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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입이 없는 것들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275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6월
평점 :
이성복이다, 이성복이다. 신문 하단의 광고에서 '슬퍼할 수 없는 것'(p.82)을 읽으며 나는 계속 무엇인가에 쫓기기 시작했다.
지금 바라보는 먼 산에 눈이 쌓여 있다는 것
지금 바라보는 먼 산에 가지 못하리라는 것
굳이 못 갈 것도 없지만 끝내 못 가리라는 것
나 없이 눈은 녹고 나 없이 봄은 오리라는 것
슬퍼할 수 없는 것, 슬퍼할 수조차 없는 것
뜨거운 햇빛이 무섭게 땅으로 곤두박질치던 날 나는 냉방이 잘 된 시원한 서점에서 시집을 사들고 도망치듯 빠져 나왔다. 그런 내 뒤에 그림자처럼 조용히 침묵과 통증이 따라와서 시집 속에 숨었다. 그리고 내가 책장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따갑게 내 손을 베었다. 나는 그의 시를 읽으면서 내내 불편해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기형도는 양반이다. 젊었던 그는 요절할 운명을 안고, 사슴처럼 가볍게 이 남루한 세상을 떴다. 이성복은 이토록 죽음을 달고 있으면서도 살아 있는 시인이다. 그 무거운 무게를 달고서도 수면 위로 떠올라 입을 벌려 무엇인가 말하려 한다.
어느 날 문을 열고 개의 뒷모습과 마주치기까지, 그것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124.문득 그런 모습이 있다) 그는 얼마나 많이 자신의 생에 복수하면서 (123.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부풀고, 꺼지고, 되풀이되었을까. 시인이란 참으로 천형天刑이다. 어쩌면 이렇게도 우리는 자유스럽지 못한가. 각혈하듯 뱉어낸 언어를 늘어놓고 소리없이 통곡하는 듯한 시인에게서, 왜 우리는 등을 돌리지 못하는가. 우리 역시 뱃가죽이 축축 늘어진 개이기 때문에, 그래, 우리도 개이기 때문이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로 첫 시집을 펴낸 이성복은 이제서야 그 입없는 돌을 들어 입맞추듯, 자신의 입으로 돌의 언어를 읊는다. 해마다 피었다 지는 꽃들에게도 부고 없음을 슬퍼한다. 그는 생을 비루하다 한다. 그러나 그 비루함을 사랑한다. 길가에 널려서 발부리에 채이는 보잘것없는 돌들의 비루함을 사랑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통해 개로 변한 우리를 보고, 그를 통해 돌로 땡그랗게 뭉쳐 있는 우리의 형편없는 삶을 본다. 울고 싶을 정도의 진실이지만, 그러나 비참한 것은 비참하기에 아름답다.
이성복은 오래오래 살았으면, 한다. 기형도처럼 이야기 속으로 흘러가 버리지 않았으면, 싶다. 내 방인지도 모르고 문을 벌컥 열었던 무모함조차 詩로 그려내는 이 진실한 시인을, 아직은 따뜻한 세상에서 잃고 싶지 않다. 그는 오래오래 살았으면, 더 많은 것들의 입이 되어 주었으면, 나의 비참함을 대신 나에게 얘기해 주었으면, 싶다. 그러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