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
하성란 지음 / 창비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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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삿뽀로 여인숙> 이후, 확실히 하성란은 약간 변한 것 같다. 어디가 어떻게 변했다고 콕 찝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라는 이 소설집을 읽고 난 후 가슴 한 구석에 푸릇한 멍이 든 것 같은 느낌은 참,익숙지 않으면서도 낯설지 않다. <삿뽀로 여인숙>을 읽고 난 한 기자는 '꼭 안아주고픈 소설'이라 했다.이란성 쌍둥이인 진명과 선명의 이야기,네 개의 종을 나누어가진 그들과 나머지 두 사람-선명의 애인과 일본의 고스케.네 사람 사이를 가로지르듯 씨줄과 날줄로 이야기를 엮어가는 하성란의 솜씨는 책을 덮는 순간 그야말로 독자를 멍,하고 약간 슬프게 만드는 느낌이었다면 이번 소설집은 그보다 조금 더 아프고 쓰린 느낌.

표제작인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는 어릴 적 읽었던 '푸른 수염'의 설화의 앞부분을 작가가 창조해낸 것이다.금기와 파기에 관한 것들,모든 조건을 갖춘 남자가 아내에게 강요한 금기는 지하실을 따고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었으며,아내는 그것을 파기하는 순간 푸른 수염의 아내들 시체와 맞닥뜨리고 저 역시 죽음의 위험에 직면한다(물론 그녀의 오빠들이 구출해 주지만).그런데,대체 푸른 수염의 첫번째 아내는 왜 죽었을까? 괄호로 남겨진 이 의문에 하성란은 정면으로 펜을 대고 우리는 다른 남자와 끌어안은 남편을 목격한 아내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의 금기가 깨지는 소리를 듣는다. '밤의 밀렵' 역시 깊은 밤 숲속에서 벌어지는 만행(그것을 발설하지 않는 것이 금기)을 전임자에게 듣지 못한 화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하성란은 또 무엇을 얘기했던가. 아직 그녀는 불륜이나 일탈에 대해서 얘기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다만 '별 모양의 얼룩'이나 '개망초'와 같은 작품에서 수없이 많은 익명으로 사라져가는 거대한 사회 폭력의 희생자들-씨랜드 참사,교통 사고 후 유기되는 소녀와 같은-에 대해 말없이 지켜볼 뿐이다.각종 참사가 끔찍한 것은 어떤 폐허에 대한 경제 비용때문이 아니라,수數로 환산할 수 없는 존재들의 값어치가 단지 석 자의 이름과 괄호 속의 나이로 치환되어 버리는 끔찍함 때문이라는 것을 작가는 알고 있다. 그리고 '기쁘다 구주 오셨네'에서 약혼자와 약혼자의 친구들에게 윤간을 당하고 누구의 아이인지 모르는 임신을 하고 난 후에도 -아가야 난 널 사랑한단다. 라고 말하는 화자를 등장시킴으로써 이 거침없는 세상에 내던져진 환영받지 못할 탄생(혹은 죽음)에 대해서 말없이 폭 싸안는 포용력을 보여준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대구 지하철 화재,태풍 매미.우리가 어느덧 잊어가는 삼풍백화점,성수대교,대한항공기 추락 사건들도 있었다.단 하나의 죽음도 잊지 못하는 것이 사람이면서 이 끔찍한 참사를 잊는 것이 사람이며,그리고 그런 망각 속에서 삶은 지속되는 것인지도 모른다.그러나 그런 각박하고 숨막히는 현실 속에서 소설은 역설적으로 숨을 틔워주고 삶의 지렛대를 지탱해주는 힘이 된다.단 한권의 책으로.

