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현상학

랄프 루드비히 / 이동희 / 이학사 / 276쪽

(2018. 11. 12.)

그는『현상학』을 우선 전체 체계의 “서론"으로 생각하고 썼다. 이 “서론”이 이제는 비록 체계의 “제1부”로 불리지만 셸링에게 보낸 한 편지를 보면 헤겔은『현상학』이 출판된 후에도『현상학』을 서론으로 간주하려는 태도를 버리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서론은 “알게 모르게” 확장되었고. 내적-외적 압력을 받으면서 “거의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짧은 시간 안에”(테오드르 헤링). “헤겔의 예나 생활의 위기의 최정점에서”(알트하우스) 지금의 부피로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사이에 서론은 자기 목적이 되어『정신현상학』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현상학』의 부피가 괴물같이 되어 버린 것은. 헤겔이 소용돌이에 빠진 것처럼 집필에 너무 빠져 버려서 더 이상 멈출 수 없 었다는 주장으로 설명된다.

『현상학』을 쓸 당시 헤겔은 후대의 세대들이 이 저작을 자신의 철학 의 “탄생지” (칼 맑스)로 여기고. 그것을 그의 저서들 중 가장 유명하고도 영향력이 있는 저서로 천명하리라는 사실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현상학』이 완성된 후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그의 체계 안에서『현상학』에게 가장 알맞는 자리를 부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헤겔은 자신의 주저인 뉘른베르크『논리학』(통칭『대논리학』〕이 간행되고 하이델베르크『엔치클로패디』가 예측되는 시기에도『현상학』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 바를 몰랐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앞의 주장들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은 이론이 주장된다. 즉『현상학』은 기대하지 않았던 헤겔 철학 체계의 선행적 작품이다. 헤겔은 후기의 체계적인 서술만을 전적으로 애호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시어머니처럼 이『현상학』을 구박하게 된다.

​(P.18)

헤겔의 거대한 사유가 흘러가는 강줄기는 관념론이다. 관념론을 염두에 두지 않고는 그토록 난해한 헤겔 사유의 도정을 더더욱 이해하지 못 할것이다.

관념론은 다음과 같은 그리스어에서 기원한다. idein=보다, eidos= 형상. 원래 감각적인 의미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매우 오래 전부터 감각적인 봄과 외형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뜻했다. 다시 말해 형상과 봄의 기초가 되는 어떤 것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현실과는 대비되는 지금의 말인 "이상Ideal" 과 유사하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에게 “형상Bild”은 정신적 원형, “이데아Idee” 이다. 그리고 손으로 파악 가능한 세계의 모든 현실들은 단지 모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원형, 즉 이념을 단지 구체화시킨 인화된 사진에 불과하다.

대체로 이 생각이 형이상학으로서. 전래의 모든 서양 철학을 지배해 왔다. 이 전래의 서양 철학은 모든 존재의 통일적 근거를 세계의 기초가 되는 정신적인 것, 이념적인 것에 대한 사상 속에서 찾아 왔다. 이 세계는 우리의 표상들 안에 주어져 있다.

이런 생각은 인간 사유에 의한 엄청난 결렬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이 결렬은 계몽주의와 그 결과인 자연과학의 지칠 줄 모로는 발전에 의해 이루어진다. 인간적 이성은 종교와 교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서 모든 인식의 참된 내용인 자연에 기초한다. 경험은 17~18세기의 기계적 유물론에서 최정점을 이를 때까지 제1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경험론이라는 이름하에 인간적 인식이 내리는 최상의 축복을 받는다. 힘과 질료는 새로운 근본 개념이며, 자연사自然事는 신 없이 인과관계의 도움만으로도 해명이 되었다.

우리는 관념론의 위대한 사상가들이 이런 발전에 “대항을 해 왔다"는 철학사의 과장된 정식을 인용할 수 있다. 비록 그들의 전반적인 사상 속에서 이런 정식이 확연하게 눈에 띄지는 않을지라도 말이다.

(P.20)

* 관념론

물질보다는 정신에 가치를 둔 철학 사상으로, 관념 혹은 관념적인 것을 실재적이고 물질적인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실재론 혹은 유물론과 반대적 성격을 갖는다. 관념론은 정신에 의해 세계가 만들어진다고 주장하며, 의식과 독립한 사물(事物)이 아닌 인간의 의식이 만들어낸 관념적인 것만이 세계에 관한 지식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관념론은 사물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정신적인 의식의 세계만을 인정하며, 물질적 세계의 실재에 대한 인식론적 입장을 나타내기도 한다. 관념론은 다음과 같이 주관적 관념론, 객관적 관념론, 선험적 관념론으로 나눌 수 있다.

① 주관적 관념론 : 우리를 둘러싼 사물과 세계는 표상(表象)이나 감각에 불과하며, 우리의 주관적 인식을 떠나서는 어떠한 세계도 있을 수 없다는 견해이다. 대표적 학자로는 버클리, 흄, 피히테 등이 있다.

② 객관적 관념론 :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본질을 정신적인 것으로 파악하였으며 주관적 의식과는 독립한다고 보는 견해이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헤겔셸링 등이 있으며 이들에 의해 19세기 중심 철학으로 자리 잡았다.

③ 선험적 관념론 : 형식주의적 관념론이라고도 하며, 18세기 철학자 칸트가 주장하였다. 세계를 인식하는 힘은 경험보다도 선험적 주관인 의식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견해이다. 인식의 근거를 초월적인 주관에서 찾았다는 데 의의가 있다.

정신의 발전을 나타내 보여 주는 것이『정신현상학』의 궁극적 테마이다.

처음에 정신은 자기 자신과의 격렬한 씨름을 벌인다. 즉 의식으로서의 정신은 변증법적 나선 속에서 자기의식으로 고양하기까지 자신을 도야해 가며, 결국 정신으로서 세계의 무대에 등장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정신의 발전 과정이라는『현상학』의 제목에 계속해서 접근해 갈 수 있다. 이렇게 보면『정신현상학』은 다음과 같이 “정신의 현상들에 관한 이론”을 의미할 것이다.

- 우선 개별적 의식 안에 있는 정신의 현상들은, 감각적 의식으로부터 시작해서 자기의식에 이른다.

- 결국 정신은 세계와 역사 속에서 현상하며, 절대적 정신 속에서 자기 실현에 이르게 된다.

(P.26)

또 하나의 간결한 요약 정리. 우리는 이 요약 정리로 변증법적 운동 법칙을 계속해서 안전하게 확보하고자 한다.

​- 개개의 대상은 우선 자기 자신과 동일하며. 즉자적이다.

- 그러나 그 대상은 또한 구별, 즉 자신의 대립, 나 혹은 다른 것을 위한 존재를 갖는다.

- 이 대립은 또한 지양된다. 그리고 즉자와 대타 사이의 통일은 나의 지知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지知를 풍부하게 한다. 이 통일은 대자 존재에 있다.

이제 새로운 어떤 것이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이로써도 또한 양자 사이의 타당한 절대적 통일, 즉 주체와 객체 사이의 통일은 달성되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직 달성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항상 새로운 변증법적 운동들 안에서 지知와 대상 사이의 대립은 항상 새로운 단계를 거쳐 가면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 진행은 대립이 운동의 종말에 가서 궁극적으로 극복될 때까지 계속된다.

(P.49)​

첫 번째 걸음에 대한 정리

감각적 확신이라는 단순한 형태의 의식은, 우리의 의식이 개별적 대상에 곧바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관계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은 오류이다. 소위 개별적인 것은 오로지 일반자로서만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 지금 그리고 여기라는 개념들, 그리고 무엇보다 언어는 개별자가 일반자라고 폭로하기 때문이다. 지知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물어 간다.

(P.70)

두 번째 사유 운동의 정리

우리는 정신의 두 번째 사유 운동으로서의 지각을 발견한다. 지각은대상을 이제 일반자로서 파악한다. 속성들이 드러나면서 지각은 통일성과 일반성 사이의 모순에 빠진다. 지각이 그에 대해 대답을 주려 할 때 지각은 기만에 봉착하고 만다.

(P.81)

세 번째 단락의 정리

오성은 [예를 들어〕레몬 열매의 개념에 있어서 이〔다양한〕계기들을 함께 생각하고 개념에 있어서 어떤 보편적인 것과 무제약적인 것, 즉 힘을 발견한다. 오성은 힘을 변증법적으로 끝까지 그려 내고자 하며 [힘의〕대타 존재를 힘의 발현, 즉 신맛이 나는 식물. 건강 촉진 등등으로 부른다. 그러나 힘은 또한 대자 존재이다. 비타민 c로 서의 잠재적 힘은 열매의 “내부”에 머물러 있다. “자기에게로 떠밀려 들어온 힘"으로서의 비타민은 대자 존재와 대타 존재의 통일로서 나의 오성의 산물로 남아 있다. 오성은 이제 사물이 힘을 갖는다는 것을 알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知에 대해서도 또한 알게 된다.

(P.91)

노예는 노동에 의해서 자신의 자립성을 획득한다. 주인은 노예에 의존하게 되며 노예는 주인에게 의존하게 된다.

헤질의 사유 과정은 아래에서 급격한 도약을 한다. 그는 저지된 욕구로서의 노동에 대한 정의에서 우리가 추적하기 힘든 다음과 같은 사상으로 나아간다. 즉 노동은 대상을 형성하고 형식화할 뿐만 아니라 또한 노동하는 인간도 형성하고 형식화한다는 사상이다.

앞을 내다보는 사람은 이 구절이 가져온 역사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나중에 칼 맑스라는 젊은 학생도 우리가 읽었던 것과 동일한 말을 읽었다. 맑스는 헤겔의 이 구절에서 노동에 관한 자신의 개념을 도출해 내게 된다. 헤겔의 이 구절은 맑스에게 주요한 사상적 맹아였다. 맑스는 이 맹아를 그 당시에 다음과 같은 자신의 현실적인 혁명적 사신使臣으로 발전시킨다. 즉 노동은 인간을 형성하고, 새로운 산업 사회의 비인간적 노동 조건은 노동자를 탈형성화한다. 맑스는 후에 다음과 같은 입장을 확고히 한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 그 자신의 소외를 생산해 낸다!

그러나 헤겔에 있어 이 구절은 맑스와 달리 긍정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의식은〕노동에 의해서 자기 자신에 이른다.” 더욱이 주인의 자유에 의해서 자기 자신에 이른다. 칼 맑스는 자신의 사회적 성향에 기초해서 헤겔의 이 말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다음과 같이 전도시켰다. 노동자는 비인간적인 노동 조건 때문에 자기 자신에〔자기 자신의 자유에〕도달하지 못한다. 그리고 노동자는 사회적으로 비난받아야 마땅할 이런 사실을 불타 오르는 분노의 횃불로 만들어 자본가의 머리를 향해 던진다.

