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군과의 대화 4

 

권군

 

숭군, 나 K오. 초심자의 거친 질문에 성의 있게 대답해주어 고맙네.
읽다보니 몇가지 다시 궁금한 점이 생겼오. 또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네.

자네가 정식화 해둔 명제들을 중심으로 다시 거친 질문들을 해보겠네.

1) 숭군의 정식화 1과 2 검토

1. 사진의 장르적 구분이 필요하다. 예술사진과 다큐멘터리 사진을 비롯한 타장르의 사진은 구분되어야 하며 좋은 사진이 반드시 예술사진은 아니다.
2. 예술사진의 목적은 새로운 인식(감각) 영역의 확장이다.

자네는 다큐멘터리 사진과 예술 사진을 구분하면서 다큐멘터리 사진에는 ‘사태 개방성’이 요구되지 않지만 예술사진은 사태 개방성, 즉 인식의 확장을 가져올 수 있을 정도의 새로운 감성과 감각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네. 그러니까 이것을 내 식으로 표현하자면 사진이 1차 담론으로서의 지위를 얻을 때에만 예술 사진이라 말할 수 있다는 것이겠지. 다큐멘터리 사진은 말그대로 그것이 다큐(기록)인 한 다른 1차 담론에 대한 2차 담론의 기능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했네. 일정부분은 나 역시 자네 의견과 같아. 어떤 상황이나 사건에 대한 보충적 기록으로서의 ‘다큐멘터리 사진’이라면 그것이 어떤 독자적인 사태를 개방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네. 그야말로 '시 없는 노동시'와 같은 처지일 수밖에 없겠지. 

그렇다면 자네는 다큐멘터리 사진은 예술 사진에 비해 열등한 것이라 생각하나? 좋은 다큐멘터리 사진과 나쁜 다큐멘터리 사진이 있다고 할 때 전자는 후자에 비해 2차 담론의 기능을 충실히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나는 2차 담론의 기능을 하지 제대로 못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은, 이것은 하나의 비유가 아니라 사실로서 다큐멘터리 사진일 수 없고, 다큐멘터리 사진 역시 필연적으로 2차 담론을 넘어서는 지점을 반드시 담고 있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나 싶네. 그러니까 좋은 다큐멘터리 사진은 2차 담론이기도 하지만 더 이상 2차 담론일 수 없는 사진이지. 앙리 까르티에 브레송의 <내면의 침묵>이라는 사진첩은 다큐멘터리 사진인가, 예술 사진인가? 만일 다큐멘터리 사진이라면 이 사진들은 어떤 인물에 대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그저 2차 담론인가? 2차 담론이기 때문에 예술 사진으로 인식의 확장을 가져오지 못한 것으로 봐야 하는 것인가? 나는 브레송이 촬영한 초상 사진들이 인물들의 또 다른 면을, 영화나 책에서 읽고 느낀 것을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사태개방성’을 지닌 사진들로 보았네. 그건 자네가 언급한 헬무트 뉴튼이 촬영한 초상 사진들도 마찬가지라 보네.

