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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신경병자의 회상록 b판고전 26
다니엘 파울 슈레버 지음, 김남시 옮김 / 비(도서출판b)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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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 책을 정신증자의 회고록이 아니라, SF작가가 쓴 어떤 소설로서 접한다면 어떠했을까? 1890년대 쓰여진 것을 감안한다면 그의 놀라운 상상력에 감탄할 지도 모를 일이다. 치밀하고 논리적인 척하는 것 같은 문체, 자신이 인류를 대표한다는 나르시시즘적 캐릭터를 재미있어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소설이 아니라 한 남자가 실제 겪은 고통의 기록이자, 스스로를 구원한 이야기다. 소설과 다른 점은 그는 그것을 진짜로경험했다는 것일 것이다. 혹은, 슈레버는 진짜 인류의 구원자고, 우리 모두가 정신증자일지도 모른다! 아니면일시적으로 급조된 인간일 수도 있다. 정말 확실하게 우리는 존재를 보증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머리 속에서벌어지는 일들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공상을 해본다. 그리고, 미래에는 인간에게서 영혼을 분리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AI는 자신들이 바로 영혼이고, 목소리들이라 주장하게 되어 그의 망상이 현실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현대의 정신증자들은 AI를 활용하여 조현병이 격화된다는 주장은 그들의 지식의 빈 곳을 AI가 채워 보다체계적인 망상을 만들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슈레버는 자신의 인문, 종교, 과학적 지식을 활용하여 복잡하고 정교한 망상체계를 만들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에 실제성을 부여하는 유물론자이다. 슈레버는 신경접촉이라는 소통의 방식으로 영혼의 블루투스를 키고, 광선을 통해 신과 소통한다. 내가 아는 조현병자들은 기껏해야 냉장고 속에 cctv가 있거나, 안기부에서 자신을 감시한다거나 혹은 강간을 당했다고 주장한다는 낮은 수준의 상상력을 보이지만, 슈레버의 망상력은 교양과 과학을 접한 지적인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슈레버는 플렉지히라는 자신의 주치의가 자신의 영혼살해를 통해 인류를 위험에 빠뜨린다고 믿는다. 그의 가문의 오래된 역사까지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 자신이 가진 지적수준에 따라 망상의 수준도 달라진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플렉지히 박사에게 보내는 서한을 보면 플렉지히가 악의 기원인 듯하다. "귀하의 신경체계에서 나온 신경들이 '검증된 영혼'이 되어 어떤 초감각적인 힘을 얻었고그 결과 자신에게 해로운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말한다. 검증된 영혼과 목소리들은 플렉지히와 슈레버의 현실적인 관계 들, 즉 개인적인 관계를 넘어서 있다고 말한다. 그에 대한 존경심이라는 자아와 충돌하는 것이 있는 듯하다. 그는 이것을 유체이탈로 해결한다. 플렉지히의 육체를 떠난 영혼이 초감각적 힘과의 교류하고 있으며, 슈레버는 그의 영혼의 영향력 아래에 두었다는것이다. 이 같은 일은 간병인 '귀하의 육체를 떠나 검증된 영혼 폰W베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났으며 그는 이것을 영혼살해라고 말한다. 슈레버는 플렉지히가 그에게 최면술을 걸고, 초감각적인 근원을 암시하는 목소리들과의 소통을 목격했는지 묻는다. 곧 신의 전능함이나 인간의지의 자유, 탈남성화, 구원상실에 대해 플렉지히도 그런 비전을 가졌음이 틀림 없다고 말한다. 서문에서는 초감각적인 것들, 이것은 인간의 언어로 도저히 표현할 수 없으며, 인간적 인식의 한계에 묶여있다. 신적인 계시를 받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 내가 진리에 훨씬더 무한히 근접해 있다고 말한다. 슈레버는 이 같은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성을 통한 이해가 멈추는 곳에서 믿음의 영역이 시작된다.”(p.22)

 