(P.123)​

칼맑스

그는 헤겔 전문가들 중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강력한 인물이다. 그는 헤겔이 죽은 지 5년째가 되던 해 베를린으로 온다. 베를린에서 그는 에두아르드 간스의 강의를 통해 비로소 헤겔 철학과 친숙해진다. 헤겔/맑스라는 이 주제는 관찰자가 갖는 각각의 세계관적 입장에 따라 이득이 될 만한 연구 영역을 제공한다.

우리는 [헤겔과 맑스의 관계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을 이끌어 낼 수 있을것이다.

첫 번째 관점: 헤겔과 맑스 이 두 사람은 동일한 요구를 한다.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철학은 현실적인 지知가 되어야 한다. 맑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철학은 실현되어야만 한다.

여기서 칸트가 이미 여러 모로 추구했던 다음과 같은 물음이 새롭게 터져 나온다. 지知와 사유에 있어서 이성 사용은 실천적 차원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칸트는 이 물음을 긍정하며 이론적 이성보다 실천적 이성을 우위에 둔다.

헤겔 또한 지知와 행위(이론과 실천〕사이의 관계를.「이성」과「정신」사이를 이어주는 구절 안에서 회복시키고 있으며 이 관계를 “현실적 지知”로 요약한다. 그러나 이 개념은 맑스의 귀에는 너무나 비실천적으로 들렸다 철학은 이성이 무엇을 위한 능력이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지시해야 한다고 맑스는 요구한다. 맑스는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장으로부터 핵심적 개념을 이끌어 내어 수용한다. 노동 안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에 이른다. 여기서 헤겔은 실제로 [맑스의〕대부이다. 그러나 대부는 [맑스에게〕신랄하게 비판당한다. 헤겔은 단지 정신적 노동을 알 뿐이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현실적인 구체적인 노동자에게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것이다.

맑스의 추종자들은 이 비판에 공감해서 헤겔에게 노동이란 지知[이론〕의 발전을 바라보는 일면적 관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맑스의 적대자들은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그들은 경제적 생산과 그것의 결과 만을 고려하는 이 일면적인 연관에 있어서 노동의 개념이 현실적으로 파악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질문한다.

두 번째 관점: 맑스는 헤겔의 변증법적 도식을 수용한다. 자기 실현은 자기 외화라는 우회적인 길을 통해서 일어난다. 맑스에 의한 헤겔의 전복을 단순화시켜 말해 본다면. 이런 것이다.

A. 헤겔: 자연과 물질적인 것은 정신의 외화의 결과이다.

B. 맑스: 이념적인 것과 정신은 질료의 진화적 산물이다.

(아주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질료는 맑스에게 어떤 광물 조각이나 물리적 요소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에 대해 노동을 가하며 또한 그것에 의해서 스스로를 형성해 가는 인간이다!)

앞에서 언급한 명제 A와 B를 정확하게 살펴 본 사람은 매우 본질적인 어떤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주어가 이 명제들 속에서 서로 다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헤겔에 있어 주어는 자기의식의 운동이요. 맑스에 있어서 주어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운동이다.

여기서 우리는 변증법을 묘사할 때 쓰였던 머리와 발이라고 하는 유명한 그림을 드디어 만나게 된다. 맑스는 헤겔을 비판하기를. 우리를 둘러싼 사물들은 우리의 머리 속의 의식 단계가 매번 만들어 내는 모사가 아니라(그런데 헤겔은 이렇게 주장한 적이 한번도 없다!). 오히려 머릿속의 개념은 현실적인 사물의 모사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래서 맑스는 이 “이데올로기적 곡해"는 수정되어야만 하며 머리로 서 있던 헤질의 변증법을 다시 다리로 서게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맑스에 따르면 철학의 중요한 관심사란. 이성이 실천적이 되어 노동자가 처해 있는 비인간적 상태와 정의롭지 못한 상태에 이성이 관여할 수 있는 현실을 산출해 내는 것이다.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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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정신현상학>

(Phanomenologie des Geistes)(1807)

(철학사상 별책 제3 제17호)

강성화 /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 170쪽

(2018. 11. 10.)​

W. 마르크스의 지적처럼, 일부이든 전체이든 <정신현상학>은 ‘의식의 경험에 관한 학’이고자 했음은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의식의 경험’은 의식이 자신의 인식 내용을 비판해가면서 전개해나가는 인식 비판의 과정이다. 인식은 의식이 자신에게 주어지는 대상을 단번에 온전히 파악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파악된 인식 내용을 다시 대상에 준해서 검사하고 수정하는 과정이다. 수정된 인식 내용과 함께 대상도 변화하며, 변화된 대상에 대한 의식의 새로운 인식 활동이 일어난다. 이 새로운 대상은 바로 그 첫 번째 대상을 통해서 그를 뛰어넘음으로써 얻어진 경험이다. 헤겔에 의하면 오직 의식 자체의 이러한 역전을 통해서 생성된 대상의 경험이 학적 전개 과정으로 고양되는 것이며, 이 과정이 의식의 ‘변증법적 운동’이고, 그 내용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곧 의식의 경험의 학이 되는 것이다.

(P.14)

<정신현상학>은 인간 정신이 그 일상의 의식 형태에서 출발하여, 어떤 근거에 의거하여, 또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철학적 의식에 도달하는가를 논한 것이다. 그리하여 <정신현상학>은 먼저 (대상)의식에 대한 논의를 설정하고, 직접적, 자연적인 의식으로서의 감성적 확신에 대한 장(章)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헤겔은 감성적 확신․지각․오성[지성]이라는 의식의 변증법적 운동을 통한 대상의식의 자기의식으로의 전화(轉化)를 묘사하고 있다. 대상의식으로부터 시작한 의식의 운동 속에서 의식은 대상세계의 배후에 있는 자기 자신을 보게 되고, 그래서 대상의식은 자기의식으로 전환한다. 대상의식에서 의식의 대상은 의식 자신 밖에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자기의식에서는 자기 자신이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자기의식은 다른 어떤 것도 다 그렇듯이 단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변증법적 3분법에 따라서 자기 확신의 진리 → 자기의식의 자립성과 비자립성 → 자기의식의 자유라는 삼단계를 걸쳐 완성되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자기의식은 이성으로 발전하여 간다.

자기의식의 최종 단계, 즉 자기의식의 자유의 단계에 도달하면 의식과 대상, 주관과 객관, 개별과 보편이 통일되어 이전의 자기의식은 이제 이성으로 나아간다. 한마디로 이 이성은 대상의식과 자기의식의 통일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대상의식은 대상과 의식이 대립하고 진리는 오직 대상 쪽에 있다고 생각되었고, 자기의식은 그 진리가 대상 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속에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자기의식에 있어서 자아는 자신을 그 대상들 안에서 인식하기는 하였으나 아직 절대적 실체이자 동시에 절대적 주체이기도 한 정신으로서의 의식일반과 자신이 통일되어 있다는 것을 파악하지는 못한다. 이 통일에 대한 의식이 바로 이성이다.

​ "이성은 (자기가) 모든 실재성이라는 확신이다.” 요컨대 이성으로 현상하는 정신은 자신만이 실재성이라고 확신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이성의 초기 수준에서 실재성이란 다만 확신하고 단언할 뿐 비매개적인 직접적 단계, 즉 즉자적 단계에 있을 따름이다. 이에 입각해서 “공허한 관념론”(der leere Idealismus)(S.180)이 형성된다. 따라서 이성은 이러한 공허성을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이 실재성을 지니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입증은 이론적 이성 또는 관찰하는 이성의 단계에서 실천적 이성의 단계, 그리고 자각적 이성 또는 사회적 이성의 단계로 나아가면서 더욱 분명하게 완성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즉자적 단계에 있는 이성은 대자적이기도 한 이성으로, 즉 즉자적이고 동시에 대자적인 이성, 곧 정신으로까지 나아간다.

(P.16)

정신은 상승하여 절대적 정신 '자기 확신적 정신'으로 지양되어 간다. 세계를 자기의 것으로 하고 그 운동을 나의 것으로 하는 정신이야말로 ‘절대적인 진실의 실재’라고 할 것이다. 정신의 성립과 함께 ‘의식의 경험의 학’은 끝을 맺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신현상학>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이제 자기 ‘자신을 바로 자기의 세계로서, 그리고 다시 이 세계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의식하는’ 이 정신의 전개를 역사적으로 추적하여 가는 것이다. 끝으로 <정신현상학>은 절대정신을 이야기한다. 정신이 스스로 정신임을 자각한 정신, 이것이 곧 절대정신이다. 이제 ‘자기 확신적 정신’은 절대정신으로 지양된다. 그리고 절대정신이 직접 자기를 직관하는 것은 종교의 장(章)에 와서야 가능하다. 절대적 정신이 직접적, 대상적으로 직관되고 표상되는 단계가 종교인데, 그것이 순수 사유 또는 개념으로서 자각되면 절대지(絶對知)에 이르게 된다.

(P.17)

<『정신현상학』 요약 >

헤겔의 이른바 예나 시대(1801~1807년)를 대표하는 저작이자 헤겔 최초의 주저. 나폴레옹 군대가 예나에 입성한 날인 1806년 10월 어느 날 심야에 탈고되어 편집을 거치다가 1807년 4월에 밤베르크에서 처음 출판되었다. ‘정신현상학’이란 일차적으로 ‘의식의 경험의 학’(Wissenschaft der Erfahrung des Bewußtseins)인 바, 이는 우리의 의식이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하여 진리를 파악하여 가는 과정을 서술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경험’이란 의식이 자기 자신의 내용과 대립을 극복하고 자기에게로 돌아와서 자신과 완전히 일치하게 되기까지의 의식의 변증법적 운동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연대적으로나 체계적으로나 그의 사상의 출발점이 된 저작이며 유럽 철학사에서는 손꼽히는 고전의 하나이다. 헤겔은 이 책에서 정신이 감각적 확실성에서 출발하여 과학적 오성[지성], 이성적 사회의식, 종교 등의 단계를 순차적으로 변증법적 경로를 거치며 끝까지 올라가 끝내는 절대지(絶對知)인 완전한 자각에 이르는 도정을 서술하였다.

(P.23)

헤겔의 저서를 대표하는 작품이자 독일 관념론의 ‘백미’로 꼽히는 작품. 1807년에 최초로 출판된 이 책은 다양한 해설서에 대한 ‘해설의 역사’가 필요할 정도로, ‘현존하는 철학 저서 중 가장 난해한 것 중의 하나’로 지목된다. 방대한 양의 사상이 극도로 압축되어 있어서 난해함을 더 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그토록 열렬히 읽히고 평가되어 온 이유는 고도의 독창성과 독특함에 있다. 독일 관념론의 요람으로 평가될 수 있는 이 책은 헤겔 철학 체계를 이해하는 데에 핵심이 된다. 초기 헤겔주의자들 중의 한 사람인 슈트라우스는 <정신현상학>을 ‘헤겔 저작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서, 논리학, 법철학, 종교철학, 미학, 역사철학, 철학사 등의 헤겔 후기 저작과 강의들은 모두 <정신현상학>의 ‘부분들’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헤겔의 ‘천재성’은 이 <정신현상학>에서 최고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의심할 바 없이 <정신 현상학>은 헤겔 철학의 정점이자 독일 관념론의 정점에 도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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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상)의식

‘의식의 경험’의식자신의 인식 내용을 비판해가면서 전개해나가는 인식 비판의 과정이다. 인식은 의식이 자신에게 주어지는 대상을 단번에 온전히 파악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파악된 인식 내용을 다시 대상에 준해서 검사하고 수정하는 과정이다. 수정된 인식 내용과 함께 대상도 변화하며, 변화된 대상에 대한 의식의 새로운 인식 활동이 일어난다. 이 새로운 대상은 바로 그 첫 번째 대상을 통해서 그를 뛰어넘음으로써 얻어진 경험이다. 헤겔에 의하면 오직 의식 자체의 이러한 역전을 통해서 생성된 대상의 경험이 학적 전개 과정으로 고양되는 것이며, 이 과정이 의식의 ‘변증법적 운동’이고, “그 내용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곧 의식의 경험의 학이 되는 것이다.”

