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
예술적 시간.... 질적인 밀도와 강도를 지닌 것. .
시간의 모든 존재를 포괄하는 최고의보편적인 것. 시간이 형식에 불과한 것일까? 실

체가 있는 것일까?
형식... eidos본질적 형상 ->form.

시간을 철학적으로 사유해 보고자 덤벼든 우리는 어쩌면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지

도 모릅니다. 시간을 사유한다는 것은 삶 전체뿐만 아니라 존재 전체를 건드리는 것

이 될 것입니다. 시간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여느 영역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

는 것과는 달리 사유 자체의 운명을 건드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시간을 벗어나서 도저히 사유할 수 없다.

다행하게도 소광희 선생님이 『시간의 철학적 성찰』이라는 책을 저술해 놓았습니

다. 우리가 노리는 ‘수직적 시간’은 결국 예술적 시간이 될 것입니다만, 그 시간을 찾

아가기 위해서는 선생님의 책이 중요한 몇몇 이정표 역할을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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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뢰즈<와> 예술 ; 새로운 예술의 이미지.  

 - 수유너머 채운쌤 강의 후기 -




들뢰즈라는 철학자 그 만의 언어로 얘기하는 사람. 우리가 인습적으로 쓰는 것들이 아닌 자기 개념을 창조해서 쓰는 사람. 그 뜻이 정확하게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그의 수많은 저작과 개념 사유를 적어도 이해했다 치자면 10년은 걸린다고 한다. 무슨 공부든 마찬가지이겠지만,  지금은 나는 아주 건방지다. 들뢰즈 내가 맘먹으면 이해할 수 있어... 근데 그걸 10년이나 공부해야 된다는 생각은 안해봤다. 하지만 적어도 그 언어와 사유를 이해하는데는 그만큼의 시간이 소요된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낀다.

왜 들뢰즈나 철학을 공부해야 하는가. 나의 정보나 상식, 내 생각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은 실은 여기저기 들었던 모든 것이 투입되고 단순히 산출한다. 이것이 기계? 사실 내 생각이라고 해봤자... 그건 내 생각이 아니다. 그건 내 생각이라고 착각하는 남의 것, 내 기억 속에 있는 어떤 것이 응축된 것일 수 있다. 말하고 있는 지금도 나의 생각은 별로 없고, 기억날 듯 말듯한 어떤 것을 찾고 있는 과정일 뿐이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내가 들뢰즈처럼 천재도 아니고, 천재의 산물을 이해하기 위해 가까이 가도록 노력하는 것...? 들뢰즈는 기존의 물음과 지식을 해체한다. 해체 위에서 다시 생산하는 철학. 어제 강의는 이런 차원의 생각을 가진 사람이구나,,, 아 나도 공부해보고 싶다.. 들뢰즈. 이런 욕망이 불끈 솟아오르게 했고, 그런 생각이 나를 여기까지 인도했다. 중간에 포기하기 없기. 글쓰는 것이 그냥 나오는 대로 줄줄쓰면 쉽지만, 내 진정성을 살려서 치열한 고민을 하면서 쓰는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할 말이 없어서 대화가 끊기는 그 어색함을 우리는 잘 견디지 못한다. 나의 자판을 두들기다가 도저히 생각이 안나서 아니 더 깊은 생각을 하다가 포기해 버리는 그 지점. 그 지점이 나의 시작일거다. 어렴풋이 나를 넘어서는 지점을 알것같다. 생각이 막 미친듯이 휘몰아치다가 어지러워서 그냥 가볍게 가는 지점. 쉬운 길이다. 근데 이런 나를 극복해야 나는 성장할 수 있다. 두려워하지 말자. 피하지 말자....




우리의 대화 토론을 들뢰즈는 혐오한다. 각자가 자기의 상식안에서 주고받는 지루한 대화, 자기가 가진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그 정보를 근거로 삼아서 주고받는 것을. 왜? 들뢰즈는 그런 것은 아무것도 새롭게 발생하지 않고 누구도 죽지 않는다.

