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기의 꿈
리처드 바크 지음, 류시화 옮김 / 현문미디어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죄의식없이, 죽음없이, 심판없이 

-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

- 리차드 바크, <갈매기의 꿈(Jonathan Living Seagull a Story)>


   만약에 비기독교인이라면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한 편의 잔혹영화이다. 영화는 그의 제자 가룟 유다가 스승인 예수를 파는 사건으로부터 예수가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받았던 온갖 고문과 수난을 그리고 있다. 예수의 부활은 영화 마지막의 10초 정도도 안 된다. 예수의 육체는 인간에게 가해지는 온갖 폭력에 걸레처럼 변해버린다. 영화는 그 예수-걸레되기를 조금도 외면하지 않고 클로즈-업해서 보여주고 있다. 당연히 관람자들은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저토록 처참하게 죽어야하지?

 

   영화는 그에 대하여 침묵한다. 예수의 생애를 돌아보지 못한다면 예수의 죽음은 의미가 없어진다. 그것은 마치 80년대 민주화운동의 과정에서 희생된 많은 사람의 의미가 죽음에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죽음의 의미는 부활에 있는 것인가? 부활이 실제로 있었는지와는 관련없이 부활 역시 죽음의 의미를 구성하지 못한다. 죽음은 - 아니 차라리 죽임당함은 - 예수의 생애와 관련되어있다. 그의 생애를 한마디로 정리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가 당대의 상황에서 시대에 역행하는 반항아이며 저항아였다는 것만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일반인의 이해코드로 다시 구성하자면 예수는 당대의 가치에 저항함으로 죽음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죽음에 대하여 우리 역사에서 너무도 많이 경험해왔기에 예수의 죽음은 특별한 무엇이 아니다. 물론 기독인의 코드라면 이와는 달리 접근할 것이다. 태초의 인간 아담이 하느님의 명을 어기고 죄를 지었으며, 후대의 인간은 그 이후로 계속 죄인이고, 그래서 심판의 날에 멸망당할 수밖에 없으므로, 하느님이 이를 불쌍히 여겨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고 그 아들을 인류의 희생제물로 죽임으로,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했다는 것. 그래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로 예수를 믿는 자는 심판 날에 구원을 받으며, 믿지 않으면 심판 날에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운명에 처해질 것이라는 것. 그러니 기독인들에게는 예수의 생애가 문제가 아니라 죽음과 부활이 문제이며, 심판과 구원이 문제일 것이다. 물론 비기독인들은 이러한 유치한 구원의 코드에 콧방귀를 뀌겠지만.  

 

   나는 기독인들의 잔혹한 코드보다는 리차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의 코드가 현대인에게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갈매기 조나단은 다른 갈매기와는 달리 먹기 위해서 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빨리 날기 위해서 난다. 행위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어버린 존재. 그로 인해 조나단은 갈매기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하지만 - 보통 무리로부터의 추방은 죽음을 의미한다. -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더욱더 연습하여 시간과 공간마저도 초월할 수 있는 속도로 비행하는 존재가 된다. 그는 변모한 것이다. 그리고 변모된 모습으로 귀환(재림)한다. 그리고 제자이자 동료들을 양성한다. 거기에는 기독교인들의 위협적인 죄의식도 죽음도 부활도 심판도 없다. 자신의 삶을 고양시키는 노력만이 있을 뿐이다. 조나단의 제자들은 그를 신성시하려 하지만 조나단은 단호히 거부한다. 이렇게 말하면서, “나에 대해서 어리석은 소문을 퍼뜨리거나, 또는 나를 신처럼 떠받들지 않도록 해라. 알았지, 플래처? 나는 한 마리의 갈매기에 불과해, 나는 그저 나는 것을 좋아한단다.”

 

  현대의 기독교가 진정 인류를 구원하려는 욕심이 있다면, 암울한 죽음과 심판의 코드에서 벗어나야한다. 제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믿지 않을 원죄의식의 어두운 그늘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을 애도하고 부활에 광신하기보다는 예수의 즐거운 반항의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죄 없이도, 죽음 없이도, 심판 없이도 충분히 구원받을 수 있다. (200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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