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억이 난다. 

 

ㅇㅇ와 나는 협박을 당하고 있다. 

지저분하고 덩치가 큰 조폭인데, 그는 휠체어를 타고 있다. 협박의 대상자는 내가 아니라 ㅇㅇ인듯하다. 

나는 그를 보호하기 위해 용기를 내어 휠체어를 밀어서 물에 빠뜨린다. 

그는 아마도 죽었는지, 다음 장면에 나는 지명수배자가 되어 있다. 

그와 나는 칠레로 도망갈까 하다가 중국으로 도망하려고 하는데, 여권 등이 준비되어 있지도 않다. 

나는 그에게 자수할까 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순간 이 모든 상황이 진짜가 아니라 꿈인거 같아서 다시 일련의 상황을 복기한다. 

그런데, 꿈이 아니다. 진짜다. 나는 한 5년 쯤 징역을 살면 되겠지하고 낙관적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아무래도 꿈인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ㅇㅇ에게 내가 사람을 죽였는데 진짜야?하고 묻는다. 

ㅇㅇ은 가짜라고 답하고, 잠이 깼다. 

 

휠체어는 나의 훼손된 팔루스에 대한 증상의 은유이다. 그런데 나는 이번에 마치 증상을 끝내려는 듯 물 속에 빠뜨렸다. 

대타자를 두 번 죽이는 것이다. 증상에 대한 권태. 

그 와중에 진짜와 가짜를 타진하고, 내게는 언제나 믿음이 부족하다. 

셍톰의 발명을 촉구하는 꿈이다.  너무 매끄러운 마무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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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펙토르의 시간
엘렌 식수 지음, 황은주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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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은 여자들이 있다。 말함으로써 멀어지고 싶지 않은 여자들、 사물을 비껴 나가는 말로 말하고 싶지 않는 여자들이 있다。 말의 발걸음이 내는 소음은 사물들의 맥박을 뒤덮어 가려 버리기에、 나는 사물 위로 떨어져 내려 그 미세한 떨림을 얼어붙게 하는、 음조를 어긋나게 하는、 먹먹하게 만드는 말로 그 여자들에게 대해 말하고 싶지 않다。 나는 말이 그녀들의 목소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 두렵다。 어느 한 목소리를 열렬히 사랑할 수 있는 난。 나는 여자다。 목소리의 사랑。 베일에 가려진 채 나의 피를 깨우러 오는 깊고도 조심스러운 목소리의 친근한 손길만큼 강력한 것은 없다。 목소리는 갓 태어난 심장이 만나는 최초의 빛줄기다。 내 심장이 속한 곳은 목소리이며、 그것은 무한히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곁에 있어주는 찬란한 어둠으로 빚어진다。 -9-


목소리는 그 말의 내용이나 그 내용의 의미를 구축하는 기호작용으로 환원되는 것도 아니고 또 단독적인 현존의 증명으로 환원되는 것도 아닌、 그 사이의 존재론을 함축함으로써 불가능한 위상을 달성한다。 중략

목소리가 오로지 기호작용으로 화원되지 않는 만큼 거기에는 어떤 찌꺼기가 남아 있으며、 이제 주체의 자리는 목소리의 불가능성이라는 잔해에서만 간신히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 불가능한 목소리、 림보、9쪽- 


‘말’이기 보다 리스펙토르는 ‘목소리’이다。  




하나의 글쓰기가 천사의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나 자신으로부터 그렇게나 멀리 떨어진 채 유한한 내 존재의 끄트머리에 홀로 외로이 있을 때였다。 나의 글쓰기-존재는 홀로 있음에 가슴 아파하며 나날이 커져 가는 슬품 속에서 수취인 불명의 편지를 보냈다。 "십 년간 책들의 사막에서 헤맸지만 아무런 대답도 만나지 못했어"、 편지는 점점 짧아져 가고、 "그런데 친구들은 어디 있지¿" 、 그것은 점점 더 금지된 것이 되어가고、 "시는 어디에¿" "진리는¿" 、 겁에 질려 주어가 사라지고 거의 읽을 수 없게 되었고、 내 광기의 메아가 되었다며 글쓰기-존재가 자책할까 두렸다。 그리고 나는 나의 글쓰기-존재가 절대적으로 비-현대적이고、 부-적절하며、 시대에 부-적격이라는 것을 알게 됐으니、 그것은 불가능한 것을 미친 듯 악착스레 요구하고、 이 시체 더미의 시대에 몹시도 초연하고 풍요로우며 열려 있는 젊은 노래、 찬가의 시대에 그랬던 것만큼이나 광대하고 무방비한 젊은 노래의 도래를 욕망했기 때문이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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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아포리아 14
롤랑 바르트 지음, 류재화 옮김 / 21세기북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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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쉬르의 검은 짐승、 그것은 (기호의)자의성arbiraire이었다。
그의 검은 짐승、 그것은 유사성analogie이다。 
‘유사한’ 예술(영화、 사진)、‘유사한’방법론(가령、 강담 비평)은 신뢰와 평판을 잃었다。  
왜¿ 왜냐하면 유사성은 ‘자연’의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연적인 것’을 진리의 원천으로 구성한다。
유사성의 저주란、 유사성이 억제할 수 없는 것이기에 더 심해진다는 것이다。
하나의 형태가 보이자마자、 그것은 어떤 것과 닮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인류는 유사성을 선고 받았다。
다시말해、 인류가 자연을 벗어날 수 없기에、 유사성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화가들과 작가들의 그 수고와 노력이 여기서 벗어나기 위한 것일까¿ 그런데 어떻게¿
유사성을 조롱하게 만드는、 두 상반된 과잉에 의해。 또는 두 아이러니에 의해。
대단히 뻔한 것을 존중하는 척하거나(복사와 모사가 그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래서 살아남았다)、
흉내 낸 대상을- 규칙에 따라- 규칙적으로 변형한다。(이것이 왜상 anamorphose)이다。 