 들뢰즈는 진리에 대한 사랑이나 우리의 선한 의지가 아니라, 이런 전제들을 부정하고 뺏는 데서 시작한다. 비철학적이라는 비난을 들을지언정, 이런 이미지들에 대항하여 싸움을 벌이는 곳에서 철학은 시작된다. 철학은 차라리, “침울하게 하는 데 이용된다. 아무도 침울하게 하지 않고, 아무도 언짢게 하지 않는 철학은 철학이 아니다” .... 철학의 폭력성.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는 것. 나역시 나를 불편하고 괴롭게 만든 것에서부터 내가 시작되었다.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던 갖은 문제들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것에 대한 무한 긍정. 철학은 마주침을 어떻게 조직하느냐의 문제를 얘기한다. 내가 만나는 문제와 고민들을 어떻게 풀어나가는가에 대한 문제다. 나를 깨고 나가는 지점들은 언제나 폭력적이고 아픈 것이다. 덜 아프기 위해 아픈 것을 에둘러 가는 나의 비겁함...이여.

 예술역시 감각을 불편하게 하는 잔혹성. 폭력성이 본질이라고 한다. 그냥 자연을 재현한 것들, 모사한 것들을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 그럼... 베이컨의 그림같이 존재를 찢는 것들은 그야말로 폭력적이다. 그 폭력앞에서 우리는 매우 불편하다. 익숙치 않는 것의 이물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유는 보다 불온해질 수 있을까? 어떻게 이렇게 지배적 이미지를 뒤흔들 수 있을까? 어떻게 사유는 사유의 풀을 자라게 할 수 있을까. 국부적인 곳에서조차, 가장자리에서조차, 지각불가능하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니체에 따르면, 철학자의 임부는 주어진 개념을 갈고 닦는 게 아니라, 개념을 창조하고 그것을 이용하도록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다.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살 수 있을까? 배우기를 나의 피를 바꾸고 신체를 바꾸면 사유도 바뀐다고 했다. 내 생활의 장을 바꾸면 바뀐다. 내 생활의 장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내가 생활하는 공간? 아마도 내가 가진 모든 관계속의 망들이다. 내가 조직한 나의 관계들의 망 속에서 변화해야 한다. 여기를 떠난다고 내가 바뀌진 않는다는 것. 사상마련. 현재 이 자리에서 변할 수 있음을 깊이 인식하자. 다른 방식으로 산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게 사유해 보아야한다. 가만히 들여다 보자.. 지금 내 자리에서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나의 감정들을 어떻게 수습하고 사는지. 미뤄온 감정들을 다시 꺼내보자. 내 안의 치양지말이다.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선승들의 가르침은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모두 버리기 전에는 깨달을 수 없다는 앎이 끝나는 극한의 지점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한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는, 생사를 건 외침이다. 그래서 사유는 늘 역설이다. 표준적인 언어들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무언가를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글을 쓰게 되는 것는 오로지 앎이 끝나는 최전방의 지점에 도달할 때이다.

자기를 부정하는 것,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버리지 않을 때 깨달음은 오지않는다. 내가 가진 것을 버릴 때 깨달음은 온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어떻게 버릴까? 무엇을 마주침에 자동적으로 떠오른 것을 의식적으로 버리고, 한번 느껴보기. 모른다,생각하고 아니, 나를 아예 버릴 때, 내가 가진 지식을 버릴 때, 그런 척말고 나를 내려놓을 때, 그 분이 오신다는....?

없는 방식으로 사유하기. 공부하는데 생사를 걸어라 . 내 앎을 버리는 것. 노력밖에 없다.

글을 쓸 수 없는 지점. 기존의 언어로는 한마디도 쓸수없는. 그래서 들뢰는 자기언어대로 썼다... (이대목에서 충격!)

들죄는 철학자와 예술가들에게서 새롭고 독자적인 어떤 것을 끄집어낸다. 그들이 말한 것을 다시 말하는 대신, 그들이 보여주거나 말하지 않는 것, 보여주지도 말하지도 않았지만, 그의 말과 작품속에 충분히 암시된 것을 말한다. 철학사가 철학의 역사에 대한 서술이 아니라 또 다른 철학인 것은 이 때문이다. 들뢰지는 사유의 독단적인 이미지를 거부하고 철학을 창조하는 행위로 만든다. 철학은 반성이나 관조, 혹은 소통이 아니다. 반성은 모델을 전제하고, 관조는 주체와 대상의 거리를 전제하면, 소통은 합의와 이해를 전제한다.

 철학이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면 그것은 차라기 폭력이다. ; 우리가 사유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떤 폭력이, 즉 그와 동시에 우리로부터 나라고 말 살 수 있는 능력을 박탈해가는 무한 운동의 폭력이 가해져야...한다.

