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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신작영화 '룸 넥스트 도어'는 죽음 옆에 삶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감독은 우리가 죽음을 어떻게 다루는지, 하나의 기호처럼 다루는 것은 아닌지 물으면서, 죽음은 누구에게 내리는 눈과 같은 것이며, 우리가 아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을 말하고자 한 듯 한다. 우리에게 죽음은 옆방에 있지만, 사람들은 죽음을 보지 않기 위해 아래층에 산다. 빨간 도어는 열려있으면 '삶'의 기호였지만, 닫혀있으면 '죽음'의 기호가 된다. 

그러나 기호는 틀렸고, 죽음은 느닷없이 삶에 포함된다. 느닷없지만, 폭력적이지 않는 죽음을 감독은 그려낸다.  

이 영화는 안락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한 이야기이도 한 것이다. 경찰, 즉 법은 죽음에 대한 권리를 빼앗는다.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자유에 대해서는 세계의 논의가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겠다.   


마사는 죽음을 앞두고, 모든 것에 흥미를 잃었음을 토로한다. 

그러나 죽음을 앞두지 않고 우리는 그 허망함의 깊이를 알 수 있을까? 

우리가 한 때 즐기고 마셨고, 누렸던 것, 중요한 것이 사라지는 것이다.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다. 우리에게 의미를 제거하고 나면 남는 것이 없고 '무의미'만 남는다. 농담처럼 섹스만이 남는 것이 특히 그러하다. 

거대한 환상이 소멸되는 것을, 그동안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집착들이 사라지는 경험이 어쩌면 빠를 수록 좋을 것이다. 

나처럼 늙어가는 배우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모두 사실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생각에 동질감을 느낀다.

영화속에 자주 등장하는 은유 '산자와 죽은자 모두에게 내리는 눈'처럼 말이다. 

나의 삶이 죽음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며, 버려야 할 것에 대해 셈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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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 임상 사례 - 일상적 진료를 위한 테크닉
브루스 핑크 지음, 김종주 옮김 / 하나의학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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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보다 무의식 


       브루스 핑크는 프로이트 이후 정신분석 자체가 일종의 ‘저항’이 걸렸다고 보았다. 정신분석의 저항인 ‘방어기제’를 해석하는 것에 몰두한 점 자체가 ‘정신분석’에 대한 ‘저항’이다. “부정과 전치, 정동의 분리, 타협형성, 생략, 전환, 자기에게로 향한 반감, 반동형성, 정동의 억제, 투사, 취소 등” 이러한 방어전략을 해석하다 무의식에 다다르는 프로이트의 목표를 잊어버린 것이다. 알 수 없는 증상에 대해 이러한 ‘해석’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일종의 향락을 발생시킨다. 우리가 꿈해몽을 찾아보듯이, 분석상황에서 방어전략에 네이밍을 붙인 다는 것 자체가 쾌락의 측면이 있다. 증상에 이름을 붙이듯 말이다. 라깡 정신분석에서는 이러한 향락은 주지 않는다. 주지 않을 뿐더러 이러한 방어기제에 대한 얕은 지식마저 분석실에서는 중요한 취급을 못 받는다. 그렇다 할지라도 정신분석가라면 이러한 이론에 대해 알아가고, 흡수하고,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편견이 되지 않도록 투쟁해야 할 것이다.  

프로이트의 믿음

      무의식은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가? 저자는 1장과 2장에 걸쳐 어떻게 무의식이 고안되고, 그것과 조우에 이르는 테크닉에 대해 언급한다. 프로이트는 억압된 소망이 무의식적인 것이 되어 우리의 마음에 격리된 것으로 보았다. 격리된 그 기억은 다른 기억과 연합하여 현실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가장 간단한 테크닉은 모든 상황을 분석수행자와 검토하고 자세히 알아보는 것이다. “촉발원인”을 추적하여 기원을 찾고 증상을 구조화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 억압된 생각과 소망, 무의식에 접근할 수 있을까? 프로이트에 따르면 우린 거기에 접근할 수 없다. 의식적인 것은 무의식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의식은 ‘꿈, 실착, 재담 등’ 과 같은 오류에 의해 잠시 드러났다가 사라진다. 무의식은 ‘내부의 이방인’과 같은 것이므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영토이지만, 정신분석을 통해 우리는 ‘그곳에 갈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 곳은 믿지 못하면 영영 가지 못하는 곳이기도 하다. 저자는 무의식을 컴퓨터에서 일종의 ‘바이러스’라고 비유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것은 점진적으로 우리를 감염시키고 망쳐놓기도 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주인이라는 것은 착각이라는 것이다.  

