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침, 공부하러 가는 길에 아빠 지갑처럼 생긴 까만 지갑을 주웠다.
다른 사람이 주우면 안찾아줄지도 몰라! 하는 생각에 얼른 집어들었는데 순간 아차싶었다. 땅바닥에서 지갑줍고 아싸 개득템! 하는 사람처럼 보이면 어떡하지. 내가 맨 앞에서 걸었기 때문에 뒤에 따라오던 두명이 내가 지갑 줍는 걸 봤을거야. 헐ㅠ 나 착한 일 하려고 그런건데 의심받는 기분이다.... 찾아줄거에요~ 라고 말해야 돼나.
나는 그런 의심을 잠재우고 싶어서 아주 과장된 행동으로 지갑을 열고 신분증부터 찾았다. 그런데 헐. 외국인 등록증!!!! 자세히 보니 우리나라에 일하러 온 필리핀 근로자인듯 했다. 나는 순간 한국인의 따뜻함을 보여줘야해!!!!!! 하는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나에게 한국인의 이미지가 달려있다!!! 빨리 찾아주고 따뜻함을 안겨주자!!!!
바로 파출소에 갖다주는게 맞나 생각하다가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보고 싶어졌다. 지갑 주인의 환한 미소도 보고싶었고 나에게 고마워하는 그 마음씨를 독차지하며 초긍정적인 아드레날린ㄴㄴㄴ을 느끼고싶었다. 현금 300달러에 만원짜리도 몇장 보였으므로 적은 돈은 아니니 그 액수와 나의 기쁨은 비례하리랔ㅋㅋㅋㅋㅋㅋㅋㅋ 열정에 불타올라 지갑 주인의 단서를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제일 먼저 보인 건 근처 공단에 위치한 회사의 명함이었고 그 명함의 주인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했는데 자기는 그 회사를 그만둔지 꽤 오래되었다고 했다.힝ㅠ 바로 난관이다ㅠ
이제 책상에 앉아서 본격적으로 단서 수집에 몰두했다. 아마도 필리핀에 있을 아내와 찍은 프로필 사진, 그 사진 뒤에 적힌 사랑의 속삭임. 똘망똘망한 눈망울의 아이 사진. 아마도 아들이겠지. 단서를 찾을수록 빨리 찾아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타국에 돈을 벌러와서 돈을 잃어버린데다, 아내와 아이의 사진까지 없으면 힘든 타국 생활을 어떻게 버티나. 신분증이 없어서 불법체류 의심이라도 받으면 어쩌나.
"주한필리핀대사관", "한국생활상담전문" 명함들이 나왔지만 지갑 주인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보였다. 의외로 결정적인 단서는 외국인등록증 뒷면에 있었는데 체류지가 적혀있었던 것이다!!!!!! 아 넘나 다행!!!! 체류지에 적혀 있는 회사를 네이버로 검색해서 사무실에 전화를 했고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점심시간에 만나기로 하고 장소를 정했다. 잘 전해주시겠지? 했는데 몇분 뒤 다시 전화가 와서는 지갑 주인이 직접 나오신다고 했다. 아 넘나 기뻤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드레날린ㄹㄹㄹㄹ희열ㄹㄹㄹㄹㄹㄹㄹㄹ
약속장소에 가면서 나는, 필리핀 사람이니까 영어로 말해야겠지? 일단 쿨하게 유어웰컴을 연습하고 keep your wallet...wallet이 맞나? purse하고 해야되나? purse는 동전지갑인가..? 시발 영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하면서 설렜다. 상기된 표정의 그는 나를 보자마자 캄사합니다!!!!!!!!!!했는데 한국말을 너무 잘해서 혼자 빵터졌닼ㅋㅋㅋㅋㅋ 예상대로 그는 나를 만나고 크게 안도하며 거듭 고맙다고 말했고 회사 이름이 적힌 남색 공장잠바의 품속에서 무려 신사임당 언니를 꺼내 건네려고 했다. 나는 그의 손이 안주머니로 향할 때부터 지금 뭐하는 거에요 하며 손사래를 장전하고 있었기에 그의 손을 민망함을 느낄 새 없이 다시 들어가게 할 수 있었고 이로써 나의 희열은 완성되었다.
물론 나도 단 한번의 유혹을 느끼지 않았던 건 아니다. 직장 그만두고 공부한지 하도 오래돼서 퇴직금은 다 썼고 밖에서 사 먹는 돈 아까워서 밥도 집에 가서 먹으니깤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것도 아침 왕창 먹고 최대한 오래 버틴 다음 3-4시에 한끼만 먹는다. 어우 불쌍해 눈물나네. 그치만 지갑을 줍는 행운 덕분에 300달러가 아니라 3만 달러치의 행복을 느낀 거같다. 타지에 돈 벌러 온 외로움과 서러움을 따뜻함으로 녹여줄 수 있다니!
이번 계기로 알게 된건데, 지갑을 주웠을 때 주인을 찾아주고 싶어도 단서가 없어서 힘든 경우가 많은 것같다. 여러분들도 지갑에 본인임을 표시해서 명함 꼭 넣어두세요! 명함이 없다면 연락처라도! 지금 당장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