창조란, 어떤 폭력에 의한 사유활동의 발생이다. 창조로서의 사유는 삶을 무한 긍정하면서 삶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만들어 낸다. 진리가 아니라 삶을 .

사유하기 위해 창조하기 위해 우리는 가장 심오하고 가장 고귀한 진리들이 살아 있고 깨어나는 곳인 극단적 장소들, 극단적 시간들로 가야한다.

예술은 진지를 사랑하지도 원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예술은 우리가 진리로 죽는 것을 막기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예쑬가의 의지란 진리에의 의지가 아니라, 사기치고 유호가는 거짓의 힘이며, 속이려는 의지이다. 다른 세계에 대한 유혹, 혹은 감각에 가해지는 폭력, 생각해야만 하는 것이 미리 주어지지 않은 이 지대에서 사유는 시작된다. 미리 주어진 것에 의해 구성되는것이 아님.




철학<과> 예술 ; 이중-훔침, 이중-배움.




들뢰즈의 밥딜런-되기. 들뢰즈가 밥 딜런의 연주와 마주치는 순간, 들뢰지가 다른 것으로 되는 생성과 밥딜런이 다른 것으로 되는 생성이 동시에 이루어 진다.

되기는 이중의 문제이다. 내가 공명하는 순간에 나와 타자가 같이 변한다.

이것과 저것의 마주침에서 중요한 것은 이것도 저것도 안는 그 사이<과>이다. 즉 마주침이란 사건 자체이다. 마주침들은 그렇게 예고 없이, 다소 폭력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서 뭔가를 빼앗고, 우리를 흔들고, 변화시킨다.

함께 느끼기, 그들이 그 자신에 대해서 느끼는 것처럼, 그들와 함께 느끼기. 우리는 지나가면서 그들의 영혼과 살의 진동을 포착하는 것이다. 영혼의 초월적인 것도 아니고, 우리 내부의 어떤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길위의 나그네이다. 언제 어디서든 다른 것들을 만날 수 있고, 다른 진동을 훔칠 수 있고, 다른 것으로 생성될 수 있는 길위의 나그네....

고집스럽게 저택을 피하고, 길위에 서서 간다. 길위에서 나는 다른 영혼들의 진동을 느끼면서 끊임없이 다른 존재로 생성된다. 길은 계속된다.




철학, 예술, 과학은 독자적인 영역이지만 마주치면서 독자적인 영역이 개발된다.

사유는 행위다라는 말은 사유가 특정한 실천을 동반한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사유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행하는 것이다. 사유는 동일성을 지닌 내가 무언가를 기억해내는 행위가 아니라, 내가 좀 전과 다른 위치로 이동하는 것이다. 즉 내가 이전의 내가 아니게 되는 것이고 나의 세계가 바뀌는 것이다. 모든 새로운 생각은 두뇌의 자국을 남길뿐 아니라 길위에 발자국을 남긴다. 아....

사유는 끊임없는 생성의 과정이며, 머무르기가 아니라 걷기이다. 사유는 집을 짓지 않는다. 쉬지않고 걷는다. 걷는 과정에서 마주침을 경험하고, 새로운 마주침을 조직하며, 마주침들을 통해 자신의 경계를 넘고 사유의 역량을 확장한다. 사유가 행위라는 것은 걷고 마주치는 사유의 능력을 의미한다.




내가 마주쳤을 때 느끼는 사유하는 방식에 대한 문제, 나는 지금 무엇을 만났을 때 내방식으로 쉽게 읽어내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기존의 나의 상식에 기대의 이해하려는 노력 다름 아니다. 내가 가진 것을 버리고 이해해 보도록 노력하자.




들뢰즈의 텍스는 매우 역동적이다. 들뢰즈는 자신의 개념을 입중하기 위해 그들을 예로 끌어들이는 게 아니라는 의미다. 오히려 들뢰는 그들을 통해 개념을 만들어낸다.




들뢰즈에게 철학이란 개념을 창조하는 작업이다. 무엇에 관해 반성하는 초라한 철학이 아니라 스스로 운동을 만들어내는 창조적 철하가. 그래서 그는 사유를 시작하게 하는 폭력적인마주침을 찾아 움직인다.  요는 이웃 분야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의 운동을 만들어내야 한다.

