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끄는 글 ․․․․․․․․․․․․․․․․․








눈앞의 저 빛!

찬란한 저 빛!

그러나 

저건 죽음이다


의심하라

모오든 광명을!


                           - 유하의 시 「오징어」







나의 이야기 6 -나의 시대


   나의 젊은 날은 거리의 시대였다. 불꽃의 시대였다. 죽음의 시대, 항쟁의 시대였다. 젊은이란 젊은이는 독재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와, 최루탄 지랄탄에 맞서 화염병과 짱돌을 던졌다. 그 혼동의 거리에는 매일 사망소식이 전해졌고, 열사라는 이름을 뒤늦게 얻은 청년들의 무덤이 전국을 메웠다. 저마다 그 조사를 전해듣고 치를 떨고 분노를 삭히고 소주를 기울이던, 그 소주잔에 담긴 것이 소주인지 눈물인지를 분가름하기도 힘들던 시대였다. 술이 거나해지면 너나 나나 할 것없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로 시작되어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로 끝나는 노래를 눈치보지 않고 목놓아 부르던 그런 시대였다.

   사상이 없어도 눈빛만으로 통할 수 있었고, 이념이 없어도 분노만으로 통할 수 있었던 시대였다. 우리는 행복을 찾기도 전에 싸움을 찾아야했고, 장미빛 미래를 꿈꾸기도 전에 싸늘한 감방이나 열악한 노동현장을 찾아야했다. 그렇게 나의 선배들은 하나 둘씩 감방으로 노동현장으로 옮겨갔고, 그런 선배들을 보면서 나는 죄책감 반 열심 반으로 살아야 했다.

   세월이 지나 동료들은 어느덧 번듯한 직장과 안락한 가정을 갖게 되었고, 젊은이들은 거리대신 도서관을 가득 메울 수 있게 되었다. 술집에서는 이제 더 이상 분노의 노래가 울려나오지 않는다. 대신 귀를 멍멍하게 하는 굉음들이 거리를 폭주하고, 허름한 술집 대신 대낮같이 밝은 조명의 락카페가 그 굉음의 거리를 수놓는다. 사회과학 서점의 이념서적들은 감성을 자극하는 베스트셀러들에게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한 때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던 레닌의 동상이 바로 그 젊은이들에 의하여 무너졌다. 지성인들은 너나할 것 없이 깃발을 내리고 성급하게 반성문을 쓰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 맑스주의자가 아니면 그 사람은 바보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서도 맑스주의자라면 그 사람은 더한 바보다. 보통의 기성세대들이, 자신의 과거를 술안주꺼리로 회상하며, ‘요즘 젊은 것들’의 과격한 행위를 TV나 신문지상을 통하여 보며, 근심어린 표정으로 의례히 한마디하는 말 중에서 가장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혈기있는 젊은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이 말을 들어보았으리라. 부드럽게 해석하자면 젊은 시절의 미덕은 이상, 열정, 분노에 있다면 나이가 들어서의 미덕은 현실, 계산, 타협에 있다는 말일게다. 이 말이 요즘처럼 나를 괴롭힌 적은 없다.

   이상과 현실 사이, 열정과 계산 사이, 분노와 타협 사이에서 메트로놈처럼 좌우로 똑딱거리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젊음은 얼마나 불행한가! 현실은 초라했지만 미래는 찬란했던 젊은 시대는 가고 어느덧 현실은 네온싸인처럼 휘황찬란하지만 미래는 암울한 신시대(?)에 나는 - 우리는 - 살고 있다.

   자 그렇다면 나(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현실과 이상이 동반되었던, 루카치 식으로 말하자면, ‘혁명의 시대’의 해석학은 어디로 갔는가? 그것은 이미 ‘마치 우리를 비켜 지나가는 것처럼’ 파헤쳐지고 무너지고 폭발하고 날아가버렸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렇게 묻기로 하자, 그 자리에 남은 잿더미를 가지고는 무얼 해야 할 것이냐고. 그 잿더미는 그냥 잿더미일 뿐인가? 20세기를 마감하는 끄트머리에서 나는 나에게 물어본다. 수많은 나 아닌 나에게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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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③ 하나 - 거리에서 만난 안경제조사



   하루는 거리를 걷다가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한 사람이 거리를 비틀거리며 주위를 뱅뱅도는 것이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는 희안한 안경을 끼고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그가 신기했는지 그의 주위에 모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쓰고 있던 희안한 안경을 벗으면서 말하였다.