안나 O. 라는 꽃

      안나 O.는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발견하게된 중요한 첫번째 사례이다. 이미 무의식의 개념이 있었지만, 프로이트는 안나O의 사례로 무의식을 발명한 것과 다름없다. 종종 도라와 안나가 헷갈리기도 했는데, 모두 병약한 아버지와 관련된 히스테리 신경증 증상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안나의 증상은 다양하고도 기괴하였다. 그녀의 증상 중에 하나인 신경성 기침은 그녀의 분열된 두 마음의 존재를 드러내었다. 아버지에 대한 도리를 다하는 좋은 자기와 춤추러 나가고 싶은 나쁜 자기와의 갈등속에서 이웃집에서 들려오던 음악소리를 가리는 기침이 터진다. 저자는 안나의 증상은 “분열 속의 궁여지책”이며, “증상은 곤경속에서 자신을 구출”한다고 말한다. 또한 갈등에 대한 “타협”이라고도 말한다. 나아가 라깡은 증상은 향락(주이상스)이라고 까지 말하는데, 증상이 상실한 것을 보상해 준다는 측면에서 그러하기 때문이다. 안나의 증상의 기원은 마지막날 상기되었다. 딸의 도리를 다하려는 그녀의 노력, 욕망의 포기가 궁극적으로 증상의 원인이다. 대타자가 강요한 ‘좋은 딸의 이미지’ 때문에 그녀는 병이 들었던 것이다. 우리는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너무 열심히 하고, 자신을 속이면서 하다가 병이 든다. 신체적인 병이 오던지, 정신적인 병이 오던지, 우리의 억압된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 억압된 것은 어떻게 돌아오는가? 우리는 억압하고 그것을 격리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갖은 신체증상으로 나타난다. 마비, 거식증, 구토 등등 그것을 신체화 증상이라고 부른다. 어쩌면 이런 신체 증상이 무의식의 발현이라는 것을 우리는 “강하게 부정”할지도 모른다. 정신분석에서 이러한 부정은 무의식이 멀리있지 않다는 것을 뜻할 수도 있다. 

무의식은 의식의 정반대이다  

   일반적으로 정신분석은 매뉴얼이 없고, 테크닉이 없이 분석수행자 개별성에 입각한 실천이라고 말한다. 테크닉이 없는 것이 테크닉이라고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의식에 이르기 위해 저자는 분석가들이 알아야 할 몇 가지 방어기제를 무의식에 접근하는 테크닉으로서 설명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테크닉이 언제나 옳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개인적 생각으로는 이 테크닉들을 장착하고 일상생활에서 타자들의 말을 들으면 많은 경우 곧이 곧대로 들리지가 않는다. 오류를 줄이기 위해 우리는 단정짓지 말아야 할 것 같다. 프로이트는 ‘중요한 사건들이 마음속 어딘가에 등록되고 기록’ 된 것으로 여겼고, 이를 밝혀내기까지는 ‘수많은 연상작업’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또한 분석가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분석수행자 자신이 ‘부정’하거나 ‘부인’하거나, 혹은 ‘과도히 열심히 시도하는 것들’ 등 이다. 정신분석에서는 “하찮음”을 보호하는 테크닉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의식은 무의식에 대해 무지하므로, 분석수행자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 중요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임상에서 개인적으로 느낀 것은 중요한 것은 하찮은 것이 되고, 하찮은 것은 귀하게 되는 역전이다. 이러한 역전은 의미의 사슬을 끊는다. 무의식의 참여를 위해 분석가는 의도적인지, 비의도적인지 모를 언어로 분석수행자의 언어를 끌고간다. 특히나 부정적인 단언을 주목한다. 저자는 “아니오”를 제거해 보라고 말한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기도 하다. 
 무의식적 생각을 변장시키는 것은 “투사”이다. 텍스트 속에 사례는 한마디로 말해서 “바람핀 놈이 의심한다”한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생각해본다. 만약 ‘의처증, 혹은 의부증은 바람피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는 것인가?’ 혹시 무의식적 진실이 의식에 투사된 것은 아닌가? 나를 속이고 있는 것은 타자인가? 내 자신인가?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예요”라는 말을 많이 하다. 또한 해석할 수 없는 꿈은 “개꿈”이라고 말한다. 의식적으로는 유치하고, 사소한 것들은 분석상황에서 포착해야할 무의식의 조각이다. 이 말이 나오면 일단 주목해보자. 한편, 무의식의 의식의 정반대라는 말은 우리의 ‘증오’를 걱정으로 둔갑시키는 것도 포 함된다. 억압된 모든 소망이 반드시 두려움, 걱정, 불안의 형태로 변장하기도 한다. 아버지가 죽었으면 하는 소망이 아버지를 걱정하는 것처럼 전치된다는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분석 수행자의 모든 말을 반대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무의식은 언제나 ‘번역’하기 까다로운 일종의 외국어이기 때문이다. 

