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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1 子夏曰, 博學而篤志①, 切問而近思, 仁在其中矣.


자하왈, 박학이독지, 절문이근사, 인재기중의.

번역 - 자하가 말하기를, 널리 배우고 뜻을 독실하게 하며, 절실하게 묻고 가까이 생각하면 仁이 그 가운 데 있다.

① 博學而篤志도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2개의 동사구가 말 이을 而로 연결되어 있다. 우선 博學을 보자. 다른 것을 무시하고 2개의 가능성이 있다. 동사+목적어(배우기를 널리한다) 혹은 부사어+동사(널리 배운다)가 그것이다. 후자가 더 좋을 듯하다. 篤志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동사+목적어로 해석한다. 구조상 4개중에 3개는 부사어+동사 구조인데 유독 篤志만 다른 구조여서 몇 권의 번역본을 보았는데 논어주소는 '廣學而厚識之<널리 배우고 배운 바를 독실히(잘) 기억하고> '라고 풀이하여 부사어+동사 구조로 이해하고 있으며 양백준은 동목구조로 번역하고는 다시 注에는 '博聞而强記'라는 말도 뜻은 통한다고 적고 있다. 내가 자꾸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나도 마찬가지지만 번역자들의 번역에서 티끌을 찾아내고 기뻐하지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시각으로 문장을 보았으면 해서이다. 주자의 주석을 보면 주자 역시 동목구조로 보고 있는 것같다.

集註 - 四者皆學問思辨之事耳, 未及乎力行而爲仁也. 然從事於此, 則心不外馳①, 而所存自熟. 故曰仁在其中矣. ♥ 程子曰: 博學而篤志, 切問而近思, 何以②言仁在其中矣. 學者, 要思得之. 了此, 便是徹上徹下之道. 又曰, 學不博則不能守約③, 志不篤則不能力行. 切問近思在己者, 則仁在其中矣. 又曰, 近思者以類而推④. 蘇氏曰: 博學而志不篤, 則大而無成, 泛問⑤遠思, 則勞而無功.

집주 - 사자개학문사변지사이, 미급호력행이위인야. 연종사어차, 즉심불외치, 이소존자숙. 고왈인재기중의. ♥ 정자왈: 박학이독지, 절문이근사, 하이언인재기중의. 학자, 요사득지. 요차, 편시철상철하지도. 우왈, 학불박즉불능수약, 지불독즉불능력행. 절문근사재기자, 즉인재기중의. 우왈, 근사자이류이추. 소씨왈: 박학이지부독, 즉대이무성, 범문원사, 즉노이무공.

번역 - 네 가지는 모두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일일뿐이며 <아직> 힘써 실행하여 인을 이루는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여기에 종사하면 마음이 외부를 향하지(달리지) 않게 되어, 지니고 있는 것이 자연히(저절로) 무르익게 된다. 그런 까닭에 인이 그 가운데 있다고 말한 것이다. 정자가 말하였다 : "널리 배우고 뜻을 독실하게 하며, 절실하게 묻고 가까이 생각하면, 어째서 이것으로써 仁이 그 가운데 있다고 말하는지 배우는 이는 살펴서 얻어내야 할 것이다. 이를 <명백히> 이해하는 것이 바로 위로 통하고 아래로 통하는 도인 것이다." 또 말하였다 : "배우되 넓지 못하면, 곤궁함을 지킬 수 없고, 뜻이 독실하지 못하면 (혹은, 기억하되 독실하지 못하면) 힘써 실행할 수 없다. 절실하게 묻고 가까이 생각함이 자기에게 있게 되면, 인이 그(혹은, 자기의)가운데 있게 된다." 또 말하였다:" 가까이 생각함은 서로 비슷한 것으로써 窮究하는 것이다." 소씨가 말하였다: "널리 배우고 뜻이 독실하지 못하면, (뜻이) 크기는 하지만 이루는 게 없고, 피상적으로 묻고 멀리 생각하면, 힘은 많이 드는데 공이 없다."