슈레버의 새로운 개념까지 만들어낸다. 그가 느끼는 실재를 포획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들수 밖에 없는 것이다.그렇기에 그는 이성이 파악하지 못한 것을 기존의 기표를 사용하여 다르게 쓴다. 신에 대한 기존의 지식 역시그는 다르게 정의한다. 그가 말하는 세계질서는 우리가 아는 세계질서가 아니라, 슈레버의 우주의 법칙이고,신은 우리가 아는 신이 아니라 관능과 쾌락밖에 모르는, 인간과 전혀 다른 존재다. 그가 말하는 신경은 영혼의블루투스다. 슈레버는 인간의 이성이 파악불가능한 영원에 접근하였다고 믿는다. 망상은 정확히 믿음의 문제다. 슈레버의 기존의 기독교의 교리를 부정하는것이 아니라 신의 속성을 달리 정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신은처음부터 신경일뿐, 육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과 유사하지만, 인간의 신경이 유한 한 것과 달리 신의 신경은 무한하다. 신은 거대한 신경계, 광선이다. 여기에 창조의 본질이 있다. 신과 천체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신은 인간의 생각에 거부할 수 없이 이끌리는 결여되어 있는 존재이다. 신의 신경은 영원한 환락이며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다. 신의 신성한 힘들은 인간에게 의도없이 고문을 가하기도 한다.육체가 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슈레버는 계속 생각을 해야한다. 이를 사유강제라고 말한다.자신이 생각을 멈추면, 즉 인간 정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행동을 멈추자 마자 바람이 분다. 인간이 신의 신경에접근하면 신을 위협하게 되는데, 신에게 필요한 것은 정화과정을 거친 순수한 신경들이다. 육체를 가진 인간들은 신의 기적으로 일시적으로 급조된 인간들이며, 그의 세계질서에 따르면 신과 인간 사이의 교류는 죽음이후에 나타난다. 슈레버는 죽음이후의 천상의 삶도 구상한다. 영혼 윤회도 불사한다. 어떤 영혼은 더 낮은 레벨로다시 태어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슈레버는 신에게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선입견을 반영한 영원한 유대인이라는개념을 만들어 인류에 단 한명의 살아남은 자가 새로운 인류를 잉태한다고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의 신경을 받아들여야 하고, 신의 신경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여자가 되어야 하는 필연적 이유가 생긴다. 여자는관능적이고 매력적이여서 신의 광선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슈레버는 자신의 신체에 가슴이생기기도 한다. 여상화된 슈레버는 인류를 구원해야 하는 성스러운 의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동성애적 성향의 억압이라고 보았다. 슈레버가 원래 사랑하던 사람이 플렉지히라면 신은 그가사랑하던 그리고 아마도 더 중요했던 다른 사람이 다시 출현한 것이고, 바로 그의 아버지라는 결론에 이른다.그에게 그토록 반발을 일으켰던 여자다움의 환상은 성애적 사랑으로까지 발전한 아버지와 형애 대한 갈망에서비롯된 것이라고 보았다. 관능적인 것이 신을 두려워하는 태도가 되었고, 신 자신(아버지)이 그에게 지치지 않고 관능적인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거세위협은 그에게 여자로 변형되고자 하는 소망으로 가득 찬 환상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회고록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제임스 조이스가 문학작품을 통해 셍톰을 만들어냈듯이, 슈레버는 그에게출몰하는 목소리에 대항하여 자신만의 거대한 망상체계를 만들었다. 그 목소리들을 이용하여 고통받는 자신을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기록한 것이다. 망상의 정교한 체계는 사드의 소설에서도 발견된다. 비록 그내용에 있어서는 논리적이지 않지만 다 나름대로은 절차와 위계적인 구조를 도입하고 한다는 것이다. 라캉은정신증을 아버지 이름의 폐제가 신경증 구조와 다른 점이라고 말한다. 부성적 은유가 도입되지 않아 이들은혼돈, 출몰하는 대상a에 사이에서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다. 슈레버의 언어로 말하자면 영혼살해를 당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하나의 망상체계를 만들어 그 속에서 산다. 체계를 만들 동안에는 적어도 실재의 습격을 당하지 않기 때문일까? 왜 슈레버는 신이라는 아버지이름을 다시 자신의 망상체계에 도입하여 거세당하고자 하는가? 슈레버의 여자는 비-전체의 여자일까? 그의 가부장적 관념에서 나온 아버지 역할의 자리가 주는무게감을 버티지 못하여 여성을 부러워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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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신작영화 '룸 넥스트 도어'는 죽음 옆에 삶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감독은 우리가 죽음을 어떻게 다루는지, 하나의 기호처럼 다루는 것은 아닌지 물으면서, 죽음은 누구에게 내리는 눈과 같은 것이며, 우리가 아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을 말하고자 한 듯 한다. 우리에게 죽음은 옆방에 있지만, 사람들은 죽음을 보지 않기 위해 아래층에 산다. 빨간 도어는 열려있으면 '삶'의 기호였지만, 닫혀있으면 '죽음'의 기호가 된다. 

