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 사랑, 바디우
박영진 지음 / 에디투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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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환은 사랑에 관해 어떤 함의를 가질까? 증환은 성적 비관계의 지양을 통해 한의 성과 다른 성 사이에서 관계를 조직한다. 증환은 비관계의 동인이다. 라캉이 말하듯, "증환이 있는 한에서, 즉 다른 성이 증환에 의해 지탱되는 한에서, 관계가 있습니다." (라캉세미나23 p.84) 이 관계는 팔루스 함수와 담론 작용에 의해 규제되는가? 답변은 긍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라캉은 여자가 남자의 증상이라면, 남자는 여자의 재난이다.(같은책) 여자가 남자의 증상인 것은 타자적인 성으로서의 여자가 팔루스적 주이상스라는 남성적 증상으로 인해 대상a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자가 여자의 재난인 것은 남자가 여자로 하여금 팔루스 함수 너머의 과도한 주이상스에 직면하게 함으로써 정신병적 삽화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124

그렇다면 증환적 매듭이 관계를 지지한다 하더라도, 이 관계는 여전히 기존의 법과 담론에 의해 구조화된 것으로 드러난다. 왜냐하면 증상(여자)과 재난(남자)사이의 비대칭적 관계가 결국 팔루스 함수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은 증환이 새로운 상징적 질서의 매개자로 기능한다는 입장과 일관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자. 그런데 사실 증환은 팔루스 함수와 같은 수준에 놓일 수 없다. 왜냐하면 증환은 팔루스의 함수가 무너지는 지점에서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기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난점으로부터 유일한 출구는 남자가 하나의 증환이며, 여자도 또 다른 증환이 되는 "상호 증환적 관계"에 있으며, 라캉은 이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라는 증환과 그녀라는 증환이 있습니다. 이것이 소위 성관계로부터 남아 있는 전부입니다. 성관계는 상호 증환적 관계입니다." " - P125

상호증환적 관계가 더 이상 비관계의 구멍에 대한 규범적인 구멍마개가 아님을 뜻한다. 동시에 그것은 비담론적, 비팔루스적, 비부성적 관계를 건설하는데, 이것이 곧 정신분석이 다루는 사랑의 게임의 규칙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상호 증환적 관계는 사랑에 대한 정신분석적 재창안의 고유명이다.
상호 증환적 관계는 단독성의 결합과 같다. - P125

요컨대 매듭이론은 사랑이 더 이상 상상적 자아, 상징적 결여, 실재적 주이상스와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증환적 단독성에 관련됨을 시사한다. 사랑은 "증환이라는 바이러스를 소통하는 방법"에 대한 하나의 독창적인 해법이다. 사랑은 나 자신의 증환을 구축하는 것이며, 다른 증환을 하나의 단독성으로 포횽하는 것이며, 증환적 단독성을 결합하는 것이다. 사랑은 무의식적 증상을 훈습하고 새로운 상징적 질서를 연마하면서 성적 비관계를 지양하는 상호 증환적 관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상호증환적 관계로서의 사랑은 더 이상 아버지의 이름의 작용에 의존하지 않으며 양가감저으로서의 사랑을 넘어선다. 앞서 보로매우스 매듭과 함께 이러한 최초의 진리는 전복되고 사랑에 관한 새로운 경구가 출현한다. "당신의 증환과 동일시하고, 상호증환적 관계를 창조하라!" - P127

사건으로서의 사랑은 공백이나 정의할 수 없는 X에 의해 작동된다. X는 사라이 어떠한 기존 지식에 의해서도 포착되지 않게 한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사랑은 끝내 비어 있는 채로 남을 것이다.,,,, 사랑은 배반과 함께 말소된다. 충실성은 단순히 육체적 정신적 헌신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계속해서 사랑의 상황을 재발명하고 확장시키는 주체적 과정을 가리킨다. .. 충실성을 가로막는 것은 제3자나 삼각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주체 안에 존속하는 자아다. - P131

충실성은 이 작은 주인(자아)을 초과하는 용기, 이상화에의 유혹 및 달콤한 기만과 투쟁하는 용기의 행위일 것이다. 사랑은 자아에 굴복하지 않을 용기, 둘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과정에 헌신한 채로 남아 있으려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 - P132

