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없는 사람
커트 보니것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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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러스한 할아버지, 보네거트는 지금 천국에 있을 것이다. 보네거트(보니것 보다 보네거트가 더 익숙하다)의 책이 잘 팔릴것 같다고 문학동네에서 판단했나 보다. 근간 소개에 침 흘릴만한 책들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터무니없는 가격에 사지는 않았지만 출고가격보다는 조금더 주고 <제5도살장>을 중고로 구매해서 보았던, 알라딘발 굿즈-보네거트 문학뱃지-를 얻으려고 하드커버를 기다리지 못하고 다시 <제5도살장>을 구입했던 그의 팬으로써 고마울 따름이다. 다른 책들은 좀 더 싸게 볼 수 있을테니.

역시 팬심으로 구매한 <나라 없는 사람>. 이 책은 보네거트의 마지막 산문집이다. 5년간 연재했던 것을 엮은 것이라고 한다. 곰의 탈을 쓴 여우 할아버지가 떠오르는 책이다. 시종일관 이어지는 유머와 미국(부시) 비판, 환경보호와 관련된 일관된 메시지가 좋다. 읽는 내가 미국인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웃을 수 없는 몇 가지 유머가 덜그럭거리지만 이렇게 늙는 것은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가져다 주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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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 IS NO REASON GOOD CAN‘T TRIUMPH OVER EVIL, IF ONLY ANGELS WILL GET ORGANIZED ALONG THE LINES OF THE MAFIA.
(선이 악을 물리치고 승리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천사들이 마피아처럼 조직화될 수 있다면야.) (5)


나는 과학기술을 생략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왜곡하는 소설은 섹스를 생략함으로써 빅토리아 시대의 삶을 왜곡하는 소설만큼이나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25)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1차 대전이 끝난 후 <병사의 고향>이라는 소설을 썼다. 병사에게 고향에 돌아와 무엇을 보았느냐고 묻는 것이 어째서 무례한 일인가를 그린 이야기였다. 민간인이 전투나 전쟁에 대해 물으면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입을 다물 것이다. 과거엔 그것이 유행이었다. 여러분도 알겠지만 전쟁 이야기를 가장 인상적으로 말하는 방법은 입을 다무는 것이다. 그러면 민간이들은 온갖 종류의 용감한 행위들을 상상하게 된다. (...) 그리고 내가 눈으로 보고 기록했던 이야기에서 전쟁은 아주 추하게 묘사되었다. 진실은 강력하다. 그 힘은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물론 전쟁에 대해 입을 다무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 차마 그것을 입에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28)

그러나 <햄릿>의 위대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셰익스피어는 우리에게 진실을 말했다. 사람들은 좀처럼 칠판 위에 진실을 끄리지 못한다. 사실 우리는 인생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무엇이 좋은 소식이고 무엇이 나쁜 소식인지 알지 못한다. (44)

머지않아 도시는 암흑으로 변하고, 전기는 옛이야기가 될 터이다. 모든 운송수단이 멈추고 지구는 곧 해골과 뼈와 죽은 기계들로 뒤덮일 것이다. 어느 누구도 손을 쓰지 못할 것이다. 끄러기엔 게임이 너무 많이 진행되었다. 그렇다고 파티를 망칠 필요는 없지만, 진실은 알아야 한다. 우리는 마치 내일이 없는 양 물과 공기를 비롯한 지구의 자원들을 흥청망청 써버렸고 그 탓에 정말로 내일이 사라져버렸다. 자, 파티는 계속되고 재미있는 대목은 지금부터다. (52)

내가 보기엔 모든 사람이 마치 알코올 중독자 치료협회의 회원들처럼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단 며칠만 더 살아도 충분한 것처럼 말이다. 내가 아는 한 후손들의 세계를 꿈꾸며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73)

