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서는 이제 보지 않는다. 자기를 계발한다는 것이 이 사회에서 나를 부품으로서 더욱 견고한 부품, 상품으로 만드는 과정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내가 왜 자신을 계발해야 하는지에 대한 만들어진 욕망에 대한 저항과 거부감때문에 자기계발서를 노상 들여다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들이 자기계발을 위한 열정과 나의 게으름 사이에서 무엇이 더 훌륭할까 생각해보면 행동하는 그들이 낫다는 생각이 든다.  

근 1년간 일이 너무 하기싫었다. 먹고 살기 위해 반복되는 일상이 싫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일에 대한 성취감도, 지위에 대한 욕심도, 돈에 대한 욕심도 이제는 없는데, 내가 왜 계속 직장에 다녀야 만 되는가... 그런 생각때문에 그만그만 하게 유지만 해왔다. 그러다 보니 내 업무적으로도 버벅되는 순간이 급기 오기 시작했다. 일하나는 자신 있다고 믿어왔는데, 역시 신경을 안쓰는 만큼 일을 빵꾸가 나기 마련이다. 내가 능동적인 입장이 아닌 유지의 차원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임금을 받는다는 것은 역시 어불성설이긴하다. 내가 근무하는 이조직이 아무리 느슨 조직이지만, 이렇게 일을 놓고 사니,,, 이것도 아니다. 강신주의 상처받지 않을  권리에서는 노동의 존엄성을 조작하는 것은 자본주의 자본가들의 조작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노동의 신성함과 존엄성을 조작하여 내가 하는 이 일들이 나에게 어떤 존엄성을 부여준다는 것은 착각인지 모른다. 먹고 살기 위해서 할 뿐이지 무슨 존엄인가? 그럼 너무 삶이 비참해 지지 않는가?  내가 일하는 이유를 오로지 소비하기 위해서 일을 한다면 소비의 욕망을 줄이고 다른 삶을 꿈꾸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면 일이 커져버린다...! 결국 다른 삶을 꿈을 꾸면서도 완전히 다른 삶을 살수는 없다. 그러면 현재의 일상을 낯설게 감각하기..의 방법이 있다고 한다. 과연 가능할까?  

임경선씨의 책에서는 그 모티브를 다시 얻었다.  "노동의 유희"  일을 하면서 즐거움에 빠지는 것. 이것이말로 지극히 일상적인 것일지 모른다. 먹고살기 위한 노동이 아니라 일을 하면서 즐거워 하는 것, 현재를 현재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노동의 유희성, 일의 즐거움을 다시 찾아보려고 한다.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보고 내 머릿속에 다시 집을 짓는 것. 그렇다면 지금 이 모든 일들이 지겹지만은 않을 것이다.  2010년에는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난다. 여러모로 늘어져 있던 나에게 자극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그리고 임경선의 2030대 직장여성으로 살아가기를 읽으면서 다시 나 자신을 조이는 시간을 가졌다.  임경선씨의 치열한 20대의 모습, 지금 선택한 길에 대한 만족감과 직장생활에 있어서 여러 에피소드에 대한 현명한 처신들을 보면서,  지금의 나태한 내모습에 대한 반성도 많이 하고, 다른 환경으로 진입하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구체적인 생각도 해보았다. 직장상사와 동료들에 대한 관계도 배울 수 있었다.  잘해나가야 할텐데... 잘 해날갈 수 있을것이다. 일단 일을 재밌게 하고 싶다.  

철학 삶을 말하다(강신주).. 오늘 아침에 만난 구절에서는 노동이 그저 목적을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김훈이 말하는 이 밥벌이의 지겨움이 나온다. 목적과 수단이 일치하는 노동이 놀이가 되면 더이상 그것은 고통이 아닐 것이다. 결국 내가 마음먹기 나름인 것인가.. 노동을 유희로 만드는 것이 나의 몫인가...?  일이 재밌고, 그 일로 인해서 먹고 산다는 것은 분명 행운이다! 노동이 수단이 될 수 밖에는 없지만 그 수단과 목적을 좀 더 가깝게 하는 노력은 필요하단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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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유명한 로렌스의 책을 처음 읽고 있다. 생전처음 들어보는 낯선 지명 사르디니아의 여행기라고 한다.  가만있자.. 사르디니아가 어디인가? 스페인 어느쯤인 것 같다. 읽으면서도 어디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지중해의 그 하얀집과 파란바다를 상상했던 나에게 초반부터 로렌스는 적나라하고 실감있게  기차와 배의 멀미부터 선사해주시더니 이제 배에서 내려 항구에 도달했을 때는 현대화되지 않은 거리의 쓰레기와 오물의 풍경을 친절히 묘사해주신다... 역쉬 친절한 여행기는 아니였다. 하지만 애로물이라는 오명의 명작 북회귀선의 작가라는 나의 선입견을 금방 넘어버린다.   유머러스한 비유와 날카로운 관찰력, 인간들에 대한 직관과 통찰 등 그의 시크한 매력 빠져 열심히 읽어나갔다.