(P.36)​

의식-대상-지(知)의 관계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은 타자인 대상에 대한 의식, 즉 대상 의식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의식은 우선 “의식은 그 어떤 것을 안다”(S.73)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데, 바로 이 문장은 의식, 대상, 지의 관계를 집약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대상에 해당하는 ‘그 무엇’은 의식과 관련 없이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된다. 의식은 대상과 의식 자신을 각각 독립된 것으로 간주한다. 대상과 의식은 상대의 영향 없이도 그 자체로 존재한다. 그러나 의식은 대상이 없으면 지를 가질 수 없다. 지를 가지기 위해서 의식은 대상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의식이 두 개의 대상을 가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그 하나는 일차적인 절대적 즉자체이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즉자체가 의식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즉자체로서의 일차적 대상은 의식과의 관계 속에서 변화를 겪게 된다. 따라서 일차적 의미는 즉자체도 오직 그 의식을 위한 의식과의 관계 속에 있는 즉자체로서만 존재한다. 여기서 새로이 나타나는 것이 의식에 대해서만 존재하는 즉자체, 즉 진리인 것이다. 이 새로운 대상은 바로 그 첫 번째 대상을 통해서 그를 뛰어넘음으로써 얻어진 경험이다. 헤겔에 의하면 오직 의식 자체의 이러한 역전을 통해서 생성된 대상의 경험이 학적 전개 과정으로 고양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의식의 경험의 학’이 되는 것이다.

(P.37)​

(1-2-1) 지금까지 본 바에 따르면 의식은 그 어떤 것을 지득(知得)하게 되는데 이렇게 파악된 어떤 것(대상)은 또한 본질이며 즉자적(卽自的)인 것이 된다. 바로 여기서 이미 이러한 진리의 양의성이 고개를 든다. 즉 여기서 우리는 의식이 두 개의 대상을 가진다는 사실을 알게되는 바, 그 하나는 일차적인 절대적 즉자체(卽自體)이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즉자체가 의식을 위해서 존재하게 되는 이차적이며 이중적인 의미를 띠는 것을 말한다. 이 경우에 후자에 속하는 것은 일단 의식의 자기내적 반성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것은 결코 대상에 대한 표상이 아니라 다만 첫 번째에 해당하는 즉자체에 대한 의식의 지(知)에 불과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 즉자체로서의 일차적 대상도 의식과의 관계를 통하여 어떤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그 일차적 의미의 즉자체는 더 이상 단순한 즉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의식과의 관계에 있어서 모름지기 그 의식을 위한 의식과의 관계 속에 있는 즉자체로서만 존재하게 된다. 여기서 새로이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의식에 대해서만 존재하는 즉자체, 즉 진리인 것이다. 이것을 일컬어 우리는 본질 혹은 의식의 대상이라고 한다. 이렇게 볼 때 결국 이 새로운 대상은 일차적 의미의 즉자체가 무력화됨으로써 나타난 것이라 하겠거니와 모름지기 이 새로운 대상은 바로 그 첫 번째 대상을 통해서, 그를 뛰어 넘음으로써 얻어진 경험이기도 한 것이다.(S.73/148쪽)

(P.38)

(대상)의식과 자기 의식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먼저 인간의 의식이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 즉 자기 의식에 도달하기 이전의 의식 단계를 다룬다. 이 의식의 단계는 다시 대상의 존재를 감성적으로 확신하는 의식(감성적 확신), 대상의 존재를 지각하는 의식(지각), 대상 세계의 법칙을 인식하는 의식(오성[지성])의 3단계로 전개되고 있는데, 이 세 개의 의식 형태는 모두 자기에 대한 의식, 즉 자기 의식이 아니라 외적인 대상에 대한 의식이다. 헤겔은 이 대상에 대한 의식을 단순히 ‘의식’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헤겔에게서 ‘의식’은 다름 아닌 대상 의식을 가리킨다. 이 대상 의식으로서의 의식은 자기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감성에 사로잡힌 대상 지향적 의식이다. 그러나 ‘의식의 진리는 자기의식이며, 이 자기의식이 의식의 근거’이며 “따라서 어떤 다른 대상에 대한 의식은 그 실존에 있어서 자기의식이다.”(Enzyklopädie, § 424). 헤겔에서 자기의식이란 단적으로 자기와 자기라는 대상에 대한 의식이다. 헤겔 <정신현상학>의 <A. 의식> 부분은 바로 대상의식이 이 자기의식으로 고양되는 과정과 그 논리에 대한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P.39)

​​

(1) 감성적 확신

감성적 확신의 대상 : ‘이것’

헤겔은 <정신현상학>의 <A. 의식> 부분을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자연적인 의식으로서의 감성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감성적 확신, 지각, 오성[지성]이라는 의식의 변증법적 운동을 통한 의식의 자기 의식으로의 전화(轉化)를 묘사하고 있다. <정신현상학>의 <A. 의식> 부분은 인간의 의식이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 즉 자기 의식에 도달하기 이전의 의식 단계를 다룬다. 이 의식의 단계는 다시 대상의 존재를 감성적으로 확신하는 의식(감성적 확신), 대상의 존재를 지각하는 의식(지각), 대상 세계의 법칙을 인식하는 의식(오성[지성])의 3단계로 전개되고 있는데, 이 세 개의 의식 형태는 모두 자기에 대한 의식, 즉 자기 의식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의식, 즉 대상 의식이다. 헤겔은 이 대상 의식을 단순히 ‘의식’이라 부른다. 여기서 헤겔이 대상에서 시작하고 있는 것은 감성적 확신에 있어서는 대상이야말로 직접적으로 존재하는 참된 본질이고, 이와 반대로 자아 또는 지는 대상을 매개함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는 비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대상은 자아 없이도 존재할 수 있지만 자아는 대상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헤겔은 이러한 감성적 확신의 대상을 간단히 ‘이것’이라는 말로 표현하여 “바로 이 ‘이것’이란 무엇인가?(Was ist das Diese?)”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P.51)

감성적 확신의 대상에서 지금ㆍ여기의 변증법

헤겔은 감성적 확신의 대상에 대하여 “‘이것’이란 무엇인가?(Was ist das Diese?)”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것을 시간적으로는 ‘지금’(das Jetzt), 그리고 공간적으로는 ‘여기’(das Hier)로써 답한다. 이러한 답변을 통해 그는 결국 감성적 확신이 대상의 진리를 바르게 파악하지 못함을 명확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선 “지금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예를 들면 “지금은 밤이다”라고 써둘 수 있다. 그러나 얼마 후 아침이 되고 낮이 되면 이러한 규정은 완전히 그 뜻을 상실하고 대상의 진실을 전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결국 ‘지금’이란 밤도 있고 낮도 있는 보편적인 추상물에 불과하게 된다. 여기에서 감성적 확신에 의해 드러나게 되는 대상의 진리는 완전히 보편적인 것에 지나지 않게 되고 이러한 사정은 ‘여기’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말할 수 있다. 즉 앞을 향하여 “여기에 나무가 있다”로 표현함과 동시에 뒤를 향하는 경우에는 이 진리는 없어지고 “여기는 집이다”가 진리가 된다. 결국 감성적 확신에 있어서 ‘여기’라는 대상은 집, 나무 등등 어느 것이나 포함할 수 있는 하나의 보편적인 존재에 불과한 것이 분명해진다.(황세연, <헤겔정신현상학과 논리학 강의>, 중원문화, 1984, p.102 참조) 종합하자면, ‘지금’과 ‘여기’의 차원에서 검토될 수 있는 ‘이것’이란 사실상 추상적인 보편자 내지는 일반자(ein Allgemeines)에 불과하며 대상의 구체적 진리를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P.52)

감성적 확신에서 지각으로의 이행

감성적 확신의 변증법을 통해서, 다시 말해 감성적 확신의 대상 및 주체, 그리고 감성적 확신 전체와 관련된 지금과 여기의 변증법을 통해서 거듭 확인하게 되는 것은, 감성적 확신은 구체적 진리를 하등 파악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가장 구체적으로 풍부한 파악을 확신한 것이었지만 그것이 파악한 바는 사실 가장 추상적인 일반자에 불과하다는 것이 밝혀지게 된다. 결국 이러한 존재와 그것에 대한 지(知)의 괴리를 자각한 의식은 존재의 진리를 파악하기 위해 다음으로, 즉 지각(die Wahrnehmung)으로 이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P.59)

(2) 지각

지각의 대상 : 사물

감성적 확신은 지금, 여기, 자아란 범주를 통해서 대상을 파악하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을 통한 대상 파악은 감성적 확신이 원래 의도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된다. 요컨대 감성적 확신에 있어서 진리의 포착은 개별자와 보편자(일반자)의 모순이라는 일괄된 공허한 운동으로 판명되게 된다. 바로 이것이 감성적 확신이 지각의 단계로 이행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지각의 단계에서 대상은 추상적 보편성(일반성)의 단계가 지양되고 ‘각이한 특성을 지닌 사물(Ding)’로서 나타난다. 지각의 대상은 사물이며, 이 사물은 지금 그리고 여기가 변하여도 동일한 것으로 존재한다.

(P.60)

지각에서 오성[지성]으로의 이행

지각의 대상인 사물은 타자에 대하여 존재하는 한에 있어서 대자적으로 존재하고, 대자적으로 존재하는 한에 있어서 타자에 대하여 존재하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이 대자존재와 대타존재의 모순의 통일 속에 있는 대상은 이미 사물이 아니다. 여기에서 감각적인 사물에서 출발하고 일자와 다양한 통일로서 파악된 대상은 이러한 감각적인 개별성으로서의 사물의 제약을 끊고 사물에 제약되지 않는 보편자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제약적 보편자(일반자)를 대상으로 할 때 의식은 이미 지각을 넘어서서 오성[지성]의 단계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P.69)

(3) 오성[지성]

오성[지성]과 무제약적 일반자

감성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식의 노력은 ‘지각’의 장(章)을 거쳐 ‘오성’의 장에 이르면서 그 결실을 맺게 된다. 이 세 번째 인식 단계의 목적은 대상에서 발견된 직접적인 것과 일반적인 것의 계기들을 통합하는 데 있다. ‘오성’ 장에서 의식은 감성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나 무제약적(unbedingt) 일반자를 자신의 대상으로 삼는다. 의식은 이때가지 한 개념을 발견하기는 했지만 그에 대해서는 아직도 반성을 하지 못하고 있다. 지각은 무반성적 개념에 머물러 있다. 그것은 아직도 “자기의 개념을 개념으로서 포착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개념을 개념으로서 포착하는 것’(Erfassen des Begriffes als Begriff)이 무제약적 일반자의 과제이다.

