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최전선 - ‘왜’라고 묻고 ‘느낌’이 쓰게 하라
은유 지음 / 메멘토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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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가 쓴 글쓰기의 최전선(메멘토, 2015)는 글쓰기를 갈망했던 한 여성이 평범한 삶을 살면서 어떻게 글쓰기를 시작했는지, 어떻게 훈련했는지,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그러다가 어떻게 글쓰기 강사로서 삶을 살게 되었는지를 구성지게 밝히면서, 또한 글쓰기의 이유와 과정, 즐거움과 어려움, 글쓰기의 요소들을 잘 버무려 멋지게 구성한 책이다. 글을 쓰고 싶지만 시작을 못했던 사람이나, 글쓰기의 어려움에 봉착한 사람이나, 글을 왜 쓰는 모르는 사람이나, 자신의 글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적극 강추할 만한 책이다. 글쓰기 관련된 책을 수 십 권 읽으면서, 어떤 책을 처음으로 소개하면 좋을까 고민했었는데, 그에 맞춤한 책을 발견한 것 같아, 기쁘기 그지없다. 게다가 저자인 은유가 나처럼 글쓰기 강사를 한다고 하니 묘한 동지애마저 느껴졌다. 의심하지 말고 구입하시라. 그리고 글쓰기에 관련된 은유의 구체적이고, 깊이 있고, 정밀하고, 차분한 수다에 흠뻑 취해보시라. 오랜 기간 공부하여 숙성한 글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야래는 저자가 각 꼭지마다 첫머리에 소개한 유명한 작가들의 명구들이다.

 

내가 누구인지 묻지 말고 내가 계속 같은 사람인지도 묻지 마라. 아마도 나와 비슷한 한 사람 이상의 사람들이 아무런 얼굴도 갖지 않기 위해 쓰는 게 분명하다. - 미셸 푸코

 

나는 작가로서가 아니라 이 땅에 사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그동안 우리가 지어온 죄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 조세희

 

글쓰기는 독립하되 고립되지 않는 삶의 양식을 조형하려는 이들에게 주어진 생산적 삶의 가능성이다. - 김영민

 

다른 생활습관에 자신을 노출시키고, 인간 본성의 무한한 다양성을 구경하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의 학교를 모르겠다. - 몽테뉴

 

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할 인간적인 문제이다. - 전태일

 

길도 자아도 열어두면 위험할 것 같지만,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부름이 우리를 지켜줍니다. -김우창

 

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 이성복

 

남들이 자신을 설명하도록 내버려 두지 마라. 당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또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를 남들이 말하게 하지 마라. - 마사 킨더

 

말하지 않은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 된다. - 에이드러언 리치

 

제정신을 갖고 산다는 것은, 어떤 정지된 상태로서의 남을 생각할 수 없고, 정지된 나를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김수영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행간에 머무르고 거주하는 것이다. - 발터 벤야민

 

누군가 내게 물었다. 시를 쓰는 힘은 도대체 어떤 거냐고. 나는 대답했다.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을 수 있다는 안도감이 힘이라고. 이 세계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이 세계에서 자신 있게 살아갈 수 있는 꽤 괜찮은 일이 시를 쓰는 일이라고. - 김소연

 

시란 금방 부서지기 쉬운 질그릇인데도, 우리는 그것으로 무엇인가를 떠 마신다. - 황지우

 

이렇게 인정(人情)의 하늘이 가까워진 일이 없다. 남을 불쌍히 생각함은 나를 불쌍히 생각함이라. - 김수영

 

사람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자신은 모릅니다. 알고 있었다고 믿었는데 모르고 있는 것은 얼마든지 있지요. 그런데 모르고 있다고 믿었는데 실은 알고 있는 것도 있거든요. 이 영역이 제가 글을 쓰는 장소라고 생각해요. - 후루이 요시키치

 

산다는 것은 타인의 견해를 가지고 코바늘뜨기를 하는 것이다. - 페르난두 페소아

 

오 나의 육체요, 나로 하여금 항상 물음을 던지는 인간이 되게 하소서. - 프란츠 파농

 

첫 번째 판단을 버려라. 그것은 시대가 네 몸을 통해 판단한 것이다. - 니체

 

(……)

아직 반도 못 옮겼는데, 손이 아파서 그만 옮겨야겠다.