  읽으면서 내내 궁금했던 것이 어떻게 작가들은 이리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프루스트도 마찬가지 이지만, 이것은 기억일까 창조일까.. 창조된 기억일까? 분명 그는 여장을 풀고 시간을 내어 곰곰이 기억을 떠올리면서 썼을 텐데 어찌 이렇게 세밀한 묘사가 가능할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니면서 그 많은 생각을 했다가 풀어놓는다는 것이 놀랍다.  그는 한장면 한장면 머리속에 사진을 찍어놓고 이렇게 앉아서 하나하나 그 사진들을 보면 아 그때 내가 느꼈던 것들을 묘사하고 비유하고 창조하는 것 같다. 마치 대사하듯이..

 여행 중 나는 풍경을 보면서 곧잘 내가 무엇을 좀 느껴야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불안해한다. 나를 압도만큼의 풍경을 본적이 없어서 그런 것일까? 감각이 무딘것인가? 어쨌든 자연을 있는 그대로 못느끼고 있다는 강박감 때문에 풍경들은 나에게는 특별한 의미와 재미가 없다. 오히려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이러저러한 인간이겠지? 내 그간의 편견들을 작동시켜서 상상하는게 생각의 고작일 것이다.  로렌스는 타인들을 들여다 볼때도 예리한 관찰력으로 꿰뚫어 본다. 타인들의 허세와 욕망을 읽어내고, 그에 알맞은 변명을 붙인다. 종종 웃지 않을 수 없었던 부분이다.  

 똑같은 9일의 시간을 보냈어도 나는 기억과 조우하는 수동적인 방식으로 밖에 감각하지 못하겠지만 로렌스 등 작가들은 능동적으로 시간을 감각하고 자기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9일간의 여행을 한권의 책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는가?  이것이 소위 밀도를 가지는 시간, 두께가 있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로렌스에게 하루란 긴 하루가 아닐까 싶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 만큼 빠르다는 것은 여행을 갔을 때 1박2일을 지나고 월요일 출근길에 주말이 길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하고 집에만 있었을 뿐인데 곰방 후딱 지나간 것 같이 느껴진다. 시간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 그것은 영화를 보았을 때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있으면 금방 시간이 가는 것 같이 느껴진다. 아마도 그 차이는 의식적인 시간을 보내는지 수동적인 시간을 보내는지에 따를 다르게 느껴지는 것 같다.  생각은 나도 끊임없이 하지만 로렌스 같이 상황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상황과 거의 무관한 잡념들로 이루어져 있고, 뚝뚝 그 잡념속에 현실이 끼어드는 것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인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로렌스에게 하루란 긴 하루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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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못갔다. 마지막 뒤풀이라도 참석하기에는 나의 낯은 두껍지가 않기 때문에.. 그래도 내가 이렇게 아쉬워할거라면 마지막을 포기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우유부단과 게으름,,그리고 민망함구석 때문에 안갔다. 핑계라면 핑계고, 거기까지가 나의 한계인 것이다. 딱 나의 한계까지만 견디었다.  

공부라는 나의 신체에 맞지 않는 옷(?) 때문에 내 신체의 반동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심했다. 이제 비로서 조심스레 다시 시작해볼 용기가 나는 것은 무슨 조화인지... 껄껄.. 술은 거의 중독자 수준으로 마시고 헤비스모커에 다량의 독서와 우울까지.. 뭘 좀 해보겠다고 결심하자마자 1년을 이렇게 보냈다. 자신의 아이러니에 놀라워 하면서 내면과 신체의 괴리를 더더욱 벌리는 한해였다...  

하지만 내 사유의 지평은 좀 넓어졌다고 할 수 있겠다.. 혼자서는 결코 알지 못하는 세계를 맛보았으며, 다른 이의 삶들을 관음적으로 보면서 내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다만 그들과 더 가까워 질 수 없어서 매우 아쉽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 또 이런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 아쉽다.  

열심히 공부 못했던거, 사람들이랑 좀 더 친해지지 못한 것. 하지만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다. 복구할 무엇이 없으면 새로운 것이 나타날 때니 그만 한숨쉬도록 해야겠다. 지난 1년 동안 사놓고 못읽었던 책을 읽으면서 쓸쓸한 마음을 달래자...그리고 지금 "시간" 에 대한 강의도 다 듣고, 거기서 양이 많아서 못 쫓아가서 자책하던거 이제 내 페이스대로 공부 좀 제대로 시작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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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우리를 노동으릐 계속 내몰기 위해 지속적으로 돈을 쓰도록 유혹하는 장치를 함께 고안해 냈습니다.(p19) 

세상에 대한 우리의 지배력은 돈을 쓰지 않고 돈으로 구매할 수 있는 물건들을 꿈꾸는 동안에만 작동합니다. 현실적으로 돈을 사용해버리는 순간, 우리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것들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해 버립니다..... 우리는 돈이 떠나려는 순간, 다시 노동의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51p 

리오타르는 모더니즘은 산업자본이 추동하는 것이고, 그 내적 욕망은 새로움에 대한 반복 강박이라는 점을 명확히 했습니다.  -63- 

 도시인의 삶에 대하여 짐멜의 표현처럼 " 급변하는 외부 환경에 심장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머리로 반응하게 된 것"  