   “ 여러분 나는 안경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이번에는 아주 새로운 안경을 하나 만들어 보았습니다. 멀리도 보고 자세히도 볼 수 있는 안경입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구경하고 있던 사람 중 하나가 그가 건네주는 안경을 받아 써보았다. 그 사람은 안경을 쓰자마자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얼마후 그 사람은 안경을 벗어 주인에게 돌려준 후 투덜거리며 가던 길을 가버렸다. 그 때 다른 구경꾼 하나가 안경주인에게 물었다.


   “ 아니 당신이 만든 안경이 도대체 무슨 안경입니까? 안경을 쓰자마자 저리 정신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소?”


   그러자 안경주인은 주위에 있는 구경꾼에게 말했다.


   “ 방금 전에 안경을 쓰신 분은 이 안경의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안경 쓰는 방법을 알려드리지요. 원리는 간단합니다. 오른쪽에는 현미경 알을 달았고, 왼쪽에는 망원경 알을 달았지요. 그러니까 멀리보고 싶으시면  왼쪽 눈을 감으시고 오른쪽 눈으로만 보시면 십리밖에서 일어나는 일도 훤히 보이고, 자세히 보고 싶으면 오른쪽 눈을 감고 왼쪽 눈으로만 보시면 손바닥에 있는 세균 수도 알아낼 수 있습니다. 인류가 여지껏 만들어낸 발명품 중에 최고라고 할 수 있지요. ”


   구경하던 사람들은 이 희안한 렌즈 세공사와 말을 듣고 재미있어했다. 한 사람이 물었다.


   “ 그런데 당신은 어쩌다가 그런 안경을 만들게 되었소?”



   사물거시증과 사물혐오증


   그의 대답은 구경꾼의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심각한 것이었다.


   “ 나는 원래 안경알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살다보니 안경을 맞추면서 별별 주문을 하는 사람이 많더군요. 어떤 사람은 세상을 멀리볼 수 있는 안경을 맞춰 달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세상을 자세히 볼 수 있는 안경을 맞춰달랍니다. 그래서 나는 앞 사람에게는 망원경 알로 안경을 맞춰주고, 뒷 사람에게는 혐미경 알로 안경을 맞춰주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지요.”


   그의 이야기는 점점 우리에게 흥미를 던져주었다.


   “ 무슨 문제인지? ”

   “ 글쎄 망원경 알을 쓰고 사는 사람들은 사물거시증에 걸려서 제 앞가림을 못하는 거예요.”

   “ 사물거시증이라뇨? ”

   “ 거 있잖습니까? 사물을 멀리만 보고 자세히 보지 못하니까, 모든 사물이 비슷해보이고, 당장 자기 앞에 돌덩어리가 있어도 못보고 지나치다 넘어지기 일쑤고. 그래서 그 사람은 지금 집안에서 밖을 내다보며 ‘햐 -  좋다’만 연발할 뿐 집 밖으로는 한발짝도 못 나온답니다.”

   “ 거 참 안됐군요. 다른 사람은요? ”

   “ 그 사람도 불쌍하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그 사람은 사물혐오증에 걸렸으니까요.”

   “ 사물혐오증이요?”

   “ 네, 사물을 너무 자세하게 보니까, 사물의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 부분만을 보면서 그 사물에 대하여 판단을 내리게 되었지요. 얼마전에는 어여쁘게 생긴 아가씨가 지나가는 걸 보면서, 글쎄, ‘저기 박테리아가 지나간다!’라고 소리소리 지르지 않겠어요. 그리고는 문을 꼭 걸어닫고 안나오더랍니다. 모두가 제 잘못이지요. 그런 문제를 한번에 해결할 방법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한 쪽은 망원렌즈로 다른 한쪽은 현미경렌즈를 달았는데 문제는 이 안경을 쓰고서는 두눈을 모두 한꺼번에 뜰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망원경 철학 현미경 철학


   위의 우화에서 나오는 두 인물의 태도를 철학에 비유하자면 망원경철학과 현미경철학이라고 볼 수 있다.