(P.70)

의식에서 자기 의식으로의 이행

지금까지 의식타자인 대상에 대한 의식과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구별했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은 구별일 수 없다. 타자에 대한 의식이나 대상 일반에 대한 의식은 그 ‘자체가 필연적으로 자기 의식이거나 자신에 대한 반성’이며 나아가 ‘타재성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것’이다. 의식은 힘의 전개인 현상의 내면을 초감성적 세계, 법칙의 세계라 칭하고 이 법칙의 세계가 힘의 전개인 현상의 근거, 현상에 한 설명이 된다고 생각한다. 법칙은 힘의 일반적 구별, 힘의 내재적 형식이다. 그러나 법칙은 그 자체 내적 필연성을 지나지 못한다. 법칙은 서로 무관심한 계기들의 어설픈 통합에 지니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의식은 자신이 힘에 대해 가지는 법칙이라는 지(知)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는다. 지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는 것은 곧 의식 자신의 문제점을 알아차리는 것과 같다. 의식은 자기 자신으로 복귀해 자신 안에서 구별이면서 동시에 구별의 지양인 구별을 목격한다. 그 안에서 같은 것이 다른 것이 되고 구별인 것이 구별 아닌 것으로 된다. 이런 절대적 변화 속에서 의식은 이제까지 자신이 사물, 법칙에 대해 행한 구별이 오직 의식 자신 안의 구별의 외화임을 깨닫는다. 의식은 자신이 자신을 끊임없이 이분화하고 통합하는 과정, 즉 무한성으로서의 구별을 자신의 새로운 대상으로 삼는다. 의식 자신이 의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로써 의식은 자기 의식이 된다.

(P.84)

2. 자기 의식

대상 의식으로부터 시작한 운동 속에서 의식은 대상 세계의 배후에 있는 자기 자신을 보게 되고, 그래서 대상 의식자기 의식으로 전환한다. 대상 의식에서 의식의 대상은 의식 자신 밖에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자기 의식에서는 자기 자신이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자기 의식은 헤겔에서 다른 어떤 것도 다 그러하듯이 단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 3분법에 따라서 자기 확신의 진리 → 자기 의식의 자립성과 비자립성 → 자기 의식의 자유라는 삼단계를 걸쳐 완성되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자기 의식은 이성으로 발전하여 간다.

(P.85)

자립적/비자립적 자기 의식

생사를 건 투쟁에서 한편의 자기 의식의 죽음은 다른 한편의 자기 의식의 확신까지도 부정하게 되므로 두 자기 의식은 각자 타자의 승인 혹은 인정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승인, 인정은 ‘하나의 자기 의식’에서 보자면 타자가 보존되는 가운데에 타자 스스로 자신을 부정하고 ‘그’ 하나의 자기 의식을 승인, 인정하는 것이어야 한다. 여기서 본질적 두 계기가 드러나는데, 하나는 ‘순순한 자기 의식’이요, 다른 하나는 ‘물성의 형태를 띠고 있는’ 대타적 의식이다. 그런데 ‘이 두 계기는 일단 서로가 불평등한 대립적 관계’에 있다. 하나의 자기 의식은 자아를 끝까지 고수하고 다른 자기 의식은 생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종결됨으로써 전자는 자립적 자기 의식의 지위를 유지하고 후자는 비자립적 의식이 된다. 전자는 주인이고 후자는 노예이다.

(P.96)

노동 : 주인과 노예의 역전의 완성

궁극적으로 노예를 주인으로, 예속을 지배로 변형시키는 것은 노동이다. 다시 말해 노동이 주인과 노예의 역전 관계를 완성시킨다. “노예의 의식은 오직 노동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에게로 귀일(歸一), 귀착된다.” 주인은 노예의 노동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따라서 노예에 의존하게 되고 이와는 반대로 노예는 주인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노동을 통해 생산하고 획득함에 따라서 주인을 지배하는 힘을 획득한다. 노예는 물적 소재를 가공하고 자유로운 형성 활동을 실행하는 것에 의해서, 즉 자각적 창조 행위에 의해서 자기 의식으로 복귀하고 자유를 획득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노예는 주인을 위해서 노동을 함으로써 자신의 자연성을 극복할 수 있다. 이것은 본능을 초월한 비물질적인 것을 위해서 노동한다는 것인데 이는 또한 노예가 자연성을 초월한 개념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의식적 활동에 의해서 노예는 인간화되며 자신의 본성[자연]을 부정하고 변화시킨다. 주인은 노예로 하여금 노동하도록 강요했지만, 노예는 그러나 노동함으로써 사물적 자연 위에 군림하는 주인이 된다. 노동이 노예를 사물적 자연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그것은 또한 그를 그의 노예적 본성[자연]으로부터 해방한다. 그러므로 노동은 노예에게 해방과 자유의 길을 열어주는 열쇠가 되는 셈이다.

(P.101)

자기 의식의 지양

불행한 의식의 분열은 완화되고 통일을 이루어 나간다. 그러나 불행한 의식은 순수 사유와 개별을 통일하고는 있지만 아직은 양자의 화해를 자각하는 곳에 서 있지는 않다. 불행한 의식은 금욕주의와 회의주의를 넘어서서 순수 사유와 개인성을 결합하고 통일하여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아직도 의식의 개인성과 순수 사유와의 화해를 자각한 사고에까지 고양되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추상적 사유가 의식의 개별성과 접촉하는 중간에 서 있는 것이다. 불행한 의식은 이 양자의 접촉점에 있다는 의미에서는 순수 사유와 개별성의 통일이 이루어져 있으나 아직은 개별성의 형태를 얻은 불변자가 의식의 개별성인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 자각되어 있지는 않다.(인용 참고) 그리하여Hegel은 이제부터는 개별성의 형태를 얻은 불변자에 관해서 문제를 삼고 있다.

즉 자기 의식의 내부에서 개인성과 보편성의 통일, 가변성과 불변성의 통일, 그리고 차안성과 피안성의 통일을 구한다. 이런 통일은 자기 의식이 다음에 올 이성의 단계로 지양하면서 이루어지며, 이 이성의 단계에서 자기 의식은 대상 의식과 최종적으로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

(P.120)

3. 이성​

의식 → 자기 의식 → 이성이라고 하는 변증법적 삼분법에 따라 보자면 이제 의식자기 의식을 거쳐 이성에로 이행하였다. 이 이성은 대상 의식과 자기 의식의 통일을 나타낸다. 대상의식은 대상과 의식이 대립하고 진리는 오직 대상 쪽에 있다고 생각되었고, 자기 의식은 그 진리가 대상 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속에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자기 의식에 있어서 자아는 자신을 그 대상들 안에서 인식하기는 하였으나 아직 절대적 실체이자 동시에 절대적 주체이기도 한 정신으로서의 의식 일반과 자신이 통일되어 있다는 것을 파악하지는 못한다. 이 통일에 대한 의식이 바로 이성이다.

(P.121)

이성과 관념론

자기 의식이 최종 단계, 즉 자기 의식이 자유라는 단계에 도달하면서 의식과 대상, 주관과 객관, 개별과 보편, 더 나아가서는 의식과 자기 의식이 통일되기에 이른다. 여기서 마침내 자기 의식은 이성의 단계로 고양되기에 이른다.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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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햘한 의식의 모험

헤겔의 정신현상학

강순전(글), 김양수(그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 삼성출판사 / 109쪽

(2018. 11. 9.)

헤겔은 칸트와 더불어 독일을 대표하는 철학자이다. 두 사람은 철학의 역사에서 서로 뚜렷이 구별되는 대표적인 두 가지 사고의 들을 제공 한다. 현대의 주요한 사상들도 대부분이 칸트와 헤겔의 사상을 응용한 것일 만큼, 두 사람은 사상사에 큰 영향을 끼셨다. 그런 헤겔의 대표작이 바로《정신현상학》이다. 철학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그냥 지나 치지 못하는 이유가 짐작이 갈 것이다. 게다가,《정신현상학》은 헤겔의 사상을 풍부한 소재를 통해 설명해 주는 책이라 더욱 읽을 만하다.

왜 사람들은 평생 쓰고도 남을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벌려고 할 까? 왜 어떤 사람은 자존심을 굽히지 않으려고 기꺼이 죽음을 선택하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목숨이 아까워 쉽게 자존심을 버리는 걸까? 세상은 왜 내 마음 같지 않은가? 나의 선한 이상이 왜 부조리한 세상사의 거친 풍파에 부딪혀 좌초해야만 하나? 청년들은 자기 이상에 따라 세계를 변혁하려 하고, 노인들은 세상에 자신을 기꺼이 맞추며 살아간다. 어느 쪽이 더 현명할까?

《정신현상학》은 이러한 질문들에 답을 줌으로써 인간을 깊이 이해하게 해 준다. 더 나아가 사회를 이해하는 지침을 제공하기도 한다. 개체가 공동체에 앞서는가 아니면 공동체가 개체에 대해 우선인가? 국가의 역할은 무엇인기? 이러한 문제들을 생각해 보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도 크게 도움이 된다.

(P.7)

헤겔 사상을 대표하는 것은 변증법이다. 누구나 헤겔 하면 변증법을 떠올릴 만큼 변증법은 헤겔 사상의 핵심이며, 그의 변증법은 후대의 다른 사상가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러면 변증법이란 무엇일까?

사실은, 변증법 사상을 처음 선보인 사람은 고대 그리스의 헤라클레이토스라는 철학자였다. 그는 “신은 낮과 밤, 전쟁과 평화, 배부름과 배고픔이다.”라고 말했다. 해리클레이토스는 모든 것이 낮과 밤, 전쟁과 평화, 배부름과 배고픔처럼 대립된 것들의 쌍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한 것이다.

헤겔도 위와 아래, 아버지와 아들, 동쪽과 서쪽 따위를 변증법적 관계의 예로 든다. 위는 아래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위이고, 아래도 위에 대해서 아래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도 아들이 없으면 그냥 남자 어른일 뿐이다. 또, 동쪽은 서쪽에 대해서 동쪽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한쪽이 없으면 다른 쪽도 없다. 이처럼 모든 것은 대립하는 것과 짝을 이룬다는 것이 변증법의 핵심 내용이다.

