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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제12회 백신애문학상에 하명희의 ‘불편한 온도’
등록 2019-10-14 16:36:18
제8회 백신애창작기금에는 이철산 시인의 ‘강철의 기억’

【영천=뉴시스】 이은희 기자= 제12회 백신애문학상에 선정된 소설가 하명희씨. 2019.10.14. (사진= 영천시 제공)photo@newsis.com



 
【영천=뉴시스】 이은희 기자 = 대구·경북 첫 여류작가인 영천 출신 백신애 문학상에 소설가 하명희 씨의 ‘불편한 온도’가 선정됐다.
14일 영천시에 따르면 올해 12회를 맞은 이번 문학상은 백신애기념사업회(회장 김종식)가 주관하며 상금은 1000만 원이다.
백신애문학상은 여성에게 침묵·순종을 요구하는 가부장적 가족제도와 조혼의 폐단을 거부하고 비판했던 작가의 정신을 기려 2008년에 제정됐다.
이번 상은 등단 5~15년된 작가들이 2018년에 발간한 창작집을 대상으로 심사했다.
선정된 소설가 하명희는 2009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 장편소설 ‘나무에게서 온 편지’를 출간했다.
한편 기념사업회는 상금 500만 원이 주어지는 제8회 백신애창작기금에 시 ‘강철의 기억’ 작가인 이철산 시인을 선정했다.
영남권 시인들이 지난 8월까지 발간한 시집을 대상으로 심사했다. 이 기금은 지역 문학의 활성화를 위해 쓰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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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뉴시스】 이은희 기자= 제8회 백신애창작기금에 선정된 이철산 시인. 2019.10.14. (사진=영천시 제공)photo@newsis.com

시상식은 오는 11월 9일 영천교육문화센터(2층)에서 열릴 예정이다.
백신애(1908~1939) 작가는 1920년대와 30년대에 항일 여성운동 및 작품 활동을 펼쳤다.
식민지 조선 억압받는 민중의 고통스러운 삶을 여성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여성의 언어로 사실대로 그려낸 리얼리즘 작가이다.1930년 여성으로서는 처음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나의 어머니’로 문단에 데뷔했다.
‘꺼래이’, ‘적빈’, ‘채색교’ 등 소설 20여 편과 30여 편의 수필·기행문·논단 작품을 남겼다.
leh@newsis.com

신아일보
http://www.shina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13493

경북일보
http://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17828

대구 매일신문
https://news.imaeil.com/People/2019101413322402728#

헤럴드경제
http://biz.heraldcorp.com/village/view.php?ud=201910141715358856590_10


http://biz.heraldcorp.com/village/view.php?ud=201910141715358856590_10

아시아뉴스통신
http://www.anewsa.com/detail.php?number=1997635&thread=07r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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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아 2019-10-20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해요!!!

돌바람 2019-10-21 14: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소식 전해요 이누아님!
 

[우리 시대의 리얼리스트 인터뷰] 사회의 온도를 측정하는 소설가 하명희


일시 : 2019년 5월

참석자 : 김대현(인터뷰어, 문학평론가), 하명희(소설가)


 



김대현 : 하명희 선생님 안녕하세요. 문학평론을 하는 김대현입니다. 오늘은 웹진 〈문화다〉 특집  ‘우리 시대의 리얼리스트들’ 관련하여 박일환 시인에 이어 두 번째로 선생님과 대담을 진행하려 합니다. 대담을 준비하기 위해 선생님의 작품 『불편한 온도』(2018, 강)와 『나무에게서 온 편지』(2014, 사회평론)를 다시 천천히 읽어보았습니다. 처음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읽는 사람을 서늘하게 하는 부분들이 많아서 그에 관련된 생각들을 선생님께 직접 듣고 싶었는데요. 이번 대담이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마침 이번에 『불편한 온도』로 제22회 한국가톨릭문학상 신인상을 수상하셨는데요. 상당히 오랜 기간 정련의 시간을 가진 소설집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수상을 축하드리고요. 본격적으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읽는 분들을 위해 간단한 자기소개와 근황을 조금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하명희 : 고맙습니다. 며칠 전에 시상식이 있었는데요, 제가 올해 등단한 지 딱 10년이 되거든요. 신인상을 등단 10년 이내의 작가에게 준다고 하더라고요. 『불편한 온도』 출간이 더 늦어졌으면 못 받을 거였어요. 그동안 작품집을 출간하려고 여기저기 투고도 하고 그랬는데 잘 안 되더라고요. 그러다가 재작년에 홍상수 감독의 영화 〈그 후〉에 나온 강출판사를 찾아갔다가 평론하는 정홍수 선생님을 뵙고 소설을 막 들이밀었어요. 좀 봐주세요, 하고. 그때 마음이 바닥을 치던 때여서 거기서도 퇴짜를 맞으면 이건 다 버리고 다시 쓰자, 그랬던 것 같아요. 다행히 정홍수 선생님이 출간을 결정해주셔서 이렇게 좋은 상을 받게 된 것 같습니다. 『나무에게서 온 편지』는 벌써 출간된 지 5년이 지난 장편소설인데 90년대 초 고등학생들 이야기를 누가 읽어줄까 고민하다 전태일문학상에 투고를 했었어요. 그때도 그랬던 것 같아요. 소설은 썼는데 어떻게 독자와 만나지? 저의 경우는 소설 쓰는 것만큼 그 다음이 또 어렵고 힘들더라고요. 지금은 그동안 썼던 30매 가량의 짧은소설과 단편소설들을 하나의 단편집으로 엮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불편한온도8982182306_1.jpg



김대현 : 먼저 이번 수상작인 소설집 『불편한 온도』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2009년 선생님의 등단작「꽃 땀」에서부터 비교적 최근작인 2017년 「눈의 집」까지 대략 10여 년에 걸친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는데요. 아무래도 소설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각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들과 사건들이 택배 노동자, 다문화 가정의 아이, 노점상, 알코올중독자, 타워크레인 조종사, 고려 시대의 유랑족인 양수척족의 여성 등 사회의 소수자, 노동자들과 그들의 신산한 삶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등단부터 지금까지 10여 년 동안 선생님의 시선은 변하지 않고 항상 사회의 불편한 곳을 향하고 있는데요. 이는「꽃 땀」의 한 대목처럼 언제나 “지는 팀을 응원하는 서포터의 삶”을 떠오르게 합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을 선택하는 선생님의 기준과 철학이 궁금합니다.