앞으로 하성란의 행보가 기대된다.그녀는 우리 주위를 스쳐가는 이 수많은 재앙들에 대해 '아름다운 얼굴 뒤에 숨은 맹수같은 등뼈(어떤 선배 문인의 평)'를 곧추세우고 하나하나 기록해갈 것이다.소아마비인 아이를 탐탁치 않게 여겨 개에게 정을 쏟던 부부가 결국 잃어버린 개를 찾느라 하나뿐인 아이를 잃는 충격적인 내용의 '저 푸른 초원 위에'같은 작품을 쓸 수 있는 작가라면 이 사회가 더 이상 미쳐버리지 않게,끝까지 이루어지지 않을 예언으로써 재난을 막는 예언가와 같은 소설가의 사명을 다해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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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여자의 낭만적 딜레마
마야 스토르히 지음, 장혜경 옮김 / 푸른숲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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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와 미니시리즈에는 늘 한없이 약한 여자들이 등장한다.그런 캐릭터에 코웃음을 치던 나는 정작 나의 연애에서 주도권을 쥐고 당당하게 군다고 믿었건만,뒤돌아보면 남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의아함 뿐이었다.그 때 내가 정말 왜 그랬던 거지? 강해 보인다,당당해 보인다,그런 평가를 쉽게 받았던 나는,사랑하는 남자에게는 뭔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인데.다른 사람들에게 꿋꿋했어야 했기 때문에 단지 내 남자에게는 기대고 싶었을 뿐인데.그런 핑계는 결국 나조차 한없이 약한,화초같이 쉽게 뿌리뽑히는 그 드라마들 속 여자들과 같아진 자신에 대한 변명에 불과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저자의 말대로 제목이 무척 매력적이었던 이 책은 자그맣고 흡사 대학 교양 강의의 1학기분을 합쳐놓은 듯 술술 읽힌다.사랑 이외의 것에서 강하게 굴고 싶은 여자들에게 '스스로 선택하고 싶은 사랑'은 어느 순간,'위험한 사랑' 혹은 '전쟁같은 사랑'이 되어 괴롭게 다가온다.그것은 곱절로 혼란스럽다.이상하다,나는 늘 당당하고 강했는데,왜 이렇게 갑자기 무너지고 마는 걸까.그것은 내가 어이없게 과거를 회상하며 중얼거리는 말이기도 하다.저자는 융 심리학을 공부한 덕택에 융의 '원형'개념을 적절히 끌어오고 그림 형제의 '손이 없는 소녀'를 통해 인간 무의식 깊숙한 곳의 욕망을 자연스럽게 이끌어 낸다.

<우리 속의 여신들>이나 <우리 속의 남신들>,'화남금녀'같은 아류의 수많은 책과 굳이 다른 점을 찾자면,이 책은 나처럼 혹은 현시대의 '어떤' 여성들처럼 강하고 꿋꿋하기 그지없으나 어느 날 위험한 사랑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나약하되 폭풍같은 욕구가 폭발하는 특정한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그 부류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 이 책을 읽는다면 상당 부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어차피 깊숙하고 현학적인 얘기를 하기에 한 권은 너무 짧은 분량이지만,이러한 특정 부류에게는 어느 정도 위안이 되기에 충분한 분량이다. 그리고 결국,강한 여자가 그런 사랑에 힘겨워하는 것은 드라마의 수많은 캐릭터들처럼 풀쑥 쓰러져버리는 대신 그 사랑을 버리고 다시 의지로 서기 때문이 아닐까.결국 어느 쪽도 승자,패자는 아니란 것이다.책을 덮는 순간 든 생각은,결국 이 책에서 말하는 대로 스스로 강해지고 스스로 완전해지지 않는 이상 그 누구에게도 완전한 사랑은 없다,는 것이었다.백번 천번 옳은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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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이야기
신경숙 지음 / 마음산책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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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자신 안의 깊은 우물에서 슬픔을 퍼올리듯, 신경숙은 소리내지 않고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소설 속 여자들은 아이를 잃었거나 아이를 낳지 못했고 그녀들의 동생과 친구들은 모두 불시에 죽어 버렸다. 남아 있는 사람들의 혼잣말 같은 이야기들, 신경숙은 늘 가장 신경숙다움으로써 독자를 우울하고 슬프게 만들었다. <J 이야기>는 어찌 보면 별로 특별할 것이 없는 소설이다. 연작 소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연작 에세이나 연작 콩트에 가까울 듯한 이야기들,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키만 멀대같이 크고 얼굴 허연(작가 자신의 표현)' 신경숙의 젊은 날 옆모습이 불쑥 떠오르는 작품이다.

오랜 연애 끝에 닳아진 사랑, 헤어져! 해놓고 그 돈 네가 가지라는 말에 화기애애해지는 가난한 연인들, 남편의 첫사랑 때문에 투닥투닥 싸우고 찐감자를 어디에 찍어먹을까 때문에 서로를 '무식한 연놈' 취급하는 평범한 신혼부부들의 냄새가 물씬 배어나는 책, 이렇게 써놓고 보니 '별로 특별할 것'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신경숙다움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처음 4분의 1쯤 읽으면서 실망감이 느껴졌지만 결국 한 권의 책을 덮으면서는 이 자신답지 않음 역시 매끈한 바느질 솜씨로 착 착 홈질해서 삶의 자그만 손뜨개를 완성한 작가에게 역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픽,픽 웃으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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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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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기형도로부터 시작되었다. 헐벗은 나무처럼 두 팔을 벌리고 있어도 좋다, 단 한 번의 포옹으로 눈과 눈이 스치고 귀와 귀가 맞닿는 순간을 그려내고 싶었던 나의 詩를 읽은 문학 선생님은 기형도를 읽으라 했다. '장밋빛 인생'을 펼쳐주며 이것이다, 했다. 시인은 하늘만이 알고 있는 것을 너무 많이 알아냈기 때문에 요절한다는데 뇌졸중으로 어둡고 침침한 극장 한 구석에서 죽어버린 기형도는 그 순간 얼마나 많은 것을 알아냈을까. 그의 시집은 차라리 한 장의 유서이다.