홀로 존재하는 것 같은 사물도 사실은 반드시 다른 사물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다. 즉 한 사물은 다른 사물과 어떤 것과 다른 것, 원인과 결과, 현상과 본질, 가능성을 가진 것과 현실적인 것 따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예컨대, 아무 관계도 없어 보이는 나무와 돌은 서로 '어떤 것' 과 다른 것(타자)' 이라는 관계를 맺고 있고, 불은 연기와 '원인' 과 '결과' 라는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고, 씨앗은 '가능성을 가진 것' 으로서 열매라는 '현실적인 것'과 짝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관계들의 양쪽을 나타내는 말들-어떤 것, 다른 것, 원인, 결과 등-을 철학자들은 '범주' 라고 한다. 범주란 사물을 분류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일반적인 개념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관계 들은 모두 서로 대립하는 범주의 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모든 사물 이 다른 사물과 관계하면서 존재한다는 말은 사물들이 대립적인 것들의 통일 속에 있음을 뜻하게 된다. 결국 모든 것은 대립적인 것들의 통일로서 변증법적 관계 속에 있는 것이다

(P.25)

헤겔은 먼저 사물 세계의 질서를 일반적인 범주들의 체계로 정리 하였고, 그러자 모든 사물이 대립하는 것들의 쌍으로 이루어져 있음이 드러났다. 이처럼 헤겔은 범주들을 가지고 세계를 분석한다. 그리고 그렇게 분석된 세계는 변증법적 논리의 지배를 받는 세계이다.

하지만 변증법이 단지 사물이나 사건을 구성하는 대립적 요소들의 정태적 통일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변증법은 한 사물이나 상태를 구성하는 두 규정들 사이의 분리 불가능한 상호 작용에서 다른 상태로 이행하는 운동의 논리이기도 하다. 우리는 보통 변증법이라는 방법론 아래서 '정', '반', '합'이라는 도식을 떠올린다. 그것은 부정확하고 추상적인 도식이기는 하지만 변증법을 가장 간편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설명 방식이다. 그 도식을 통해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두가지 대립되는 계기들이 상호 작용 끝에 새로운 단계로 이행한다는 이행의 논리일 것이다. 새로운 단계를 합으로 말하는데, 그것도 또다시 정과 반이라는 대립된 두 요소로 이루어진다.《정신현상학》에서도 하나의 의식의 형태는 그것을 형성하는 지식과 대상이라는 두 가지 대립된 계기들의 상호 작용에 의해 다른 의식 형태로 이행한다.《정신현상학》은 이러한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의식이 진리를 향해 운동해 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의식의 경험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기서도 변증법은《정신현상학》의 서술을 지배하는 방법론으로서 작용한다.

(P.27)

《정신현상학》은 원래 '의식의 경험의 학' 이라는 이름으로 기획되었다. 그렸던 것이 구성에 혼선이 빚어지면서 '정신현상학' 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된 것이다. 실제로 처음 출판된 책들 가운데 몇 권은 겉표지 제목이 '정신현상학', 미처 제거하지 못한 속표지 제목은 '의식의 경험의 학' 이다. 한 책에 제목이 두 개인 꼴이다. 이는 단지 출판상의 실수라고만 보아 넘길 일 이 아니다.《정신현상학》'의식의 경험의 학'이기도 하다. 의식과 정신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다. 둘의 관계를 어린아이와 노인의 관계에 비유하면 이해하기 쉬울 듯하다. 의식은 정신의 어릴 적 모습이고, 정신이 완전히 성장한 모습이다.《정신현상학》은 의식이 여러 경험을 거지면서 성장하여 마침내 정신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 준다.

아이가 자라면서 세상의 모든 것을 알려고 하는 것처럼, 의식은 세상의 진리를 알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의식은 대상을 파악하기 위해 이런저런 방법들을 사용한다. 의식은 자신이 사용 한 방법이 진리를 탐구하는 데 가장 적합한 방법이고, 그렇게 손에 넣은 진리가 진짜 진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은 늘 자기 생각을 되돌아보기 마련이다. 청년이 된 아이는 옛 모습을 되돌아보고는 그렇게나 확신에 가득 차서 했던 일들이 부질없는 짓이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청년기 역시 성장의 과정인 한, 그가 한 일도 장년이 되면 부질없게 느껴질 터이다. 인간은 산전수전 두루 겪으면서 성숙해 가고, 노인이 되어서야 마침내 세상의 이치에 통달한다. 의식도 마찬가지다. 진리를 얻었다고 확신했다가 그렇지 않음을 알고 절망하기를 거듭한다. 의식이 그런 시행착오 끝에 도달 하는 목적지는 정신이다. 정신은 그때까지 의식이 경험한 모든 내용을 자기 것으로 품어 안은 진리이다.

노인이 지난날을 되돌아보듯이, 정신은 자신이 겪어 왔던 험난한 모험의 과정을 되돌아본다. 노인의 회상 속에서 생에의 여러 장면들이 떠오르듯이, 정신의 회상에서는 이전에 인식했던 이런저런 진리들이 모습을 드러낸다.《정신현상학》이 '의식의 경험의 학' 이기도 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의식이 끊임없이 진리를 향해 전진하는 모습을 그린 '의식의 경험의 학' 이 곧 정신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모습을 그린 '정신의 현상학' 인 것이다.

​(P.31)

의식의 경험 혹은 정신의 현상은 '감각적 확신' 이라는 의식에서 출발한다. 감각적 확신이란 '감각으로 파악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인식 방식' 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감각적 확신은 가장 단순한 것을 파악하는 가장 약한 인식임이 밝혀진다. 이제 감각적 확신을 대체할 보다 고차적인 인식으로 '지각'이 제시된다. 지각은 경험주의 인식론처럼 경험을 통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확실한 진리 획득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각 역시 인식이 단지 사물에 대한 파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이 갖는 관계까지 파악하여야 한다는 것을 경험하고는 자신의 주장을 거둔다. 진리를 찾아 헤매는 의식은 다시 '오성' 으로 이행한다. 오성은 사물들의 관계, 즉 법칙을 파악하는 과학적인 인식이지만 정태적인 과학적 인식은 보다 고차적인 생명에 관한 실천적 인식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자기의식을 본질로 하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까지도 파악하여야 우리는 보다 고차적인 진리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의식의 대상이 사물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실천적 관계로 바뀌고 의식은 '자기의식' 이 된다.

사람들은 자기만 인격으로서 인정받으려고 하고 남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서로 싸우고, 그 때문에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생겨난다. 그런데 헤겔은 결국 주인이 노예에 의존하고, 노예는 주인의식을 갖게 됨으로써 상호 인정하는 관계로 나아가게 된다고 한다.

이제 보편성을 깨달은 의식은 진리의 내용을 자신이 모두 간직하고 있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바로 세계의 내용이라고 거침없이 주장하는 '이성' 이 된다. 헤겔이 여기서 말하는 이성은 칸트식의 개인주의적 인간 중심주의 사상을 말한다. 이성을 가진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제일이라는 자기중심적 사고에 빠져 있다. 헤겔은 이런 사람을 돈키호테에 비유한다. 돈기호테는 창을 들고 풍차로 돌진한다. 이 풍차가 나타내는 것은 세상사이다. 제 아무리 잘난 개인도 세상사에 부딪치면서 결국 세상이 진리이고 개인은 그것을 거슬러 살 수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이 세상사에 담긴 진리가 바로 '정신' 이다. 개인적 차원의 이성이 진리가 아님이 밝혀지면서 이제 진리는 정신임이 드러나게 된다. 헤겔은 정신이 예컨대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처럼 개체와 공동체가 조회를 이룬 이상적인 상태라고 서술한다. 정신은 가장 풍부한 지식이고 그 안에 모든 것의 진리 근거가 들어 있다. 의식은 이로써 정신과 일치하게 되고 마침내 자신의 목적지에 도달한다.

​(P.33)

칸트개인의 의식 속에 세계의 진리와 실천 규범이 완벽한 형식으로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헤겔우리가 인식에서나 실천에서나 항상 세상의 구체적인 대상들과 부딪쳐 가면서 그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누구 말이 맞는가? 사실은 두 주장이 모두 설득력이 충분해서 우열을 가릴 수 없다. 칸트와 헤겔 이후의 철학사를 보더라도 그렇다. 후대의 수많은 철학자들이 두 사람의 사상을 자기 사상에 응용하고 있다. 개인의 주체성과 양심을 중시하는 자유주의와. 개인과 공동체의 합일을 꾀하는 공동체주의가 현대의 대표적인 두 철학 사조라는 사실에서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칸트와 헤겔의 사고방식이 모두 현대 철학에도 막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P.37)

대상을 가장 확실하게 인식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렇게 파악된 대상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어떤 용감한 사람이 가장 먼저 "나는 눈으로 보는 것만이 가장 확실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대답한다. 헤겔에 따르면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은 감각적 확신이라는 의식의 형태다. 의식의 첫 번째 형태는 이러한 사람들의 생각을 말한다. 이 생각은 우리가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진리란 무엇인가?' , '참된 인식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이 가장 확실한 인식을 가져다준다고 밀하곤 한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 아무 생각 없는 것이다.​

​(P.45)

감각적 확신은 이러한 보편적인 것을 파악하는 데 너무 무기력하다. 처음 우리는 감각적 확신이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인식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에는 그것이 가장 빈약한 인식이라는 반대의 결과를 얻게 되었다.

가장 풍부하고 확실해 보였던 감각적 확신이 왜 가장 빈곤하고 불완전한 인식으로 전락했을까? 감각적 확신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파악하는 방법인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게 파악된 개별적인 대상은 말로 표현하자마자 보편적인 것으로 바뀐다. 존재하는 것은 구체적인 개별자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일반적인 것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다. 철학사를 공부해 보면 이러한 헤겔의 생각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플라톤은 보통 사람들이 생생한 현실 세계라고 하는 현상 세계가 사실은 그 자체로 인식될 수 없는 가상의 세계라고 말한다. 반면 인식 속에서 분명하게 파악될 수 있는 일반적인 관념이 참된 세계라 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구체적인 개별자가 인식의 대상이지만 그것이 인식될 때에는 개념이라는 일반적인 것을 통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헤겔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이러한 부류의 철학자들을 주지주의자(主知主義者)라고 부른다. 이들은 지(知), 즉 이성으로 파악되는 지가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을 다른 말로 합리주의자, 이성주의자라고도 한다. 헤겔은 이런 합리주의, 이성주의의 마지막 주자이다.

(P.51)

우리는 지식을 보편적인 개념의 형태로 갈무리한다. 감각적 확신은 자신이 대상을 가장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파악한다고 믿지만, 자기가 안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려고 할 때 바로 어려움을 겪는다. 알긴 아는데 분명 하게 말로 표현하지는 못하는 처지에 놓이기 때문이다. 이성주의자 플라톤은 그런 경우 정말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지식말로 분명히 표현되어야 하고 남에게 전달될 수 있어야 하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함은 전달할 수 있는 지식의 꼴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말과 같다는 것이다. 감각적 확신은 대상을 말로 표현할 때 그저 '이것' 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내용에 대해서 아무것도 전달할 수 없는 가장 빈약한 지식이다.