하명희 : 무슨 단어가 좋을까요. ‘소외’보다는 ‘낙오’라고 할까요.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저는 자라면서 성공이나 무언가를 성취하고 싶은 욕망이 자연스럽게 거세된 같아요. 집도 아니고 방도 아니고 포장마차에서 자고 먹고 그랬으니까, 그게 뭔지, 그걸 어떻게 가질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죠. 리어카에 포장을 쳐서 포장마차가 되는 것처럼 간혹 그걸 가진다 해도 눈앞에서 금방 부서지고 빼앗기고 다시 리어카가 되는 걸 봐버렸거든요. 내가 자란 환경을 보면 저 또한 사회적 소외자, 낙오자일 수밖에 없지요. 그들은 일어서고 싶지만 일어설 수가 없어요. 방도 없고 돈도 없고 가족도 자꾸 없어졌다가 돌아오고, 또 폭력에 그만큼 노출되어 있고. 리어카에 도둑질한 철재를 숨기듯 살아가려면 법을 어길 수밖에 없거든요.


   왜 나는 이런 글만 쓰나, 생각해봤는데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의 저는 ‘낙오’를 선택한 걸지도 모르겠어요. 내가 낙오자이기 때문에 낙오자에 대해 쓸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런데 낙오한 삶이어도 어쨌든 살았단 말입니다. 여기 이렇게 있잖아요. 지금의 나를 증명할 단어들, 나를 형성했던 것들을 돌아보면 쓸쓸함, 슬픔 그런 것들인데, 나를 버티고 살게 만든 것은 성공을 향한 의지가 아니라 ‘슬픔을 슬픔이라고 말하고 싶은 의지’였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그러다 보니까 슬픈 게 좋더라고요. 슬프지도 않으면 사람은 사람이 아닌 것 같고. 자꾸 그런 것만 보이는 거죠.


김대현 : 소설을 통해 소수자의 삶을 재현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소설의 내용이나 형식이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소설의 소재로 소수자들을 재현할 때 피할 수 없는 소설의 윤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 이야기 되듯이 나는 혹시 타인이 겪는 고통을 미학적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닐까? 또는 나의 휴머니즘에서 시작된 재현이 그들을 연민의 대상으로 삼아 오히려 그들을 완전히 타자화시키는 것이 아닌가라는 물음이 그것입니다. 혹시 선생님께서 생각하는 사회적 소수자들과 그들을 소설로 재현하는 나름의 기준이 있으신지를 듣고 싶습니다.


하명희20190517_080542.png하명희 : 내가 그 안에 있으면 돼요. 그러면 타자화하지 않아도 그냥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상일 수밖에 없어요. 소설 속 인물들도 소외로 통칭되는 타자가 아니라 개별적인 사람이 되는 거고요.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많잖아요. 제가 소설의 윤리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모르는 것에 대한 접근이 없는 것, 다시 말하면 모르면 책을 보고 사람을 만나고 사건의 현장을 찾아가야 하는데 미리 내 사고로 재단해버리는 것을 경계하기는 합니다. 말씀하신 가난이나 고통을 소비하고 그들을 미학적으로 소설화하지 않으려면 우선은 내가 여과기가 되고 싶기는 해요. 그들 속에 있지만 정말 그런가 끊임없이 묻는 작업을 하는 것. 왜 그런지. 왜 그렇게 되어버렸는지. 그럴 때 제 기준이랄까 윤리랄까 하는 것은 “돌을 돌답게 하는 것이 상상력이다”라는 바슐라르의 문장을 적용해보는 겁니다. 내가 그를, 그들을 그답게 그렸나, 퇴고 과정에서 항상 그런 질문을 하게 되더라고요.


김대현 : 선생님의 소설을 읽다가 놀랐던 점은 평상시 독자들이 접하기 어려운 실제 삶의 현장들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불편한 온도」에서 한겨울 타워크레인에 쌓인 눈을 크레인을 조종해 처리하는 방법이라든가, 「그림자들의 강」에 나오는 포장마차에서 카바이드를 이용해 불을 피우는 장면들이 그렇습니다. 자전적 경험이나 심도 깊은 취재가 아니라면 관념적 사고만으로는 도저히 묘사할 수 없는 내용들입니다. 이러한 세밀한 묘사는 읽는 이들에게 소설 속 사건이 가지는 특수성을 지근적으로 체험하게 함으로써 소설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로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세밀한 묘사를 가능하게 하는 선생님의 문학적 원체험이나 특별히 기억에 남는 취재 후기 등을 듣고 싶습니다.


하명희 : 직접 만나기, 만나서 보기, 듣기, 그리고 이게 가장 중요할 것 같은데 버리기. 소설은 세부를 통해 사람이든 사건을 전달하기 때문에 현실의 질료들이 다 들어오기 전까지는 소설이 씌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불편한 온도」는 크레인 조종사를 만나고도 해결되지 않는 이런 세부들을 알고 싶어서 크레인 자격증 문제집을 풀었습니다. 크레인을 설치하고 해체할 때 조종사가 헤드에 앉아 로봇처럼 자기 팔다리를 끼워넣고 빼내고 한다는 거예요. 통계로는 최근 6년 동안 300여 명이 넘게 이 설치와 해체 과정에서 사망했어요. 사고가 아니라 사망이요. 이해가 되세요? 저는 들어도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책을 찾아봤는데 의외로 책이 없어서 크레인 자격증 문제집을 풀었죠. 그림도 그리고. 그러면서 취재하고도 1년 있다가 이야기가 만들어지더라고요. 그 1년 동안 버리는 작업을 해야 했던 것 같아요. 썼다가 버리는 것은 문장은 없지만 흔적은 남더라고요. 쓰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이 그걸 읽어줄 때 찌르르 하고 정말 좋았어요. 아, 소설에서 버리는 작업이 이래서 중요하구나. 저도 처음으로 쓰면서 실감했던 소설입니다.


   「그림자들의 강」은 자전적인 이야기인데요. 포장마차에서 살다 보니까 카바이드 돌 같은 경우는 나만의 특별한 경험으로 튀어나오더라고요. 돌이 물을 만났는데 불이 되네, 같은 것들. 노래에서처럼 카바이드가 나오는 포장마차는 80년대 노동자들이 쓴 소주에 시름을 달래던 곳이지만, 제게 포장마차는 생활의 공간이어서 냄새나는 돌에 불을 붙이는 저녁이면 하루가 시작되는, 그런 경험을 풀어내고 싶었고요. 또 그 돌이 막걸리에 들어가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 되는 것처럼 리어카에 포장을 씌우면 포장마차가 되고, 그런 포장마차들도 고향이 있다는 것, 그러니까 함부로 부셔질 수 없다는 것, 그런 것들이 다 제 주변의 소재들이었던 것 같아요.