   망원경철학은 ‘숲은 보되 나무는 보지 못하는’ 철학이다. 이러한 철학은 낭패를 당하기 쉽상인데, 마치 시험에 임하는 학생이 시험범위의 전체적인 윤곽만을 공부하고 들어갔다가 세부적인 문제가 나왔을 때 낭패를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망원경은 매우 유용하다. 전쟁터에서 망원경이 없다면 멀리서 접근하는 적군의 동태를 살피지 못하여 패배하게 되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할 수도 있다. 망원경의 위력은 이러한 사태를 예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망원경철학은 이처럼 사물을 멀리 그리고 넓게 볼 수 있고 그에 따른 예측을 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힘이 있다. 그러나.....

   현미경철학은 역으로 ‘나무는 보되 숲을 보지 못하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철학 역시 낭패 당하기 쉽상인데, 이번에는 지엽적인 문제에만 공부하다가 전체적인 맥락을 묻는 문제에 부딛쳐 곤란을 겪는 학생과 비유할 수 있다. 물론 현미경 역시 맨눈으로는 볼 수 없는 미세한 것들을 관찰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위력을 발휘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현미경철학은 일반적인 시각에서는 관찰할 수 없는 감추어진 비밀을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힘이 있다. 그러나 역시 그러나 .....

   그렇다고 이 두가지 철학을 짬뽕하면 정답이 나올까? 즉 위에 나온 안경제조사의 노력은 성공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사냥꾼이 두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 것 만큼이나 불가능하다. 위의 우화가 실패로 끝난 것처럼.

   그러나 우리는 종종 망원경철학이나 현미경철학을 찾으려는 것에 더욱 매력을 느낀다. 남들보다 더 멀리 내다볼 수 있다거나 더 세밀히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망원경철학이나 현미경철학을 추구하게 되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번만 더 생각해 본다면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필요한 것은 망원경이나 현미경이 아니라 우리의 시각에 맞는 안경이다. 안경은 망원경이나 현미경처럼 사물을 과장되게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 그대로를 보게 만든다. 사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이 침침할 때 시각교정을 위해서 필요한 것도 안경이다. 철학도 이 안경과 같다.

   위의 우화에 나오는 안경제조사는 자신의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 자신이 잘못 맞추어 준 안경을 벗겨내고 그들의 시각에 맞는 안경으로 바꾸어주어야 한다. 자신의 방에 갇혀있는 그들을 일상의 자리로 되돌려야 한다.

   철학을 공부하다보면 때로 망원경철학이 필요하기도 하고 현미경철학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철학이 필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딛고 있는 현실에 올바로 정착하고 출발하기 위해서이다. 생각해보자. 우리는 어떤 안경을 끼고 살아왔는가? 즉 우리는 어떤 철학을 갖고 살아왔는가? 망원경철학? 현미경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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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② 철학-살기


   이런 이야기가 철학과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젊은 한 시절의 추억담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무슨 효과를 본다는 말인가. 물론  위의 이야기는 나의 젊은 한 시절의 단면을 그린 것이다. 나의 성장과 만남 그리고 헤어짐, 세계관의 세움과 무너짐 그리고 또 다른 세계관의 모색, 확신과 의심, 긍정과 부정.

   위의 이야기는 물론 나 개인의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비단 나에게만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가 인생의 중요한 사건을 만나고, 그러한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삶의 전환점을 찾아나서게 된다. 사건의 충격이 크면 클수록 방황의 깊이와 넓이도 커지게 된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나는 교회를 등지게 되었다. 그것은 커다란 불행의 시작이었다. 이전의 믿음, 세계를 신의 섭리로 바라보던 그 행복의 해석학을 나는 잃었다. 세상은 모순 투성이었고, 이러한 모순들은 좀처럼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는 또하나의 도전이었고 행운이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스스로 선다는 것. 자신의 생각과 의지에 의하여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 더욱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하여 하나 하나를 깊이 고민하고 모색하며 살아간다는 것. 이렇게 나의 철학살기는 시작되었다.

   철학을 전공하기보다는 철학을 살아가는 것. 자신에게 던져진 문제들에 용감하게 맞서는 것. 때로 좌절하더라도 다시 일어서는 것. 어쩌면 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이러한 철학-살기일지도 모른다.


