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실시간 뉴스를 접했으므로 실시간으로 내 의견을 정리해 본다. (뒷북은 싫다. 항상 하는 것이지만...)


내 생각으로는 안희정이 유죄가 되었어야 한다고 본다. 두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둘이 상하 관계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피해자 측이 성적 관계에 있어 수동적 입장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상하 관계에 놓여 있는 상태에서 상대적 약자의 명시적 동의가 없이 성관계가 이루어졌다면 그 행위의 강제성이 인정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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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대학 다니는 친구들 둘이 우리 집에 놀러 왔다. 그 중 한 친구가 책장을 이리 저리 살피다 콘라드의 "암흑의 핵심"을 꺼낸다. "읽어보셨어요? 어떤 내용이예요?" 젠장, 읽어 보지 않았다. 콘라드나 그 책 주변 이야기는 무성하게 해줄 수 있으나 그 책 자체는 읽지 않았다. 그래서 안읽어 봤다고만 하고 말았다. 이번엔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를 꺼내든다. 이 책에 대해서도 무성하게 할 이야기는 많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책을 읽어 봤느냐는 것이다. 안 읽어 봤다. 그런데 이번 것은 좀 심각하다. 당신이라면 이런 책 읽었어야 하는 것 아니예요? 라고 꾸지람 섞인 소리를 한다면, 이런 무게의 책이 한 둘이 아닌데 그걸 어떻게 다 읽냐, 하고 넘어갈 자신이 없다. 다행히 그 친구는 예의바른 친구라 나를 구석에 몰지는 않았다.


특정 주제의 독서나 사색에 몰두하다 보면, 여차하면 그 밖의 다른 영역들에 대해서는 바보가 되는 것 같다. 요즘 이런 문제들에 자주 부딪힌다. 하여 나의 주제에 꼭이 부합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책 하나를 리스트로 올려 놓고 읽어야 할 것들은 강제적으로라도 읽어 보려 한다. 첫 번째 책은 쿤의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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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8-08-13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굳이 읽지 않아도 더 잘 알 수 있는 책도 많은 것 같습니다. ^^
이 책이 바로 그런데요, 저자도 자신 책 의미를 잘 몰랐다고 하더라구요. ^^

weekly 2018-08-14 01:18   좋아요 1 | 수정 | 삭제 | URL
읔, 그런가요?:) 솔직히 잘 공감이 되지는 않지만:) 쿤의 책을 읽고 나서 제 지식이 얼마나 더 확장되었는가는 음미해 봐야 겠네요.

2018-08-16 0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16 06: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16 23: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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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7 01: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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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8 0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18 0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18 06: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18 16: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18 1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영국에 와서 처음으로 가든 파티에 가서 놀았다. 옆 집에서 하는 거였다. 한 두어 집 부르는 건 줄 알았는데, 어른만 세서 20명 정도 온 것 같다. 주인장 부부가 독실한 기독교인이어서 교회 사람들, 그리고 남편 쪽이 흑인이어서 흑인 친구들도 많이 왔다. 동네에서 40년 이상 산 백인 노부부, 나이지리아 출신, 이탈리아 출신, 아일랜드 출신, 러시아 출신, 그리고 우리 같은 한국 출신 등, 평범한 시골 동네지만 한국에서라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람들이 모여 담소를 즐겼다. 우리는 쿠키랑 포도주를 들고 갔는데, 한쪽 테이블에 사람들이 가져온 먹을 거리를 쌓아 두고 알아서 먹게끔 하더라. 주인장 친구들이 구워주는 소세지와 치킨이 특히 맛났다. 두 세 명, 혹은 서너 명씩 무리를 지어 담소를 하는데, 나는 처음 보는 사람들과 뭔 이야기를 해야 하나 하고 걱정을 했었다. 그런데 교회 사람들이 많이 와서 그런지, 적어도 나는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되더라. 내게 전도를 하려는 것이었을까? 브렉싯이나 이민자 문제 같은 예민한 이야기들도 하게 되었고, 특히 나는 철학하는 사람으로 통했기 때문에 철학적 논쟁을 걸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 니 철학적 입장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어떤 거지?” 첫 질문으로 이런 게 막 들어온다. 물론, 축구 이야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축구에 무지한 지라… 내가 한국인이니까 손흥민에 대해 물어 주던데, 난 손흥민이 토트넘에서 뛴다는 것 밖에 모른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던 아일랜드 친구가 웨스트햄 응원한다기에 나는 풀햄 응원한다고 했다.
나: 풀햄 경기 세 번 갔었는데 한번도 이기지를 못하더라고. 풀햄은 지금 2부 리그에서 경기하고 있어.
그: 어? 풀햄 이번에 승격했는데? 가까스로 올라왔어. 이 주 후에 홈 경기 있을 건데?
나: 어, 그래? 대단하네!  (대참사-.-)