김대현 : 선생님의 소설에는 빈곤과 폭력으로 점철된 불안한 가정의 모습이 종종 나타납니다. 가정폭력으로 한국인 남편에게 살해당한 베트남 여성과 그 자녀의 이야기를 다룬 「까막편지를 읽는 법」이나, 아빠의 폭력을 피해 달아난 엄마의 이야기가 있는「그림자들의 강」, 부인에 대한 폭력을 통해 자신의 결핍된 남성성을 보충하려는「늙은 물의 사랑은」들이 그렇습니다. 빈곤이라는 구조적 문제의 피해자들 사이에서 다시 젠더역학의 피해자로서 이중의 피해자인 여성들의 모습이 서늘하게 드러나 있는데요. 제가 선생님의 소설에서 주목하는 지점은 이러한 젠더역학을 다루는 방식이, 젠더의 차이를 도식화하여 피해자성과 가해자성을 강화하여 젠더의 차이를 부각시키는 최근의 주류적인 여성서사들과 결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점에 있습니다. 선생님의 소설에는 여성에 대한 가해자로서 남성이 사회 구조적으로 왜 그렇게 되었는가에 대한 과정이 충실히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라 생각되는데요.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문학이 젠더문제를 다루는 온당한 방식이 무엇인지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하명희 : 질문이 어렵지만 우선은 이해요. 기본적으로 이해를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가해와 피해의 도식적 사건이 되어버리고, 이것의 해결은 고발과 법적인 처벌이 되어버립니다. 문학은 모든 것을 법적으로 해결하면 끝나버리는 고발과 처벌에서, 나와 너가 다르다는 구분과 차별의 방식에서 벗어나는 숨구멍이지 않을까요. 문학은 어느 시대나 주류를 다루는 방식에서 끊임없이 예외가 있음을, 그것이 인간사임을 드러내는 작업이 아니었을까요. 그 틈에 구멍을 내고 틈이 틈이 아니게 되었을 때, 그땐 미련 없이 또 다른 틈을 찾아나서는 것이 문학의 운명이 아닐까요. 그래서 고독하고 개별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성을 회복해오지 않았을까요. 바틀비처럼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백 년도 넘게 외치잖아요. 문학이 그런 일을 해오지 않았다고 한다면 더 할 말이 없지만, 내가 몸에 익힌 문학은 분명히 그러했고, 지금 저는 그것을 내 방식대로 하나씩 풀어내는 중이라고 느껴요. 큰 줄기는 그렇습니다. 오해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만, 지금 문학장에서 젠더를 다루는 차별과 배제와 고발과 처벌의 방식은 제 방식은 아닌 것 같아요.


KakaoTalk_20160928_172353726.jpg김대현 : 그래서인지 몰라도 선생님의 소설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구사대로 활동하며 다른 노동자를 폭행했던 청년의 변화과정을 다룬 「목발」이나, 고려를 배경으로 유랑족 출신이지만 고관의 첩이 되어 동료 유랑민들을 자신의 노비로 삼은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눈의 집」, 부인을 폭행하는 알코올중독 남편의 이야기를 인터뷰 형식으로 담은 「늙은 물의 사랑은」등은 가해자의 처지에서 사건을 기술함으로써 그 동안 단순화되었던 가해자성에 대한 고착된 관념을 전도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는 가해자의 행위에 대한 변명의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왜 그렇게 되었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고찰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 해결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접근방식으로 생각됩니다. 누군가의 피해자이면서 누군가에게 동시에 가해자일 수 있는 인간이라는 복합적인 존재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하명희 : 한 사람 안에 있는 가해와 피해의 양상을 통해 ‘그 사람’을 보여주고 싶은데 아직도 멀었습니다. 현대소설은 개별적 인간, 즉 ‘사람’을 다룹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사람’, 여성이냐 남성이냐가 아니라 그 사람에 더 집중하고 갈등하고 싶어요. 아시잖아요. 사람 하나를 이해하는 것은 우주를 이해하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이해할 수도 없어요. 다만 글 쓰는 사람으로 저의 자세는 그것에 다가가보려고 애써보는 것, 이렇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해보는 것, 결국에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가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김대현 : 앞서의 물음과 연결되는 질문일 것 같은데요 사회 시스템이 점점 복잡해짐에 따라 이전의 도식으로는 쉽게 해명될 수 없는 많은 사회적 관계들이 형성되었습니다. 예컨대 프랜차이즈 가맹점에 대해 착취를 당하는 약자인 가맹점주가 그보다 더 약자인 아르바이트 노동자를 착취하거나, 그 노동자가 다른 감정노동자들에게 갑질을 하는 등 가해와 피해의 관계가 일방향이 아닌 상호 교차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손을 잡는 대신 서로를 피해 각자의 공간에서 고립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약자들의 연대가 불가능해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선생님의 작품들에서도 각 등장인물들이 사회적 약자임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성과 피해자성을 동시에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불편한 온도」에서 정혜언니의 가르침을 빌어 “혼자서는 어쩔 수 없는 일들도 같이 하면 바꿀 수 있는 거”라는 연대의 힘을 신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날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연대의 가능성과 그 방식에 대해 생각하시는 부분이 있다면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하명희 : 「불편한 온도」의 미주가 내게 특별한 인물이 된 것은 딱 한 발짝을 더 가본 것이에요. 정혜 언니의 죽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인물이 외로움이나 쓸쓸함을 그것 자체로 발음할 수 있게 되기까지, 그것을 받아들인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 딱 한 발짝의 변화가 있지 않을까. 체불된 임금을 받지 못하고 크레인에 올라온 아저씨를 허공에 두고 혼자 내려올 수 없어서 고민이 시작된 거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같이 내려가자, 내려가서 밥 먹자, 할 수 있는 힘은 뭔가 대단한 의지와 용기가 작동하지 않더라도 행동을 요구하니까요. 어떻게 할 거니? 같은 거요. 그 이후엔 미주의 세계가 굳이 ‘연대’라는 단어를 붙이지 않아도 그 전과 다른 방식으로 갈 거라고 생각했어요. 크레인이 춤을 추는 것처럼 스스로를 움직이는 힘인 ‘행동(行動)’이란 그 한 발짝 때문에 사고(思考)의 춤, 마음의 연대가 될 수 있는 거죠. 이전과는 다른 것들이 생겨버리니까.