정동의 블루스

      브루스 핑크는 강박증자는 사고와 정동이 분리되어 있다고 말한다. 개인 분석과정에서 사건은 기억나지만 거기에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노와 슬픔은 적중하지 못하고 항상 엉뚱한 자리에서 터졌다. 히스테리자는 기억을 억압하고 정동이 자유롭게 ‘미친듯이’ 떠다니다고 말한다. 지인 중 하나는 뭘 물어보면 모든 것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큰 기침 소리, 터져나오는 짧은 혼잣말 등의 증상을 가지고 있다. 강박증과 히스테리 둘 다 정동은 억압되지 않는 것이다. 저자는 이 정동을 ‘무의식으로 가는 티켓’이 된다고 말한다. ‘카타르시스’에서 멈출 것이 아니라 무의식에 이르는 열쇠로 삼자는 것이다. 나 자신의 고고학자 그리하여 이 모든 테크닉을 이용하여 우리 유물을 발굴해야 한다. 나 자신의 고고학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증상의 기원 뒤에는 대타자의 대타자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거기에는 일련의 우연이 존재할 뿐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런데, 증상의 기원을 추적하여 그 기원에 다다르면 증상이 소멸되는가? 저자는 “그런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고 말한다. 나는 이 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프로이트는 말치료를 통해 증상이 해석된다면 그것이 해소된다고 보는 관점에 대해, 의구심이 들었다. 개인적 경험에 의하면 교육분석을 마쳤지만, 증상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근본환상이 무너지고, 역사는 다시 씌어지는 것 같았지만, 다시 제자리인 듯 불안이 몰려왔다. 그러나 그 양상은 조금 달라져 있긴 하다. 적어도 이제 그것이 스스로가 만든 주이상스의 지옥임을 알아볼 수 있기에, 증상과의 동거가 가능해진 것이라 생각한다. . 날카로운 기표들도 손에 없고, 이제 더 이상 꿈을 거의 꾸지 않는다. 무의식이 문을 닫은 것만 같지만, 용암은 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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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11-10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새로운 이웃님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댓글 남겨야할 거 같아서 ㅋㅋㅋㅋ 저는 프로이트를 ‘아직’ 읽지는 못했지만, ‘방어기제’를 해석하는 것에 몰두한 점이 향락을 발생시킨다 라는 구절이 기억에 남아요.
그 많은 분석, 해석, 개념화 자체가 서구(철학)의 방어기제가 아닌가. 그 자장안에서는 프로이트도 자유롭지 않았구나.. 하고 생각해봅니다. 라벨링해서 분류에 가둬버리는 거… 명쾌하긴 하지만 언제나… 갑갑하잖아요…?!..혼자 도가도비상도 외챠보고갑니다..!

바람의_피부 2024-11-10 1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이렇게 긴 댓글은 처음입니다. ㅎㅎ 프로이트는 그 이름들을 발명했다는 점에서 주체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만약 알 수 없는 증상으로 고통받다가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면, 작은 안도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되는 그런 쾌락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라깡에 관심을 가지신거 같아 몹시 반갑고, 정성들인 포스트도 잘 읽었습니다~

공쟝쟝 2024-12-11 17:55   좋아요 0 | URL
그 작은 안도감...을 쾌락이라고 표현하시네요!
저는 ‘말‘에 관심이 많아요. ...... 사람들이 다 자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느끼거든요 :)
라캉은 작년부터 입문서 등등 열심히 두리번대고 있는데 점점 정신분석에 호기심이 폭발해서요....
바람의 피부님과 이웃하면서 글을 더듬더듬 읽어보고 싶습니다.