藍谷曰 : 쉽게 풀어서 이해하기 쉽게 번역하려니 무척이나 어렵네요.

① 心不外馳는 원래는 心不馳(동사술어)外(목적어)의 구조가 부정사 不의 영향으로 도치된 것이다.

② 何以는 何는 '어찌하여, 왜'의 뜻이고 以는 전치사(개사)로 목적어(博學而篤志, 切問而近思)가 생략되었다고 보는 게 좋을 듯하다.

③ 不能守約을 金都練은 주술관계로 보아 '지킴이 요약될 수 없고'라고 번역하였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문 어순 지식으로 볼 때 조동사 能다음에 주술관계가 온다는 게 이해가 안 된다. 조동사 뒤에는 바로 술어가 오거나 아니면 부사어밖에 올 수 없지 않은가? 따라서 守約은 동목구조로 보아야 한다. 그럼 約을 지킨다는 말인데 約은 무슨 뜻일까? 양백준의 논어사전에 따르면 논어원문에서는 約이 6번 나온다. 그 중 2번은 困窮의 뜻이고, 나머지 4번은 '不放肆, 約束 방종하지 않고 (스스로를) 단속하다'의 뜻으로 쓰였다. 나는 困窮의 뜻으로 번역했는데 나머지의 뜻도 무난한 것 같다.

④ 近思者以類而推는 판단구 문장이다. 類는 동종, 같은 부류, 서로 비슷한 것을 말한다. 推는 자전의 구석에서 窮究하다라는 뜻을 찾아내어 옹색하게 번역해 보았는데 思의 좀더 확장된 의미라고 보아도 무난한 것으로 보인다.

⑤ 泛問은 문맥속에서 파악해 볼 때 절실하게 묻지 않는 것, 즉 대충 대충 묻는 것이다. 번역할 말이 궁하여 '피상적으로'라고 번역해 보았다. 다른 좋은 단어가 없을까요? * 제 번역및 설명에 대한 질문과 의견을 환영합니다. 묻고 답하기에 올려 주시면 성심성의껏 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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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 子夏曰: 日知其所亡①, 月無忘②其所能, 可謂好學也已矣.


자하왈: 일지기소무, 월무망기소능, 가위호학야이의.

번역 - 자하가 말하기를, 날마다 그 모르는 것을 알고, 달마다 그 능한 바를 잊음이 없으면 배움을 좋아한다고 이를 수 있다.

① '其所亡'는 '其所未聞'과 통한다. 다시 말해 아직 듣지 못한 것을 말한다.

② '無忘'을 일부러 '잊음이 없다'라고 번역하였는데, 만약 '잊지 않는다'라고 번역하려면 '無' 대신에 '不'이 쓰여야 되지 않을까? 하지만 뜻이 통하고 번역에 문제가 없으니 그대로 이해하면 좋겠다.

集註 - 亡, 無也. 謂己之所未有 ♥ 尹氏曰: 好學者, 日新③而不失.

무, 무야. 위기지소미유 ♥ 윤씨왈: 호학자, 일신이불실.

번역 - 亡은 없음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음을 이른다. 윤씨가 말하기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날마다 (자신을) 새롭게 하고, (이미 배운 것을) 잃지 않는다.