만일 예가 적절하지 않았다면 용서하게. 다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사진 예술에서 이 같은 장르의 구분이 꼭 필요한가 하는 점, 더 정확히 말해 자네는 ‘구분’이라고 하지만 두 사진 간의 관계를 예술이라는 관점에서 ‘우열’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것이네. 파인 아트에 대해서만 사태 개방성을 요구할 때 자네는 파인 아트 외의 장르 사진들에는 그런 사태 개방성이 어째서 요구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인지 궁금하네. 그러면서도 동시에 자네는 요구되지는 않지만 만일 사태개방성을 가지고 있다면 예술 사진으로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이 부분이 잘 정리가 되지 않아. 어쩐지 충돌처럼 여겨지거든. 그런 점에서 그런 ‘우열’관계가 정당한 것인지, 사진계에서 어느정도까지 보편화된 입장인지 궁금하네. 자네가 더 잘알겠지만 뷰먼트 뉴홀의 경우 다큐멘터리 사진은 사건을 기록할 수도 있지만 ‘뉴스사진’이 지닌 특수한 의미보다 어떤 보편적 의미를 지녀야 한다고 하지 않나. 나는 자네가 혹시 예술 사진을 심상 사진이나 회화성을 지닌 사진으로만 국한해서 이해하는 것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구만. 사진가들이 취할 수 있는 포지션으로는 시인, 정치가, 철학자 등 다양한 시선이 있을텐데 나는 자네가 작품이 지니는 ‘시적 특성’에만 사진을 국한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굳이 표현을 바꾸자면 자네가 다큐멘터리 사진이라고 부른 사진은 결국 ‘보도 사진’을 말하는 것 아닌가? 보도 사진은 2차 담론 외의 기능을 스스로도 의도하지 않지만 다큐멘터리 사진은 다르다고 생각하네. 물론 자네가 조셉 쿠델카 같은 작가들이 다큐멘터리 사진이지만 새로운 사태를 개방하는 사진을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그들의 작품을 예술 사진이라고 말한 것도 기억하고 있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다큐멘터리 사진과 타장르의 사진을 구분해야 할 정당성이 있는가? ‘좋은 사진’은 ‘예술 사진’이라고 말하면 왜 안되는가? 잘 만든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라도 예술 영화로 부를 수 있는 것 아닌가. 나는 ‘터미네이터', ‘배트맨', '반지의 제왕' 시리즈 등을 포함해 최근의 ‘노아'까지도 예술이라 부르지 않을/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네. 블록버스터의 공식이 반복되더라도 그 반복이 단순 반복일 수 없다는 점, 걸작과 걸작을 매개하는 아류에 불과하더라도 아류가 예술이 아닌 것은 아니듯이 말이네. 솔직히 '매트릭스' 정도 되면 이미 예술을 넘어선 예술 아닌가.

여기서 질문을 의미있게 만들기 위해 한가지만 용어를 정의하고 싶네. 나는 ‘좋음’을 기술적으로 정밀한 것과는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사진가 세계에서 기술적으로 정밀하지 못한 것은 아예 우리 논의의 고려대상 자체가 아니네. 나는 ‘좋음’을 사태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내지 사태를 얼마나 개방하는지와 관련해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그러니까 사태에 대한 ‘엄밀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 정밀함과 엄밀함의 구분은 현상학의 개념적 도식이기도 하네. 나는 사진의 매체적 독특성을 나름대로 실현하고 있는 사진이라면 여전히 예술사진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하네. 보도사진이나 상업사진들 역시 사진의 메채적 독특성을 실현해내고 있다면 예술이라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네. 그것의 창작 내지 제작 의도가 무엇이든지 간에 말이네. 내가 말한 사진의 매체적 독특성은 언어로 완전히 환원되지 않는 사진만의 잉여적 의미를 작품이 생산할 수 있는지 하는 것이네. 나는 자네와 같은 직관으로 여지현 작가의 작품의 경우 의미의 보편성이 좀 의심스럽네. 그러나 정연두, 김옥선 작가의 경우에도 같은 식으로 평가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요컨대 사회주의 선전화들이 그저 키치에 불과하다고 여겨질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나름대로 ‘저항’이나 ‘자유’와 같은 나름의 보편성을 지녔다고 평가되지도 않나? 자네 말대로 해석학적 시간축을 고려했을 때 소통불가능한 작품에 대해서 그렇다고 말하려면 조심해야 하듯이, 이들의 작품들에 대해서 ‘진부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유의해야 하지 않나 싶네.

내 관점에서 예술의 범위가 많이 넓어질 수 있음을 부정하지 않네. 나는 내가 예술 범위에 있어서 최대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있음을 부정하지 않아.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술의 조건’이니까.