존재는 관계보다 우선하지 않는다는 것, 관계 자치는 항의 외부지만 그 외는 항이 성립하기 위해 필요조건이다. 철학도, 과학도, 예술도 그것들이 놓인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 즉 어떻게 각각의 영역 바깥과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상이한 배치를 갖는다. 비예술, 비과학, 비철학은 예술과 과학과 철학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외부, 주름이다. 뒤샹, 앤디워홀, 존케이지... 이들은 외부를 통해 예술을 사유하고 그럼으로써 예쑬의 경계를 넘는다. 각 활동이 자신의 도주선을 발생시키는 곳에서 철학은 생산된다. 그러므로 철학을 하기 위해선, 철학을 벗어나야 한다.

예술, 철학, 과학의 공통점이 있다면, 마주침을 통해 자신의 역량을 확대하고, 사이에서 생각되르 수없는것을 생각한다는 점일 것이다. 사유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하는 것.




무엇을 사유할까가 아니라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 나는 사유에 대한 그동안의 갖고 있던 이미지들을 어떻게 내던져야 할 지 느끼게 해 준 수업이였다. 들뢰즈의 그의 독특하고 어려운 철학을 그래도 내가 알아들을 정도로 쉽게 설명해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이렇게 한번 써보니까 좀 더 이해가 간다. 역시 노력해야돼.

철학이 폭력적  이여야한다. 예술의 본질은 잔혹하다는 것. 이 말이 나에게는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폭력이란 말과 철학이 조우했을 때 나는 낯선 이 조우에 불편함을 느끼고 폭력적으로 느꼈던 것이다. 기존의 것들을 그대로 가지고 가면서 부딪히는 것으로는 나를 넘어설 수 없다. 나를 넘어서는 것은 이렇게 낯설고, 폭력적이여서 매우 다른 방식으로 사유할 수 밖에 없을 때 나는 넘어설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버리고 부딪쳐야한다. 기존의 것들에다 덧붙이지 말고 자기를 버리고 만났을 때 존재의 변용이 올 수 있다. 들뢰즈는 이러한 의미에서 철학을 어떻게 해야 할지 보여준 철학자가 아닐까 싶다. 기존의 개념과 학자들을 만나서 그들의 언어로 얘기하지 않고 자신의 언어로 얘기는 자. 자기의 언어로밖에 말할 수 없는 언어를 창조한 자라고 생각이 든다.

글쓰기나 사유하기나 저택에서 할 수가없다. 더 이상을 글을 쓸 수 없는 그 지점, 사유의 극한 그 지점에서 길 위에서 우리는 생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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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면위로 떠오른 슬픔의 정체







    사랑하는 이의 죽음 뒤에 슬픔이라는 것은 꼭 그렇게 즉발하는 것이 아니라 뒤늦게 찾아올 수도 있다. 슬픔이 왜 뒤늦게 찾아오는 지 알 수는 없다. 아마도 사랑하는 이의 부재가 실감나지 않아서 이거나 그 슬픔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을 때 자신도 모르게 회피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프루스트는 발베크를 다시 여행하면서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추억이 떠오르게 되고 언제나 그렇듯이 그에 대한 단상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이글은 뒤늦게 찾아온 할머니의 죽음을 실감하면서 느끼게 되는 프루스트의 추억과 고통에 대한 세밀한 이야기이다.

 프루스트는 발베크에서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 등을  몽상하다가 불현듯 마들렌을 입에 물면서 출현했던 비슷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나의 전인간적인 전복. 초저녁부터, 피로 때문에 심장이 뚝딱거려 괴로운 것을 꾹 참으면서, 나는 구부려 천천히 신중히 신을 벗으려고 했다. 그러나 편상화의 첫 단추에 손을 대자마자, 뭔지 모를 신성한 것의 출현으로 가득 차 나의 가슴은 부풀어, 흐느낌에 몸이 흔들리고, 눈물이 눈에서 주르르 흘러나왔다. 지금 막 나를 도우러 와서 영혼의 메마름을 구해준 것은 몇 해 전, 비슷한 슬픔과 외로움의 한순간에, 자아를 하나도 갖지 않았던 한순간에, 내 안에 들어와 나를 자신에게 돌려 준 것과 같은 것, 나이자 나 이상의 것(알맹이를 담고 있으면서 알맹이 보다 더 큰 그릇, 그리고 그 알맹이를 내게 가져다 주는 그릇)이었다’