 

<추신>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깔깔대고 웃었던 문장이 있다. 이 문장이다. “글을 쓰고 싶은 것과 글을 쓰는 것은 쥐며느라와 며느리의 차이다.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다.”(55쪽)

 

<추신2> 쥐며느리가 뭔지 모르는 사람을 위해 친절하게 그림파일도 첨부한다. 아래와 같다.

 


사람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자신은 모릅니다. 알고 있었다고 믿었는데 모르고 있는 것은 얼마든지 있지요. 그런데 모르고 있다고 믿었는데 실은 알고 있는 것도 있거든요. 이 영역이 제가 글을 쓰는 장소라고 생각해요. - 후루이 요시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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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모험 - 철학자들과 함께 떠나는
황산 지음 / 북바이북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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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이 쓴 철학자들과 함께 떠나는 글쓰기의 모험(북바이북, 2020)을 주문해 읽었다. 8명의 철학자의 글쓰기를 소개한 책이다. 각 꼭지들은 출판전문잡지 기획회의에 연재한 글들이다. 연속적인 글이 아니라 독립적인 글모음이다. 연재했을 당시에 제목이 철학자들의 글쓰기였다. 이번에는 책읽기를 앞에서부터 뒤로 하지 않고, 저자의 마무리글을 빼고, 뒤에서부터 앞으로 읽었다. 그래도 아무 문제 없는 책 구성이다. 이렇게 거꾸로 책을 읽어보기는 처음이다.

다른 꼭지들도 좋았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철학자는 모리스 블랑쇼다. 인용한 문장들은 모두 블랑쇼의 글쓰기에 소개된 인용구들이다. 블랑쇼의 글을 읽으며, 블랑쇼의 책 카오스의 글쓰기카프카에서 카프카로를 추가 주문했다. 책은 책으로 연결된다. 황산에 의견에 따르면 카오스의 글쓰기재난의 글쓰기로 변역하는 것이 원문에 가깝다. 나도 동의한다. 한편 내가 왜 블랑쇼의 글쓰기에 주목하였을까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전세계적 재앙이 코로나19 사태를 겪고 있기 때문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 이전의 생각과 삶의 방식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총제적이고 재난적 상황을 전지구가 맞이하고 있다. 모든 것을 괄호치고 제로 베이스에서 새로 생각하고 글을 써야하는 것 아닌가하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나의 생각을 더욱 격발시키는 작가가 모리스 블랑쇼였다. 아마도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나는 분명 니체나 들뢰즈에 더 주목했을 것이다. 삶의 처지가 달라지니 세상이 달리 보인다고, 이전 같았으며 그냥 지나치고 말았을 블랑쇼가 자슴에 들어와 박혔다. 글을 쓸 수 없는 시기에 글을 쓴다는 것, 자신이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절망적 상황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기독교 초장기때 바울의 글쓰기가 블랑쇼의 글쓰기 정신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도 들었다


<추신> 황산이라는 작가를 작가서랍에 넣어두었다. 그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글을 쓰려면 굽히지 말라.
희석시키지 말라.
논리적으로 만들려고 애쓰지 말라.
유행에 맞추어 당신의 영혼을 편집하지 말라.
당신의 가장 강렬한 집착을 무조건적으로 따라가자."
- 프란츠 카프카, 《카프카의 생각》(힘찬북스, 2019)

카프카가 쓰지 않으면 미칠 것 같기 때문에 쓴다는 사실을 한 친구에게 알려줄 때, 그는 쓴다는 것이 이미 광기, 자신의 광기이며, 일종의 의식 밖에서 깨어있는 것, 불면의 상태에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광기에 대항하는 광기인 것이다.(66쪽)

정념과 괴로움을 겪는 것, 맹목적인 복종, 신비함 속에서 기다라면서 밤을 맞아들이는 것, 따라서 헐벗음,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뿌리 뽑히는 것, 집착 없음을 포함해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게 만드는 집착 없음, 또는 자기 밖으로의(주도권도 없이, 동의하지도 않고 겪는) 추락.(68~9쪽)

읽지도 쓰지도 말하지도 않는 것, 그것은 묵언 가운데 머무는 것이 아니다. 아마 그것은 전대미문의 방식으로 웅얼거릴 것이다. 으르렁거림과 침묵.(69쪽)