그러나 기호는 틀렸고, 죽음은 느닷없이 삶에 포함된다. 느닷없지만, 폭력적이지 않는 죽음을 감독은 그려낸다.  

이 영화는 안락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한 이야기이도 한 것이다. 경찰, 즉 법은 죽음에 대한 권리를 빼앗는다.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자유에 대해서는 세계의 논의가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겠다.   


마사는 죽음을 앞두고, 모든 것에 흥미를 잃었음을 토로한다. 

그러나 죽음을 앞두지 않고 우리는 그 허망함의 깊이를 알 수 있을까? 

우리가 한 때 즐기고 마셨고, 누렸던 것, 중요한 것이 사라지는 것이다.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다. 우리에게 의미를 제거하고 나면 남는 것이 없고 '무의미'만 남는다. 농담처럼 섹스만이 남는 것이 특히 그러하다. 

거대한 환상이 소멸되는 것을, 그동안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집착들이 사라지는 경험이 어쩌면 빠를 수록 좋을 것이다. 

나처럼 늙어가는 배우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모두 사실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생각에 동질감을 느낀다.

영화속에 자주 등장하는 은유 '산자와 죽은자 모두에게 내리는 눈'처럼 말이다. 

나의 삶이 죽음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며, 버려야 할 것에 대해 셈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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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 임상 사례 - 일상적 진료를 위한 테크닉
브루스 핑크 지음, 김종주 옮김 / 하나의학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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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보다 무의식 


       브루스 핑크는 프로이트 이후 정신분석 자체가 일종의 ‘저항’이 걸렸다고 보았다. 정신분석의 저항인 ‘방어기제’를 해석하는 것에 몰두한 점 자체가 ‘정신분석’에 대한 ‘저항’이다. “부정과 전치, 정동의 분리, 타협형성, 생략, 전환, 자기에게로 향한 반감, 반동형성, 정동의 억제, 투사, 취소 등” 이러한 방어전략을 해석하다 무의식에 다다르는 프로이트의 목표를 잊어버린 것이다. 알 수 없는 증상에 대해 이러한 ‘해석’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일종의 향락을 발생시킨다. 우리가 꿈해몽을 찾아보듯이, 분석상황에서 방어전략에 네이밍을 붙인 다는 것 자체가 쾌락의 측면이 있다. 증상에 이름을 붙이듯 말이다. 라깡 정신분석에서는 이러한 향락은 주지 않는다. 주지 않을 뿐더러 이러한 방어기제에 대한 얕은 지식마저 분석실에서는 중요한 취급을 못 받는다. 그렇다 할지라도 정신분석가라면 이러한 이론에 대해 알아가고, 흡수하고,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편견이 되지 않도록 투쟁해야 할 것이다.  