​ 감각적 확신은 대상을 감각을 통해 직접 인식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도 풍부한 인식이라고 생각한다. 그 대상은 단순한 개별자이고, 그것에 대해서 감각적 확신은 그저 '이것' 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에 대해 반성을 해 본 결과, 감각적 확신의 대상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복잡하고 보편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의식은 단순한 것을 파악하는 감각적 확신의 형태로는 대상을 더 이상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음이 드러났다.​

(P.52)

사물이 고유한 본질을 지니려면 다른 것과 구별되어야 한다. 그런데 구별은 다른 것과 관계하는 것이다. 결국, 사물은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것과 관계해야 한다는 모순 속에 놓인다. 이제 사물의 동일성은 관계가 된다. 동일성이 관계라는 것은 모순이다. 사물은 본래 자기 동일적인 것이라고 했지만 자기 동일적 사물은 모순에 의해 파괴되고 만다.

사물이 몰락한다는 것은 사물이 동일성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사 물은 그 자신으로 있지 못하고 파괴되어 해체된다. 사물이 파괴되고 해체 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것은 하나의 단위로 통일되어 있던 사물이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제 사물은 하나의 통일체로 존재하지 못하고 관계가 된다. 관계란 자기와 다른 것이라는 두 개의 관계 형틀로 이루어진다. 결국 하나의 통일체로서 사물은 부정되고 두 개의 사물들, 두 개의 관계항들로 이루어진 관계가 사물의 진리임이 밝혀진다.

지각의 대상은 사물이다. 지각은 처음에 사물을 하나의 통일체로서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이 통일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진리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사물을 잘 관찰해 보면, 지각의 생각과는 달리 그것이 통일체가 아니라 관계임이 밝혀진다. 관계는 하나의 사물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지각에 의해서는 더 이상 파악될 수 없다. 지각의 방식으로 진리를 파악하고자 했던 의식은 좌절하고, 의식은 이제 새로운 진리 인식의 방법을 필요로 한다.

​(P.58)

지각과 경험의 결과인 관계를 파악하는 의식오성이다. 동일적 대상으로서의 사물은 결국 관계 속에서 그것의 진리를 파악할 수 있음이 드러났다. 사물은 지양되어 사물과 사물의 관계인 법칙 속에 위치하게 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진리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하나의 사물을 그대로 받아 들이기만 하면 진리라는 지각의 생각은 단순한 생각이다. 하나의 사물이 다른 사물과의 관계 속에 있고, 진리는 하나의 사물 차원에서가 아니라 관계 속에 있다는 생각이 오성의 생각이다.

​(P.61)

헤겔은 법칙의 뒤집힌 세계 논리가 생명의 논리와 같다고 한다. 이로써 헤겔이 말하려는 바는 법칙보다 생명이 더 높은 단계의 진리라는 것이다.

후대의 여러 철학자들이 헤겔의 이러한 통찰을 탁견이라 평가하였고, 그의 견해에 동조하여 과학주의비판하였다. 과학주의 입장에 선 사람들은 과학적 지식이야말로 최고의 진리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철학자들은 과학이란 세계를 설명하는 다양한 방식들 가운데 한 가지일 뿐이며, 과학을 비롯 하여 모든 형태의 지식들의 원천인, 우리의 생활 세계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학적 지식만이 지식의 표본으로 간주되고 다른 모든 지식이 무시된다면 세계는 추상화하고 세계의 다양성들이 무시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세계를 생생하게 파악할 수 없다고 헤겔은 비판한 것이다.

헤겔은 법칙에 대한 지식보다 더 우위에 있는 것이 생명에 대한 지식이라고 말한다. 의식의 경험에서 이제 새로운 대상은 생명이다. 이제 의식은 자신과 똑같이 생명을 가진 존재를 대상으로 한다. 이러한 의식을 우리는 자기의식이라고 한다. 이전에는 대상에 대해 의식했지만 이제 자기와 동일한 것, 자기 자신을 의식한다. 이렇게 의식의 진리는 자기의식임이 밝혀지면서 우리는 자기의식이라는 의식의 형태가 겪는 경험으로 넘어간다.

(P.66)

동물은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 자기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수치심은 자기의식에서 비롯한다. 자기의식이란 자기에 대한 의식이다. 우리는 자기를 어떻게 의식하는가? 나는 나이다. 이것이 자기의식의 출발점이다.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나이고 나여야 한다. 이러한 나에 대한 의식을 우리는 자아에 대한 의식, 자의식이라고 한다. 자의식을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확고한 의식, 즉 주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는 남에게 주체로서 존중 받기를 원하지, 객체로 이용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자의식은 곧 자존감이다. 남이 내 자의식을 무시하거나 그것에 상처를 주었을 때, 우리는 자존심 상해 한다.

자기의식을 존중하는 것을 헤겔은 인정이라고 부른다. 인간이 자기의식을 본질로 하는 존재인 한,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 한다. 또한, 우리는 자신이 인격으로서 존중 받으려면 남의 인격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배워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기의식 만 남에게 존중 받기를 원하고 남의 자기의식은 인정하지 않으려고 들기 십상이다. 이렇게 인간의 자기의식은 욕구의 형태로 나타난다. 욕구란 자아가 존재에 관계하여 그것을 부정하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인간은 욕구를 채우기 위해 맛있는 음식을 먹어 치우고 산을 깎아 집을 짓는다. 자연의 사물을 부정하여 자기의 의도대로 변형함으로써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킨다. 꼭 자연에 대해서만 그러는 것이 아니다. 같은 인간을 상대로 해서도 남을 부정하고 자기 마음대로 부리고 싶어 한다. 그래서 남을 자기와 똑같이 자기의식을 가진 인간으로 대우하려 하지 않는다. 남의 자기의식을 무시하고 마치 자기의식이 없는 동물이나 사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루려고 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취급 받기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결국 싸움이 벌어진다. 그것은 사람들이 저마다 인간으로서 인정받기 위해 벌이는 싸움이다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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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타인을 인정하기보다 타인에게 인정받기를 원한다. 남을 자기의식으로서 섬기기보다 남의 자기의식을 부정하며, 그러면서도 자신의 자기의식은 남이 존중하고 섬겨 주기를 바란다. 그 의중에 남에게 인정 받으려는 욕구와 욕구가 서로 충돌하여 싸움이 일어난다. 이 싸움은 자기 의식을 가진 인간으로서 대우 받느냐, 아니면 자기의식을 부정당한 채 동 물이나 사물처럼 취급당하느냐를 결정하는 중대한 투쟁이다.​

이때 한쪽의 자기의식은 동물적 생명을 초월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 말처럼,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자가 그렇지 않은 자에게 승리를 거두고 인정을 받는다. 그에게는 동물과 공유하는 생명보다 인간을 인간다운 존재로 만들어 주는 자기의식, 자존감이 더 중요하다. 이 자기의식이 바로 주인의식이다. 남에게 자기의식을 인정받은 승자는 주인이 된다. 한편, 다른 쪽의 자기의식은 자기의식으로서 자신을 주장하기보다 죽음을 두려워하여 생명에 집착한다. 그는 '제발 목숨만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패자이다. 패자는 주인의 아량 덕분에 목숨은 부지할 수 있지만, 그 대가로 자기의식을 철저히 부정당한다. 자기의식을 전혀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동물이나 사물처럼 취급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가 노예이다. 그리고 이로써 주인-노예의 관계가 성립된다.

​(P.74)

주인-노예 관계를 논리적으로 고찰해 보면 겉보기외는 반대로 관계가 뒤집힌다. 주인의 자기의식은 '자기=자기' 라는 동어 반복의 성격을 지닌 추상적인 자기의식이다. 주인은 자연에 직접 관계하지 않고 노예의 노동의 결과를 향유한다. 이는 주인이 노예를 통해서만 대상과 관계를 맺고 노예를 통해서만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음을 뜻한다. 결국 주인은 그의 욕구 충족을 노예에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또한 주인이 주인일 수 있는 것은 노예를 통해서이기 때문에, 주인 개념 역시 노예에 예속되어 있다. 그렇게 보면, 주인은 겉보기에는 자립적인 의식이지만 실제로는 비자립적인 의식임이 드러난다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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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은 철학적으로 노예를 주인보다 높이 평가한다. 왜 그럴까? 헤겔이 노예를 더 중시하는 것은 그가 노동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노예는 노동의 상징이다. 노예제 사회에서 노동은 노예나 하는 부정적인 활동이었고, 귀족은 정치적 실천에만 관여했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 노동은 사회 형성의 원리로 간주 된다. 노동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노동은 자연의 가공을 통해 자기의식을 자연에 부과하고 그 본질을 실현함으로써 의식이 발전해 가는 원동력이 된다. 헤겔은 노동이 사회 형성의 원리일 뿐 아니라 인간의 본질이라고 본다. 또, 노동을 통해 사회를 형성하는 노예의 노동만이 보편적 자유의 이념을 실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민 사회란 노예가 주인이 되는 사회라고 규정한다. 시민 사회에서는 각 구성원이 남이 소비할 상품을 공급한다는 의미에서 남을 섬기는 노예이고, 남이 생산한 상품을 향유한다는 의미에서 남의 주인이 된다. 시민 사회는 사람들이 누구나 노예이자 주인인 사회이다. 우리는 헤겔의 그러한 생각에서 인간에 대한 탁월한 통찰을 엿볼 수 있다. 노동자라고 남을 위한 수단에 머물러야 하는 것이 아니고, 노동은 하지 않으면서 목적으로만 대우 받으려는 것도 허위의식임을 그의 시민사회론은 일깨워 준다.

(P.79)

자기와 다른 사물이 아니라 자기처럼 생명을 가진 인간을 대상으로 하면서 의식은 자기의식이 된다. 자기의식의 대상은 생명을 가진 인간이다. 주체인 자기의식은 대상인 인간을 동등한 자기의식으로 대하지 않고 자기의식이 없는 생명처럼 취급하려고 한다. 물론, 객체인 인간도 인간인 한 똑같은 태도를 취하며, 인정투생을 통해서 승패가 결정됨으로써 주체인 주인과 객체인 노예가 결정된다. 하지만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노예가 노동을 통해 자기의식을 획득하고 주인이 편협한 자유의식을 보편적 자유의식으로 발전시키면서 해체된다. 이로써 주인만이 자유롭다는 일면적이고 개별적인 자기의식은 모두가 주인이라는 보편적인 자기의식으로 발전한다. 자기의식이 대상으로 삼았던 생명의 진리는 자기의식임이 밝혀졌고, 자기의식은 자신의 상대방도 자기의식임을 인정하면서 보편적 자기의식으로 바뀐다.​

(P.81)

이성은 자연을 자기방식대로 파악할 뿐 아니라, 사회에 대해서도 자신의 생각이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방식대로 세상사를 규정하고 변경하려고 한다. 칸트는 앞의 것을 이론적 이성이라고 하고 뒤의 것을 실천적 이성이라고 부른다. 이론적 이성에 대해서나 실천적 이성에 대해서나, 헤겔은 칸트의 입장을 비판한다.