쓸 때, 쓰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글쓰기는 –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 변한다. 그것이 카오스(재난)의 글쓰기이다.(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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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내 읽다가 늙었습니다 - 무리 짓지 않는 삶의 아름다움
박홍규.박지원 지음 / 사이드웨이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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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학자로서 존경해마지 않는 분들이 여럿이 있다. 그중에서 급진적 사상을 몸소 실천하고 계신 분이 두 분 있다. 한 분이 녹색평론 대표인 김종철 선생이고, 또 다른 한 분이 법학자이자 상상을 불허하는 엄청난 인문학적 책을 저술하고 번역한 박홍규 선생이다. 김종철 선생으로 치자면 1991년부터 지금까지 격월간으로 녹색평론이라는 생태사상 잡지를 내고 있으니, 그 저력은 상상을 불허한다. 박홍규 선생도 마찬가지. 그가 쓴 저술을 소개한 내용을 보자.

그동안 아돌프 히틀러, 누가 헤밍웨이를 죽였나, 카프카, 권력과 싸우다, 복지국가의 탄생, 헤세, 반항을 노래하다, 제우스는 죽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조지 오웰, 니체는 틀렸다, 인문학의 거짓말, 왜 다시 마키아벨리인가, 내 친구 톨스토이, 함석헌과 간디, 독학자 반 고흐가 사랑한 책, 독서독인, 마르틴 부버, 이반 일리히, 디오게네스와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다시 보기, 반민주적인, 너무나 반민주적인, 누가 아렌트와 토크빌을 읽었다 하는가, 윌리엄 모리스 평전,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생각하라, 자유인 루쉰등을 집필했으며, 존 스튜어트 밀 자서전, 유한계급론, 군주론, 산업 민주주의, 간디가 말하는 자치의 정신, 간디, 비폭력 저항운동, 유토피아, 이반 일리히의 유언, 학교 없는 사회, 자유론, 간디 자서전, 오리엔탈리즘, 사상의 자유의 역사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이 중에 내가 사고 읽은 책만 반이 넘는다. 나도 어지간이 읽은 셈이다.

이 정도면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 내내 썼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 박홍규 선생이 이번에 대담집을 냈다. 박지원이 묻고 박홍규가 답한 내내 읽다가 늙었습니다(사이드웨이, 2019)이다. 제목에서 확인하듯이 그의 쓰기는 읽기의 반영이다. 내내 읽었으니, 내내 썼던 셈. 현재 박홍규 선생은 교편을 접고 그의 아내와 경북 경산의 시골로 가서 600평의 땅에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휴대폰도 없이, 자동차도 없이, 매일 도시락을 싸들고 도서관으로 출퇴근한다. 주말이면 아내와 산책도 하고 영화도 본다. 책 표지를 보니, 그러한 박홍규 선생의 삶을 고독한 독서인’, ‘영원한 이단아’, ‘르네상스적 지식인등 다양한 타이틀을 붙여 소개해놨다. 부제는 무리 짓지 않는 삶의 아름다움이라 지었으니, 번다하고 과하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박홍규 선생의 삶을 생각해보면 모두 고개가 끄덕여지는 명칭이다.

이 대담집은 박홍규 선생의 다른 책에 비해 읽기가 수월하다. 질문도 쉽거니와, 대답도 동네에 지혜로운 노인의 말처럼 쉽고 명료하다. 독서, 고독, 사회, 인간 등을 주제로 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다정다감하다. 지적으로 무장한 박홍규가 아니라, 자상하고 친절한 박홍규를 보는 것이 낯설지만, 글이 날 서있다고 삶이 날 선 것이 아니라 생각하니 그 또한 고개가 끄덕여진다.

일체의 명예나 지위도 갖지 않고 오직 독서와 집필에만 몰두하는 그의 고독한 삶은 아무나 따라 할 수 없는 것이기에, 부럽다기보다는 경외감이 든다. 일본작가 마루야마 겐지 정도와 맞먹는 인물이 우리나라에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기도 하다. 어쨌든 나와 동시대에 박홍규 선생과 같은 지성인이 한 하늘에 숨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마음이 뿌듯해진다. 일독을 권한다.


