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뜬금없지만, Henri Cartier-Bresson에게 정신이 팔려, 저녁 내내 그의 사진을 찾는 웹서핑으로 두어시간을 보냈다. 그 중에서 몇 장의 사진을 보는데, 연상이 되는 그림이 있다. 그걸 찾기 위해서, 서재를 뒤지게 된다. 그러니까 나는 그림만 기억할 뿐, 작가와 작품명을 몰랐고, 그걸 알고 싶었던 것이다. 다른 웹페이지를 꾸미는데, 브레송의 사진과 내가 찾는 그림이 적절하게 매치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나는 그만 못 할 일을 해버렸다.
뭐, 따지면 많지도 않지만, 그래도 쉰 권이 넘는 미술관련 책들을 일일이 다 뒤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 찾았다. 분명히 내가 가진 책 안에서 그 그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같은데- 혼잣말을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서 없는 그림이 나와줄리도 만무하고. 아무튼.
그림책을 뒤지다가, 오랜만에 이 책을 뒤적이게 된다. <지독한 아름다움>이 제목이고, 부제는 '김영숙 아줌마의 도발적인 그림 읽기'다. 그런데, 이 책, 아줌마의 시선이 그리 크게 전제되지 않은, 그저 그림읽기,에 관한 책이다. 알라딘에서는 '미술이야기'라는 장르에 들어간다. 그러니까, 이 책은 여성의 시선으로 보는 그림에 관한 이야기,일뿐 아줌마여서 그림을 더 특별히 본다거나, 아줌마여서 그림을 더 쉽고 간편하게 보게 안내할 것이라는, 뭐 그런 종류의 선입관은 보기좋게 허물어트리는 책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굳이 '아줌마'라는 단어를 꼭, 사용해야 했었을까.
아줌마, 대신 소녀나 아가씨, 엄마나 아빠, 혹은 아저씨로, 언니나 오빠, 로 치환했을 때, 저 부제와 얼만큼의 거리감을 조절할 수 있겠는가, 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물론, '아줌마'라는 단어와 '도발적인'이라는 수식어구의 만남이 문제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전에, 내가 앞문단에서도 범한 오류인 '아줌마=쉽고 단순' 이라는 도식에 따라 더 특별한 기대를 하게 한다는 것. 그림읽기,라는 일반인에게 거리가 있을 이야기를 아줌마,라는 생활의 최접선의 존재감의 명칭과 부여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고. 아무튼.
아무튼, 이 책은 아줌마 스러움은 별로 없다. 다만, 여성의 시선,은 있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는 조금 안타깝게 생각하는 듯 싶다. 아줌마,라는 단어가 마케팅 전략으로 사용되어 판매부수에 득이 될 요건이 되었을지언정, 그 단어가 참 공허하게 느껴지기 때문. 아무튼, 이 참에, 알라딘을 조금 뒤적여보니,
ㅡ 키워드 : "아줌마"(으)로 검색한 결과 총 87 건의 상품이 검색되었습니다.
라고 결과가 나온다. 그 책들을 주욱, 뒤적여보니, 이래저래 많은 생각이 든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하니, 아줌마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줌마도 아닌 나 같은 얼뜨기 아줌마는 어디 낄 자리도 없다는 것이다.
뭐, 각설하고. 위의 책. <지독한 아름다움>의 미덕은 큼지막한 도판. 시원하게 표지 전면을 르동의 그림으로 디자인 한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그림읽기,를 시작하는 분들에게 권하기에 충분한 책. 부제를 뺀다면 별 다섯 개도 무난.
(그런데, 정말 내가 찾는 그림은 무엇이란 말인가. 도대체 내 책에 없는 그림이었단 말인가. 이거, 혹시, 아줌마들의 가장 공통적 특성, 건망증의 시작인가? 시덥지 않은 생각들이, 두서없이 막 튀쳐나온다. 큼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