김대현 : 선생님의 소설은 내용도 중요하지만 형식에 대한 고민도 놓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배경에 대한 묘사들이 인상 깊었는데요. 특히「목발」에서 구사대에 속했던 청년이 열쇠를 잃어버리고 일종의 패닉 상태에서 열쇠집을 찾기 위해 동네의 풍경을 가게의 이름으로 묘사하는 모습이 특별했습니다. 마치 왕가위 영화처럼 서사의 프레임이 고정되지 않고 모호한 시공간 속에서 불안정하게 부유하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또한 「저녁의 목소리」는 마치 시와 희곡이 결합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명사구로 끝나는 간결한 묘사와 산문임에도 불구하고 운문의 특성을 가지는 문장들, 예컨대 ‘저녁이 반짝인다’, ‘저녁이 굴러간다.’ ‘저녁이 들썩인다.’처럼 문장 하나하나가 은유 속에서 리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묘사들이 나타나는 배경과 소설의 형식에 대해 선생님께서 고민하는 지점을 듣고 싶습니다.


하명희 : 「목발」의 공간은 제가 살고 있는 동네에요. 양말공장이 사라지고 그 자리가 공터가 되었는데, 매번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더라고요. 벽에 스프레이로 낙서가 씌어진달지 며칠 후에 가보면 그 낙서에 또 다른 낙서가 덧씌워져 있고. 길도 수시로 바뀌는데 외국인 노동자들이 거주하면서 낯선 가게가 들어서고 간판이 바뀌듯 무언가 계속 바뀌고요. 그 속도랄지 변화에 절뚝거리면서 걸어야 하는 목발을 짚은 인물이 떠올랐어요. 그 속도의 가해자이면서 노동 환경 변화의 피해자로. 왕가위 영화의 부유하는 느낌이라고 해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그 속도와 변화를 기록하고 싶었거든요. 열쇠를 잃어버려야 그 궤도에서 일탈해서 뒤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저녁의 목소리」는 ‘이야기가 없는 소설도 소설이 될까’를 고민할 때 썼어요. 유령이 나타나는 시간이 저한테는 저녁이거든요. 제가 보는 유령은 살면서 만나고 싶지만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인데 저녁이면 그 관계나 상황들로 들어가고 싶더라고요. 그 사람들은 가까운 죽음이기도 하고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실종이기도 한데요. 저녁만 되면 그런 것들이 떠올라요. 그러면 유령의 시간인 저녁을 써보자 싶었지요. 그러다 보니 유령을 따라서 이야기가 해체되더라고요. 더 재밌는 건 유령의 문체는 명사형의 시가 되더라고요. 서로 대화를 하는 게 아니니까 이미지를 보여주게 되고요. 누군가 살구가 굴러다니는 산문시 같다고 해주셨는데, 딱 그렇게 써보고 싶었어요.


김대현 : 선생님의 소설을 읽다보면 일상에서 자주 사용되지 않는 고유어들, 예컨대 ‘곤두기침’, ‘발탄강아지’, ‘애줄없이’ 같이 사전을 찾지 않으면 익숙하게 해석되지 않는 단어들이 풍성하게 나타납니다. 이러한 낯선 고유어의 사용은 문학을 통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폭을 넓히고 사유의 경계를 확장하는 장점이 있지만, 소설에 사용될 경우 읽는 이로 하여금 온전히 서사에 몰입하는 과정을 지연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소설의 언어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하명희 : 대학교 때 최인훈 선생님 수업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소설 창작 시간인데도 선생님은 우리에게 소설 강독을 시키셨어요. 그때 월북 작가들의 작품이 해금되어서 막 출판이 되었던 때인데 이태준 전집을 강독 텍스트로 정하고 단편들을 수업 시간에 한 편씩 읽어나가는 거였거든요. 선생님의 주문은 모르는 단어는 무조건 찾아와라. 그거 하나였어요. 그때는 강독도 단어 찾는 것도 별로 재미없었거든요. 왜 소설 창작 시간에 합평도 아니고 이런 걸 해야 하나.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그게 남더라고요. 그때 제가 단어장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후에 편집 일을 하면서 그 단어장이 더 채워졌고요. 지금은 한 권 분량의 저만 보는 소설 사전이 만들어졌습니다.


   문제는 그 단어들이 대부분 현재는 쓰지 않는 사어(死語)라는 점인데요. 동사들은 죽었어도 명사나 부사, 형용사들은 되살리고 싶은 단어들이 많아요. 굳이 문장으로 쓰지 않아도 단어 하나로 해결되는 것들. 요즘 유행어로 ‘쓰담쓰담’ 같은 단어가 어떤 상태와 행동을 다 담고 있는 것처럼 발밤발밤 내려앉다, 비거스렁이를 하다, 왝댁거리고 가난살이가 뚝뚝 떨어지다…. 제 세대는 이 단어들을 쓸 수 있는 인물들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소설에 노인이 나올 때는 단어장을 활용할 수 있어서 신나요. 최인훈 선생님은 소설 창작에 대해 이런 걸 알려주신 것 같아요. 소설이란 단어 하나도 신중하게 고르고 절약해서 써야 한다. 그런 문장이 모여서 소설이 된다. 소설에 대한 어떤 큰 명구보다 선생님의 교수법이 저한테는 훨씬 큰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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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현 : 이번에는 『나무에게서 온 편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이 소설은 선생님의 첫 번째 장편소설입니다. 전교조 창립 시기에 해직된 교사들과 이에 반발하여 학생운동에 투신하는 고등학생들의 이야기, 이른바 ‘고운’을 다룬 소설인데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저 또한 그 시기에 중,고등학교를 다녀서인지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만 그렇게 깊은 사연을 가진 고등학생 선배들의 이야기는 처음 접하는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선생님께서 당시 고운에 참여하게 되었던 동기와 고운의 활동 내용을 들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명희 : 직접 봤으니까요. 저는 선생님들이 해직되고 학교에서 쫓겨나는 것을 눈앞에서 직접 본 세대입니다. 그럴 때 나에게 묻게 되지요. 이게 뭘까, 인간화 교육 하자는 게 뭐가 잘못됐지? 왜 선생님들이 쫓겨나야 하지? 그 시기에 그런 질문들을 해본 거지요. 그 다음은 소설에서처럼 친구들을 만나고 고민을 나누고 또 행동을 하게 되었던 거구요. 그런데 그 경험이 왜 이렇게 사회화되지 않았을까, 가라앉아 있을까, 각자의 경험으로 숨어 있을까… 소설을 쓰면서 그것이 가장 궁금했었는데요. 제가 찾은 답은 1991년 봄, 그러니까 ‘자살정국’이라고 불렸던 그 봄이 너무 아픈 사회적 경험이었구나 싶더라구요. 단 두 달간 13명이 국가 공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그것을 알리기 위해 스스로 몸을 던진 그들에 대해 충분히 애도할 만한 공동의 시간이 없었다고 느꼈어요. 당시 전교조 해직 교사가 1,500여 명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각 학교별로 선생님을 돌려달라고 스스로를 조직했던 학생들은 그 열 배는 될 거예요. 그들은 학교에서 퇴학, 정학 등 징계를 감수했고요. 고운 세대라고 불리는 그들의 경험이 문학작품으로 나올 만도 한데 기다려도 안 나오길래 제가 쓴 거죠. 아마 세월호의 아이들이 자라면 그들이 직접 보고 겪은 2014년을 기록하게 될 겁니다. 너무 늦었지만 저도 그런 의미에서 1991년 봄을 끄집어내는 작업을 해야 했던 것 같아요.