③ 日新而不失에서 중간에 말 이을 '而'가 있으니 앞뒤의 日新과 不失은 자동적으로 동사구로 볼 수 있다. '日新'은 무슨 구조인가? 이 경우 新이 동사이다. 그러면 당연히 앞의 日은 동사를 꾸며주는 부사어이다. 번역은 '날마다, 날로'등이 좋겠다. 또 하나 더, 이건 순전히 나 개인의 생각인데 여기에서 '新'은 원래 형용사이다. 많은 경우에 형용사에서 동사의 의미를 가질 때는 타동사로 전환된다. 다시 말해 '新'의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목적어는 당연히 '己'일 것이다. 번역도 '새로워진다'가 아니라 '(자신을) 새롭게 하다(혹은 만들다)'가 더욱 的確(적확)하지 않나 싶다. 혹자는 그게 그것이 아니냐 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새로워진다'라고 번역하면 동작의 능동성이 사라지고 어딘지 피동적이 되어 버리고 만다. 하지만 '(자신을) 새롭게 하다(혹은 만들다)'라고 번역하면 얼마나 매끄럽고 능동적인가? 여러분! 동의하시나요? 이제 不失을 보자. 역시 '失'은 타동사이므로 목적어를 필요로 한다.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失'의 목적어로는 '其所聞'이나 '已所學' 정도가 될 것이다. 한문을 포함하여 외국어를 공부하는데 가장 중요한 일은 대명사가 가리키고 있는 바와 동사의 주어, 그리고 동사의 목적어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특히 한문처럼 시도 때도 없이 생략이 일어나는 경우는 일부러라도 이런 훈련을 해두지 않으면 안되지 않나 생각해 본다. 쉬운 문장이라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많이 길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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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1 子夏曰: 雖小道, 必有可觀者焉①. 致遠恐泥, 是以君子不爲②也.


자하왈: 수소도, 필유가관자언. 치원공니, 시이군자불위야.

번역- 비록 작은 道(기능)이라도 반드시 볼만한 것이 있다. 먼데 이르는데 방해가 될까 두렵기 때문에 군자는 배우지 않는다.

① '焉'은 '於之'로 보아 <거기에는>의 뜻이나 문맥상 해석하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② '爲'는 그대로 '하다'라고 번역해도 무난하지만 대동사로 '學'을 대신한다고 보는 것이 훨씬 낫겠다.

集註 - 小道, 如農圃③醫卜之屬. 泥, 不通也. ♥ 楊氏曰, 百家衆技④, 猶耳目口鼻, 皆有所明而不能相通, 非無可觀也. 致遠, 則泥矣. 故君子不爲也.

         소도, 여농포의복지속. 니, 불통야. ♥ 양씨왈, 백가중기, 유이목구비, 개유소명이불능상통, 비무가관야. 치원, 즉니의. 고군자불위야

번역 - 小道는 농사, 의학, 점술과 같은 것이다. 泥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양씨가 말하기를, 제자백가와 여러 기능은 耳目口鼻와 같아서 모두 밝은 바가 있으나 서로 통할 수 없다. 볼만한 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먼데 이르면 방해가 된다. 따라서 군자는 배우지 않는다.

③ '農圃'를 나누지 않고 그냥 농사로 번역하였다.

④ '百家衆技'를 번역할 때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百家의 衆技라고 해석하는 것이고 (편정관계) 다른 하나는 百家와 衆技로 보는 것이다(병렬관계). '技'는 원문의 '小道'의 '道'와 의미상 통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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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1 子夏之門人, 問交於子張. 子張曰: 子夏云何. 對曰: 子夏曰: 可者與之①, 其不可者拒之. 子張曰: 異乎吾所聞, 君子尊賢而容衆②, 嘉善而矜不能③, 我之大賢與④, 於人何所不容⑤. 我之不賢與, 人將拒我, 如之何其拒人也.


 번역 - 자하의 제자가 자장에게 交(친구를 사귐)에 대해 물었다. 자장이 말하기를, 자하는 무엇이라고 하던가? 하자 대답하여 말하길, "더불어 지낼 만하면 그와 더불어 사귀고, 그렇지 못하면 거절하라"고 했습니다. 자장이 말하길, "내가 들은 것과는 다르구나. 군자는 어진 이를 존중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용납하며, 善한 이를 좋게 여기고 그렇지 못한 자들을 불쌍히 여긴다. 내가 크게 어질다면, 사람들에 대해 어찌 용납하지 않을 바이겠는가? 내가 어질지 못하다면 남들이 곧 나를 거절할 터인데 어떻게 남을 거절하겠는가?"

① 可者與之에서 조동사 可의 본동사는 뒤에 나오는 與로 보아 可與者與之로 해석함이 좋을 듯하다. 뒤에도 마찬가지다.