사랑의 윤리학이 사건, 충실성, 진리의 보로매우스 매듭을 형성한다.
... 비록 바디우가 사랑의 이상적인 형식을 제안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윤리학은 사랑의 악에 대한 인정을 통해 라캉과 만난다. "사랑은 모든 악의 원천이다. " 사랑의 악에 대한 비관주의와 사랑의 선에 대한 낙관주의라는 이분법은 성립하지 않는다. 악이 없다면 사랑의 윤리학은 의의를 상실한다. 사랑에서의 악의 현존이 우리를 급진적인 만남, 불굴의 충실성, 둘의 절제된 힘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사랑은 악과 씨름함으로써 스스로를 완성한다. ... 사랑은 악을 통해 스스로를 넘어선다. 사랑은 악이라는 내적인 과잉에 연루되어 있다. 순수한 선으로서의 사랑이 환영적이라면, 순수한 악으로서의 사랑은 파괴적이다. 사랑은 선악 너머에 있다기 보다는 선악 사이에 있는 것이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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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사랑, 바디우
박영진 지음 / 에디투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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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으로서의 사랑은 덧없고 불안정하다.... 불가능성이 우연성에 의해 점이 찍히는 짧은 순간 실존하기 때문이다... 라캉에게는 사랑의 진상은 과정이 아니라 만남이다...그러나 사랑은 만남의 발생을 예찬하는 것이 아니라 만남의 결과를 전개하고 만남의 무작위성을 극복하는데 있다... 바디우의 비판은 여기에 있다... 단계별로 집요하고 끈덕지게 이루어진 시간적 영원성의 구축, 둘의 경험의 구축을 지지 한다. (사랑예찬,90쪽),,, 둘의 관점으로 새로운 주체적 세계를 충실하게 창조하는 데 있다. 오직 충실한 과정에 대한 불굴의 헌신과 집요한 전념만이 시간 안에 영원성을 구축하는 사랑을 지지 할 수 있다. (p.93)



오래전에 사두었지만, 올해들어 다시 읽기 시작했다. 

라캉과 바디우 그리고 사랑을 저자는 보로메오 매듭처럼 묶었다. 

수도 없이 밑줄을 치느라 읽기가 어렵지만, 진지하고 복잡하고 재미있다.  


저자는 라캉과 바디우의 뒤얽힘의 지점에는 사랑이 있다고 주장한다.  

라캉은 만남이 있어야 사랑 개시 되기에 "만남으로서의 사랑"을 주장한다. 사랑이라는 불가능성이 우연에 의해 짧은 순간 실존의 점이 찍힌다. 

반면 바디우는사랑의 개시를 인위적 '노고'에 의해 "영원성의 구축"이 가능하다고 본다. 

바디우의 "과정으로서의 사랑"은 "주체적 세계의 구축" 이자, 나와 타자의 새로운 진리의 발명품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의 문제는 이 세상의 사람의 수 만큼 다양한 무한의 영역일 것이다. 

관건은 사랑은 하나로 수렴되는 것이 아니라, 둘의 새로운 단독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 것은 하나와 어떻게 다른 것일까? 

하나도 둘도 아닌 새로운 둘을 하나로 만드는 것일까?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닌 새로운 두 주체의 공동체일까?  삶을 예술로 만드는 일 속에 사랑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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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신분석 이론과 실천에 대한 다른 접근방법들을 잘 알아보려고 하다가 분석가들이 흔히 서로의 저술에 대해 서투른 독자가 된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P.519)

 

브루스 핑크는 각 분석가들은 서로의 이론에 대해서 거의 서투른 독자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분석가의 기표를 빌려와 자신만의 의미로 썼다는 것이다. 각 학자들은 이론의 구축 속에서 유명 분석가의 등 뒤에서 숨을 곳을 찾아내고 뒷문으로 용어를 들여왔다는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도 많은 저자들이 2차 문헌만을 통하여 지식을 획득하였고, 저자들의 저술에 대해서는 자명하거나 널리 합의되어 논평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원래의 텍스트와 상당한 틈새가 드러난 것을 알게 되었고, 주요 분석가들의 원문에 접근하는 것 밖에 이 구멍을 채울 방법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핑크교수는 이 책에서 각 학파의 이론을 정리하고, 계보를 보여주었다. 정신분석 개념들의 역사와 발전에 관한 연구는 그 영역의 확고한 파악을 위해 필요한 일이기에, 이차서적을 읽기보다는 프로이트, 클라인, 위니캇, 비온 등의 분석가들의 저술에 직접 접근하라고 권한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시간이 부족하다. 2차서적을 통해 오독을 감수할 것인가? 부족하지만 원문에 접근하여 그 만 볼 것인가? 나의 경우 수박 겉핡기식으로 다른 학파의 이론을 우회적으로 접근해 보지만, 아직은 초보적인 수준에서 각 학파의 주요 학자들의 이름 정도 알게 되었을 뿐이다. 이런 식의 이해가 또 하나의 고정관념을 만드는 것일 수 도 있을 것이다. 챗지피티의 등장으로 우리는 이제 텍스트를 읽어 개요를 긁어내는 것 아니라, 개요를 읽고 텍스트를 읽는 독서방식이 채택하기도 한다. 여러모로 이해라는 쉬운 길을 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정신분석의 의미의 전달, 해석의 차원을 유한한 상상계적인 것으로 본다. 우리가 의미와 개요만을 취하는 사이에 주체는 소외되는 것이 아닐까? AI는 무의식이 없지만, 대타자의 언어를 사용하여 인간을 상담할 지경에 이르렀다. AI가 말아주는 정신분석은 결락 없는 언어구사로 그럴듯해 보이지만 텅빈 말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인공지능의 사용으로 남는 시간을 새로운 은유를 발명하는데 써야 한다.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영역은 '은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시간이 없는게 아니라, 텍스트가 주는 무의식적 변화를 두려워 하는 것은 아닐까? 기표가 인간의 무의식을 변화시킨다. 꽉찬 말을 가진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무의식의 입장에서는 부담이다. 대타자로서의 무의식은 현상을 붙잡고 놓지 않지만, 실재적 무의식은 끊임없이 불안을 양산하여, 뭐든 하게 만든다. 