김대현 : 묻고 싶은 것은 더 많은데 지면의 한계상 이제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현 시점에서 가장 궁금한 것은 다음 작품일 텐데요. 독자들을 위해 혹시 앞으로 나올 작품에 대해 간단한 소개나 현재 구상하고 있는 내용에 대한 간단한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하명희 : 몇 년 전부터 30매 내외의 짧은소설을 연재하면서 한 달에 한 편씩 소설을 썼거든요. 요즘에는 단편소설 한 편을 한 자리에서 읽는 것이 힘들다고 그러잖아요. 예전엔 엽편소설이라고 했고, 최근엔 초단편, 스마트소설이라고도 하던데, 저는 외려 기존의 단편소설이 너무 길이에 제한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길이가 자유로운 단편소설집을 묶으려고요.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순간들, 사건들이라 읽다가 덮어도 되고 아무 쪽이나 펴서 읽을 수 있는 소설집이었으면 해요. 무겁기도 하고 찌질하고 웃기기도 하고 또 슬프기도 한 이야기가 한데 묶이면 좋겠다 싶어서요.


   또 하나는 「그림자들의 강」을 쓰면서 내 고향이 서울이구나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는데요. 하도 서울 이곳저곳을 돌아다녀서 그동안 저는 고향이 어디라고 말할 수가 없었거든요. 고향 있는 사람이 그렇게 부럽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에는 서울 곳곳을 돌아다닙니다. 워낙 서울이 유튜브 같은 곳이어서 팍팍 바뀌고 있기는 하지만 터를 잡고 사는 사람들의 기억은 남아 있으니까요. 소설 연작 형식으로 서울 사람들 이야기를 한 편씩 쓰려고 합니다.


김대현 :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자유롭게 말씀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긴 시간동안 답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에 다시 기회가 되면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하명희 : 김대현 선생님의 『당신의 징표-이름의 존재론과 성(姓)의 정치학』을 읽었거든요. 그때 깜짝 놀랐어요. 글 쓰는 사람들도 다들 대학에 자리를 잡고 안정적인 지원이랄까 그런 것들을 추구하는 때에 선생님은 인문의 지평을 넓히는 작업을 하셨더라고요. 그 책에서 ‘이름’이라는 징표를 문화사회학적으로, 또 인류학적인 접근으로 풀어내셨는데, 특히 여자들이 자신이 거처하는 집(방)이나 출신 지역의 이름으로 불린 예들을 읽는데 너무 즐거웠어요. 사임당이나 난설헌, 혜경궁 홍씨 등이 그들이 거처한 작은 집의 이름을 쓴다는 걸 알면서도 그걸 ‘자기만의 방’으로 연결시키진 못했거든요.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했던 버지니아 울프만 알고 있었던 거죠. 그런 발견이 자극이 되더라고요. 사고를 깨고 질문을 던지는 작업들. 그건 호기심을 가지고 있어야 할 수 있다는 걸 선생님 책을 보면서도 느꼈습니다. 저도 꾸준히 그런 작업들을 해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앞서 선생님이 짚어주신 문제들이 결코 쉬운 질문들이 아닌데 〈문화 다〉를 통해 이런 이야기를 고민해보고 나눌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웹진 <문화 다> 2019. 5월)

 

http://www.munhwada.net/home/m_view.php?ps_db=power_interview&ps_boid=47

출처 : 뉴스페이퍼(http://www.news-pap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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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19-05-23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봐야겠어요.

돌바람 2019-07-22 14:33   좋아요 0 | URL
너무 늦었네요. 고맙습니다^^
 

제22회 한국가톨릭문학상 시상식

본상 이승하 시인, 신인상 하명희 소설가 수상

발행일2019-05-19 [제3145호, 1면]    

5월 9일 열린 제22회 한국가톨릭문학상 시상식에서 본상 이승하 시인(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신인상 하명희 소설가(이 시인 오른쪽)와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대주교(이 시인 왼쪽), 손태승 우리은행장(하 소설가 오른쪽) 등 관계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사진 이승훈 기자

가톨릭신문사(사장 이기수 신부)가 주최하고 우리은행(은행장 손태승)이 후원하는 제22회 한국가톨릭문학상 시상식이 5월 9일 오후 4시 서울 회현동 우리은행 본점 5층 강당에서 열렸다.

본상은 「나무 앞에서의 기도」를 쓴 이승하(프란치스코) 시인, 신인상은 「불편한 온도」를 쓴 하명희 소설가에게 돌아갔다.

생명체에 대한 연민과 따뜻한 사랑이 관류하는 이승하 시인의 시들은 문학적 형상화가 뛰어다나는 평을 받으며 본상의 영예를 안았다. 시적 주제들이 가톨릭 신앙과 깊숙이 연결된다는 점도 높이 평가됐다. 소외된 이들의 현실을 가감 없이 담아낸 하명희 소설가의 「불편한 온도」는 구원 의식을 주제로 삼고 있어 향후 문단 전체에 좋은 모범이 될 수 있다고 심사위원은 평가했다. 심사에는 구중서 문학평론가, 신달자 시인, 이태수 시인이 참여했다.

