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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립도서관 가운데, syo가 사는 곳에서는 구로도서관이 제일 가깝다. 지하철 세 정거장 하고 도보로 노래 두 곡 듣는 거리. 걸어서도 한 시간이면 간다. 뛰면 이십 분 안짝이다. 그렇다고 뛰지는 않는다. 물론 걷지조차 않는다. 가끔 다리는 왜 있는 건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곤 한다.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바지를 입기 위해서가 아닌가 싶다. 남자는 바지를 입지 않고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 문명사회다. 세 살에 미적분을 마스터하고 일곱 살에 제5 외국어가 네이티브의 경지에 도달했으며 열세 살에 플라톤에서 시작해 마침내 열 일곱에 지젝을 완전정복한, 취미가 Fast Fourier Transform 암산인 남자라면 물론 세계적인 천재로 추앙받겠지만, 그런 그라도 바지를 입지 않은 채 지하철을 타는 순간 즉시 돌아이로 급전직하하여 구금 및 벌금의 처분을 받게 됨은 물론, 덤으로 2호선 하의실종남으로 등극하여 영원히 고통받는 것이 바로 이 세상 이치다. 그리하여 다리는 머리보다 위대하고, 바지는 걷기보다 위대하다. 그렇다는 것은, 일단 바지를 입었다면 다리가 할 바 중요한 임무를 완수한 것이므로, 그까짓 걷기 좀 안 해도 된다는 이야기겠다. 뭐, 어쨌든 지하철 역에서 도서관까지는 걸었잖아. 택시 탈 수도 있었는데.


여담이지만, 바깥 출입이 거의 없는 요즘, syo의 다리는 바지를 입는 용도보다는 주로 간지러울 때 긁는 용도로 사용되는 중이다.



보행은 수단인 동시에 목적이며, 여행인 동시에 목적지다.

_ 리베카 솔닛,『걷기의 인문학』


느리게 가는 데 걷는 것만큼 좋은 건 일찍이 없었다. 걷기 위해서는 두 다리만 있으면 된다. 다른 건 일체 필요 없다. 더 빨리 가고 싶다고? 그럼 걷지 말고 다른 걸 하라. 구르든지, 미끄러지든지, 날아라. 걷지 마라. 그러고 나서 중요한건 오직 하늘의 강렬함, 풍경의 찬란함 뿐이다. 걷는 것은 스포츠가 아니다.

_ 프레데리크 그로,『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보행은 가없이 넓은 도서관이다. 매번 길 위에 놓인 평범한 사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도서관, 우리가 스쳐 지나가는 장소들의 기억을 매개하는 도서관인 동시에 표지판, 폐허, 기념물 등이 베풀어주는 집단적 기억을 간직하는 도서관이다. 이렇게 볼 떄 걷는 것은 여러가지 풍경들과 말들 속을 통과하는 것이다.

_ 다비드 르브르통,『걷기 예찬』




2


지하철 역 화장실에 잠깐 들렀다. 들어갈 때는 분명 입구 앞 긴 의자에 잘 생긴 외국인 남자가 혼자 조용히 앉아 있었는데, 나오면서 보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영악하게 생긴 꼬맹이 두 명이 그 외국인 옆에 찰싹 붙어 함께 셀카를 찍고 있었다. 요즘도 외국인 신기해 하는 꼬맹이들이 있단 말인가, 싶었지만 아무래도 외국인이어서라기보다는 잘생긴 외국인이어서 저러는 듯했다. 아 어린노무자식들이 벌써부터 잘 생긴 건 알아가지고, 이 나라가 어찌 되려고 이러나, 못 생기고 속도 좁아 이래저래 빡친 syo 아재가 혀를 끌끌 차며 슬쩍 지나가려 했는데, 갑자기 그 외국남이 자기들 사진 좀 찍어달라며 말을 걸어왔다! 영어였다! 앗, 야생의 외국인이 나타났다!!