이런 위배적인 것 말고、 이 기만적인 유사성과 반대되면서도 이로운 것은 단순한 구조적 상응、
즉 상동성이다。 최초의 어떤 대상을 비례적인 암시로 떠올리는 것이다
(어원적으로도、 언어의 행복했던 시간으로 돌아가보면 유사는 유비、 곧 비율을 의미했다) 

(황소는 그의 미끼가 코 아래로 떨어질 때 붉은 것을 본다。 두 붉은색이 겹친다。
분노의 붉은색과 투우사 케이프의 붉은 색。 황소는 완전한 유사성 속에 있다。
다시 말해 완전한 상상계 속에 있다。
내가 유사성에 저항할 때、 내가 저항하는 것은 사실상 상상계이다。
기호의 합착、 기표와 기의의 비슷함、 이미지들의 위상동형、 거울、 뇌쇄적인 미끼。
유사성에 도움을 청하는 모든 학문적 설명- 이런 설명들이 한 군단을 이룬다-은 이런 미끼의 일부다。
그래서 이런 설명들이 학문의 상상계를 형성한다。) 63-6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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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사랑, 바디우
박영진 지음 / 에디투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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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환은 사랑에 관해 어떤 함의를 가질까? 증환은 성적 비관계의 지양을 통해 한의 성과 다른 성 사이에서 관계를 조직한다. 증환은 비관계의 동인이다. 라캉이 말하듯, "증환이 있는 한에서, 즉 다른 성이 증환에 의해 지탱되는 한에서, 관계가 있습니다." (라캉세미나23 p.84) 이 관계는 팔루스 함수와 담론 작용에 의해 규제되는가? 답변은 긍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라캉은 여자가 남자의 증상이라면, 남자는 여자의 재난이다.(같은책) 여자가 남자의 증상인 것은 타자적인 성으로서의 여자가 팔루스적 주이상스라는 남성적 증상으로 인해 대상a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자가 여자의 재난인 것은 남자가 여자로 하여금 팔루스 함수 너머의 과도한 주이상스에 직면하게 함으로써 정신병적 삽화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124

그렇다면 증환적 매듭이 관계를 지지한다 하더라도, 이 관계는 여전히 기존의 법과 담론에 의해 구조화된 것으로 드러난다. 왜냐하면 증상(여자)과 재난(남자)사이의 비대칭적 관계가 결국 팔루스 함수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은 증환이 새로운 상징적 질서의 매개자로 기능한다는 입장과 일관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자. 그런데 사실 증환은 팔루스 함수와 같은 수준에 놓일 수 없다. 왜냐하면 증환은 팔루스의 함수가 무너지는 지점에서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기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난점으로부터 유일한 출구는 남자가 하나의 증환이며, 여자도 또 다른 증환이 되는 "상호 증환적 관계"에 있으며, 라캉은 이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라는 증환과 그녀라는 증환이 있습니다. 이것이 소위 성관계로부터 남아 있는 전부입니다. 성관계는 상호 증환적 관계입니다." " - P125

상호증환적 관계가 더 이상 비관계의 구멍에 대한 규범적인 구멍마개가 아님을 뜻한다. 동시에 그것은 비담론적, 비팔루스적, 비부성적 관계를 건설하는데, 이것이 곧 정신분석이 다루는 사랑의 게임의 규칙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상호 증환적 관계는 사랑에 대한 정신분석적 재창안의 고유명이다.
상호 증환적 관계는 단독성의 결합과 같다. - P125

요컨대 매듭이론은 사랑이 더 이상 상상적 자아, 상징적 결여, 실재적 주이상스와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증환적 단독성에 관련됨을 시사한다. 사랑은 "증환이라는 바이러스를 소통하는 방법"에 대한 하나의 독창적인 해법이다. 사랑은 나 자신의 증환을 구축하는 것이며, 다른 증환을 하나의 단독성으로 포횽하는 것이며, 증환적 단독성을 결합하는 것이다. 사랑은 무의식적 증상을 훈습하고 새로운 상징적 질서를 연마하면서 성적 비관계를 지양하는 상호 증환적 관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상호증환적 관계로서의 사랑은 더 이상 아버지의 이름의 작용에 의존하지 않으며 양가감저으로서의 사랑을 넘어선다. 앞서 보로매우스 매듭과 함께 이러한 최초의 진리는 전복되고 사랑에 관한 새로운 경구가 출현한다. "당신의 증환과 동일시하고, 상호증환적 관계를 창조하라!" - P127