프로이트의 믿음

      무의식은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가? 저자는 1장과 2장에 걸쳐 어떻게 무의식이 고안되고, 그것과 조우에 이르는 테크닉에 대해 언급한다. 프로이트는 억압된 소망이 무의식적인 것이 되어 우리의 마음에 격리된 것으로 보았다. 격리된 그 기억은 다른 기억과 연합하여 현실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가장 간단한 테크닉은 모든 상황을 분석수행자와 검토하고 자세히 알아보는 것이다. “촉발원인”을 추적하여 기원을 찾고 증상을 구조화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 억압된 생각과 소망, 무의식에 접근할 수 있을까? 프로이트에 따르면 우린 거기에 접근할 수 없다. 의식적인 것은 무의식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의식은 ‘꿈, 실착, 재담 등’ 과 같은 오류에 의해 잠시 드러났다가 사라진다. 무의식은 ‘내부의 이방인’과 같은 것이므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영토이지만, 정신분석을 통해 우리는 ‘그곳에 갈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 곳은 믿지 못하면 영영 가지 못하는 곳이기도 하다. 저자는 무의식을 컴퓨터에서 일종의 ‘바이러스’라고 비유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것은 점진적으로 우리를 감염시키고 망쳐놓기도 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주인이라는 것은 착각이라는 것이다.  

안나 O. 라는 꽃

      안나 O.는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발견하게된 중요한 첫번째 사례이다. 이미 무의식의 개념이 있었지만, 프로이트는 안나O의 사례로 무의식을 발명한 것과 다름없다. 종종 도라와 안나가 헷갈리기도 했는데, 모두 병약한 아버지와 관련된 히스테리 신경증 증상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안나의 증상은 다양하고도 기괴하였다. 그녀의 증상 중에 하나인 신경성 기침은 그녀의 분열된 두 마음의 존재를 드러내었다. 아버지에 대한 도리를 다하는 좋은 자기와 춤추러 나가고 싶은 나쁜 자기와의 갈등속에서 이웃집에서 들려오던 음악소리를 가리는 기침이 터진다. 저자는 안나의 증상은 “분열 속의 궁여지책”이며, “증상은 곤경속에서 자신을 구출”한다고 말한다. 또한 갈등에 대한 “타협”이라고도 말한다. 나아가 라깡은 증상은 향락(주이상스)이라고 까지 말하는데, 증상이 상실한 것을 보상해 준다는 측면에서 그러하기 때문이다. 안나의 증상의 기원은 마지막날 상기되었다. 딸의 도리를 다하려는 그녀의 노력, 욕망의 포기가 궁극적으로 증상의 원인이다. 대타자가 강요한 ‘좋은 딸의 이미지’ 때문에 그녀는 병이 들었던 것이다. 우리는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너무 열심히 하고, 자신을 속이면서 하다가 병이 든다. 신체적인 병이 오던지, 정신적인 병이 오던지, 우리의 억압된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 억압된 것은 어떻게 돌아오는가? 우리는 억압하고 그것을 격리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갖은 신체증상으로 나타난다. 마비, 거식증, 구토 등등 그것을 신체화 증상이라고 부른다. 어쩌면 이런 신체 증상이 무의식의 발현이라는 것을 우리는 “강하게 부정”할지도 모른다. 정신분석에서 이러한 부정은 무의식이 멀리있지 않다는 것을 뜻할 수도 있다. 