하느님은 어떨까? 오늘날 그가 살아 있다면? 길 버먼은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은 무신론자가 될 겁니다. 상황이 너무 심각하기 때문이죠.˝ (116)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제외하고 우리가 저지르고 있는 가장 큰 실수는 시간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시계와 달력이라는 도구를 이용해서 시간을 소시지처럼 일정하게 자른 다음, 마치 그것들이 우리의 소유물이고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을 것처럼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인다 - 가령 1918년 11월 11일 오전 11시 - 그러나 실제로 시간은 수은 덩어리처럼 잘게 부서지거나 순식간에 증발하는 경향이 있다. 혹시 2차 대전이 1차 대전의 원인은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다면 1차 대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섬뜩한 종류의 불가해한 난센스로 남는다.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라. 바흐와 셰익스피어와 아인슈타인 같은 인류의 천재들은 사실은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 단지 미래의 위대한 작품을 베낀 표절가들이 아니었을까?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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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13계단 - 제47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밀리언셀러 클럽 29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 황금가지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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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된다. 별을 네개 주어야 할지 다섯개 주어야 할지. 좋다는 얘기다. 지난 번 앍은 <제노사이드>보다 복잡하지 않지만 재밌다. 사형제도와 그에 얽힌 사람들의 복잡한 심경을 잘 풀었다. 짧고 임펙트있게 영화처럼 치고 가는 스타일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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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추리소설‘에 해당하고, 아래 글은 스포일러에 해당하여 뒤에 덧붙여 본다. 책을 읽을 사람들은 읽지 않아야 더 재미있을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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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준이치는 마침내 13계단을 다 올랐다. 준이치는 아직일까 싶어 중간층을 통해 회중전등을 비추어 보았으나, 빛은 1층 입구까지 닿지 않았다. 준이치는 회중전등을 2층 중앙의 불상 쪽으로 돌렸다. 부동명왕은 항마의 보검을 움켜쥐고, 모든 불적을 섬멸하고자 버티고 있었다. 원래는 이교의 최고 신이었으면서, 그 압도적인 파괴력과 함께 불교의 수호신으로 거듭난 무신의 모습이었다. 석가여래가 형성하는 정토, 그리고 법을 범한 자는 그 보검의 일격을 받아야만 한다. 지금 준이치는 눈앞의 불상에 끌리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가 읽은 자료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불교는 상냥한 자비를 베푸는 것만으로는 구할 수 없는 어리석은 중생들을 위해 이 파괴신을 준비했노라고. (6장, 고인을 사형에 처함 중에서)

이야기 속 결정적인 증거가 묻혀있는 일본의 사찰. 이곳에 모셔져 있는 불상은 ‘부동명왕‘이다.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본에서는 많은 사찰에 모셔져 있다고 한다. 시바신이 일본의 불교로 넘어올 때 이 부동명왕이 되었다 한다. 부동명왕이 상냥한 자비를 베푸는 것만으로 구할 수 없는 어리석은 중생이란 사형제도를 없애면 살아남는 범죄자들을 이르는 것은 아닐까. 결국 살인을 저지른 범인에 대한 단죄가 다시 살인으로 이어진다는 이후의 내용을 암시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절에 있는 13계단, 그리고 사형이 집행되는 형장에 있다는 13계단 잘 연결되는 아이템을 통해 ‘당신이라면 이 범죄자들을 - 부모를 처참하게 죽인 자를, 여자친구를 강간한 자를, 아들을 죽인 자를 - 죽이지 않고 살려둘 수 있겠는가? 당신이 당한 일이라도 그럴 수 있겠는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정면으로 던져대는 긴장감 넘치는 추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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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오를 때마다 그 질문이 떠오를 것이다. 속으로 열 셋을 세는 버릇도 생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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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진짜 아이들
조 월튼 지음, 이주혜 옮김 / 아작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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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수 만 가지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지금. 나는 어떤 가지의 끝에 매달려 있는 것일까. 당장 짧은 말다툼으로 상처입고 공고했던 나의 세계가 내가 모르던 나로인해 흔들린 오늘, 멀미처럼 잠이 오지 않았고, 멀미약을 마시듯 쉼없이 그녀(들)의 삶을 읽었다. 나는 우리 집에 누워있지만, 내 침대 끝에 오늘의 차트가 걸려있다면, ‘매우 혼란스러워 함‘이라고 적혀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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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평등에 반대한다 도란스 기획 총서 1
정희진 엮음, 정희진.권김현영.루인 외 지음 / 교양인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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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격전지는 여기. 서문에 등장하는 ‘서울, (중산층), (젊은), 이성애자, 고학력, 비장애인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 2016년, 한 달에 한 권 정도는 페미니즘 관련서를 읽어 보자 하고 시작한 책 관련 공부줄기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다만 그 여름에 폭탄처럼 터지기 시작한 페미니즘서 출간 분량을 따라갈 수가 없을 뿐. 그 과정에서 이래저래 상처받고, 주위 사람들의 생각과 반응에 혼란스러웠음도 사실이다. 그래도 페미니즘 SF에 해당하는 번역을 환영하며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상을 수상했다는 SF 번역서는 꼭 챙겨보고, 책 살때마다 관련 신간이 얼마나 나왔나 챙겨본다. 공부하는 책읽기의 한 줄기인데 공부도 취향에 자꾸 치우친다. 읽기 편한 책에 기대는 중이다. 가늘게라도 공부해야지.

1월의 줄기는 <이갈리아의 딸들>, <라비니아>, <마지막으로 할 만한 멋진 일>, <나의 진짜 아이들>(여기까지는 픽션류), <거리에 선 페미니즘>, <싸울수록 투명해진다>,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대한민국 넷페미사>, <여성혐오, 그 후>이다. ‘여자 말을 잘 듣자‘가 어떻게 권력적인 말이 될 수 있는지 은유님의 책에서 시작된 생각이 ‘남녀가 평등하다‘는 말이 어떻게 권력과 폭력이 되는지 <양성평등에 반대한다>에서 이어진다. 한 저자가 긴 분량으로 써내려간 글이 아니라 호흡이 조금 짧지만, 머리를 때리는 시선이 가득하다. 도란스 기획총서가 계속 좋은 시리즈를 내주면 좋겠다.