가든 파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느라 런던 셰익스피어스 글로브라는 극장에서 하는 “As You Like It” 연극에 조금 늦었다. 1막을 놓쳤다. 그동안 셰익스피어 극을 몇 개 봤었는데 알아듣기도 힘들고 크게 감흥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엔 조금 공부를 했다. 그랬더니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As You Like It을 출발점 삼아 셰익스피어를 제대로 공부해 보자고 마음 먹고 예전 무대 버전의 DVD도 샀다. 그런데 이번 공연 자체는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혹은, 내가 상상했던 식으로 공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번 공연에서는 여자 주인공을 남자 배우가 하고, 남자 주인공을 여자가 하는 등 주요 캐릭터의 성별을 바꾸어 놓았다. 이런게 요즘 유행이긴 한가 보다. 그런데 원작에서 이미 여자 주인공이 남장을 하고 극 흐름을 주도한다. 결국 여자 주인공을 남자 배우가 하니 원작과는 거꾸로 남자가 극의 흐름을 주도하는, 말하자면 메일 워싱 현상이 일어나고 만 것이다. 나는 이걸 어느 정도는 참사라고 생각한다. 영국의 관객들은 웃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배우가 조금이라도 웃음을 유발할 만한 행동이나 대사를 하면 죄다들 까르르 웃어제낀다. 도대체 왜들 그렇게 웃는 걸까? 그래서인지 배우들도 온 힘을 다해 과장을 하고 슬랩스틱을 한다. 난 이런 과장스런 연기가 극을 즐기는데 방해가 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사실 나만 해도 고전 극을 쫒아다니고 있기는 한다. 최근 한 달 안에 본 연극들, 그러니까 트랜스레이션, 노 엑싯, 그리고  As You Like It 까지 모두 영국의 고등 학교 교육 과정 안에 포함되어 있는 작품들이다. 고전 극은 잘 팔리고 현대 창작 극은 잘 팔리지 않는다(현대 극은 비싼 것이 많기도 하다). 그래서 고전 극을 이렇게 저렇게 새롭게 해석하는 식으로, 그 틀 안에서 뭔가를 해보려고 하는 시도들이 있다. 그런데 여차하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될 위험이 큰 것 같다. 적어도 나는 고전 극에 대해서라면 정통적인 해석을 하는 연극을 보려고 할 것 같다. 어쨌든 박수는 크게 쳐주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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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ly 2018-08-16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문득 든 생각이고 확인해 보지는 않았다. 셰익스피어 시절에 여성 캐릭터를 여성 배우가 했을까? 남자가 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사태는 좀 복잡해 진다. 진심으로 복잡해 진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날도 덥고 이러저러하여 영화를 꽤 보게 되었다. 최근에 본 영화 중 인상에 남은 것들을 골라 내 마음대로 평점을 매겨 본다.

캡틴 아메리카(윈터 솔저), 4/5: 이걸 보고 나서 왜 어른 남자들이 히어로물을 좋아하는지 알게 되었다. 잘 짜여진 스토리, 적당한 무게감, 남성적 감정 이입을 강요하는 상황들.

블루 자스민, 3/5: 우디 앨런 영화는 이제 그만… 이라는 말을 되뇌이게 한다. 인물 하나가 나와서 지금껏 벌어진 일을 죄다 설명해 주고, 또 다른 인물이 나와서 똑같은 짓을 하고의 무한 반복. 이렇게 게으른 작가가 있나!

빵과 장미, 4/5: 캔 로치 감독 작품. 캔 로치는 도무지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스토리 라인이 단순하면 인물을 입체화하는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공리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작품.

넛띵 벗 트루쓰, 4/5. 취재원을 공개해야 하느냐로 갈등하는 저널리스트 이야기. 반전이 있는데, 그 반전이라는 것이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기 때문에 생기는 반전이라는 것.

PK, 5/5. 처음으로 본 발리우드 영화. 장면, 장면 모두 놀랍다. 재미, 아이디어, 감동이 넘치는 영화.

세 얼간이, 4/5. 발리우드 영화. 아이디어로 넘친다. 작가가 천재라는 생각을 했다. 다만, 끊임없이 가르치려는 태도여서 불편함을 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나이트크로울러, 4/5. 작품이란 결국 감상자와의 게임이라는 점을 실감하게 한다. 너무 과장해서 흥이 깨지 않도록 적당히 긴장감을 조성하는 기술이 명품이다. 또 발군의 대화 장면들. 세상에는 천재들이 정말 많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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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선악의 저편”을 읽었다. 아주 어릴 때, 그러니까 대학 때 읽고 나서 처음으로 다시 읽은 것이었다. 그때 읽고 나서 커다란 충격을 받았었다. 말하자면… 철학을 자신의 평생의 관심 영역으로 삼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느꼈었다. 지금도 그 생각은 여전하다. 그러나 너무 어릴 때 읽는 것을 권하고 싶지는 않다. 비트겐슈타인의 책들도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화가 지망생이 피카소의 후기 화풍으로 습작을 시작하는 것이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닌 것과 같다.