프로이트로부터 시작해 현대정신분석에 이르기까지, 정신분석은 몇 개의 주류로 나뉘어져 왔다. 라깡정신분석은 현재 정신분석의 주류 속성(전이, 역전이, 성격분석, 정동우세, 전문적인 중립성)에 반대되고, 주체상호주의-대인관계-자기심리학파의 속성으로 간주했던 많은 테크닉)에도 반대한다.”고 핑크는 말한다. 정신분석은 미국 뿐아니라 영국학파와도 수렴될 수 없을 것이며, 그 차이는 너무 구조적이여서 돌이킬 수 없는 차이점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신분석이론 각 학파의 고유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수렴점을 찾고 싶어한다. 수렴은 안정이기 때문일까? 브루스 핑크는 9장에서 정상화를 다루면서 정상성이란 각자의 정상성 밖에 없다고 말하듯이, 각 이론의 정상성에 대한 논의은 어쩌면 부질 없다. 그렇다고 정신분석의 다원주의, 통합이라는 늪도 경계해야 할 듯하다. 각자가 뾰족하게 정밀한 테크닉을 세공하는 장인정신이 필요한 영역인 것이다.

 

브루스 핑크에 따르면 영어권은 테크닉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지만, 불어권의 분석가들은 전염병처럼 피한다고 말한다. 특히 라깡학파는 그러하다. 영어권 임상가들은 라깡식의 테크닉이 무엇인지 모르고 라깡의 방식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라깡의 테크닉의 실제는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구체적 기술같은 것은 전수되지 않지만, 핑크교수는 정신분석테크닉에서 신경증 환자들로 하여금 억압되어 왔던 것에 도달되어야 한다는 목표와 무의식의 충격을 주는 지도원리는 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대의 환자들은 오이디푸스 해석에 익숙해져 충격의 가치가 사라진 것처럼 무의식의 진화와 더불어 정신분석의 테크닉 역시 계속 진화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술은 계속해서 해체하고 다시 진화하여야 한다

알려진 테크닉은 이미 무용한 테크닉이기 때문이다. 한번 발명된 테크닉은 바로 대타자에게 흡수된다. 유일한 테크닉이라면, 정신분석작업은 전이, 해석을 넘어 내담자 스스로 발명한 테크닉만이 남는 곳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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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허무에 맞서는 인간의 발명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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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건물에서 작은 창문을 열고 누군가가 떨어져 죽는다. 자살인지 뭔지 아직까지는 확신할 수 없다. 

뒤를 이어 또 다른 젊은이가 떨어져 죽는다. 그리고 그 옆건물에서도 떨어져 죽는다. 

계속해서 사람들이 무엇에 홀린 듯 아래로 떨어진다. 

'퍽'하고 으깨어지는 소리도 없다. 아마 꿈 속에서도 조차 그 소리까지는 너무 끔찍하므로 검열을 통해 누락한 듯한다. 

그런데 꿈에서 왜 소리가 나지 않는지 의아하게 생각한다.  

떨어지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사람들이 비처럼 떨어져 죽네"라고 말하고 잠이 깬다. 


어떤 감정이였는지는 나는 확실히 말하기가 어렵다. 

안타까움도 끔찍함도 무서운 것도, 그렇다고 아무렇지도 않는 것도 아닌데,, 일어나서 어떤 감정이였는지 나는 말하기가 어려웠다. 

꿈의 재료들은 어디서 왔는지는 알겠다.

그렇지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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