처음 그의 전집을 읽고 울고 싶었다. 지적 열등감에 사로잡혀 죽고 싶은 욕망에 시달렸다. 소주 두 병만 마시면 그를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날 휭하니 바람따라 날면 사뿐히 바닥에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기형도를 읽고 나서 시를 쓰지 않았다. 단 한 편도 쓸 수 없었다. 윤동주가 그리웠다. 때묻지 않은 순결한 미소가 그리웠다. 기형도는 너무 아픈 이름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이름을 순간마다 떠올리며 산다. 특히 눈이 내리는 어두운 겨울엔 더욱 그의 숨결을 가까이 느낀다. 나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느낄 때면 그는 마치 나의 연인처럼 바삭바삭한 어깨를 대어준다. 기형도는 젊은 날의 잊지못할 이름이며, 세계를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은 유일한 통로였다. 그리고 눈에게 감히 닿을 수 없던 죽음처럼 그는 죽음같은 시를 남겨놓고선 오히려 삶이 되어 너무 많은 젊은이들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다. 미친 듯이 방황하고 많이 외로웠던 젊은이들의 삶 속에.

그리고 기형도는 늘 시작된다. 입 속에 질기게 달라붙은 검은 잎처럼 두려운 환희로 세상의 경계에 서 있는 그에서 모든 것은 다시 시작된다. 기형도를 알고 난 후부터 나는 울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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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입이 없는 것들 문학과지성 시인선 275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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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이다, 이성복이다. 신문 하단의 광고에서 '슬퍼할 수 없는 것'(p.82)을 읽으며 나는 계속 무엇인가에 쫓기기 시작했다.

지금 바라보는 먼 산에 눈이 쌓여 있다는 것
지금 바라보는 먼 산에 가지 못하리라는 것
굳이 못 갈 것도 없지만 끝내 못 가리라는 것
나 없이 눈은 녹고 나 없이 봄은 오리라는 것
슬퍼할 수 없는 것, 슬퍼할 수조차 없는 것

뜨거운 햇빛이 무섭게 땅으로 곤두박질치던 날 나는 냉방이 잘 된 시원한 서점에서 시집을 사들고 도망치듯 빠져 나왔다. 그런 내 뒤에 그림자처럼 조용히 침묵과 통증이 따라와서 시집 속에 숨었다. 그리고 내가 책장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따갑게 내 손을 베었다. 나는 그의 시를 읽으면서 내내 불편해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기형도는 양반이다. 젊었던 그는 요절할 운명을 안고, 사슴처럼 가볍게 이 남루한 세상을 떴다. 이성복은 이토록 죽음을 달고 있으면서도 살아 있는 시인이다. 그 무거운 무게를 달고서도 수면 위로 떠올라 입을 벌려 무엇인가 말하려 한다.

어느 날 문을 열고 개의 뒷모습과 마주치기까지, 그것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124.문득 그런 모습이 있다) 그는 얼마나 많이 자신의 생에 복수하면서 (123.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부풀고, 꺼지고, 되풀이되었을까. 시인이란 참으로 천형天刑이다. 어쩌면 이렇게도 우리는 자유스럽지 못한가. 각혈하듯 뱉어낸 언어를 늘어놓고 소리없이 통곡하는 듯한 시인에게서, 왜 우리는 등을 돌리지 못하는가. 우리 역시 뱃가죽이 축축 늘어진 개이기 때문에, 그래, 우리도 개이기 때문이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로 첫 시집을 펴낸 이성복은 이제서야 그 입없는 돌을 들어 입맞추듯, 자신의 입으로 돌의 언어를 읊는다. 해마다 피었다 지는 꽃들에게도 부고 없음을 슬퍼한다. 그는 생을 비루하다 한다. 그러나 그 비루함을 사랑한다. 길가에 널려서 발부리에 채이는 보잘것없는 돌들의 비루함을 사랑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통해 개로 변한 우리를 보고, 그를 통해 돌로 땡그랗게 뭉쳐 있는 우리의 형편없는 삶을 본다. 울고 싶을 정도의 진실이지만, 그러나 비참한 것은 비참하기에 아름답다.

이성복은 오래오래 살았으면, 한다. 기형도처럼 이야기 속으로 흘러가 버리지 않았으면, 싶다. 내 방인지도 모르고 문을 벌컥 열었던 무모함조차 詩로 그려내는 이 진실한 시인을, 아직은 따뜻한 세상에서 잃고 싶지 않다. 그는 오래오래 살았으면, 더 많은 것들의 입이 되어 주었으면, 나의 비참함을 대신 나에게 얘기해 주었으면, 싶다. 그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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