 프루스트는 밀려드는 슬픔의 실체를 그 영혼의 메마름을 구원해 준 것이라고 해석하고 슬픔으로 인하여 자기 자신을 충만히 느꼈던 것 같다. 막연히 떠오른 슬픔의 이유는 바로 할머니에 죽음이 대한 상기였다. 프루스트를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 내 주변의 일어났던 죽음들이 하나 둘씩 떠올랐는데, 특히 나의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눈물 대신 하염없는 폭식을 했다...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이유없이 터트리던 눈물들이 생각이 났다. 그리고 가장 슬퍼해야 할 순간에 슬퍼할 수 없음이 너무도 답답했던 기억이 난다. 프루스트도 할머니에 대한 추억으로 슬픔이 느껴질 때 온전히 자기자신으로 들어가 슬퍼할 수 있음에 나를 나자신에게 돌려준 것이라고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할머니가 발작을 일으켰던 그 샹 젤리제 이후 처음으로 나는 무의식적인, 따라서 완전한 추억 속에서 할머니의 산 실재를 이렇듯, 매장한지 1년 이상이 지난 이제야 할머니의 팔 안에 뛰어들고 싶은 격한 욕망의 사로잡혀-사실의 달력을 감정의 달력과 일치시키는 걸 자주 방해하는 그 날짜의 틀림 때문에-처음으로 할머니의 죽음을 알았다.’

 가까운 이의 죽음이 실감이 나지 않고 할머니의 죽음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아 푸르스트는 그 상태를 가상상태로 표현하고 가상상태에서 벗어나, 이제 그는 할머니의 죽음을 이제 막 알았다는 듯이 비통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된다. ‘할머니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던 그 순간에 내가 들러붙은 것은 그 자아가 모르는 오늘 낮 동안의 하루라는 것의 뒤에가 아니라 시간의 연속을 중단하지 않은 채 극히 자연스럽게 , 지난날의  발베크 도착 첫 저녁 후에 곧바로 이어져 있었다.’ 프루스트가 자신의 기억속으로 들어가면서 프루스트는 할머니의 진정한 산 실재를 느끼는 동시에 영영 만날 수 없음을 느끼게 된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다음과 같은 모순의 고통을 감내하려고 하였을 뿐, 만사가 내 중심이였던 그 애정.... 허무가 그 애정을 사모하는 나의 심상을 지우며, 그 헌신적인 존재를 부수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우리 둘의 상호 인연을 없애고, 그 허무 속에서 확실성을 관통한 할머니의 죽음의 실감이, 되풀이 되는 육체적 고통처럼 욱신거리고, 그것이 거울 속에 보듯이 할머니의 모습을 되찾은 순간에 할머니를 마치 남의 곁에서처럼 우연히 내 곁에서 몇 해를 지낸 사람과 같은 나와 아무 관계없는 한갓 낯선 여인이 만드는 모순의 고통을 감내하려고 하였을 뿐이다.’ 그는 할머니의 그 지극한 애정을 허무가 만들어내는 모순의 고통을 감내하려고 했을 뿐 할머니의 죽음을 인정하려고 하지않았음을 고백한다.

  

 이제 그는 할머니와의 과거, 그때에 느꼈던 할머니의 고통을 덜어 드렸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을 되뇌인다. 망자에게 더 잘하지 못한 후회가 프루스트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다. ‘지난날 그 얼굴에 무모하게도 아무리 작은 기쁨의 그림자마저 뿌리째 뽑으려고 지랄한 적이 있었으나, 예컨대 생 루가 사진 찍어 주던 날 그랬는데, 그날 할머니의 교태가 우스꽝스럽고 유치해 마음을 상케하는 말을 건네 할머니가 얼굴을 찌뿌렸던 기억. 나의 가슴아픔이 영영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고통을 누그러뜨리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단지 괴로워하고 싶었을 뿐이 아니라, 내가 받은 고뇌의 정직한 발생을 존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 마음속에서 교차하는 생존자의 허무 그같이 이상한 모순이 다시 일어날 적마다, 나는 내 고뇌가 갖는 법도에 좇아 계속해서 그 고뇌를 받고자 하였다. 지금 이해되지 않는 이 고통스러운 인상에서, 약간의 참을 끌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이성을 통해 그려지지도 무기력에 의해 경감되지도 않는 특이한, 우발적인, 이 고뇌밖에서 있을 수 없을리라는 것, 아무튼 죽음 자체가 죽음의 돌연한 계시가, 벼락처럼, 초자연적이 비인간적인 기호에 따라 둘로 갈라진 신비한 고랑을 내 몸 속에 파 놓았음을 알았다.’