두 작가의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 시상식을 찾은 조환길 대주교(대구대교구장)는 “오늘 수상한 두 작품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태계가 처한 어려움과 연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는 종교가 가져야 할 자세이기도 하다”라며 “종교가 건드리기 쉽지 않은 인간 내면의 심성을 문학으로 표현하고, 생에 대한 가치를 높여준 것에 대해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가톨릭문학상이 걸어온 22년의 시간동안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과 후원사인 우리은행에 감사드리며 두 분의 수상자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하길 기도한다”고 전했다.

한국가톨릭문학상 운영위원장 이기수 신부는 인사말을 통해 “물질주의가 만연한 시대에 생명과 사랑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신 두 분 작가님께 감사와 축하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한국가톨릭문학상 후원사인 우리은행의 손태승 은행장은 “기쁨, 행복, 사랑 등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은 모두 공짜라고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얻기 위해서 용기라는 대가가 필요하다”며 “이번 한국가톨릭문학상 수상작을 비롯해 많은 문인들의 작품들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들을 얻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해주는 마음의 양식이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

 

제22회 한국가톨릭문학상 시상식

고통 받는 생명을 위한 교회의 사명 일깨우다

● 운영위원장 이기수 신부
“물질주의 만연한 이 시대에 생명과 사랑의 중요성 언급”
● 본상 이승하 시인
“큰 상 받았다고 자만하지 않고 낮은 자세로 시에 정진할 것”
● 신인상 하명희 소설가
“고통의 호소 담은 책으로 수상 믿음과 격려 주신 데 감사”

발행일2019-05-19 [제3145호, 11면]

제22회 한국가톨릭문학상 시상식은 고통 받는 존재들을 감싸안는 교회 노력이 절실함을 다시금 깨닫는 장이었다.

가톨릭신문사(사장 이기수 신부)가 주최한 이번 시상식은 5월 9일 오후 4시 서울 회현동 우리은행 본점 5층 강당에서 열렸다. 본상은 「나무 앞에서의 기도」를 쓴 이승하 시인이, 신인상은 「불편한 온도」를 쓴 하명희 소설가가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이날 시상식은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대주교, 가톨릭신문 사장 이기수 신부, 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 사장 조정래 신부, 손태승 우리은행장, 이광복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등 내빈을 비롯한 관계자 100여 명이 참석해 두 작가의 수상을 축하했다.


■ 교회와 사회 등불 되는 가톨릭 문학

◎… 가톨릭신문사 사장이자 가톨릭문학상 운영위원장인 이기수 신부는 “매년 신록이 푸르른 아름다운 시기에 한국가톨릭문학상 시상식을 개최할 수 있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린다”고 시상식의 문을 열었다. 이어 “오늘 영예의 본상을 수상하신 시인 이승하 님, 신인상을 수상하신 소설가 하명희 님은 각자 작품을 통해 생명에 대한 연민과 사랑, 소외된 이웃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강조하고 있다”며 “물질주의가 만연한 시대에 생명과 사랑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신 두 분 작가님께 감사와 축하의 말씀을 드린다”고 전했다.

22년을 이어온 한국가톨릭문학상의 미래에 대한 다짐도 덧붙였다. 이 신부는 “앞으로도 가톨릭신문사는 우리은행과 함께 한국가톨릭문학상의 위상을 키우며 이 세상에 평화를 널리 전하는데 힘쓸 것을 다짐한다”며 “한국가톨릭문학상이 더 큰 열매를 맺어 우리 사회를 밝힐 수 있는 더 큰 등불이 될 수 있도록 여러분의 관심과 후원을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 본상을 수상한 이승하(프란치스코) 시인은 ‘폭력과 광기가 사라진 세상을 향한 희망’에 대한 이야기로 수상소감을 시작했다. 그는 “주먹으로 때리는 것만이 폭력이 아니다”라며 “무단 방류하는 산업 폐기물, 남벌, 어류 남획도 모두 폭력이며 저는 이러한 것들이 사라졌으면 하는 간절한 기도를 담아 시집「나무 앞에서의 기도」를 펴냈다”고 말했다.

이어 “큰 상을 받으면 시세계가 약화되는 경우가 있는데 저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각오로 더욱 정진하겠다”며 “제 자신을 높이지 않고 시를 쓰면서 자세를 낮추겠다”는 다짐의 말도 덧붙였다.


◎… 수상소감을 말하기 위해 단상에 오른 하명희 소설가는 “적어도 문학이란 슬픔을 슬픔이라고 온전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제 소설집 「불편한 온도」는 우리는 왜 슬픈데 슬프다고 말할 수 없나, 왜 이렇게 이해되는 것이 어려울까라는 각자의 호소들을 담아낸 결과물”이라고 말했다.

등단 10년 만에 신인상을 수상한 하명희 소설가는 앞으로 소설가로서 정진하겠다는 각오도 밝혔다. 그는 “소설을 쓰면서 지치고 회의가 들 때면 오늘 주신 이상을 꺼내 한 번씩 쓰다듬도록 하겠다”며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강력한 믿음과 격려의 손을 얹어주신 심사위원들께 깊이 감사드린다”고 전했다.


■ 교회 안팎의 축하 인사

◎… 이날 시상식에는 교회 안팎의 인사들과 가톨릭 문인회 회원 등 저명한 문인들, 역대 수상자들이 함께 했다. 한국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박명(토마스 아퀴나스) 사무총장은 축하연 건배사를 통해 “지금을 살아가는 평신도들이 활동을 할 수 있는 자양분을 책을 통해 전해주는 이번 가톨릭문학상 수상자를 비롯한 가톨릭문인회 회원들에게 감사를 전한다”고 말했다. 이어 박 사무총장은 “22년 동안 한국가톨릭문학상을 꾸려오면서 책과 문학을 통해 성숙한 신앙생활을 돕는 가톨릭신문사와 우리은행에 감사드린다”고 덧붙였다.


◎… 한국문인협회 이광복(프란치스코) 이사장은 “22회를 이어온 한국가톨릭문학상은 가톨릭의 이념을 살리고 있어 더욱 의미 있는 상”이라며 “이번에 수상한 이승하 시인과 하명희 소설가가 주님 안에서 큰 은총을 받으며 더욱 활발히 글을 쓰길 바란다”고 말했다.