2)

3. 예술사진의 조건이 반드시 형식적 혁신성이 될 필요는 없으나 감각의 층위에서 탈영토화를 전제로 한 독창성의 성취는 필수적이다.
4. 예술사진은 3에서 밝힌 예술사진의 기본 조건을 토대로 형식적 혁신성을 지향해야 한다.
5. 예술사진이 생성하는 사태 개방성의 수준, 예술사진의 수준은 개념화(언어화)될 수 없는 의미 잉여분과 비례한다. 단, 독해불가능한 자폐적 지시성과 시적 지시성은 구별되어야 한다. 


나는 이번 자네의 답변을 읽으면서 자네와 내가 생각하는 ‘사태’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여겼네. 사실 현상학계 내에서도 ‘사태’(Sachen)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합의가 되지 않고 있네. 오이겐 핑크는 “사태 자체는 반드시 무언가 이미 확정된 것으로서 미리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엇이 사태 자체인가는 연구주제의 관점으로부터만 추정될 수 있다”고 한다네. 자네는 예술이 인식영역의 확장을 가져올 수 있어야 하며 예술 사진이라면 새로운 감수성과 감각을 호출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네. 그리고 그것은 내용면에서나 형식면에서 모두 추구될 수 있는 것이라고도 했네. 그러면서 독창성, 즉 탈영토화에 대한 지향이 없을 때 그것을 과연 예술로 부를 수는 없기에 감각적 독창성과 독자성이 추구될 필요가 있다고 봤네. 이 답변으로 왜 예술에서 새로움이 그토록 중요한 것인지, 새로움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느정도 이해하게 되었다네. 고맙네.

질문은 이런 것일세. 그러면 자네가 말하는 독자적인 감각이나 감수성은 무엇인가?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감각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들이 우리에게 주는 공포심, 비열한 웃음처럼 언어화 되기 이전에 감상자에게 주는 충격과 같은 직접적 감각을 말하는 것인가? 만일 자네가 첫번째를 의미했다면 나는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감각, 개념화될 수 없는 의미의 잉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할 것 같네. 예를 들면 성서가 열어주는 신적 사태를 경험했다고 해보자구. 그 사태에 대해서 우리가 온전하게 지시할 수 있는 의미, 경험이 완전하게 의미화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시의 성공’과는 별개로 ‘지시의 실패’가 연속적으로 이어지더라도 ‘언어화’에 대한 시도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네. 사실 지시의 실패, 기표의 흘러내림이라는 것은 언어의 본질적 한계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 예술 사진이 개념화될 수 없는 의미의 잉여가 있어야 한다는 말은 결국 ‘감각’이나 ‘예술'을 신비화하는 것 아닌가?. 감각이 주는 사태의 풍부함을 언어로 모두 담기는 불가능하겠지만, 만일 나와 같은 관점에서 보자면 모든 사진은 언어화되기 이전의 풍부한 감각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언어보다 감성적 차원에서 언어보다 우등하고, 따라서 사태개방성을 갖고 있다고 봐야 하네. 그러니 좋은 사진 예술은 언어와 사태 간의 관계만으로는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사태의 또 다른 면을 사진이 보여줄 수 있어야 하고, 그 때 사진이 드러낸 사태의 또 다른 측면은 환원이 실패하더라도 언어로 말해질 수 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네. 나는 언어와 사태의 관계에 기생하는 사진은 나쁜 사진이지만, 사태의 또 다른 측면을 열어주는 사진은 다르게 평가해야 한다고 보네. 다른 말로 하면 한 사진이 사태, 경험 현실의 재구성을 통해 사태의  '진실'(truth)을 담고 있다면 좋은 사진이라고 봐야 하지 않나 싶어. 정리하자면, 나는 자네가 '언어화될 수 없는 감각, 감수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네. 

