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가 총총 오더니 물었다.

엄마, 애가 뭐야?

응? 아이들. 애기야.

아가의 눈이 커지며 또 묻습니다.

애를 잡아 먹었어?

누가 애를 잡아먹어? 뭘 봤는데?

토마스에서 고든이 애먹었다고 그랬어.

후후...아이의 질문을 듣다 보면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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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들렸다. 내 서재에.

심심하구나.

즐겨찾기 한사람이 5명이라는데, (언제 그리 늘었담.)

대체 누구들이란 말이냐. 구누들인지 표시나 되면 그쪽 서재에도 놀러가 보건만.

음...자수하라.

함....건너뛰어보자. 블로깅처럼, 휙, 하고 타인의 서재로.

(음...내 딴사람 서재는 알라딘 쥔장 서재와 내 리뷰에서 아이디어를 훔쳐간 딴 리뷰어의 서재는

 함 가뵜다....알라딘 쥔장은 너무너무 화가난다. 2000년도 주문하면 다음날로 제깍 가져다주던

 그 눈물 겨운 서비스는 어디가고, 기본 3일 주로 4일이 걸리는 서비스 하면서 저한테 책을 공짜로

선물하라고 큰 소리 펑펑 치기는. 미워서 절대 글케 못한다. 배송료 무료 - 하나도 반갑지 않다. 베송료 낸다고 언제는 책 안사봤냔 말이다. 인터파크 같은데랑 어줍잖게 경쟁할 생각말고 고객 서비스나 향상시키고 책 사달라고 졸라라 쥔장...)

 

글고..내 아이디어 훔쳐간 리뷰어. (학계 였음 매장당할 짓이다 - 울 나라 학계는 빼고 ㅎㅎ)

어째 내 아이디어 훔쳐가가 추천수는 나보다 더 많노 - 것 도 재주다. 재주는 잘 써야 하는기다.

세상에 보니 별 재주로 먹고사는 사람들 많더라.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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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7-03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매진 리뷰 보고 놀러왔습니다. 자주 들를게요. 저는 꽤 오래 전 방 마련해놓고 며칠 전부터 꼼지락거리며 한 편씩 짧은 글 쓰고 있답니다.
어쨌든 반가워요. 가끔 놀러오세요.^^
 
아름다운 지옥 1
권지예 지음 / 문학사상사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아...이 작가도 그렇구나. ㅎㅎ (무슨 말이냐면, 또 한명의 작가도 - 내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신경숙이 그렇다는 뜻이다. 이미 같은 제목으로 그녀의 소설 하나에도 댓글을 쓴 바있고.)

하지만, 사실 고백하자면, 이 작가는 난 그다지 싫어하지 않는다. 신경숙을 너무도 싫어하는 건 자기연민이 도가 지나쳐서 역겹기 때문이다.  권지예가 마참가지로 나르시시즘 이건 맞지만, 역겨운 자기 연민은 아니긴 한다.

작가를 떼어놓고 본 뱀장어 스튜는 참으로 좋았다. 그런데, 자전적 소설이라는 이 글을 읽고나니 범생으로만 살아온 지식인 여성의 나르시시즘은 이렇구나, 하고 주억거리게 되더라. 욕구는 인정하면서도 결코 자연스레 자신의 삶의 일부분으로 끌어안지 못하는 구나......머리만 커서 바퀴벌레라도 들여다 보듯, 그 알집과 바동거리는 다리들을 이질적으로 내려다 보듯 자신의 욕구를 내려다보는 구나..싶었다.

'아름다운 창틀'이 결국 '관'이었음 까지 인식하면서도, 고루한 윤리의식에 갇혀있고 스스로도 걸어나가지 못하는 갇힌 욕구는 결국, 자의식과 동일시 못되고....그렇게 그저 pierced 당하는 것 같은 '피동'형의 침탈로 해소되는 구나..말이지...

중년의 여성 작가가 글쓰기를 하며 담아내는 이런 해소되지 못하는 리비도는 보기에 안쓰럽기까지 하다. 나이키 광고문구라고 귀에 닳도록 들으라고 틀어주면 나르시시즘적인 마스터베이션은 끝낼 수 있으려나? - Just Do it!이라고 말이다.

후후 (이 웃음은 자조이다...)

뭐 귀에 닳게 되뇌어도 나도 안되더라.  권지예 세대는 아니자만, 비스무리한 배경을 가진 나로서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공적인 글은 안쓸란다. 마스터베이션은 혼자 해야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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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양말 2006-03-20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어요. 근래 보기 드문 훌륭한 리뷰였습니다.
신경숙 얘기도 그렇구요......(개인적으로 너무 싫어함)
사실 신경숙 때문에 아예 한국여성작가와는 거리를 두고 살아가니....
이런 훌륭한 리뷰에 추천이 하나도 없어 꾹 누르고 갑니다.
2년이나 지났지만 말이죠.....
 
터널 그림책은 내 친구 2
앤서니 브라운 글 그림, 장미란 옮김 / 논장 / 200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피붙이와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어떻게 극복할 지 말입니다. 어떤 영화에서는 이해한다고 사랑하는것은 아니다. 사랑은 그냥하는 거다.라고 말하고 있지만...함께 자라고 피를 나누었다는 단지 그 이유 만으로 미운정 고운정이 든 형제들과 너무도 다르다는 것은 힘든일이지요. (하하..제가 그랬다는 소리이지요.)