20회 수상자인 이인평(아우구스티노) 시인은 “올해 좋은 작품이 한국가톨릭문학상에 뽑혀 더욱 뜻깊은 시상식이 된 것 같다”면서 “수상자들의 문학정신이 담긴 작품집이 말하고자 하는 밝고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우리 모두 힘써야 할 것”이라고 격려했다.
하 소설가의 딸 유지원(18)양은 “옆에서 엄마를 통해 세상의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울 수 있어 좋았다”면서 “너무 멋있는 엄마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대주교(왼쪽)가 이승하 시인에게 본상을 시상하고 있다.

손태승 우리은행장(왼쪽)이 하명희 소설가에게 신인상을 시상하고 있다.



5월 9일 열린 제22회 한국가톨릭문학상 시상식에서 참석자들이 기도를 바치고 있다.



시상식이 끝난 뒤 참석자들이 축하떡을 자르고 있다. 가톨릭신문사 사장 이기수 신부, 신달자 시인,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대주교, 본상 수상자 이승하 시인, 신인상 수상자 하명희 소설가, 구중서 문학평론가, 이태수 시인, 한국평협 박명 사무총장.(왼쪽부터)



이승하 시인(왼쪽)이 조환길 대주교에게 본상 수상작 「나무 앞에서의 기도」를 선물하고 있다.



시상식이 끝난 뒤 한국가톨릭문인회 회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
사진 이승훈·성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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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9-05-19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수상소감도 아주 멋있어요 ^^

돌바람 2019-05-19 14:07   좋아요 0 | URL
아이고, 고맙습니다 하이네님! ^^

잉크냄새 2019-05-23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축하드려요.
 

카바이드 불빛에 어른거리는 노동과 사랑 이야기

 

 

복도훈

 

 

 

    바람이 많이 불던 2017년 겨울 어느 날, 동갑내기 소설가 하명희를 처음 만났다. 91년 5월에 대한 귀한 문학적 증언이자 아름다운 성장소설인 『나무에게서 온 편지』(사회평론, 2014)를 벅찬 마음으로 읽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그와 나는 새벽이 되도록 조그만 술집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나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고3 시절, 91년 5월의 진귀하고도 드문 경험을 나직한 목소리로 하나씩 들려줬다. 나는 괜히 부끄러웠고, 즐거웠으며, 그의 소설이 더 읽고 싶어졌다. 얼마 후 나는 소설집 『불편한 온도』(강, 2018)에 실린 원고 묶음을 받았고, 즉시 그 자리에서 읽기 시작했다. 철거, 택배, 고공 농성, 트럭, 크레인, 양말 공장, 밤섬, 한강, 포장마차 리어카, 카바이드 막걸리. 하명희의 소설에서 만날 수 있는 단어들. 우리 삶과 노동현장 가장 밑바닥에 있거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체취 어리고 숨결 가득한 소재들. 하지만 적어도 70년대 이후에 출생한 한국 작가의 소설에서는 어느새 자취를 감췄는지 좀처럼 만나기 힘들게 된 단어들. 그 단어들은 불편하다. 그러나 푸른 카바이드 불빛의 추억과 사람의 온기가 부드럽게 감싸고 있다. 『불편한 온도』 곳곳에는 고단한 노동의 자취들이 언어의 근육에 단단히 배어 있다. 마냥 고달프거나 팍팍하지는 않고, 저녁처럼 안온하고 아늑하다. 하명희의 소설은 백반집에서 함께 밥을 먹는 남녀 노동자의 간절한 연대를 이야기하고, 저녁에 함께 걷고 싶은 연인들의 애달픈 그리움을 묘사한다. 밥의 연대와 살의 그리움, 파업현장과 살아온 날들에 대한 추억 모두 살림살이의 이치다. 그리하여 『불편한 온도』는 "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땅에서 자신의 온도를 생성하는" 범의귀라는 꽃을 닮았다. 하명희의 소설은 단단하면서도 따뜻한 리얼리즘의 성취다.

 

    소설집에는 절반 분량 못 미치게 실렸지만 『불편한 온도』의 추천사로 쓴 글을 다시 읽고 조금 다듬었다. 추천사를 적을 당시 내 생각은 이랬다. 한국 소설에서 노동, 계급, 가난의 문제를 재현하는 소설은 최근 들어 거의 증발된 것은 아닌가. 이런 직감적인 반문은 무수히 날아들 반박의 돌팔매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런데 만일 내게 날아올 돌팔매가 나 혼자만의 환영(幻影)에 불과했다면. 하명희의 『불편한 온도』를 처음 읽었던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읽은 한국의 무수한 중단편에서 노동, 계급, 가난의 문제를 재현한 작가의 목소리를 듣기란 쉽지 않았다. 마침 《문장 웹진》에서 내게 청탁이 왔고, 나는 망설임 없이 소설가에게 연락했다. 『불편한 온도』를 출간하고 나서 그는 바쁜 것 같았다. 소설가는 올해 1~2월에 『나무에게서 온 편지』에도 등장하는 성균관대 앞의 풀무질 서점에서 근무했다. 그는 조만간 출간될 두 번째 소설집 『고요는 어디 있나요』(2019, 근간) 원고 파일을 내게 보내줬다. 원고지 30매 내외의 짧은 단편과 다른 단편 모음집이었다. 여전히 소설의 목소리는 소설가의 목소리만큼이나 나직하고, 차분하고, 단단했다.

 

복도훈 : 2월에 풀무질 서점에서 만났는데, 그새 두 달이 지났다. 잘 지냈나?

 

하명희 : 올해 초에 33년 동안 성균관대 앞에 있었던 인문사회과학서점 풀무질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듣고 고민하다 그곳에 오는 사람들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매일 출퇴근을 했다. 소설에도 '물고기의 집'으로 등장하는 이 서점이 내겐 책과 사람들을 만난 특별한 공간이어서 가만있을 수가 없더라. 지금은 새 단편집 교정 중이어서 조금 바빴다.

복도훈 : 정말 부지런하다. 바로 작품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가도 되겠다. 『불편한 온도』에 실린 중편 「그림자들의 강」에는 소설가의 자전적 삶의 흔적이 짙게 배어 있다. 어린 시절에 푸른 불빛을 내는 카바이드 막걸리 제조 과정을 곁에서 어렴풋이 보았던 기억이 나서 그 부분을 특히 재미있게 읽었다. 이 에피소드는 『나무에게서 온 편지』의 엄마의 포장마차 에피소드에서도 반복된다. 뭐랄까, 바슐라르적인 원형의 불꽃이 어머니가 포장마차로 생계를 꾸리던 노동현장과 만난다고나 할까. 포장마차 한구석에서 부글부글 끓던 카바이드 이야기를 더 들려 달라.