만일 자네가 의미하는 것이 두번째, 즉 감상자에게 주는 충격과 직접적 감각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면, 나는 그보다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의 경우라면 이 작품이 지닌 시적 측면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네. 자네가 보여준 헬무트 뉴튼과 로버트 메이플소프 모두 그런 차원이 있다고 생각하네. 그러면 자네가 ‘정형화된 감각’이라고 말하는 것에서 정형화가 수식하는 것은 ‘감각’이 아니라 작품이 시적 언어의 지시성을 지니지 않고 단지 일상 언어의 지시성을 갖는 경우를 말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싶네.  만일 그렇다면 내 생각도 바로 그러하네. 그리고 더 나아가 나는 사태 개방성은 우리의 일상적 시선을 해방하는 기능이 있어야 예술이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네. 그러니까 우리가 존재와 세계를 정립하는 ‘서정’의 방식에 의문을 던지는 정도에 따라, 그리고 다른 ‘서정’으로 돌변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네. 카프카의 작품이 나를 추방하며, 내게 형벌을 부과하면서 세계와 존재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갖게 하듯이 사태 개방성은 ‘시선의 전향’ 외에 다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네. 내가 상업 사진이나 다큐멘터리 사진, 보도 사진을 순수 사진과 구분할 수 없다고 보는 지점이 바로 이것이네. 그런 점에서 헐리우드 영화도 이런 시선의 전향을 불러온다면 예술로 기능하는 것으로 봐야해. 예술의 조건이라기 보다 좋은 예술의 조건은 이런 사태 개방성을 얼마나 가지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겠지.

한가지 더 보태자면, 앞서 말했든 나는 예술의 범위에 있어서 최대주의자라고 생각하네. 예술에 대해 너무 과장할 필요가 없고, 예술을 신비화시켜서도 안되고, 어떤 대상 내지 사태가 지닌 다른 측면을 보여주며 예술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면 예술이라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거지. 그리고 쉽게 언어로 해석되는 작품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전부일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보네. 내 경우에 ‘상록타워(evergreen tower)’를 보면서 과연 이게 전부일까, 즉 내가 해석한 내용이 이 작품의 최종적 의미일까 하고 묻고 작품을 더 고민해야만 했었네. 그 작품이 지니는 여러 층위가 있다고 보고 나는 표층만을 봤을 수도 있다고 본것이지. 감각은 모두 지시될 수 없더라도, 언어화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작품은 끝없이 새로운 감각, 새로운 사태를 생산해 낸다. 나는 그것이 작품을 경험하는 자의 입장에서 가져야 할 태도, 작품에 대한 윤리가 아닌가 하네. 

질문을 정리하겠네.
1) 첫 번째 질문은 예술 사진의 조건이네. 왜 예술 사진을 말하는데 있어서 다른 장르와의 구분이 필요한가? 좋은 다큐멘터리 사진에 사태개방성이 요구되지 않는다면 좋은 다큐멘터리 사진과 나쁜 다큐멘터리 사진의 차이는 무엇인가?

2) 두 번째 질문은 훌륭한 예술 사진의 조건이네. 자네가 훌륭한 예술 사진의 조건으로 말한 형식과 내용 측면에서의  ‘사태개방성’에서 ‘새로운 감각과 감수성’을 호출한다는 말이 정확히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내가 말한 둘 중의 하나에 해당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외의 다른 어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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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군 :

 

답글 고맙네! 덕분에 정말 평소에 당연하게 생각하던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좋네!

 

나는 좋은 다큐멘터리 사진과 나쁜 다큐멘터리 사진의 기준은 기술적 완성도에 있다고 생각하네.

즉, 잘 찍었느냐, 못 찍었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네.

 

그리고 이전에 언급했다시피 이같은 기준에서 더 나아가서 상황의 새로운 측면을 환기시키는 힘을 가진 사진을

나는 예술로 작동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이라고 생각하네.

이 점 많은 다큐 사진가들에게 적잖히 욕먹을 일이라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네

 

예를 들어

얼마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은 박노해의 다큐사진을 보겠네

 

 

 

 

 

 

 

 

 

 

이상의 박노해의 사진은 정말 잘찍은 다큐사진이라 생각하네.

내가 죽기 전에 저렇게 잘찍은 사진을 한번 남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드네.