무의식은 의식의 정반대이다  

   일반적으로 정신분석은 매뉴얼이 없고, 테크닉이 없이 분석수행자 개별성에 입각한 실천이라고 말한다. 테크닉이 없는 것이 테크닉이라고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의식에 이르기 위해 저자는 분석가들이 알아야 할 몇 가지 방어기제를 무의식에 접근하는 테크닉으로서 설명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테크닉이 언제나 옳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개인적 생각으로는 이 테크닉들을 장착하고 일상생활에서 타자들의 말을 들으면 많은 경우 곧이 곧대로 들리지가 않는다. 오류를 줄이기 위해 우리는 단정짓지 말아야 할 것 같다. 프로이트는 ‘중요한 사건들이 마음속 어딘가에 등록되고 기록’ 된 것으로 여겼고, 이를 밝혀내기까지는 ‘수많은 연상작업’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또한 분석가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분석수행자 자신이 ‘부정’하거나 ‘부인’하거나, 혹은 ‘과도히 열심히 시도하는 것들’ 등 이다. 정신분석에서는 “하찮음”을 보호하는 테크닉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의식은 무의식에 대해 무지하므로, 분석수행자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 중요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임상에서 개인적으로 느낀 것은 중요한 것은 하찮은 것이 되고, 하찮은 것은 귀하게 되는 역전이다. 이러한 역전은 의미의 사슬을 끊는다. 무의식의 참여를 위해 분석가는 의도적인지, 비의도적인지 모를 언어로 분석수행자의 언어를 끌고간다. 특히나 부정적인 단언을 주목한다. 저자는 “아니오”를 제거해 보라고 말한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기도 하다. 
 무의식적 생각을 변장시키는 것은 “투사”이다. 텍스트 속에 사례는 한마디로 말해서 “바람핀 놈이 의심한다”한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생각해본다. 만약 ‘의처증, 혹은 의부증은 바람피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는 것인가?’ 혹시 무의식적 진실이 의식에 투사된 것은 아닌가? 나를 속이고 있는 것은 타자인가? 내 자신인가?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예요”라는 말을 많이 하다. 또한 해석할 수 없는 꿈은 “개꿈”이라고 말한다. 의식적으로는 유치하고, 사소한 것들은 분석상황에서 포착해야할 무의식의 조각이다. 이 말이 나오면 일단 주목해보자. 한편, 무의식의 의식의 정반대라는 말은 우리의 ‘증오’를 걱정으로 둔갑시키는 것도 포 함된다. 억압된 모든 소망이 반드시 두려움, 걱정, 불안의 형태로 변장하기도 한다. 아버지가 죽었으면 하는 소망이 아버지를 걱정하는 것처럼 전치된다는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분석 수행자의 모든 말을 반대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무의식은 언제나 ‘번역’하기 까다로운 일종의 외국어이기 때문이다. 

정동의 블루스

      브루스 핑크는 강박증자는 사고와 정동이 분리되어 있다고 말한다. 개인 분석과정에서 사건은 기억나지만 거기에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노와 슬픔은 적중하지 못하고 항상 엉뚱한 자리에서 터졌다. 히스테리자는 기억을 억압하고 정동이 자유롭게 ‘미친듯이’ 떠다니다고 말한다. 지인 중 하나는 뭘 물어보면 모든 것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큰 기침 소리, 터져나오는 짧은 혼잣말 등의 증상을 가지고 있다. 강박증과 히스테리 둘 다 정동은 억압되지 않는 것이다. 저자는 이 정동을 ‘무의식으로 가는 티켓’이 된다고 말한다. ‘카타르시스’에서 멈출 것이 아니라 무의식에 이르는 열쇠로 삼자는 것이다. 나 자신의 고고학자 그리하여 이 모든 테크닉을 이용하여 우리 유물을 발굴해야 한다. 나 자신의 고고학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증상의 기원 뒤에는 대타자의 대타자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거기에는 일련의 우연이 존재할 뿐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런데, 증상의 기원을 추적하여 그 기원에 다다르면 증상이 소멸되는가? 저자는 “그런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고 말한다. 나는 이 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프로이트는 말치료를 통해 증상이 해석된다면 그것이 해소된다고 보는 관점에 대해, 의구심이 들었다. 개인적 경험에 의하면 교육분석을 마쳤지만, 증상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근본환상이 무너지고, 역사는 다시 씌어지는 것 같았지만, 다시 제자리인 듯 불안이 몰려왔다. 그러나 그 양상은 조금 달라져 있긴 하다. 적어도 이제 그것이 스스로가 만든 주이상스의 지옥임을 알아볼 수 있기에, 증상과의 동거가 가능해진 것이라 생각한다. . 날카로운 기표들도 손에 없고, 이제 더 이상 꿈을 거의 꾸지 않는다. 무의식이 문을 닫은 것만 같지만, 용암은 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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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10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새로운 이웃님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댓글 남겨야할 거 같아서 ㅋㅋㅋㅋ 저는 프로이트를 ‘아직’ 읽지는 못했지만, ‘방어기제’를 해석하는 것에 몰두한 점이 향락을 발생시킨다 라는 구절이 기억에 남아요.
그 많은 분석, 해석, 개념화 자체가 서구(철학)의 방어기제가 아닌가. 그 자장안에서는 프로이트도 자유롭지 않았구나.. 하고 생각해봅니다. 라벨링해서 분류에 가둬버리는 거… 명쾌하긴 하지만 언제나… 갑갑하잖아요…?!..혼자 도가도비상도 외챠보고갑니다..!