먼저, 이론이성에 대한 헤겔의 비판을 살펴보자. 헤겔은 세계란 인간 안에 미리 갖추어진 보는 방식에 따라 이러저러하게 규정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의 인식을 그때그때 세계의 내용에 맞추어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칸트와 헤겔의 이러한 차이는 이미 제1부에서 살펴보았다. 칸트는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기 이전에 이미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이 우리의 의식 속에 갖추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의식 안에 있는 인식의 도구를 잘 파악해서 오류에 빠지지 않고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수영장에 들어가기 전에 수영의 기술을 미리 터득해 두어야 한다는 주장과 같다.

하지만 수영은 언제나 잔잔한 수영장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고, 물살이 센 강이나 파도가 거친 바다에서도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리고 장소가 달라지면 그에 맞추어 수영 방식도 바꾸어야 한다. 헤겔은 경험이 항상 대상에 따라 달라진다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보아 온, 의식의 다양한 경험이 그것을 말해 준다. 단순한 성질들을 감각을 통해 파악할 때가 있는가 하면, 사물을 파악할 때에는 지각의 방식으로 사물의 성질들을 받아들이며, 더 복잡한 대상인 사물들의 관계오성을 통해 인식한다. 또한, 죽은 사물뿐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도 인식의 대상이 되며, 그 경우에는 분명히 또 다른 인식 방식이 적용된다. 헤겔은 이처럼 대상의 종류에 따라 서로 다른 인식의 방법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P.84)​

실천이성에서도 칸트와 헤겔은 대립한다. 먼저. 칸트의 생각을 알아보자. 실천이성이란 실천을 인도하는 이성이고, 이성이 이끄는 대로 수행하는 실천이 도덕이다. 도덕이란 무엇인가? 아니, 더 구체적으로, 도덕적으 로 행동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남이 보지 않거나 남에게 들키지 않더라도 도둑질이나 거짓말을 하기를 꺼린다. 그 꺼림칙함의 정체는 무엇이고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것이 바로 양심의 가책이고, 우리가 가책을 느끼는 것은 이처럼 우리에게 양심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행동이 도덕적인지 아닌지는 남이 판단해 주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양심이 행위의 도덕성을 판정하는 심판관이다. 칸트는 인간은 누구나 양심을 가지고 태어나고, 양심이 있는 한 어떤 것이 도덕적이고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프리카 인이든 한국인이든, 미국인이든 아랍인이든, 모두가 양심과 양심에 따라 생각하는 실천 이성을 가진 인간인 한 도덕에 관해 합의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칸트는 도덕이 개인적 양심에 근거를 두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헤겔의 생각은 그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는 인간의 행위를 윤리적으로 만드는 것은 풍습, 관습 등을 비롯한 공동체의 규범이라고 생각한다. 헤겔은 사람들이 그저 거짓말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도둑질하지 말아야 한다는 등의 몇 가지 추상적인 명제에 대해서만 의견 일치를 볼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런 추상적 명제는 어떤 행동을 어떻게 하는 것이 윤리적인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윤리적 규범으로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헤겔은 주장한다. 그러면 어찌 해야 하는가? 헤겔은 윤리적 행동이란 무엇인지를 배우려면 우선 공동체의 규범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각각의 공동체는 그에 속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며, 공동체의 규범은 그 구성원들의 생활 방식을 결정한다. 아프리카 사람은 한국 사람과 다른 풍습과 관습 속에서 살아 왔으며 살아가고 있다. 아랍 사람은 미국 사람과 다른 종교와 문화 속에서 살아 왔고 살고 있다. 물론 그들 모두가 인간으로서 이성을 공유하고, 도덕적 행위에 대하여 서로 합의를 이를 수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헤겔은 구체적 행동과 관련해서는 그런 공통성보다 차이가 더 크고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리고 개인의 윤리적 행위는 그가 사는 공동체의 규범에 맞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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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주관 안에 보편적 자기의식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실천의 측면에서 보자면, 보편적 자기의식은 곧 실천이성이다 실천이성은 우리에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은지를 가르쳐 준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고,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성이 가르치는 내용에 따라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안다. 이성이 가르치는 내용이 도덕 법칙이다.

그런데 헤겔은 칸트의 도덕 법칙이 주관적 의식의 보편에 머물 뿐, 객관적 현실에까지 높여지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칸트의 도덕 법칙은 인간 주관에 공통된 것이지만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가령, 칸트의 도덕 법칙은 '누구나 진리를 말해야 한다.' 거나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고 말한다. 하지만 헤겔은 그것만으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위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첫 번째 법칙에는 '진리를 안다면' 이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먼저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그것을 실천 할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제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한, 법칙 자체는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도덕 법칙도 그것을 구체적 상황에서 실천하려면 사랑이라는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지,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은 무엇인지를 알이야 한다. 이러한 전제와 구체적 상황이 바로 세상에서 통용되는 현실이다.

이처럼, 헤겔은 칸트의 도덕 법칙이 구체적인 현실을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고 비판한다. 설령 보편적이라 할지라도, 그 보편이란 주관적 의식 안에 머무는 보편이지, 객관적 현실을 반영하는 보편일 수 없다. 덕의 기사가 세상을 상대로 실천하다 좌절하고 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성은 보편적 자기의식이다. 하지만 그 보편성은 주관적 보편일 따름이어서 객관적 현실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이성은 세상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음을 알고 좌절한다. 하지만 이성은 자연을 관찰하고 세상 속에서 실천하면서 객관적 현실에 관한 내용을 습득한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을 통해 객관적 현실로 지양된 이성이 정신이다.

(P.93)

헤겔이 그리는 인륜적 공동체의 이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편으로 구성원 모두가 전체의 목적을 깨달아 그에 기여하는 활동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서로 구별되는 각 구성원들의 자각적 활등을 통해 공동체 자신이 주체적인 성격을 획득하는 상태, 곧 개체와 공동체의 통일이다. 달리 말해서, 그것은 인륜적 정신이 자각적으로 스스로를 구별하고 그 구별을 통해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의 내용을 형성해 가는 과정이다. 결국 헤겔의 인륜적 정신은 당대의 대표적인 두 사상인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의 일면성을 비판하면서 둘을 통일하는 사상인 것이다.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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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에게 승고한 마음을 가지고 우러르지 않을 수 없는 두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내 머리 위의 별이 빛나는 밤하늘과 내 마 음속의 도덕 법칙이다.” 평생을 경건한 마음으로 철학을 했고, 욕구를 억

​제하고 도덕적 의무를 띠를 것을 설파했던 대철학자 칸트의 묘비에 적현 이 문구를 읽는 우리의 마음은 실로 경건해질 수밖에 없다. 칸트는 평생 이 두 영역의 진리를 탐구했고, 그 오묘한 이치에 경외심을 금치 못했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은 우주의 이치를 말하며 그것은 《순수이성비판》의 대상이다. "내 마음속의 도덕 법칙”은 도덕의 세계를 말하며 그것은《실전이성 비판》의 대상이다. 칸트 철학의 두 원리는 이처럼 나 밖의 자연이라는 객관과 내 안의 도덕 세계라는 주관의 영역으로 구분될 수 있다. 칸트에게 자연은 인간 주관이 어찌할 수 없는 타자의 요소를 지니지만, 도덕은 전적으로 주관적 사실이다.

헤겔은 도덕과 인륜은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 현실 속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칸트에게 객관적 현실이란 내 머리 위에 별이 빛나는 밤하늘이요 도덕이란 단지 주관적인 것일 따름이었다면, 헤겔에게 도덕과 인륜이란 내 머리 위에서 빛나는 객관적 현실이었다. 헤겔이 생각하는 윤리는 더 이상 개인의 양심이라는 좁은 틀에 갇혀 있지 않다. 윤리적 행위의 기준과 지침은 개인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현실로 서 공동체의 규범 속에 있다. 이로써 우리는 고등학교《시민윤리》교과의 〈민주적 도덕 공동체의 실현 과정〉 단원에서 “개인과 사회와 국가의 관계로 윤리를 치환함으로써 국가 공동체의 윤리를 정립”하였다고 헤겔 윤리학을 평가한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현대의 공동체주의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 이 공동체 윤리는 칸트의 영향을 받은 자유윤리와 대립한다. 결국 현대의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윤리사상 사이의 대립은 칸트와 헤겔의 후예들이 두 사람을 대신해 치르는 대리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자유주의는 개인이 사회에 우선한다는 사상이다. 존 로크에서 시작하여 칸트로 이어진다. 공동체주의는 개인은 사회 속에서만 완성될 수 있다는 사상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했던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해서 루소와 헤겔, 마르크스 같은 주요한 사회철학지들로 이어진다. 이 두 사상은 현대에도 주요한 사상 조류로 살아남아,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현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서로 다른 대안들을 제시해 가고 있다.

(P.104)

​ 지금까지 우리는 의식의 경험의 긴 여정을 따라왔다. 의식은 감각적 확신, 지각, 오성이라는 대상의식의 형태를 띠고 진리를 파악하려고 했다. 하지만, 곧이어 대상의식의 진리는 자기의식임이 밝히지고, 자기의식으로서의 의식이 보편적 자기의식으로 고양되는 것을 목격했다. 이성으로서의 보편적 자기의식은 개별적 의식 차원의 보편성만을 확보했기 때문에 보편적 자기의식은 주관의 제한을 넘이서 객관적 현실로까지 확장되어 정신이 되어야 했다.

의식은 자기 밖의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한다. 의식의 여러 형태들은 저마다 자기 나름대로 대상을 파악하려고 한다. 대상을 파악 한다는 것은 대상과 합치하는 것을 뜻한다. 대상과 분리된 의식은 그것과 하나되는 진리라는 고향을 찾아 끊임없는 모험을 감행한다. 결국 의식은 정신이 되면서 자신의 고향인 진리의 왕국에 도달한다. 정신은 대상과 합일한 진리이기 때문에 자기 외부의 자기와 다른 대상을 추구하지 않는다. 정신은 스스로 자신을 분리하여 자신의 다른 모습으로서 대상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인식함으로써 자신을 인식한다. 이러한 정신의 활동 속에는 지금까지 여러 형태의 의식들이 제각각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추구하였던 진리의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한 의식의 형태가 지양되어 더 높은 의식의 형태에 포함되는 식으로 의식의 경험이 진행되는 터라, 마지막 단계의 정신은 앞의 모든 의식 형태들이 파악한 진리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이제 정신의 활동은 의식의 형태들의 내용을 산출하는 것이고, 지금까지의 의식의 경험은 정신의 활동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감각적 확신이라는 출발점에서 앞쪽을 보면 의식은 진리를 향해 전진한다. 하지만 정신이라는 도달점에서 되돌아보면 앞의 의식들의 경험이란 바로 정신의 자기 전개의 모습들이다. 정신 안에는 모든 것이 들어 있고 그것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의식의 경험들은 인간이 신을 알아 가는 과정에 비유 될 수 있다.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는 것이 신이듯이, 의식의 경험을 가능케 하는 것은 정신이다. 종교가 세상의 모든 것을 신의 계시로 간주하듯이, 《정신현상학》은 세계의 모든 것을 정신의 현상, 정신이 자신을 보여 주는 모습으로서 설명한다.

