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프랑켄슈타인

 victor가 무엇일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오늘 이영화에 프랑켄슈타인의 이름이란걸 알고 깜짝 놀랐다
컴버비치가 나오는 영국 영화 아니 연극에서 그 이름이 빅터였다.

우연의 일치일까. 무의식의 장난일까.

전혀 나는 의식하고 있지 않았지만, 나는 어느새 이 연극(영화)를 보고 있다.

사실 햄릿과 고민하다가, 프랑켄슈타인이 더 보고싶어서 봤는데, 빅터라니..

 

사랑을 받지 못한 자의 절규.

 '만들어 달라고 한 적이 없어 나는' 그는 절규한다.

 

눈이 보이지 않는  한 노인 만이 그의 친구가 된다.

대타자의 사랑이라도 받아보고자 했지만,

그를 만든 신은 그를 두려워하고 그를 abandon한다.

괴물이라 불리우는 그의 고독은 점점 원한과 함께 깊어져 간다.

그를 만들어준 그의 신, 빅터 프랑켄슈타인에게

자신과 닮은 신부를 만들어달라고 그래서 영원히 그와 함께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살겠다고 애원을 하지만,

그의 신은 또 한번 그를 버린다.

그를 만든 신은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 대한 오만과 두려움에 떤다.

 

애초의 언어도 복수도 사랑도 몰랐던 그는

인간이 되었다. 인간이 된 이상 인간처럼 되어야 하는데,

그는 끔찍한 고독속에서 외롭게 살아야하는 그 지독한 운명에 포효한다.

인간의 그 오만함, 다름에 대한 배척,

연극은 그래서 인지 다양한 인종을 가족을 만든다.

 

하나, 이해가 잘 안되는 것은 왜

그 아름다운 시체를 괴물 프랑켄슈타인에게 넘기지 않았을까.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믿지 못하여 두려운 것일까.

아니면 괴물에게 아름다운 여인을 넘기기 싫었던 것일까,

사람인 자신도 모르는 괴물의 그 사랑이 질투가 났던 것일까.

 

그는 주인이자 노예인 그 신과 함께 몰락의 길을 떠난다.

 

 

컴버비치의 그의 연기는 놀라웠다. 너무나,

 

 

대사가 소설의 원작과 같을까?

프랑켄스타인 소설을 읽어봐야 겠다.

무대장치며, 그의 체액이 흐르는 그 무서울정도로

진실한 연기에 나는 거의 압사당할뻔 했다.

괴물 프랑켄스타인 완전한 결핍이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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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 일찍 나왔다.

5시에 시계를 맞춰놓고 자는 둥 마는 둥

밤새 뒤척이기를 벌써 6개월째.

깊은 한숨에 혼잣말까지 늘었다.

그만해야 할까.

우울증이라도 걸릴까봐 무섭다.

멜랑꼴리아의 저스틴처럼

나의 다리가 어느날 너무나 무거워 못 일어날까봐 두렵다.

 

 

나도. 반대로 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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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싶었던 영화 패터슨을 어제 보았다.

짐 자무쉬 감독의 대한 정보는 없었고, 영화에 대한 정보도 거의 없이 보게 되었다.

 

 

시를 쓰는 버스드라이버.

패터슨과 그의 부인 로라.

로라가 꿈에 나온 트윈스를 언급한 뒤로  

그의 눈에는 트윈스가 계속 목격된다.

트윈스는 이 영화에서 의미한 것은 무엇일까.   

닮았지만 다른 우리의 개별적인 삶. 개인들.

월화수목금토일. 반복되는 일상 - 차이와 반복의 철학을 얘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원본과 같을 수 없는 패터슨 비밀노트의 복사본 역시 트윈스의 일종이다.

마지막 일본 시인이 갑자기 등장하면서

원본과 사본의 간극에 대한 이야기는 패터슨에게 용기를 준다.

다시 패터슨은 시를 쓸 것이고, 그가 복사본을 만들어 놓을지 말지는 모르겠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트윈스에 대한 메타포를 발견하는 묘미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여운으로 남는다.

 

매일 반복되는 우리의 일상은 작은 차이를 두고 다르다.

영화는 일상을 시인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면 그것은 시가되고,

삶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속절없이 조용하고 격렬한 사랑. 그 둘의 사랑도

처음에는 매력적이지만 변덕스러운 성격을 가진 로라가 망쳐버리진 않을까 생각이 들었지만,  

로라 역시 꿈을 위해 일상을 예술로 바꾸고 있었다. 

패터슨은 조용히 일상을 보내지만,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인이고,

삶을 예술로. 하루하루를 똑같지만, 다르게 살아내려면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보는 것. 창조하는 것. 생각하는 것.. 소소한 기술을

발휘해야 할 것같다.   

 

 

일상을 예술로 만들어 버리는 위대한 예술가 이자 생활인.

내면의 소리를 따르는 고요한 생활인의 모습이 감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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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깡의 인간학 - <세미나 7> 강해: 윤리 그 자체인 인간 존재에 관하여
백상현 지음 / 위고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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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텍스를 끝없이 참조하는 해석자로서의 라깡이 응시하는ㄴ 것은 프로이트의 지식이 아니었다. 그의 집요한 응시가 지치지 않고 겨냥하는 것은 프로이트의 텍스트가 무너뜨린 문명의 페허와 그것에 벌어진 허무의 동공이다. -9-

죽음을 욕망하지 않느 ㄴ다면, 삶을 고정시키는 환영적 욕망의 기둥들을 무너뜨리지 못한다며, 그리하여 삶의 끝자레에 도달하지 않는다면 새로움이란 시작도차 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윤리학이 이곳에 있다. 정신부석 임상은 이와 같은 마음의 몰락을 준비하는 절차이다.
무의식의 환강에 사로잡혀 평생을 동일한 욕마의 구도를 반복하며 같은 장소를 맴도리기만 한느 우리의 자아를 페허로 이끌지 않는 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라깡은 주장한다. -10-

라깡의 존재론에서 인간의 본질은 공백 그 자체이다. 신경증자로서의 인간만이 공백을, 없음을, 즉 상실을 사유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라깡의 윤리학은 출발하고 있다. 욕망의 대상이 법과 초자아의 수로들에 의해 통제되는 유한성의 한계을 벗어나게 하는 윤리학. 그런 다음 그것을 큰사뭉릐 위상으로 전화시키는 윤리학. 달리 말해서 의미로 봉합된 사물의 외관이 아닌 사물의 존재를 공백인 그것을 사유한는 승화의 절차.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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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동안 읽어아할 책짐을 계속 이고 이동중이다 한권을 읽고이어서 바로 읽어야하기때문에 네권을 가지고 다닌다. 이제 한권을 덜을수 있게되었다. 한동일 저자의 라틴어 수업이 그 첫번째 책이다. 라틴어를 공부한다는 것을 생각해본적도 없어 라틴어가 먼지도 몰랐다.
라틴어를 공부한다는 것은 공부의 방법과 사고의 확장을
가져오는데도 큰 의미가 있다고 한다. 문법의 복잡성과 체계를 공부하다가보면 그렇게 된다는 얘기다.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들었다. 오로지 지적유희만을 위해. 라틴어라는 언어를 통해 배우는 문화와 인생. 저자가 살아오면서 다져진 인내와 겸허한 배움의 언어가 아름다운 책이였다. 시간을 통해 배우는 모든 것들에 겸손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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