바람의_피부 2024-12-12 09: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네 정신분석에 관심을 가진 분이 계셔서 반갑습니다. 이미 공쟝쟝님께서는 ˝의미가 없다는 의미˝를 알고 계시니, 정신분석의 핵심을 꿰뚫고 계신 듯 보이네요^^ 티스토리에서도 정신분석관련 블로그(studiountold)를 운영하고 있으니, 관심있으시면 놀러오세요. 그리고 ‘말‘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저도 ‘무의식의 말‘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요즘 사사키 아타루 읽고 계신던데, 저도 재밌게 읽었습니다. 느리게 즐겁게 함께 읽어나가 보아요

공쟝쟝 2024-12-19 20:10   좋아요 0 | URL
좋아요, 느리게 즐겁게 함께 읽어나가보아요!
정신분석을 받기로 했습니다. 그냥 받아봐야겠다 싶어졌어요. (말은 이렇게 하지만, 그냥은 아니겟지요? ㅋㅋㅋ) 블로그 즐겨찾기 해두겠습니다! 또 만나요~

바람의_피부 2024-12-19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네 꼭 받아보세요. 인생의 변화가 찾아온다고 저는 믿고 있어요
 


형상이란 형상 없는 것의 흔적이다. 형상 없는 것이 형상을 배태하는 것이다. 그 역이 아니다. 질료가 현전하는 즉시 형상 없는 것이 형상을 배태한다. 하지만 질료는 극단적으로 아득해지는 것이다. 질료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형상이 가장 하등할 정도로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랑할 만한 것이 형상에 의해 형상화되는 존재이지 질료가 아니라면, 질료 안에 있는 형상이 영혼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라면, 지성이 그보다도 더 고등한 차원에서 형상이고 또 욕망할 만한 것이라면 우리는 ‘아름다움‘의 제일 본성이 무형의 것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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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바깥은 없다. 

데리다의 텍스트 바깥은 없다.는 언어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회의주의가 아니라, 텍스트를 관장하는 초월적 심급이 없다는 뜻이다. 데리다는 텍스트 바깥 실재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사물은 곧 기호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데리다는 인간의 역사도 필연적 역사가 아니다. 인간의 액자화, 의미화를 통한  역사의 구성인 것이다. 

데리다의 텍스트 바깥은 없다는 대타자가 없다는 말과 같다. 


데리다의 액자화 

텍스트 바깥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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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개념어총서 WHAT 6
고병권 지음 / 그린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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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읽었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고병권선생님의 민주주의 근거없음, 아르케 없음은 정신분석의 '대타자가 없음'을 상기시킨다. 사회를 지배하는 척도를 다수라고 한다면 그 척도에서 먼 것이 소수일 것이다. 우리의 민주주의 정체, 그 척도가 수가 많음의 다수라면 그 다수에 배제된 소수들의 힘, 잠재력은 셀 수 없는 것이다. " 우리는 (소수와) 다만 교섭하고 소통하고 서로를 변용 시킬 수 있을 따름이다. 그 역량이 우리 사회 민주주의 역량이 될 것이다. 들뢰즈 가타리는 '소수자는 단 한 사람의 성원으로 구성된다 해도 셀 수 없는 능력을 갖고 있다' 고 했다." 소수성이 어째서 중요한가에 대한 나의 막연한 의문에 실마리를 가져다 주었다. 얼마 전 책을 버렸는데, 다시 읽어보고 싶어 아쉬운 생각이 든다.  

‘미국의 민주주의‘의 저자 알렉시스 토크빌은 민주화에 대한 미묘한 입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한편으로 프랑스혁명을 긍정하고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주화에 대해 지지의사를 밝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화와 더불어 대중의 노예화가 나타나고 있음을 우려했다. 그는 미국의 민주주의에서도 전반적으로 미국의 민주주의 혁명을 추켜올리면서도, 점차 자율성을 잃고 중앙권력에 예속되어 가는 미국 시민들을 우려하며 글을 맺는다.
(중략) 그는 평등을 부인했다기 보다 평등-예속 짝을 부인했던 것이고, 이것을 평등-자유(자율)의 짝으로 바꾸려했다고 할 수 있다. 중앙의 권위 아래서 평등하지만 아주 무기력하고 서로에 대해 무관심한 개인을, 평등하면서도 서로 협력하는 공동의 존재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 P35

앞서 나는 민주주의의 ‘아르케없음‘으로부터 민주주의가 통치자, 지배자의 권력이 아니라 ‘데모스의 힘‘이라고 주장했고, 민주주의란 고유의 근거를 갖는 정체가 아니라 ‘근거없음‘의 정체라고 주장했다. 즉, 민주주의 정체를 규정하는 특정한 근거(원리, 척도, 기준)를 갖지 않으며, 오히려 그 근거가 한계를 드러내는 곳, 그것이 비판에 직면한 곳에서 제기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민주화가 의미하는 것은 ‘교정‘이 아니라 ‘이행‘일 것이다. 즉 정체를 그 척도에 비추어 바로잡는 일이 아니라 척도 자체를 바꾸는 일이 민주화라는 것이다.. - P37