   갑자기 자신의 생각이 통째로 틀리다는 생각이 들 때, 자신이 받아온 과거의 교육이 틀렸다는 생각이 들 때,  세상이 온통 모순 투성이로만 보일 때, 고민의 고민은 꼬리를 물고 생겨나지만 좀처럼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을 때라도 우리는 행복하다. 맑스에 의하면,“인류는 오직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을 내놓”기 때문이다.


   철학은 물론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사가 아니다. 그러나 철학은 당대의 중요한 문제들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그러한 노력에 우리가 동참한다면 우리는 이미 철학에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잠깐!- 철학에 들어가기에 앞서 여기서 우리가 해야할 작업이 있다. 철학을 공부하면서 범하기 쉬운 오류를 점검하는 것이다. 싸움터에 나서는 병사가 자신의 무기를 점검하듯이. 그 점검을 위하여 나는 세개의 우화를 준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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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나의 이야기 1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교회를 다녔다. 이 말은 나의 의지에 의하여 교회를 다니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여덟살이 되면 국민학교에 들어가야하는 일이나 마찬가지로 교회는 나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졌던 일이었다. 어머니의 손에 이끌리어 다니게 된 교회. 그곳에서 이야기하는 ‘주님의 은총(恩寵)’이 어린 나에게는 번쩍이는 ‘은총(銀銃)’으로 들렸지만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지루한 설교시간이 끝난 후 교회선생님이 주던 맛있는 사탕과 과자는  탈콤한 유혹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교회가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나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교회에서 성장하였고, 동네어린이와 노는 것보다, 학교에 다니는 것보다 더 열심히 교회를 다녔다. 그렇게 해서 나는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의 거의를, 그리고 대학교 시절의 절반쯤을 교회에 투자(?)하였다.  

 

   그러다가 나에게 두가지의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는 괴짜전도사(그는 지금 방글라데시에서 성실한 - 괴짜가 더이상 아닌 - 선교생활을 하고 있다)와 나의 직접적인 만남이고, 다른 하나는 전두환 전(前)대통령(그가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다)과 나의 간접적,시대적 만남이었다.

   우선 괴짜 전도사와 나의 만남. 교회청년부시절 자칭 해방신학자라는 지휘자 겸 전도사가 내가 다니던 교회에 왔다. 그는 단연 청년들에게 인기 만점이었고 나 역시 그에게 지적으로 매료되었다. 나는 그에게 수없이 많은 질문을 포탄처럼 쏘아댔으나 그의 대답은 아주 간단하고 늘 같은 것이었다: 너 자신의 눈으로 성서를 읽어라!

 

   20년이 넘도록 교회를 다닌 사람에게 성서를 읽어보라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고마운) 답변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속는 셈치고 다시 한번 읽기로 결심했다, 아무런 선입견없이 ‘나 자신의 눈으로’.(자신의 눈으로 책을 읽는 것은 축복이자 저주이다.) 나는 성서를 꼼꼼히 읽으면서 예전에는 발견할 수 없었던 수많은 논리적 모순을 발견하였고, 모순을 발견한 이상 어떠한 권위도 성서에 부여할 수 없었다. 신의 손에 의하여 쓰여졌다고 믿어왔던 성서가 인간의 손으로, 다양한 해석관점의 차이에 따라 쓰여진 문서의 다발임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을 때, 내가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다음으로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의 만남. 내가 성장해서 대학을 다니던 그 시절은 전두환 집권시절 이었고, 세상은 안밖으로 뒤숭숭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개헌을 발표하고 얼마 안있어 사회불안을 이유로 다시 호헌을 주장하였다. 이에 분노한 시위행렬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시내 곳곳을 메웠다. 전두환 전대통령이 발표한 호헌선언은 나에게도 분노의 꺼리가 되었다. 그러나 내가 다니던 교회는 그 와중에서도 커다란 태풍의 눈처럼 잠잠했고, 정치적인 현실에 대해서는 애써 침묵을 지켰다. 그곳에는 죽음과 같은 안식만이 있을 뿐이었다. 어린 시절 누구나가 대통령이 되길 장래소망란에 써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귀중한 꿈에 비해 현실은 얼마나 다른가. 파렴치한 대통령과 침묵하는 교회. 젊은 한 시절 내가 겪어야만 했던 한 시대의 모습은 이처럼 나에게 충격과 비참함으로 직조되고 있었다.