사건으로서의 사랑은 공백이나 정의할 수 없는 X에 의해 작동된다. X는 사라이 어떠한 기존 지식에 의해서도 포착되지 않게 한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사랑은 끝내 비어 있는 채로 남을 것이다.,,,, 사랑은 배반과 함께 말소된다. 충실성은 단순히 육체적 정신적 헌신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계속해서 사랑의 상황을 재발명하고 확장시키는 주체적 과정을 가리킨다. .. 충실성을 가로막는 것은 제3자나 삼각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주체 안에 존속하는 자아다. - P131

충실성은 이 작은 주인(자아)을 초과하는 용기, 이상화에의 유혹 및 달콤한 기만과 투쟁하는 용기의 행위일 것이다. 사랑은 자아에 굴복하지 않을 용기, 둘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과정에 헌신한 채로 남아 있으려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 - P132

사랑의 윤리학이 사건, 충실성, 진리의 보로매우스 매듭을 형성한다.
... 비록 바디우가 사랑의 이상적인 형식을 제안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윤리학은 사랑의 악에 대한 인정을 통해 라캉과 만난다. "사랑은 모든 악의 원천이다. " 사랑의 악에 대한 비관주의와 사랑의 선에 대한 낙관주의라는 이분법은 성립하지 않는다. 악이 없다면 사랑의 윤리학은 의의를 상실한다. 사랑에서의 악의 현존이 우리를 급진적인 만남, 불굴의 충실성, 둘의 절제된 힘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사랑은 악과 씨름함으로써 스스로를 완성한다. ... 사랑은 악을 통해 스스로를 넘어선다. 사랑은 악이라는 내적인 과잉에 연루되어 있다. 순수한 선으로서의 사랑이 환영적이라면, 순수한 악으로서의 사랑은 파괴적이다. 사랑은 선악 너머에 있다기 보다는 선악 사이에 있는 것이다. - P134

"앞서 논의했듯 라캉은 토러스를 통해 설명될 수 있는 정신분석학적 위상학을 창안한다. 토러스는 하나의 구조를 형상화하는데, 거기서 신경증적 주체는 욕망에 대한 무지로 구성되면 사랑에의 요구를 지속적으로 반복한다. 토러스는 또한 말하는 존재가 기표의 작용으로 인해 주이상스의 상실로부터 고통스러워하는 토러스적 세계를 보여준다. 이를 사랑의 문제와 연결시킴으로써 우리는 토러스적 사랑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토러스는 또한 말하는 존재가 기표의 작용으로 인해 주이상스의 상실로부터 고통스러워하는 토러스적 세계를 보여준다.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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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사랑, 바디우
박영진 지음 / 에디투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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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으로서의 사랑은 덧없고 불안정하다.... 불가능성이 우연성에 의해 점이 찍히는 짧은 순간 실존하기 때문이다... 라캉에게는 사랑의 진상은 과정이 아니라 만남이다...그러나 사랑은 만남의 발생을 예찬하는 것이 아니라 만남의 결과를 전개하고 만남의 무작위성을 극복하는데 있다... 바디우의 비판은 여기에 있다... 단계별로 집요하고 끈덕지게 이루어진 시간적 영원성의 구축, 둘의 경험의 구축을 지지 한다. (사랑예찬,90쪽),,, 둘의 관점으로 새로운 주체적 세계를 충실하게 창조하는 데 있다. 오직 충실한 과정에 대한 불굴의 헌신과 집요한 전념만이 시간 안에 영원성을 구축하는 사랑을 지지 할 수 있다. (p.93)



오래전에 사두었지만, 올해들어 다시 읽기 시작했다. 

라캉과 바디우 그리고 사랑을 저자는 보로메오 매듭처럼 묶었다. 

수도 없이 밑줄을 치느라 읽기가 어렵지만, 진지하고 복잡하고 재미있다.  


저자는 라캉과 바디우의 뒤얽힘의 지점에는 사랑이 있다고 주장한다.  

라캉은 만남이 있어야 사랑 개시 되기에 "만남으로서의 사랑"을 주장한다. 사랑이라는 불가능성이 우연에 의해 짧은 순간 실존의 점이 찍힌다. 

반면 바디우는사랑의 개시를 인위적 '노고'에 의해 "영원성의 구축"이 가능하다고 본다. 

바디우의 "과정으로서의 사랑"은 "주체적 세계의 구축" 이자, 나와 타자의 새로운 진리의 발명품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의 문제는 이 세상의 사람의 수 만큼 다양한 무한의 영역일 것이다. 

관건은 사랑은 하나로 수렴되는 것이 아니라, 둘의 새로운 단독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 것은 하나와 어떻게 다른 것일까? 

하나도 둘도 아닌 새로운 둘을 하나로 만드는 것일까?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닌 새로운 두 주체의 공동체일까?  삶을 예술로 만드는 일 속에 사랑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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