도시인들의 자유과 고독; 고독을 피하기 위해 답답함을 받아들이던가, 자유를 위해 고독을 감내해야한다. -92- 

짐멜의 논의를 역사적 순서로 정리하면,,,자본주의 이전에 공동체주의에서 양적개인주의(상호불간섭으로 규정되는 소극적 의미의자유가 도래,, 그런데 이같은 소극적 의미의 자유라는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에 침잠하고 이에 따라 서서히 자신만이 가진 단독성을 깨닫게 된다. 이로 인해 자신의 고유한 개성을 표현하려는 욕망이 이전시대 보다 강해진다. 짐멜은 이것이 바로 질적 개인주의의 진정한 기원이라고 설명한다. 그가 명확하게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자신만의 특이성, 혹은 질적 고유성을 표현하려는 욕망은 사실 도시적 삶이 가져다 주는 고독을 극복하려는 데서 작동한다고 볼수 있다.  그럴까???  -97-

대도시에서 개인이 자유와 평등을 느낀다고 하지만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노동자임을 은폐하고 오직 소비자로서 행동할 때에만 가능한 현상입니다. 짐멜에 따르면 자유와 평등을 얻게된 개인은 스스로 타인과 구별되려는 욕망을 갖게되고....이 개성을 강조하려는 논의는 소비사회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흔히 이용된다.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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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이 끝나간다. 나는 마지막 4학기를 놔두고 포기한다. 애초에 내가 따라갈수 없는 것들이였지만, 그래도 마칠수 있었는데. 결국에는 포기한다. 핑계는 많지만, 핑계는 핑계일뿐. 내능력에 비해 너무 많은 것을 해야된다는 부담감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작했고, 그 한계를 계속 맛보면서 그 길을 걸었다. 내가 갈수 있을거라고, 변해야 된다고 하는 나의 절박성은 벽에 막혀서 계속 뒷걸음치는 관성을 유지한테, 나의 패턴을 반복한채, 나는 그렇게 루저가 되었다. 하지만 나 자신에 대한 실망을 때문에 무너지지는 않는다. 그간의 나의 관성으로 미루어볼때, 나는 그 자신에 실망과 실패를 부여잡고, 그 안에서 결코 나오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문제로서 나는 나의 삶을 채워가는 것이다. 이렇게 잘 알면서 나오지 않는 것은 나오고 싶지 않기 떄문에, 이러한 고통마저 없다면 나를 지탱줄 그 무엇인가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어린애같은 것이다.  

이렇게 잘 알면서도 나의 신체적 욕망이 나를 이렇게 만드는가,, 아니다 신체, 중독도 아닌 불행감에의 중독이다.  상쾌하고 신선한 삶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내가 잘살면 안된다는 죄의식이 불러온 걸까. 근원을 생각해보면 삶의 대한 허무감이겠지만, 그 허무감이 나를 지탱해주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차이 없는 반복이 문제다. 차이는 조금 있겠지만, 나는 노예다.   

시간이 과거가 나를 지배하고 있다. 과거와 미래가 나를 지배하고 있다. 과거나 미래가 나를 지배하는것은 맞지만 이렇게 나를 지속하는 있는 것은 매순간의 나이다. 매순간의 내가 진다. 어떻게 해야될까... 나는 나에게 계속 진다. 나와의 싸움을 계속 지고 있다. 이긴 나의 모습을 상상해보지만, 그건 왜인지 꼭 나같지 않다. 나라는 주체를 설정해 놓고 이래야지 저래야지 생각하는 것들, 그런것들을 생각하는 현재의 나는 무엇일까. 내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 나는 부단히 유치하게 잡념에 빠져서 산다. 그래서 주체를 버리라고 했다. 동양에서는.  

 근대가 만든 주체라는 개념이 우리를 이렇게 피곤하게 한다. 나는 흐름이고 이 흐름 속에 자연스럽게 살면 되는것을 끊임없이 생각은 떠돈다. 주체를 설정하는 이 작업이야 말로, 이 주체, 정체성이라는 것 조차 모든 것들의 조합인것을.  우리는 집착을 한다.  어떻게 해야 나의 주체아닌 주체를 버리고 그냥 살아갈 수 있을까... 나를 통과하는 모든 것들을 그저 지나가게 바라보야할까. 그것도 아니다...  

시간.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우리가 물리적으로 정형적으로 생각하는 시간은 그림이 있다. 많은 철학자들이 근대에 넘어오면서 시간을 다시 새롭게 해석한다. 베르그손은 시간이 농밀한 과거의 이빨자국이라고 까지 말한다. 들뢰즈는 현재에서 과거는 흔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건 그냥 쉽게 내가 얘기한 것이다. 수평적인 시간에서 수직적인 시간을 사유하는 것.... 그것이 말처럼 쉽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시간이라 것..  

내 사유가 짧아서 무엇이 들어와도 그저 한마디의 말 밖에 할 수 없다. 소화가 안된다는 얘기다. 소화를 하려면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 노력조차도 하지 않고  무엇을 바라는가...  

나의 나약함. 의지와 욕망을 구분을 하지 못했다. 쓰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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