사진을 찍는 데는 one, two, three, one more time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가 없었기에 곤란할 일 없이 일단락되리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난감한 전개가 이어졌다. 바로 syo의 앨범을 호올쭉한 거지로 만든 유년기부터의 고질병, 수전증 때문에...... one more time을 남발하며 몇 장 찍었으나 역시나 죄다 조금씩 흔들려 있었고 계속 찍어 본들 더 나아질 것 같지가 않았기에 핸드폰을 돌려주며 변명을 시도했다. 근데 여기서 일이 터질 줄이야..... 아무 생각 없이 Because of my handshake, 까지 내뱉고는 뭐? 핸드셰이크? 손 떠는 게 핸드셰이크라고? 와, 인디언이 역삼동 땅투기하는 소리 하네. 이 덜떨어진 미친놈아! 으아아아아아아아앙아아앙 이 망신 난 몰라!! 하는 내면의 아우성, 자발적 패닉 상태에 빠지고 만 것이다. 


얼어 있는 syo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 남자, 태평양이든 대서양이든 인도양이든 뭐든 건너 와, 마음씨도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처럼 광활한 그 남자가 방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syo는 그 손을 맞잡았다. 마치 처음부터 악수가 의도였던 사람처럼 최대한 천연덕스럽게 손을 잡고 위 아래로 살짝 흔들며 말했다. Have a nice day and a nice trip. Yeah, thank you. 그의 손은 정말 따뜻했다. 


그러고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나는데, 등뒤에서 들렸다. 야, 저 사람 동공에 지진났어. 아 어린노무자식들이 벌써부터 관상보는 법은 알아가지고. 이 나라가 어찌 되려고 이러나.


쪽은 팔렸지만, 그렇다고 영어공부를 하지는 않는다.




  

한국에서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강박은 실제 삶에서 영어가 얼마나 필요한가외는 무관하다. 유창하고 세련된 영어는 1퍼센트에겐 신분을 상징하는 수단이며, 99퍼센트에겐 1퍼센트에게 빌어먹는 수단이다.

_ 김규항,『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사회가 요구하는 것에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 '아니오'라는 목소리에는 사회 개혁을 위한 연대 정신과 '다른 가능성의 세계'를 모색하는 정신을 담고 있다.

_ 이하준,『고전으로 철학하기』

    


3



김소연,『시옷의 세계』를 마치다.

김서영,『영화로 읽는 정신분석』을 마치다.

Transnational College of Lex,『수학으로 배우는 파동의 법칙』을 마치다.

탕누어,『마르케스의 서재에서』를 읽기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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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8-01-20 18: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yo 야매 어학원에서 배웠다 그러고 이제 동공지진은 아이쉐이크라고 할께요. ㅋㅋㅋㅋㅋ

syo 2018-01-20 18:51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아이쉐이크 좋다ㅋㅋㅋ
그러나 분명 그 순간에는 아이쉐이크가 아니라 아이퀘이크 수준으로 흔들렸을 거예요. 아, 등줄기에 땀이 다 나더라니까요 이 추운 겨울에.

겨울호랑이 2018-01-20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syo님 논리대로라면 제 머리는 모자를 쓰기 위해 존재하는군요... 그랬군요. 어쩐지...syo님 덕분에 존재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ㅋㅋ

syo 2018-01-20 23:32   좋아요 0 | URL
네?? 겨울호랑이님 머리가요??
그렇다면 도대체 제 머리는 뭐가 되는 걸까요....(아이퀘이크)

겨울호랑이 2018-01-20 23:46   좋아요 1 | URL
가끔은 제가 영화 「메멘토 」의 주인공같은 부분이 있어서요 ㅋㅋ

서니데이 2018-01-21 0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올해는 영어공부는 더이상은 안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즐거운 일요일 좋은 하루 보내세요.^^

syo 2018-01-21 10:13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ㅎㅎㅎㅎ
원래 안하지만요 ㅎ^^

서니데이님두 힐링선데이되세요~

2018-01-21 0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21 1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21 12: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18-01-22 0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오늘도 편안하고 행복한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