따라서 민주화의 성패는 체제의 ‘이행‘에 있는 것이지 그것을 가장 많이 주도한 사람이 최고 권력자 자리에 앉았는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설사 민주화가 그것을 주도한 사람들의 집권을 낳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과적인 것이고 상대적으로 부차적인 문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한때 민주화 세력이었고 그 정부가 민주정부를 자칭한다고 해서 민주화투쟁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 민주주의를 특정한 아르케, 특정한 정부, 특정한 세력과 동일시 한느 사람들에게는 민주정부에 대해 민주화 투쟁이 일어난다.. - P37

민주주의를 좌우 엘리트들이 벌이는 대중 획득 게임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물론 정책과 제도의 영역은 중요하다. 민주주가 바로 그것들은 아니지마, 민주주의는 또한 그것들과 관계해서 정의되기 때문이다. ... 이는 민주주의가 그 자체로는 특정한 역사적 정체와 동일시될 수 없으면서도 동시에 민주화 투쟁이 역사적 형식을 취하는 이유다. - P38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형상 없음‘은 데모스가 무엇보다 다양한 형상들의 번역가능하고 소통가능하며 연대가능한 집합적 신체라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근거를 공유하지 않고 척도를 공유하지 않는 다양한 존재들이 공동의 삶을 구축할 수 있는가, 서로 연대할 수 있는가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민주화란 이처럼 자격이나 조건, 척도를 넘어 다양한 존재들이 연대하는 것이고, 자기에게 부여된 형상을 넘어 공동의 삶, 연대의 삶을 구축하는 것이기도 하다. - P39

이제 우리는 ‘민주주의는 다수자의 통치인가‘라는 물음에 답할 때가 된 것 같다. 이미 앞에서 충분히 시사한 것처럼 나는 민주주의를 다수성의 획득과 동일시하는 시각에 반대한다. 여기서는 다수성이란 수적인 의미는 아니다. 들뢰지와 가타리가 말한 것처럼 다수성과 소수성은 일차적 수적인 구분이라기보다 척도 공리에 따른 구분이다. 한 사회를 지배하는 척도, 그것이 신분이든, 재산이든, 지식이든, 인종이든, 종교든, 그 척도에 의해서 다수성과 소수성이 규정된다.....반면 소수성ㅇ은 그 척도로부터 거리가 얼마나 먼가에 따라 규정된다고 하 ㄹ수 있다. - P40

그런데 민주주의 아르케가 ‘아르케 없음‘이고, 데모스의 형상이 ‘형상없음‘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민주주의가 무엇보다 ‘‘소수성의 문제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수성과 소수성이 숫자가 아니라 척도(아르케)의 문제라고 했지만, 분명한 것은 만약 숫자가 척도의 역할을 한다면 그때는 숫자도 문제가 될 것이다...
어떤 정체가 ‘수‘를 척도로 삼는다면 그곳에서 민주화 투쟁은 수라는 척도의 싸움이 될 것이다. 만약 수적인 ‘다수‘로 모든 걸 결정한느 정체를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부른다면 민주주의 이념이란 기껏해야 한 사회를 지배하는 상식과 통념 이상이 아닐 것이다. 나는 이 경우 통념에 맞선 소수적 투쟁이야말로 민주화 투쟁에 합당한 이름이지, 다수 의견을 이유로 그것을 제압하는게 민주주라고 생각지 않는다. 만약 어느 논자의 말처럼 민주주의 핵심이 "정당들이 특표를 위해 투표자 다수의 관심이나 선호에 반응하는 노력"에 있다면, 소수자들은 아마도 그런 민주주의에 의해 폭력적 배제를 경 - P41

하지만 이 글에서 말한 것처럼 민주주의가 근거 아래서 근거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그 심연에서는 어떤 것도 다른 것을 배제할 권위를 갖지 않는다. 거기서 모든 것들은 원초적으로 평등하기 때문이다.거기서는 수적으로 다수를 형성한 삶이 그렇지 못한 삶에 대해 우위를 차지할 근거가 없다. 우리는 다만 교섭하고 소통하고 서로를 변용시킬 수 있을 따름이다. 그 역량이 우리 사회 민주주의 역량이 될 것이다. 들뢰즈 가타리는 "소수자는 단 한 사람의 성원으로 구성된다 해도 셀 수 없는 능력을 갖고 있다" 고 했다. ....‘민주주의 힘을 세려 하지 말라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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