생각을 깊이 하라, 많이 하라는 말은 세상에 얼마나 많나요? 그런데 제가 보기엔, 그처럼 ‘생각의 힘’을 막무가내로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저는 생각한다는 일의 진정한 힘은 ‘여러 가지를 다양하게 생각할 수 있는 힘’이라고 믿고 있어요. 다양한 생각들이 자기 안에 축적되어 있고, 그래서 자기 생각의 좌표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 그런 축적과 인식의 연쇄 과정. 그게 바로 생각의 가치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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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행복하라 - 법정 스님 열반 10주기 특별판, 샘터 50주년 지령 600호 기념판
법정 지음 / 샘터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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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었던 때가 중학교 3학년 시절이었다. 그 얇디얇은 수필집을 교회 목사님의 권유로 읽으면서, 나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법정스님의 도력(혹은 필력)으로 내 협소한 종교관이 무너진 것도 중3 때였다. 그 이전의 나는 기독교의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나, 법정스님의 글로 인해 벽이 무너져버렸다. 이후 법정스님의 책이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사서 읽었던 것 같다. 그리고 법정스님의 무소유 정신에 입각하여 내가 소장한 책들을 무수히 남들에게 주기도 했었다. 그 법정스님이 돌아가신 지 벌써 10년이 지났다. 돌아가시며 자신의 이름으로 낸 책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라는 말씀도 하셔서 법정 없는 10년이 지났다. 그리고 스님의 책들도 나에게서 다른 사람들에게 거의 다 넘어가버리고 말았다. 그랬는데 올해 스님의 책이 출간되었다. 얼마나 반갑던지. 눈에 띄자마자 구입했다.

책소개란에 이렇게 쓰여 있다. “2010311(음력 126) 법정 스님이 입적하고 10년이 흘렀다. 법정 스님의 유지에 따라 그의 맑고 향기로운 영혼이 담긴 글들이 더 이상 출간되지 않아 안타까워하는 독자가 많았다. 법정 스님 열반 10주기를 맞아, 그리고 샘터 50주년 지령 600호를 맞아, 저작권 관리를 포함하여 법정 스님의 뜻을 이어가고 있는 '()맑고 향기롭게'와 협의하여 샘터는 그의 글들을 다시 출간한다. 스스로 행복하라는 법정 스님이 남긴 글들 중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글을 가려 뽑아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읽어보니, 오래전에 읽었던 추억들이 새록새록 돋았다. 그러다가 퍼뜩 글을 오래전 것인데 메시지는 낡지 않았구나 생각하였다. 아니 오히려 더 설득력을 가지고 다가왔다. 세상은 새로워진 것 없이 낡아가고 있었는데, 스님의 글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니 새로울 밖에.

법정스님의 글을 읽으면 맑은 거울을 마주보고 있는 듯 내 더러운 삶의 때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욕망과 망집에 사로잡혔던 나의 모습이 부끄러워지고, 고개가 숙여지고, 조금은 겸허해진다. 무릇 종교인의 삶이 이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앞날이 참으로 멀구나 느껴진다. 법정스님처럼 살지는 못하겠지만 그분에게 심하게 꾸지람을 듣지는 말고 살아야겠구나 다짐하게 된다.

이 책의 구입과 독서로 스님의 열반 10주기를 기념하자. 그리고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50주년을 맞이한 샘터의 지령 600호 기념판을 축하하자. 내 어린 시절부터 서민의 값싸고 유익한 잡지로 계속 나의 정신을 맑혀준 잡지가 샘터 아니던가. 스님의 정신이 그러하듯, 샘터도 오랫동안 우리 곁에 머물러 주기를 기대한다.

