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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소년이 25년 만에 우리 사회에 던진 질문에 답을 찾는 일이다. 어째서 소년은 우리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일까. 우리는 수용소와 연관된 모든 이들이 퇴소 후에도 여전히 비가시적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문맥과 행간에서 찾아야 한다. 이제 이 문제는 새로운 아포리아(곤경)여야 한다.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적 성취가 가장 가시적이었던 시기에 소년은 오히려 비가시적인 존재로, 사회적 투명인간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서 우리가 마주해야 할 물음은 무엇일까. 이 책은 우리 시대, 우리 사회의 어느 거대한 공백에 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전규찬 기획, 한종선 전규찬 박래군 지음, 안영춘, 「발문:소년은 그들과 이어진 벼리이다」, 『살아남은 아이』(이리, 2012)

 

* 책이 나온 것이 2012년이니 벌써 6년이 지났다. 그 사이 이 책의 소년이 던진 질문들은 그 거대한 공백을 어떻게 채웠을까. 어떤 시기를 함께 지나왔으나 수용과 격리로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공백. 그리고 몇십 년이 지나 불쑥 내 앞에 나타난 책 속의 소년과 422일째 거리에서 노숙중인 ‘역사의 천사’는 무엇을 통해 바뀌었나. "사람들은 더이상 진실을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는 명제는 이 역사의 천사 앞에서는 함부로 발설할 수 없는 문장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어떻게 만나야 할까를 고민하는 아침. 우선은 내가 길에서 본 가장 소박한 집, 그 작은집에 대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고백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마흔네 해 동안 바다에서 떠오르는 해를 한번도 본 적 없다는 고백을 받아 적어야겠다. 피하지 않는, 우회하지 않을 용기를. 용기가 절실한 날이다.

 

#살아남은아이

#형제복지원

#작은집

#길위의집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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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0 14: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돌바람 2019-05-19 12:38   좋아요 0 | URL
이렇게 소식 전할 수 있게 되어서 반가워요.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알라딘에 들어오니 반가운 분들이 있어서 좋아요. 읽어주실 줄 알았어요. 빈 허공에 띄우는 소식이었는데 어디서든 누구든 만날 수 있는 우연이 좋아서요. 혼자 씩 웃습니다.
 

눈에 바친다

 

눈에 밟힌다는 말을 처음 쓴 사람은

눈에 손발이 달린 사람이거나

망막이 통점痛點인 시인이었을 것이다

 

아무 하중도 없는 눈빛에 천만 근의

무게를 달아놓고

눈빛이 심장처럼 뛴다고

더듬었던 눈이,

밟힌 눈이 아프다 하였으니

 

두 눈이 만나지도 못하면서

늘 한곳을 보는 것은

한 눈의 외로움보다는

한 눈의 나태를

지켜봐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아픔을 눈이 읽는다

모든 희열을 눈이 말한다

모든 숨이 두 눈꺼풀로 끝난다

 

제 눈에 제 눈물을

다 바치고서야

눈은 제 눈을

돌아보지 않는다

 

 

―문동만, 「눈에 바친다」 전문, 『구르는 잠』(반걸음, 2018)

 

 

* 시집의 어느 구절을 잡아도 생각을 멈추게 되더군요. 어느 쪽을 펴도 생각이 돌아요. 어느 해, 어느 날 바닷가 늙은 집의 철없는 막내둥이가 어쩌다가 생활을 짊어지고 살아온 내력을, 너무 일찍 철들은 무거운 삶 쪽으로 걸음을 옮긴 수평선을 닮은 시인의 시선과 마주하게 되고요. 출렁이다 다시 돌아가는 바다의 발가락 같은 간지러움을 읽다가 시인의 말을 들여다보는 연말입니다.

 

“나는 나에게 감동할 것이 희소했으므로 핏줄이나 사회적 혈연들에게서 그리움이나 한탄이나 웃음을 구했다.”

 

언제 보아도 울렁이는 파도의 말을, “피는 것 속에서 지는 것을 먼저 보는 병을 그냥 삶이라, 시라 받아들이고 싶다.”는 그냥과 결기 사이를 내년에도 살아가겠지요. 내 것이라 내보일 수 없는 빈약한 나이를 먹었으나, 그 초라함을 가져본 적 없는 웃음 쪽으로 옮겨보려는 마음을 숨길 수 없군요. 내년에는 나뭇잎을 던지고 노는, “아무도 아프지 않은 나뭇잎 싸움”을, “맞을수록 웃음만 나오는” 구르는 잠을 청하고 싶어져요. 덮을 수 없는 시집을 앞에 둔 2018년 마지막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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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적 호기심을 지닌 아마추어들이 그날 모닝 포스트지에서 읽을 수 있었던 기사는 다음과 같다.