 

그러나 나는 과연 박노해의 사진이 예술작품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네.

적어도 나에게는 박노해의 사진은 기존에 너무나 많이 보아왔던 그런 이미지의 반복 생산이라고 생각하네.

즉 새로운 감각, 새로운 의식의 지평을 한치도 넓히지 못했다는 것이지.

좀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박노해의 사진은 사진은 "인간 사랑, 가난한 이웃에 대한 따뜻한 시선" 등으로

너무나 쉽게 수렴 되어버린다는 것이지.

이는 사진이 애초에 "기존의 관념이나 생각"을 지시하는 일종의 지시기호로 기획되어

사용되었기에 발생하는 당연한 결과라 생각하네.

 

그리고 나는 이 점에 대해 다큐사진으로서는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네.

나는 다큐사진이 기존의 양식화 된 이념이나 세계관을 사진을 통해

그려낸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누군가는 반드시 이 사명 역시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위의 사진은 자네도 알다시피 2007년 처음 내가 처음 사진을 시작할 때 신촌에서 찍었던 사진이네.

사진 기술적인 문제도 문제지만 위의 사진이 예술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명확하게

내가 지시하는 상황이 이미 일반화, 도식화된 지점을 지시하고 있다고 있기 때문이지.

 

즉, 내가 이 사진으로 그려내고자 했던 것은

소위 "어려운 이웃에 대한 무관심", 혹은 "자본주의 사회의 비인간성" 등에 대한 고발이겠지.

 

내가 "언어화 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이 바로 이 지점을 이야기하는 것이네.

그러니까 내가 말한 "언어"란 "정형화된 인식", "정형화된 의식"의 구조적 틀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네.

 

이 점 자네가 이미 앞서 나와 동일한 생각을 아래와 같이 이야기해 주었네.

 

"나는 사태 개방성은 우리의 일상적 시선을 해방하는 기능이 있어야 예술이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네. 그러니까 우리가 존재와 세계를 정립하는 ‘서정’의 방식에 의문을 던지는 정도에 따라, 그리고 다른 ‘서정’으로 돌변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네."

 

 

그렇다고 해서 나는 결코 예술사진이 다큐사진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네.

예술가가 혁명가보다 더 우위에 있지 않는 것과 동일한 이유에서 그렇다고 생각하네.

다만 서로의 영역이 다르고 나의 경우에 있어서 예술 쪽에 더 선호를 가지고 있을 뿐이네.

만약 우위를 따지자면 소위 미학적 차원에서 예술사진이 우위를 가질 것이고,

운동성의 차원에서 다큐사진이 우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네.

즉, 상대적 우위를 모두 나름대로 점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네.

 

그리고 거듭이야기 하자면 조셉 쿠델카의 사진과 같이 어느 지점에서

"일반적인 다큐멘터리 사진"의 영역이 아닌 "예술로서의 사진"  영역으로 침투하는 사진이 있다고 생각하네.

 

조셉 쿠델카의 사진

 

 

 

 

 

 

 

그리고 이러한 예술 영역으로의 침투는

이미 말했다시피 패션 사진을 비롯한 상업사진 뿐만 아니라 헐리웃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네. 내가 이전에 말한 소위 "헐리웃 영화"는 매트릭스와 같은 작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래도 진부한 상업 영화를 지칭하는 것이었네.(소위 킬링타임용 영화)

 

그러니 첫번째 문제에 대해 정리하자면 나는 좋은 다큐멘터리 사진과 나쁜 다큐멘터리 사진의

기준을 기술적 완성도로 보고 있다네. 예를 들어 좋은 다큐멘터리 작가로 "스티브 맥커리" 같은 작가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네. (물론 그가 찍은 사진 가운데에서도 예술 사진의 가능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는

사진도 있다고 나는 생각하네.)

 

한편, 보도사진의 경우는 오히려 나는 저널리즘이 핵심인 사진이라 생각하네.