 


탐욕이 없는 것이 진정한 보시요
어리석음 없는 것이 진정한 좌선
성내지 않음이 전정한 지계持戒요
잡념 없음이 진정한 구도다

악을 두려워하지 않고
선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인연 따라 거리낌 없이 사니
모두가 함께 반야선般若船을 탄다 (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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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그 유골을 먹고 싶었다
미야가와 사토시 지음, 장민주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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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그 유골을 먹고 싶었다(흐름출판, 2020)를 읽어보라고 추천받았을 때, 속으로 엽기적인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식인욕망은 엽기적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만큼 여러 지층을 형성하고 있는 문화적 현상이어서 도대체 어떤 책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그리고 드디어 추천작가가 건낸 책을 읽어보고 나서 엽기가 아니라 감동 만화에세이였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그린 이 만화책은 미야가와 사토시의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우주 전함 티라미스라는 시리즈 만화의 원작자로 알려진 사토시는 도쿄에서 생활하는 지방 출신 요괴들의 비애를 그린 만화 도쿄 백귀야행으로 2013년에 데뷔했다. (뒤져봤더니 우리나라에서는 번역이 안 되어 있다.) 그는 지금 도쿄에서 정력적으로 만화가 생활을 하고 있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그 유골을 먹고 싶었다는 일본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하니 기회가 되면 꼭 챙겨봐야겠다.

나이가 들수록 주변에 죽음이 늘어난다. 10년 전만 해도 이전 세대의 죽음을 치러야했는데, 이제는 동시대인들의 죽음을 경험한다. 가까운 선후배, 지인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볼 때, 나는 간접적으로 나의 죽음을 생각한다. 2 때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할 때만 하더라도 나의 죽음은 상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나의 죽음이 멀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경구가 나의 삶의 그림자처럼 드리워있다.

한편 한 사람의 죽음은 단지 그 사람의 소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주변의 사람들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상실의 슬픔으로 절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애써 그 슬픔을 꾹꾹 눌러 참는 사람들도 있지만, 슬픔을 참는다고 해서 슬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랫동안 그 사람의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고여있게 된다. 부모의 죽음 앞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냉혈한이라 불리는 사람도 피끓는 슬픔을 간직하고 괴로워하기도 한다. 단지 남들에게 표현하지 못했을 뿐. 이 만화에세이는 사랑하는 어머니의 죽음을 둘러싼 가족들의 다양한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그 표현양식은 다르지만 가족의 상실에 대한 슬픔이 절절하다. 이 작품이 연재되었을 때 500만 뷰의 누적조회수를 기록한 것은 그 다양한 슬픔에 대한 공감이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뼈 한 조각이라도 자기 몸 속에 영원히 간직하고픈 작가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 유골을 먹고 싶었다라고 속으로 말한다. 그 속마음은 엽기도 아니고, 공포도 아니다. 오히려 예수의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 빵과 포도주를 먹으며 예수의 살이고 피라 말했던 기독교인들의 방식처럼, 사라진 것을 영원히 현재화하려는 거룩한 몸짓일수도 있다. 만화는 그 작가의 슬픔을 천천히 따라가며 우리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한다. 단순하고 투박한 만화체는 오히려 이러한 정서를 잘 담아내는 장점으로 작동하면서 몰입감을 더한다. 주변에 상실의 슬픔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손수건처럼 건낼 수 있는 좋은 만화책 한 권을 발견했다. 이 책을 권유해준 이수연 작가에게 고맙다고 말해야겠다.

 

 

 


언젠가 나도 죽어서 이 세상에서 갑자기 사라질 테고 무르고 새하얀 뼈만 남게 되겠지. 하지만 그때가 되면 아프거나 힘들거나 하는 세상의 일에서 해방된 후일 테니 나쁘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 나를 불쌍하게 여기지는 않아도 된다. 네가 몹시 슬픈 이유는 틀림없이 아직 네 안에 ‘죽음‘과 ‘외로움‘이 뒤섞여 있는 상태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1년쯤 지나면 ‘죽음‘을 외로움과 떨어뜨려 놓고 조금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죽음‘의 정체를 알게 되면 그 외로움도 조금씩 치유되어 갈 거야. ‘시간이 약‘이지. 나는 네가 ‘죽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의식을 가지기 바란다.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할수록 ‘죽음‘에는 의미가 더해져 간다.
나도 요새 어쩐지 죽음에는 에너지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부모의 죽음에는 아이의 인생을 움직일 정도로 엄청난 힘이 있어. 슬프다, 슬프다 하면서 울다가 정신 차려보면 어느새 새로운 일들이 시작되고 또 흘러가고 있을 거야. 어느 날의 이별 경험이 슬픔에 주저앉은 너의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올릴 거야, 그러면 너는 다시 바빠질 테고, 바쁜 것은 행복한 일이니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기를. (154~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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