여러분은 이따금 수평선에서 지는 태양을 지켜본 적이 있습니까? 있을 것입니다! 틀립없이요. 여러분은 수면을 스치는 그 원의 윗부분이 사라지는 순간까지 태양을 계속 지켜본 적이 있을 법한 일입니다. 하지만 바다 안개가 사라진 하늘이 완벽하게 맑을 때 그 빛나는 천체가 마지막 광선을 던지는 바로 그 순간에 나타나는 현상을 여러분은 눈여겨 본 적이 있습니까?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처음으로 지켜볼 기회가그런 기회는 아주 드물게 있을 것입니다생긴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 망막을 자극하는 붉은 광선이 아닌 녹색광선일 것이며 그야말로 경이로운 녹색, 어떤 화가도 팔레트에서 찾아낼 수 없는 녹색, 자연이 식물의 아주 다양한 색채는 물론, 가장 투명한 바다의 색에서도 결코 재현해내지 못한 색조의 녹색 광선일 것입니다! 만일 천국에 녹색이 있다면 그것은 소망을 상징하는 진짜 녹색인 바로 그 녹색 말고는 다른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캠벨 양이 홀에 들어서면서 손에 들고 있던 모닝 포스트지에 실린 기사는 그와 같았다. 짧은 기사에 불과했지만 그것을 본 그녀는 열광했다. 그래서 흥분한 목소리로 삼촌들에게, 녹색 광선의 아름다움을 서정적인 형식으로 노래한, 앞서 인용한 몇몇 구절들을 읽은 것이다.

하지만 캠벨 양이 삼촌들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는데, 바로 그 녹색 광선이 오래된 전설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전설의 내밀한 의미까지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전설이란 하일랜드 지방에서 유래된 많은 전설 중에서도 불가사의한 것으로 내용은 이러했다. 전설에 따르면, 녹색 광선은 그것을 본 사람들로 하여금 사랑의 감정 속에서 더 이상 속지 않게 해주는 효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 광선이 나타나면 헛된 기대와 거짓말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운 좋게도 일단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게 된다.

하일랜드의 스코틀랜드 아가씨가 모닝 포스트지의 기사를 읽자마자 상상력으로 되살린 시적 맹신을 너그럽게 보아주기를.“

쥘 베른, 3.모닝 포스트지의 기사, 녹색 광선(딴짓의 세상, 2014)

 

*에릭 로메르의 동명의 영화로 먼저 봤으나, 내겐 올해 만난 가장 아름다운 표지와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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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새벽 다섯 시.

욕실 전구 불빛 아래서,

그녀는 한 생을 벗듯 옷을 벗는다.

타일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발 앞으로 세숫대야를 끌어당긴다.

 

나는 매일 몸을 씻어, 남들이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이비누 향이 좋지. 며칠 멀리 갈 일이 있으면 오이비누를 꼭 챙겨가.

 

나는 나를 모르지만 내 몸은 잘 알아.

 

내 몸은 내 손만 씻길 수 있어.

다른 손이 씻기는 건 싫어.

 

누가 내 몸을 보는 것도 싫어.

 

질 안에 손가락을 넣으면 배꼽 같은 게 만져져.

나는 질 안에까지 손가락을 넣어서 씻어.

군인 받는 공장에서 그렇게 씻었어, 붉은 소독약 물로.

위생병들이 그렇게 씻으라고 알려주었어.

아흔 살이 넘어서야 배꼽 같은 게 없어졌어.

 

꿈에 또 엄마가 보였어..."

-김숨,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현대문학, 2018)

 

 

*문장의소리 녹음하러 갔을 때 글을 쓰다 후다닥 겉옷만 걸치고 나온 모습으로 하늘색 색연필을 꺼내 세 줄의 글짜를 써서 내게 주었던 소설의 문장. 평생의 시력을 다 쓰고 컴컴한 방에서, 이제야 쪼개진 기억을 이어붙였을 김복동 할머니의 말을 새벽 다섯 시에 읽다. 아마 작가도 이 문장을 새벽 다섯 시에 썼을 것이다. 인용된 부분의 적나라함에 불편한 사람들이 있겠다. 사실 이 책은 잠깐씩 멈추면서 숨을 고르듯, 생각을 돌리듯, 이야기를 마저 들을 수 있는 용기를 배우듯, 여백을 읽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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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는 다시금 출발해 너와 나를 스쳐 지나가는데, 지난 밤과 낮 우리를 둘러싸던 그 노래. 사랑을 멈추지 말아요, 제발 멈추지 말아요 하고 반복되던, 고작 사랑이지만 결국 사랑이라고 울려 퍼지던 그 노래를, 무너질 듯 무너지던 천장, 은하처럼 반짝이고 터지던 미러볼, 깊은 밤 나는 흥얼거리는 걸 멈추지 못하면서, 조금은 울면서, 점점 더 멀어지면서, 우린 하나가 되진 못하겠지만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돌쯤은 될 거라고, 눈을 뜨면 사랑을 할 테고, 이대로 눈을 감아도 사랑을 하는 거라고, 사랑하는 류, 당신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고.”

-김봉곤, 유월열차, 사랑을 멈추지 말아요(큐큐,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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