(P.106)

우리는 인식을 통해 무엇을 지향하는가? 모든 학문 활동이 지향하는 바는 진리이다. 철학은 진리가 무엇인지를 말해 주려고 한다.《정신현상학》 은 의식의 경험을 통해 진리 추구의 여러 모델들을 소개하고 진리가 어떤 성격을 지녀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정신은 진리이며, 진리를 찾아 헤매는 의식의 고향이다. 《정신현상학》은 진리로서의 정신이 의식 속에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 준다. 의식은 대상에 대한 의식으로서 대상인 세계의 모습을 포함한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의 경험 속에서 나타나는 정신은 곧 세계 속에서 현상하는 진리의 모습이다. 《정신현상학》은 의식의 경험, 즉 인식의 진리에 관한 이론이자 진리로서의 세계의 내용을 밝혀 주는 이론이다. 이 책이 말하려는 것은 '인식의 진리는 곧 세계의 내용'이라는 평범하게 들리는 내용이다. 하지만《정신현상학》은 그것을 의식의 경험과 정신의 현상이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서술함으로써 이전의 철학적 이론들의 한계를 비판하고 새로운 철학적 방법론의 지평을 열어 놓았다.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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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개발의 정석

임성순 / 민음사 / 168쪽

(2018.11.3.)

이전까지 이 부장의 세계는 아주 단순한 메커니즘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목표와 결과가 있었고, 목표를 향하는 거대한 기계는 그의 인내를 연료로 움직였다. 세상은 쓸모 있는 것과 쓸데없는 것으로 나뉘었고. 쓸모 있는 것이 아니라면 효율을 위해 버려 마땅했다. 적자생존이란 단어의 의미는 명확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쓸모 있는 것이 되어야만 했다. 이 부장은 자신의 존재 이유가 그 목표라는 것이 결과와 일치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자신이 속해 있는 회사나 가족이 원하는 목표를 향해 달려왔다. 그런데 저 앞에 앉아 있는 수염은 다른 사명이 있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P.71)

“아빠 왜 늘 바빠?"

“회사에서 할 일이 많아서.”

“왜 일이 많은데?”

“아빠가 회사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니까”

“아빠가 안 필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나랑 놀 시간이 많을 거 아니야.”

“음. 세상에는 꼭 필요한 사람과 필요 없는 사람이 있어. 필요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고, 필요 없는 사람은 도움이 되질 않는 사람이지.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 같아?”

“남에게 도움 되는 사람의”

“그래. 그러니까 아빠도 필요한 사람이고, 도움이 되는 사 람이지.”

“그래야 좋은 사람?”

​ “응. 그러니까 너도 커서 꼭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해.”

아이가 몇 살 때였을까? 다섯 살? 여섯 살? 아이는 늘 회사에서 늦은 아빠를 기다리다 잠들곤 했다. 어느 일요일 아침, 아이는 눈곱도 떼지 않는 눈을 부비며 일요일에도 출근하는 이 부장에게 이렇게 물었더랬다.

이 부장은 가슴이 먹먹했다. 아이가 조숙하고 이기적으로 보일 정도로 세상에 대해 계산이 빠른 것은 자신 탓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정석을 씹어 먹는 마음으로 매달려 성취할 삶 이란 것이 지 아비처럼 10점 만점에 3.21 정도의 행복뿐일 것 만 같아, 더더욱 가슴 아팠다.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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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 대하여

김혜진 / 민음사 / 216쪽​

​​(2018.11.2.)

젓가락으로 굵은 면발 하나를 건져 먹는다. 젊은 시절엔 이런 면 음식을 즐겨 먹었다 세 끼 중 한 끼를 꼭 면으로 해결 할 정도였다. 면은 여전히 좋아하지만 이제는 먹고 나서가 문제다. 좀처럼 소화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부룩한 배를 어루만지고 이리저리 걸어 다니고 잠자리에 들었다가 다시금 몸을 일으키는 짓을 얼마나 반복해야 하는지. 즐거운 일들을 하나씩 잃어 가는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말이다.

(P.8)

끝이 없는 노동. 아무도 날 이런 고된 노동에서 구해 줄 수 없구나 하는 깨달음.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 그러니까 내가 염려하는건 언제나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어떤 식으로든 살아 있는 동안엔 끝나지 않는 이런 막막함을 견뎌 내야 한다. 나는 이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 버렸다. 어쩌면 이건 늙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 시대의 문제일지도 모르지. 이 시대. 지금의 세대. 생각은 자연스럽게 딸애에게로 옮겨 간다. 딸애는 서른 중반에, 나는 예순이 넘어 지금, 여기에 도착했다. 그리고 딸애가 도달할, 결국 나는 가닿지 못할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아무래도 지금보다는 나을까. 아니, 지금보다 더 팍팍 할까.

(P.22)

언젠가부터 나는 뭔가를 바꿀 수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천천히 시간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뭐든 무리하게 바꾸려면 너무나 큰 수고로움을 각오해야 한다. 그런 걸 각오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거의 없다. 좋든 나쁘든. 모든 게 내 것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내가 선택했으므로 내 것이 된 것들. 그것들이 지금의 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닫는다. 과거나 미래 같은, 지금 있지도 않은 것들에 고개를 빼고 두리번거리는 동안 허비 하는 시간이 얼마나 아까운지. 그런 후회는 언제나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들의 몫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무엇이든 경험하지 않고 말로만 듣고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까. 특히 힘이 세고 단단한 젊음으로 무장한 지금의 딸애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지도 모른다.

(P.30)

딸애에게는 직장이 없다. 일을 하지만 직장이 없는 사람들. 열 명 중 하나. 열 명 중 셋. 그런 식으로 늘어나더니 이제는 열 명 중 여섯, 일곱이 그런 사람이다. 그들에겐 자격이 없다. 대출을 받을 자격도, 공공 주택에 들어갈 자격도.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다수라는게 위로가 되진 않는다 오히려 내 딸이 그런 부류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매일 충격적이고 놀랍다. 그래서 매번 똑같은 강도의 실망감과 죄책감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딸애는 공부를 지나치게 많이 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불필요한 공부를 내가 너무 많이 시킨 걸지도 모른다. 배우고 배우다가 배울 필요가 없는 것, 배우지 말아야 할 것까지 배위 버린 거라고 나는생각한다.

세계를 거부하는 법. 세계와 불화하는 법.

(P.32)

딸애는 내 삶 속에서 생겨났다. 내 삶 속에서 태어나서 한 동안은 조건 없는 호의와 보살핌 속에서 자라난 존재. 그러나 이제는 나와 아무 상관 없다는 듯 굴고 있다. 저 혼자 태어나 서 저 스스로 자라고 어른이 된 것처럼 행동한다. 모든 걸 저 혼자 판단하고 결정하고 언젠가부터 내게는 통보만 한다. 심지어 통보하지 않는 것들도 많다. 딸애가 말하지 않지만 내가 아는 것들. 내가 모른 척하는 것들. 그런 것들이 딸애와 나 사이로 고요히, 시퍼렇게 흐르는 것을 난 매일 본다.

(P.36)

그게 뭐든. 언제나 받는 사람은 모르는 법이다. 그건 다만 짐작이나 상상으로는 알 수가 없는 거니까. 자신이 받는 게 무엇인지, 그걸 얻기 위해 누군가가 맞바꾼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그 돈이 어떤 빛깔을 띠고 무슨 냄새를 풍기며 얼마나 무거워지는지 결코 알 수 없다. 그런 귀중한 걸 누군가에게 줘야 한다면, 줄 수 있다면, 가족이 유일하다. 숨과 체온, 피와 살을 나눠 준 내 자식 하나뿐이다.

(P.74)

엄마가 세상의 전부라고 알던 아이. 내 말을 스편지처럼 빨아들이며 성장한 아이. 아니다, 하면 아니라고 이해하고 옳다, 하면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던 아이. 잘못했다고 말하고 금세 내가 원하는 자리로 되돌아오던 아이. 이제 아이는 나를 앞지르고 저만큼 가 버렸다. 이제는 회초리를 들고 아무리 엄한 얼굴을 해 봐도 소용이 없다. 딸애의 세계는 나로부터 너무 멀다. 딸에는 다시는 내 품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내 잘못인지도 모르지.

그런 의심은 끝내 떨쳐지지 않는다. 그것은 이내 죄책감으로 바뀐다. 나는 빛깔과 무늬를 달리하며 스스로 떠오르고 저무는 감정을 바라보느라 말을 잃는다. 딸애에게 걸었던 기대와 욕심, 가능성과 희망. 그런 것들은 버리고 또 버려도 또 다시 남아서 나를 괴롭힌다. 내가 얼마나 앙상해지고 공허해져야 그것들은 마침내 나를 놓아줄까.

(P.97)

나는 고개를 젓는다. 손발이 묶인 채 어디로 보내질지도 모르고 누워 있는 저 여자가 왜 나로 여겨지는지 어떻게 설명 해야 할까. 너무나도 분명한 그런 예감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기댈 데도 의지할 데도 없는 게 저 여자의 탓일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나는 이제 딸애에게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고 단념해 버린 걸까. 어쩌면 나도, 딸애도 저 여자처럼 길고 긴 삶의 끝에 처박히다시피 하며 죽음을 기다리는 벌을 받게 될까. 어떻게든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은 걸까.

마음은 왜 항상 까치발을 하고 두려움이 오는 쪽을 향해 서 있는 걸까. ​

​(P.129)

권 과장의 일굴에 피곤하고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이 한 사람에게만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며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걸 나도 안다. 오늘날 일이란 행위는 모두 훼손되고 더럽혀졌다. 그것은 오래전에 우리 세대에게 자긍심과 자부심을 불어넣어 주던 역할을 않은 지 오래다. 사람들은 이제 일의 주인이 아니고 그것에 종노릇을 하며 소외당하고 외면당하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해야 한다. 그리고 끝내는 일 밖으로 밀려나고 쫓겨나고 실패를 인정해야 하는 순간을 맞는다.

(P.160)

눈을 감고 잠을 청해 본다. 한숨 자고 나면, 아주 깊고 깊은 잠에서 깨어나면, 이 모든 일이 다 거짓말처럼 되어 버리면 좋겠다. 모든게 제자리로 돌아와 있으면 좋겠다. 내가 이해하고 받아 들이려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순조롭고 수월한 일상. 그러나 이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끊임없이 싸우고 견뎌야 하는 일상일지도 모른다.

그런 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견뎌 낼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물으면 고집스럽고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 늙은 노인의 모습이 보일 뿐이다. 다시 눈을 감아 본다. 어쨌든 지금은 좀 자야 하니까. 자고 나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삶을 또 얼마간 받아들일 기운이 나겠지. 생각하는 건 아득한 내일이 아니다. 마주 서 있는 나는 오늘 주어진 일들을 생각하고 오직 그 모든 일들을 무사히 마무리하겠다는 생각만 한다. 그런 식으로 길고 긴 내일 들을 지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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