  그가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  죽음에 관하여 통찰하게 만들었다고 나는 이해된다. 한편으로는 프로이트식 애도의 과정 중 수용의 단계를 거치면서 애도가 완성된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프루스트에게는 뒤늦게 찾아온 슬픔이였지만 엄마에게는 할머니의 죽음이 전과 다른 모습, 할머니같이 탈바꿈을 시키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저 죽음이 허무로만 끝나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아마도 엄마의 경우처럼, 생모의 죽음이 딸에게 남기는 큰 슬픔이고 보면 그 슬픔을 한시바삐 제 속에 품은 번데기를 부수고, 도 한 존재의 탈바꿈과 출현을 촉진하다보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가 죽자 우리는 남이 될까봐 꺼리고, 망자의 생시모습이 그립고, 기왕의 성격에 섞여 있던 다른 것을 배척하고, 차후론 오로지 망자의 사람됨을 이어받아 간다. 그런 뜻에서 비로서 말할 수 있다, 죽음은 헛되지 않다, 망자는 우리의 위에 계속에서 활동한다고,. ’  어쨌든 이러한 슬픔을  받아들이면서 그는 어머니의 슬픔도 더 깊게 이해하게 되고 망자가 남기고간 사람됨이 죽음의 헛됨을 극복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며칠 후 그는 할머니사진을 보아도 이제는 그렇게 아련하고 가슴아프지는 않다. 그것은 추억이 그에게서 떠나지 않고 그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병환을 숨기고 사진을 남긴 할머니의 사랑을 앞에서 프루스트는 할머니가 덜 불행한 할머니를 상상한다. 하지만 그 뺨아래 숨겨져있던 슬픔, 무의식적인 비참한 모양을 프루스트 저 자신은 간파하지 못했으나, 엄마에게 보여주지 않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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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정치철학 수업.. 장장 9주간의 수업을 마치고, 이제 에세이만 남았다. 아직 많이 모자란 나의 실력에 추장은 쉬운숙제로 돌려주었다. 언제 실력쌓아서 부끄럽지 않은 발표도 하고 그럴수 있을까나. 일단 이해가 안가는 텍스트. 수업만 가지고 절대 되지 않는데.. 그나마도 열심히 못들었다. 읽기 숙제는 하지도 못하고,,, 밤을 새서라고 해야되는데 그런 열정은 벌써 식은건가.. 아니 공부하는 싫은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다만.. 확빠져들지 못할 뿐이다.. 쉽게 몰입을 못할 뿐이다. 그냥 두려워할 것없이 느낀 바를 쓰고, 요약도 하고 그러면 되는데 좀 두려워??  

처음에 데리다의 마르크스 유령들.. 환대에 대하여.. 등을 읽으면서 뭥미?? 철학을 문학처럼 온통 은유와 알 수없는 암호들로 메워진 것 같은 느낌. 역사에 대한 배경지식도 짧은 데다.. 뭔가 알수 없다는 두려움은 감히 데리다를 어떻게 읽어야 할 지 도대체 감이 오지 않았다. 데리다로부터 점점 텍스트들은 쉬워져 갔으나, 어렵게만 느껴지던 첫인상때문인지, 나머지 책들도 잘 읽혀지지 않았다... 소화하지 못하고 넘어가... 항상 답답하고 찜찜하다. 언제 시간내서 다시 읽어봐야지 하는데 그 시간은 좀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선생님의 강의는 명쾌하다. 경직된 사유의 틈이 벌어지면서 빛이 쏟아지는 느낌이라고 해야되나. 그 틈을 비짓고 껍데기를 벗으면 새로운 세상이 보이지는 않을까... 다른 차원의 정신적인 세계. 철학자들은 그런 세계에 산다. 그리고 나는 그 세계를 탐험하기 위해 준비물을 챙기는 중이고,, 신발끈을 묶는 시간이 너무 길다... 그렇게 하다가는 출발도 못하고 지칠텐데.. 그럼 안되. 신발끈을 묶었으면 얼른 길을 떠나야 한다...   

길을 떠나면서 나는 카메라를 준비하지 않으니,, 머리속에 이미지만 남는다.  

카메라와 일기장.. 그리고 여행하면서 읽을 책들도 잊지말자... 인제 준비다 되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길을 나서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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