이번에 읽을 때는 클로소프스키, 바타이유, 니체, 들뢰즈 등 프랑스 현대 사상가들의 흔적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이들 사상가들에 공통적인 성향을 간단하게 정리해 말하는 것이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다. 요컨대 니체 등은 진리에의 의지(이성, 학, 합리성 등의 추구)가 권력에의 의지(말하자면 유기체적 충동)의 외피이거나 한 첨단이라는 단순한 주장을 하고 있을 뿐이다. 대단히 전복적인 주장이라고들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니체 등의 이 주장은 데카르트와 대비해서만 전복적이며, 그나마도 “대단히” 전복적인 것은 아니다. 어찌 되었든 니체의 이 테제가 진리의 일단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철학적으로 말해서 존재가 인식에 앞서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다만, 니체가 그 유기체적 충동의 본질을 지배하고자 하는 충동으로 간주한 것은 거의 근거가 없는 일이다. 더구나 이것을 서구 역사에 대입하여 주인-윤리와 노예-윤리의 변증법을 만들어 낸 것은 거의 황당한 짓이었다고 본다. 나는 니체의 사상을 유럽 제국주의의 자의식으로 본다.

 니체 테제의 계보를 근대 철학 안에서 찾자면 스피노자가 그 시조가 될 것이고 그 중간에 쇼펜하우어가 들어갈 것이다. 이 점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사상 계열의 한 성향을, 요즘 뜨거운 논쟁의 대상인 페미니즘과 연결시켜 보면 어떨까? 이럴 때 분명하게 부각되는 것은 이들 사상가들이 철저하게 “반동적”이라는 점이다.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이른바 여성 혐오에 대해서는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스피노자가 유작인 “정치론”에서 매우 보수적인 여성관을 피력한 것을 두고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는 한다. 그리고 럿셀이 말한 대로 스피노자를 가장 “사랑스러운” 철학자로 남겨 두기 위해 가급적이면 그 저작의 그 절을 인용하는 것을 삼간다. 스피노자도 자신의 시대를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구나 하는 실망을 속으로 삭이며… 그러나 내가 보기에 스피노자의 이런 보수성은 전혀 우발적이지 않다. 그것은 스피노자가 속한 사상 계열의 논리 전개상 거의 필연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 점을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데카르트에 대해 다시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데카르트는 왜 근대의 기획을 사유, 연장 이원론의 기반 위에서 실행하고자 했을까? 그것은 그가 그리고 있던 근대의 그림 때문이다. 근대는 전-근대와 달라야 한다. 전-근대를 탈피해야 한다. 그럼 데카르트에게 전-근대란 어떤 것일까? 전-근대는 인간이 유기체적 충동들에 지배되어, 신의 은총 없이는 그 조건을 벗어날 수 없다는 이미지에 구속되어 있는 시대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는 인간 조건에서 이 유기체적 충동들의 막대한 힘을 배제시켜 버리려고 한 것이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유이며, 이성을 잘 사용한다면 그러한 충동들을 잘 제어할 수 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아마 데카르트는 이런 회의를 이겨낼 수 없을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반-데카르트주의자가 옳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데카르트가 어떤 시대적 요청에 응답하고 있었는가를 고려하는 것이다. 뻔한 이야기지만 그것은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낙관론이었다. 유럽의 계몽주의도 그렇고, 한국의 성리학 운동도 그렇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 제낀다는 자의식은 항상 낙관론적, 그러므로 이상주의적, 형식주의적 성향을 가질 수 밖에 없다(그러면 물론 “반”의 운동으로 경험론에 기반한 이론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데카르트의 경우에는 그 낙관론이 이렇게 간명하게 표현된다. 모든 인간은 양지를 갖고 있다고. 이 명제가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은 부정될 수 없다. 그리고 니체에 따르면 모든 명제는 다 이데올로기적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 이데올로기를 수용하느냐, 거부하느냐 하는 것이다. 니체에서 정점에 이른 사상 계열은 경험론적이기 때문에 이런 명제(보편성에 기반한)에 부정적이다. 그들은 이 명제 밑에서 작동하는 힘들의 충동들을 보기 때문이다. 표면 아래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은 이 사상 계열의 깊은 안목을 증명한다. 그러나 이 사상 계열이 이중적인 의미에서 보수적이라는 점 역시 분명하다. 그리고 그  보수성은 이 사상 계열의 철학자들을 정치 철학적으로 파산하게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예컨대, 푸코를 신자유주의와 엮어 생각하는 것이, 엉뚱하기는 하지만 전혀 어림 없는 일은 아니라고 본다.)