   결국 나는 내 의지로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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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의 꿈
리처드 바크 지음, 류시화 옮김 / 현문미디어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죄의식없이, 죽음없이, 심판없이 

-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

- 리차드 바크, <갈매기의 꿈(Jonathan Living Seagull a Story)>


   만약에 비기독교인이라면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한 편의 잔혹영화이다. 영화는 그의 제자 가룟 유다가 스승인 예수를 파는 사건으로부터 예수가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받았던 온갖 고문과 수난을 그리고 있다. 예수의 부활은 영화 마지막의 10초 정도도 안 된다. 예수의 육체는 인간에게 가해지는 온갖 폭력에 걸레처럼 변해버린다. 영화는 그 예수-걸레되기를 조금도 외면하지 않고 클로즈-업해서 보여주고 있다. 당연히 관람자들은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저토록 처참하게 죽어야하지?

 

   영화는 그에 대하여 침묵한다. 예수의 생애를 돌아보지 못한다면 예수의 죽음은 의미가 없어진다. 그것은 마치 80년대 민주화운동의 과정에서 희생된 많은 사람의 의미가 죽음에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죽음의 의미는 부활에 있는 것인가? 부활이 실제로 있었는지와는 관련없이 부활 역시 죽음의 의미를 구성하지 못한다. 죽음은 - 아니 차라리 죽임당함은 - 예수의 생애와 관련되어있다. 그의 생애를 한마디로 정리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가 당대의 상황에서 시대에 역행하는 반항아이며 저항아였다는 것만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일반인의 이해코드로 다시 구성하자면 예수는 당대의 가치에 저항함으로 죽음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죽음에 대하여 우리 역사에서 너무도 많이 경험해왔기에 예수의 죽음은 특별한 무엇이 아니다. 물론 기독인의 코드라면 이와는 달리 접근할 것이다. 태초의 인간 아담이 하느님의 명을 어기고 죄를 지었으며, 후대의 인간은 그 이후로 계속 죄인이고, 그래서 심판의 날에 멸망당할 수밖에 없으므로, 하느님이 이를 불쌍히 여겨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고 그 아들을 인류의 희생제물로 죽임으로,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했다는 것. 그래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로 예수를 믿는 자는 심판 날에 구원을 받으며, 믿지 않으면 심판 날에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운명에 처해질 것이라는 것. 그러니 기독인들에게는 예수의 생애가 문제가 아니라 죽음과 부활이 문제이며, 심판과 구원이 문제일 것이다. 물론 비기독인들은 이러한 유치한 구원의 코드에 콧방귀를 뀌겠지만.  

 

   나는 기독인들의 잔혹한 코드보다는 리차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의 코드가 현대인에게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갈매기 조나단은 다른 갈매기와는 달리 먹기 위해서 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빨리 날기 위해서 난다. 행위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어버린 존재. 그로 인해 조나단은 갈매기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하지만 - 보통 무리로부터의 추방은 죽음을 의미한다. -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더욱더 연습하여 시간과 공간마저도 초월할 수 있는 속도로 비행하는 존재가 된다. 그는 변모한 것이다. 그리고 변모된 모습으로 귀환(재림)한다. 그리고 제자이자 동료들을 양성한다. 거기에는 기독교인들의 위협적인 죄의식도 죽음도 부활도 심판도 없다. 자신의 삶을 고양시키는 노력만이 있을 뿐이다. 조나단의 제자들은 그를 신성시하려 하지만 조나단은 단호히 거부한다. 이렇게 말하면서, “나에 대해서 어리석은 소문을 퍼뜨리거나, 또는 나를 신처럼 떠받들지 않도록 해라. 알았지, 플래처? 나는 한 마리의 갈매기에 불과해, 나는 그저 나는 것을 좋아한단다.”

 

  현대의 기독교가 진정 인류를 구원하려는 욕심이 있다면, 암울한 죽음과 심판의 코드에서 벗어나야한다. 제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믿지 않을 원죄의식의 어두운 그늘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을 애도하고 부활에 광신하기보다는 예수의 즐거운 반항의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죄 없이도, 죽음 없이도, 심판 없이도 충분히 구원받을 수 있다. (200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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