하지만, 이 책에서 보여주는 다른 형제에 대한 애정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저는 책을 재킷 속지 까지 다 보는데, 이책은 앞쪽 속지는 왼쪽에 공, 오른쪽에 책이 따로 떨어져 있다가 얘기가 다 끝난 뒷쪽 속지에는 공과 책이 함께 놓여 있는 것 보고 빙긋 웃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빨간 모자 이야기 와 병치되는 이야기의 구조와, 어두운 것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인 두려움,을 잘 구성한 작가의 솜씨가 놀라웠습니다. 동생이 자는 방을 잘 들여다 보면, 벽에 그린 그림도 빨간 모자 이야기이고, 동생 침대 옆 등불도 빨간 모자에 나올법한 집에다, 옷장 옆에는 똑같은 빨간 후드도 걸려 있습니다. 오빠는 빨간 모자와 자신을 동일시 하는 동생에게 늑대 가면을 뒤집어 쓰고 동생의 세계에 기어들어오는 '야수성'을 지는 이질적인 피붙이일 뿐이였지요.

터널은 일종의 통과의례입니다. 어둡고 긴 '차이'와 '몰이해'의 터널 저쪽에서 동생은 야수성의 실체는 오빠가 아니라, 나무를 괴물로 보는 자신의 상상력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신의 두려움을 투사한 결과라는 걸 깨닫지요. 그리고 그러한 투사의 결과, 자신의 세계에서 오빠는 돌처럼 의사소통이 결여된 존재 였을뿐이구요. 누가 오빠를 돌로 만들었냐구요? 물론 그런 마법을 사용한 건 '상상력'이란 마법을 지닌 여동생이지요. 내 세계에서 당신은 nothing이다, 돌과 마찬가지로 - 이보다 더한 타인에 대한 부정은 없을 테지요.

여동생은 터널 저쪽 세계에서 결국 자신 속의 오빠를 찾아내고, 눈물을 흘림으로써 오빠를 껴안아 다시 오빠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사랑'하는 피붙이로 받아들입니다.

터널 이전과 터널 이후의 차이가 뭐냐구요? 사실 겉보기엔 큰 차이는 없을지도 모르죠. 오빠는 여전히 공차기를 좋아할거고, 동생은 차라리 집에서 책만 읽을 거예요. 오빠는 여전히 때때로 늑대 가면쓰고 동생을 놀래키는 장난을 할테죠. 하지만, 가장 큰 차이 무엇보다도, 동생은 이제 자신의 공포를 깨뜨릴 수 있는 마법과 같은 내적의 힘을 얻었다는 거지요. 오빠는요? - 동생의 세계를 정말로 체험했다면, 믿는대로 실현되는 동생의 상상력의 세계가 어떤 힘을 지닌 곳인지 정말로 알았다면, 언명와 무의식적 소망이 가진 엄청난 힘을 깨닫고 조금이나마 공차기 이외에 다른 세계도 기웃거려보지 않을지요.^^;  (아..저는 또 제 소망을 투사하고 있군요. 이런 이런.)

모든 사람에게 이 터널과 같은 극적인 순간이 찾아오는 건 아니지만, 차라리 대부분 천천히 나이들면서, 자신이 보지못했던 삶의 이면을 긍정하게 되는 건 아닐지요. 그렇다고 언이처럼 동생처럼 될수는 없을테지만, 왜 언니가 동생이 나와는 그리도 달랐는지는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지는 않을까 말입니다.

형제없이 외동으로 자라는 울 아가에게는, 타인과 어떻게 융합하는 지를, 보여줄 수 있는 긴 말로보다는 이미지로 알려줄 수 있는 아주 좋은 책입니다.

사실 우리 아가도 아주 좋아합니다. 단, 늑대로 보이는 나무들이 아가의 원초적인(?) 공포심에 상당히

자극적인지 그 부분을 참으로 좋아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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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점심 때 밥을 먹으며 재방송하는 그의 강의를 듣다가 속 다 버리는 줄 알았다.

난 원래..똑똑한 척 하며 권력과 대중에 야합하는 그를 싫어하지만,

서양 문명의 발달사에 대해 잘못알고 있는 그가 세삼 기가 막혔다.

서양은 기독교 사회라서 과학이 발달했다고?

어찌 그리 말도 안되는 소리를?

서양은 근대 문명의 발달 대부분을 이슬람에 빚지고 있다.

십자군 전쟁때 야만족 연랍군이 우르르 몰려가 이슬람 이스라엘 성주 단 한사람을 상대로 싸웠다는 걸

아는 사람? 7세기 이슬람의 학자 하나는 이미 주변국/ 중심국의 이야기를 하며, 전쟁은 대부분 야만국이

선진국으로부터 강제적으로 문화적/ 경제적 인풋을 강탈하기 위해 일으킨다고 말한 바 있다.

십자군 전쟁으로, 서양은 아리스토텔레스 (자연과학의 진정한 기반은 그의 철학이다...그 이전엔 플라톤 밖에 없었다...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봐라...기독교 반동들이 아리스토텔레스 책에 독까지 발라놓는 모습을....), 화약 (중국에서 이슬람으로 전파되었다...예루살렘 성주가 대포 한발 뻥, 쏘면 무거운 갑옷 입고 절그럭 뒤뚱대던 서양 군주들 다들 말에서 내동댕이쳐서 혼비백산 내뺐었다), 나침반...아라비아 숫자...를 전수 받는다. 그리고 그 다음 세기 화약으로 드디어 총을 만들고, 나침반을 들고 세계 정복에 나서게 된거다.

그런데고 기독교라서 과학이 발달했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다니 말이다.

서양애들이 제못대로 Dark Age라고 정의해버린 중세는,  이슬람의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던 때였다. 암흑기 라기보다, '야만기'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 현대 파워역학에 의해 쓰여진 세계사 따윈 이젠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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