나는 스피노자가 여성에 대해 보수적 관점을 피력하고 있는 대목을 읽고는 곧바로 데카르트를 떠올렸었다. 데카르트는 “정념론”을, 내 기억에, 스웨덴의 어떤 공주에게 헌정하며, 그 공주를 자신이 만난 그 어떤 사람들보다 지적으로 명석한 사람이라고 칭찬한다. 데카르트가 그 밖의 다른 문헌에서 여성에 대해 보수적인 관점을 피력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스피노자처럼, 모든 시대와 지역을 다 고려해 보더라도 여성이 지배적 위치에 있는 사회는 없으므로 여성이 지배적 위치에 있어서는 안된다는 식의 생각을 갖고 있었으리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데카르트의 근대적 낙관론에 상충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우리는 여전히 데카르트주의자일 수 밖에 없다는 점도 분명하다. 

데카르트의 명제를 현대적으로 Girls can do anything으로 번역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선 도드라지는 것은 이 명제의 형식주의다. 정말 여성들은 남성들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할 수 있을까? 역사가 증명하듯이 당연히 그렇다. 그러나 더 잘 할 수 있는가, 혹은 그렇게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인가, 혹은 그렇게 하기를 여성들이 원하는가 등등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예컨대, 여성들이 정치, 언론, 교육, 법조, 의료 등등의 영역에서 남성들과 동등한, 혹은 그 이상의 성과를 내는 것은 흔히 보는 일이다. 그러나 여성들이 아직 뚜렷한 경쟁력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영역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곳곳에서 데카르트와 니체가 충돌한다. 예컨대 기업의 이사진 구성에 여성 쿼터제를 강제하는 것이 기업의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되는가? 이에 대해 확정적인 답은 나와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러므로 이런 제도들은 일종의 실험인 셈이다. 좀 더 사적인 영역에서도 그렇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긴머리, 화장, 하이힐과 같은 제도들을 벗어던지자고 주장한다. 나같은 이상주의자는 이런 운동에 적극 찬동한다. 나같이 늙은 세대의 사람은, 예컨대 걸그룹 문화나 젊고 예쁜 여성에게 애교를 강요하고 그것을 즐기는 문화 등에 도대체 적응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그것이 여성들을 더 행복하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혹은 사회를 더 다양하고 건강하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 그러므로 이러한 페미니스트 운동 역시 실험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실험들에 찬성한다. 이상주의적 관점은 경험적인 실험을 통해서만 관철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메갈리아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말한 것처럼, 이러한 페미니스트 운동에 퇴행적 요소들이 많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예컨대, 메갈리아는 데이트 더치 페이에 엄청난 거부감을 드러내는데 명백히 이는 자기 모순이다. 말하자면 데카르트와 니체를 아무렇게나 뒤섞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체 운동의 진전 국면에서 이러한 퇴행적 요소는 휩쓸려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다. 한국 남성들이 가장 예민하게 느끼는 부분인 남성에게만 병역 의무가 부과되어 있는 현실도 그렇다. 페미니즘이 진전되면 여성에게도 어떤 식으로든 병역이 부과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데카르트의 모든 사람에게 양지가 구비되어 있다는 명제의 현실성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여성들을 더 행복하게 하는 일인지, 사회를 더 다채롭게 하는 일인지는 모르겠다. 왜 모든 사람들이 다 군대를 가서 획일적인 사고를 강요받아야 하는가? 어떤 사람은 토론을 통해서 자신을 관철하려 하고 어떤 사람은 눈물을 통해 그리 할 수도 있는 것이지 왜 후자를 배제하려 하는가? 자신의 신체의 아름다움에 주목하고 그것에 많은 투자를 하는 것을 왜 배타적으로, 부정적으로 바라봐야 하는가? 분명한 것은 이런 것들이 우선적인 고려 사항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가 진전되고 사회의 구성원들이 동일한 역량이 가정되는 시민으로 편성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일 것이기 때문이다. 엊그제 대구 폭행 사건에 대한 기사를 보았는데, 댓글에서 한 가지 논쟁이 내 눈길을 끌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기 부모 뻘 되는 사람을 그렇게 패도 되는가?” “여기서 부모가 왜 나와? 법 앞에서는 모두 똑같은 사람이지!” 우리는 후자의 세계를 향해 가고 있다. 가치 평가를 배제하고. 하나의 규율이 관철되는 사회를 향해. 가치 평가를 배제하고. 혹은 향수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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