이제까지 서구 페미니즘 이론이나 한국의 여성주의에서나, ‘양성‘은 집단으로서 남성과 집단으로서 여성의 존재를 전제해 왔다. 남성/여성 집단 안의 개인들의 차이와 남성과 여성의 개념 자체를 문제시하는 성적 소수자의 정치학이 등장하기 전까지, 페미니즘은 양성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나 인간을 양성으로 나눈 ‘판단자‘는 조물주나 자연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다. 다연히 양성개념은 변화할 수 있고 검토할 수 있는 사회적 산물이다. 더구나 양성 개념으로는 대부분의 ‘여성 문제‘가 해석되지 않는다. (23)

사람들은 ‘여성의 해‘ 제정과 같은 일이 여성에 대한 특혜라고 생각한다. ˝여성부는 있는데 남성부는 없다.˝는 식이다. 성의 구별이 ‘사회적 억압 제도‘가 아니라 단지 ‘대칭 집단‘이라는 사고방식은, 최근 몇 년간 온라인을 중심으로 싱을 부린 극심한 미소지니 현상과 이에 대항한 여성들의 대응을 ‘남혐‘으로 명명함으로써 절정을 맞았다.(24)

넥슨 성우 교체 사건 이후 메갈리아 반대 전선은 대동 단결했고, 근 1년간 지속된 메갈리아 성립과 경과,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한 논의는 순식간에 여혐과 남혐이라는 이분법으로 환원됐다. 이에 SNS에서 기본적인 페미니즘 구호에 실제적인 위협을 가하지 말라는 ˝#내가 메갈이다˝ 해시태그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메갈리아를 일베와 더불어 남녀 혐오 세력이라고 대칭적으로 인식했다(141)

조혜영이 짚어냈든 메갈리안들은 현실에 바탕을 두고 가상 세계로 이동한 게 아니라 정확히 반대로 온라인에서 현실 세계로 강력하게 개입해 들어간 것이다. 이 때문에 ‘나쁜 미러링‘의 목록을 수집하고 이것이 사실인가 아닌가를 꼽는 것으로 여성들에게 재갈을 물릴 수는 없다. 메갈리아를 일베보다 더한 이 시대의 최악으로 꼽는 이들은 ‘메갈‘의 실상을 드러낸따는 사건, 사고를 수집하고 나열하는 데 골몰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제공하는 관련 사실, 즉 ‘팩트‘는 의심할 여지 없는 지식이라고 빋는다. (...) 결국 이 데이터 다발이 양적으로 상대를 굴복시킨다는 ‘팩트 폭력‘이나 ‘팩트 폭격‘이 되고, 때로는 자기 확신을 거쳐 집단신념이 된다.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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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참치 2017-02-08 0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써주신 문장 문장이 공감되고 앞으로 어떤 책들 읽으시는지 지켜보고 싶어서 친구신청 드렸습니다. (이런 기능에 익숙하진 않지만요) 요즘에는 페미니즘 책들이 물 만난 고기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네요. 저는 페미니즘에 대한 기반도 없고, 학술적 읽기에 너무 빨리 지쳐버려서 매번 구입을 망설이는데, 책을 고르는 데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해의눈물 2017-02-08 08:20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SF와 페미니즘과 교육과 과학책 줄기를 따라갑니다. 기반없이 학술적 읽기는 정말 지치죠. 그래도 머리를 때려주는 책들이 많이 나와주어 좋습니다. 페미니즘 책읽기가 더 다양해지고 선택의 폭이 넓어진 건 좋은 일인 것 같아요. ^^
 

배명훈 작가의 글은 따스하면서도 유머러스하고, 어딘지 모르게 멀고도 가깝다. ≪예술과 중력가속도≫에는 버릴 수 없는 단편들이 모여있다. <스마트D>는 물론이고 <조개를 읽어요>도 정말 좋다. 누군가는 그의 글을 하드 SF로 분류하지만 나는 따뜻한 SF로 분류하고 싶다. 과학적 소재, 냉철한 사유와 고군분투하는 주인공들의 치열한 삶을 볼 수 있는 과학소설이 아니라, 어딘가 흐느적거리면서 어쩌면 조금은 여유있는 모습으로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그의 주인공들이 좋다. 그 주인공들의 세계가 조금 SF와 이어질 뿐인 것 같은 느낌. ≪안녕, 인공존재≫의 <크레인 크레인>과 <누군가를 만났어>도 따스하면서 과학적이기도 아니기도 한 그 분위기가 좋다. 외국 작가들의 번역 SF에서는 볼 수 없는 이 작가만의 분위기. 단편집만 보다가 이번에는 장편 ≪은닉≫에 도전한다. 배명훈 작가 스트레이트 플러시를 목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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