분명 상황을 담는다는 차원에서는 다큐나 보도사진 모두 같은 맥락이겠지만,

 

좋은 기사가 개인의 "주관적 가치관"을 글로써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듯이,

(물론 여기서 말하는 "주관적 가치관"을 드러내는 사진이 다큐멘터리 사진이라 생각하네)

 

좋은 저널리즘 사진, 보도사진은 사진 기자의 주관적 가치관을 드러내는 것을 지향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네.

(물론 어디 개인의 주관성이 투영되지 않은 사진이 있겠는가만은 나는 그 비중과 지향성을 이야기 하는 것이네)

 

 

아주 거친 비유를 들자면 다음과 같을 것 같네.

 

보도사진(정확성,객관성) = 기사(정확성,객관성)

다큐사진(기술적 완성도) = 사설(논리성)

예술사진(미학성) = 시,문학(미학성)

 

 

 

그리고 내가 "사태개방성", "독자적 감각"이란 용어로 말하고자 한 것은

자네가 이미 앞서 말했던 두번째 상황("언어화 되기 이전에 감상자에게 주는 충격과 같은 직접적 감각")

의미하는 것이었네.

 

내가 말하는 "언어"란 앞서 말했듯, "일종의 도식화, 정형화된 해석틀"을 일컫는 것이네.

이같은 맥락에서 "개념화(언어화)될 수 없는 의미 잉여분" 이란 것도 

"기존에 확보되었던 정형성"(언어)을 넘어서는 새로움에 대한 잉여를 이야기 하는 것이지.

이 점 자네와 나 역시 생각을 같이 한다네.

 

또한

 

"쉽게 언어로 해석되는 작품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전부일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보네. 내 경우에 ‘상록타워(evergreen tower)’를 보면서 과연 이게 전부일까, 즉 내가 해석한 내용이 이 작품의 최종적 의미일까 하고 묻고 작품을 더 고민해야만 했었네."

 

라고 밝혀주었듯이 작품에 대해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자세의 생각에 역시 동의하네.

 

솔직히 그동안 내가 많은 작가들의 작품들을 너무 쉽게 빨리 판단했을 수 있었을 것이란 반성을 하게 되네.

 

하지만 한편으로 나는 "가치 없는 작품"을 "그 작품보다 더 가치없는 사이비 평론"으로 

포장하는 예술계의 관행도 분명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하네.

 

자네가 말했듯 속단하지 않고 진중하게 작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은 감상자와 평론가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자세이겠지만,

 

"없는 목소리"를 거짓말로 만들어내는 일부 몰지각한 사이비 평론가들에게도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네.

좋은 감상, 좋은 평론이란 말 그대로 "냉정과 열정사이"에서의 균형이 필요한 작업이라 생각하네.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니까. 그리고 때론 "진실"은 "냉혹한 것"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작가를 위해 정직하고 냉정한 비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네.

 

자본의 논리에 봉사하는 거짓 칭찬에 편승하여, 혹은 그 거짓과 공모하여

한 평생을 고작 "비싼 쓰레기"를 만들기 위해 산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작가 자신에게 너무 잔혹한 형벌이라 생각하네.

 

그러니 나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닌 바로 작가를 위해 정직하고 냉정한 감상과 평이 필수적이라 생각하네.

 

한가지 덧붙이면

이상의 내 생각이 물론 사진계와 공유하는 보편적 생각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참고해주시게나.

각 작가들에 대한 평가뿐만 아니라 개념미술에 대한 생각, 사진 장르의 구분, 예술 사진의 조건 등등 역시

전혀 공식화된 생각이 아니니까 다른 분들의 생각을 많이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네.

나 역시 사진을 공부하는 사진학도의 한명일 뿐이니까.

 

다만 나는 나의 미적판단에 대한 나름의 정당성과 기준을 확보하고,

이 정당성과 기준을 근거로 내 작업을 해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이를 위해 불가피하게 여러가지 문제에 대한 다소 거친 개념화가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점 이해해주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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