② 君子尊賢而容衆에서 '賢'과 '衆'은 문장에서 대조가 되는 개념이다. 즉, 衆은 賢하지 못한 자, 일반 백성들을 가리킨다.

③ 嘉善而矜不能에서도 '善'과 '不能'은 서로 대조되는 개념이다. 여기서 善은 무슨 말인가?  무엇을 잘하는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④ 我之大賢與에서 '之'는 위치상 주격조사로 보는 게 좋겠고, '與'는 그냥 허사로 봐도 좋겠다. 김원중의 허사사전에 보면 이 경우의 與를 별도로 "구 가운데 쓰여 일시적인 정지를 나타낸다. '~면'으로 해석한다.(513쪽)"고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석될 수 있다고 하여 '~면'의 뜻이 있다고 보기엔 무언가가 부족한 느낌이다.

⑤ 於人何所不容에서 문제는 何所不容이다. 이 역시 김원중의 허사사전의 설명을 빌면 所不容者何의 의미라고 한다. 번역하면 <용납하지 못할게 무엇이겠는가> 정도가 될 것이다. 참고할 만하다. 또는 何所를 의문대사 '何'와 명사 '所'가 결합된 관용조사로 보는 것이다. 이 경우 '何所'는 '어디에, 어디를'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억지로 번역하면 <어찌 용서하지 못하겠는가>정도이다.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한 번역일까요?

集註 - 子夏之言迫⑥狹, 子張譏之⑦是也. 但其所言亦有過高之弊. 蓋大賢雖無所不容, 然大故亦所當絶, 不賢固⑧不可以拒人, 然損友⑨亦所當遠, 學者不可不察.

번역 - 자하의 말이 지나치게 편협하므로 자장이 자하를 나무라는 것은 옳다. 하지만, 그(자장)이 말한 것도 지나치게 높은 폐단이 있다. 대개 큰 현인은 비록 용납하지 못할 것이 없더라도 大故가 있으면 역시 마땅히 끊어야 한다. 어질지 못한 사람은 남을 거절할 수 없다 할지라도 損友는 마땅히 멀리 해야한다. 배우는 사람들은 살피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⑥ '迫'은 강조부사 정도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⑦ '之'는 子夏를 받는 인칭대사이다.

⑧ '固'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지만 나는 뒤의 '然'과 연계하여 보아 양보를 나타내는 접속사로 보고 싶다. 물론 '固'를 강조 부사로, 즉 '진실로' 따위로 번역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⑨ '損友'는 논어 제 16편 <계씨> 4장에 나오는 '損者三友'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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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1 子張曰: 執德不弘1), 信道不篤2), 焉能爲有, 焉能爲亡3).


번역 : 자장이 말하기를, 덕을 잡는 것이 넓지 못하고, 도를 믿음이 독실하지 못하다면, 어찌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어찌 없다고 할 수 있겠느냐?

1) 문제는 弘자인데 양백준은 强(굳세다)으로, 논어주소에서는 大로 이해하고 있다. 또하나는 執德不弘에서 執德과 不弘이 주술관계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는 점이다. 다시 번역하면, <덕을 집행하는데 있어 (그 쓰임이)넓지 못하고>정도일 것이다.

2) 信道不篤은 주술관계로 봐도 무난하다. 그런데, <(비록)도를><(비록)도를 믿는다고는 하나, 독실하지 못하면>으로 번역하면 어떨까?

3) 焉能爲有, 焉能爲亡(무)에서도 爲앞에 以가 생략되어 있다고 보면 어떨까 한다. 그러면 번역은 자연히 <어찌 있다고 여길것인가? 어찌 없다고 여길 것인가?> 정도가 되겠다.

集註 - 有所得而守之太狹, 則德孤, 有所聞而信之不篤, 則道廢. 焉能爲有亡, 猶言不足爲輕重.

번역 - 얻은 것이 있으나 지킴이 너무 협소하면 덕이 외롭고, 들은 것이 있으나 (그것을) 믿음이 독실하지 못하면, 도가 폐한다. 焉能爲有亡는 경중을 따질 수가 없다는 말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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