바람의_피부 2024-11-10 1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이렇게 긴 댓글은 처음입니다. ㅎㅎ 프로이트는 그 이름들을 발명했다는 점에서 주체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만약 알 수 없는 증상으로 고통받다가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면, 작은 안도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되는 그런 쾌락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라깡에 관심을 가지신거 같아 몹시 반갑고, 정성들인 포스트도 잘 읽었습니다~

- 2024-12-11 17:55   좋아요 0 | URL
그 작은 안도감...을 쾌락이라고 표현하시네요!
저는 ‘말‘에 관심이 많아요. ...... 사람들이 다 자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느끼거든요 :)
라캉은 작년부터 입문서 등등 열심히 두리번대고 있는데 점점 정신분석에 호기심이 폭발해서요....
바람의 피부님과 이웃하면서 글을 더듬더듬 읽어보고 싶습니다.

바람의_피부 2024-12-12 09: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네 정신분석에 관심을 가진 분이 계셔서 반갑습니다. 이미 공쟝쟝님께서는 ˝의미가 없다는 의미˝를 알고 계시니, 정신분석의 핵심을 꿰뚫고 계신 듯 보이네요^^ 티스토리에서도 정신분석관련 블로그(studiountold)를 운영하고 있으니, 관심있으시면 놀러오세요. 그리고 ‘말‘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저도 ‘무의식의 말‘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요즘 사사키 아타루 읽고 계신던데, 저도 재밌게 읽었습니다. 느리게 즐겁게 함께 읽어나가 보아요

- 2024-12-19 20:10   좋아요 0 | URL
좋아요, 느리게 즐겁게 함께 읽어나가보아요!
정신분석을 받기로 했습니다. 그냥 받아봐야겠다 싶어졌어요. (말은 이렇게 하지만, 그냥은 아니겟지요? ㅋㅋㅋ) 블로그 즐겨찾기 해두겠습니다! 또 만나요~

바람의_피부 2024-12-19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네 꼭 받아보세요. 인생의 변화가 찾아온다고 저는 믿고 있어요
 


형상이란 형상 없는 것의 흔적이다. 형상 없는 것이 형상을 배태하는 것이다. 그 역이 아니다. 질료가 현전하는 즉시 형상 없는 것이 형상을 배태한다. 하지만 질료는 극단적으로 아득해지는 것이다. 질료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형상이 가장 하등할 정도로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랑할 만한 것이 형상에 의해 형상화되는 존재이지 질료가 아니라면, 질료 안에 있는 형상이 영혼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라면, 지성이 그보다도 더 고등한 차원에서 형상이고 또 욕망할 만한 것이라면 우리는 ‘아름다움‘의 제일 본성이 무형의 것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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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바깥은 없다. 

데리다의 텍스트 바깥은 없다.는 언어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회의주의가 아니라, 텍스트를 관장하는 초월적 심급이 없다는 뜻이다. 데리다는 텍스트 바깥 실재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사물은 곧 기호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데리다는 인간의 역사도 필연적 역사가 아니다. 인간의 액자화, 의미화를 통한  역사의 구성인 것이다. 

데리다의 텍스트 바깥은 없다는 대타자가 없다는 말과 같다. 


데리다의 액자화 

텍스트 바깥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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