 

    "그동안 모아놓은 몸속의 불덩이가 녹고 있었다. 한강에 던졌던 카바이드가 이제야 끓어오르며 섬을 들어 올린 것일까. 아빠는 그곳에 있을까. 리어카 배를 타고 풀등으로 갔을까.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우리가 가져 보지 못한 불탄 집도, 오빠가 불태운 꽃들의 집도, 갈아엎어진 할머니의 파밭도, 할아버지의 늙은 배들까지 모두 싣고 덤블링을 하듯 강물 위로 몸을 던져 떠오른 그것은, 그림자들의 강이 지어놓은 한 채의 집이었다."(하명희, 「그림자들의 강」, 『불편한 온도』, 152쪽)

 

 

하명희 : 푸른 불꽃의 카바이드, 그건 내게 늘 같은 자리로 되돌아오게 하는 원형 이미지 같다. 서울이 고향이지만 하도 이곳저곳 떠돌아다녀서 그동안 나는 내 고향이 어디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떠돌아다니면서도 그 카바이드 불빛이 있던 곳, 하면 그 주변에 한강이 있었지, 경마장이 있었지 하는 식으로 기억이 떠오르더라. 그런 곳이 고향 아닐까. 우습지만 소설을 쓰면서 내 고향이 여기구나 각인된 것 같다. 내가 몰랐던 고향(시공간)이랄까. 내가 잉태된 곳이 어디인가, 찾아 올라가다 보면 어릴 때 야반도주를 했던 발산동, 중학교 때까지는 한강변, 고등학교 시절은 명동이었다. 찾아가면 머무르는 곳, 기억의 자리, 추억의 자리다. 문학이 만들어지는 곳이다. 나중에 바슐라르 책을 읽으면서 '칸델라' 불빛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참으로 신비한 불빛이 아닌가. 돌이 물을 만났는데 불이 되네? 꽃같이 생긴.

복도훈 : 재밌다. 카바이드 돌이 불이 되고 별이 되고 꽃처럼 피는 과정을 좀 더 이야기해 달라.

하명희 : 카바이드를 화분 같은 통에 넣고 그 위에 촛대가 달린 뚜껑을 덮는다. 그리고 그걸 좀 더 큰 화분 같은 통에 넣고 물을 부으면 삼투압으로 천천히 물이 돌에 스미면서 촛대 끝으로 가스가 분출된다. 피이익 푹 하는 가스 소리가 나면, 그때 불을 붙여 점화한다. 여기에는 카바이드 돌(흙), 물, 가스(공기), 불, 4원소가 다 있다. 우주의 원리 같지 않나? 점화하는 순간 불이 되는 것이니까, 그 순간에 카바이드는 별이 된다. 그것도 멀리 있는 별이 아니라 눈앞에서 내가 별의 탄생과 소멸을 직접 보는 거다. 가까이 있으니까 그 별에서는 소리도 나고 냄새도 난다. 그래서 내게 카바이드는 '냄새나는 돌'이다. 그건 허기를 채워 주는 냄새였다. 연탄가스나 부탄가스에서 나는 아찔한 냄새. 어린 시절 나는 늘 배가 고팠는데, 그 냄새들을 맡으면 거짓말처럼 허기가 달래졌다. 나만 알고 있는 연금술 제조랄까. 누군가 내 소설이 가난하고 아픈 이야기인데도 따뜻하다고 했는데 그건 분명히 그 카바이드 불꽃이 어떤 좌표처럼 내가 옮겨간 곳마다 빛을 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별은 멀리 있지만 내가 별을 만든 거니까, 그건 내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또 별의 냄새도 맡아 봤으니까. 「그림자들의 강」의 모티프는 그 불빛으로부터 생겨난 것 같다. 그 불빛이 있는 포장마차가 내게는 별을 만드는 신기한 공간이었다.

 

    『나무에게서 온 편지』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 장편소설이다. 소설의 2/3는 노동, 가난 등 삶의 조건에 대해 아프게 눈뜨는 성장소설이다. 소설의 나머지 1/3은 91년 5월의 무수한 젊음의 죽음, 고등학생들의 운동조직 '고운'의 결성과 해산, 친구들(동지들)과의 이별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두 개의 이야기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 5월 투쟁에 뛰어들었던 고등학생들, 해고된 전교조 교사를 응원하는 학생들, 문건을 복사하고, 금지된 책들을 읽고, 서점에 들르고, 뜻을 같이하는 고등학생들과 대학생이 만나는 이야기들은 주인공 도은의 성장서사 속에서 자연히 녹아 들어간다. 아주 잠깐이지만 타자기를 갖고 싶어 하면서 노트에 시와 산문을 끄적거리는 예비 작가의 초상과 함께 컴퓨터가 처음 상용화되고 일본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가 불법복제물로 유통되던 90년대 초반의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분위기, 이른바 '우체국근대화'(273쪽)도 언급된다.

 

복도훈 : 바슐라르 할아버지가 포장마차 손님으로 카바이드 불빛을 보면 꼭 하명희 작가와 똑같은 이야기를 할 것만 같다. 자, 계속하겠다. 내겐 「그림자들의 강」의 후속편이 장편소설 『나무에게서 온 편지』였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되는 1991년, 나는 고3 입시생이었다. 소설의 주인공으로 91년 5월을 온몸으로 통과한 고3 '도은'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자전적인 것이라면, 하명희 작가는 그해 고3들과는 전혀 다른 고3을 보낸 셈이다. 내게는 함께 방을 쓰던 하숙집 아들인 대학생 형의 옷에서 나던 최루탄, 막걸리, 등사지 냄새로 어지럽게 기억되던 5월이었다. 그런데 다시 읽은 이 소설에서 재미있는 표현을 발견했다. 처음 읽을 때는 91년 5월의 이야기에만 집중했는데, 타자기를 갖고 싶어 했던 도은의 소망, 포스트모더니즘, 도스 운영체제 컴퓨터, 〈천공의 성 라퓨타〉 이야기도 조금 있었다. 이번에는 오히려 그게 흥미롭게 읽혔다.

하명희 : 실제로 「그림자들의 강」을 『나무에게서 온 편지』보다 먼저 썼다. 그걸 알아채 주셔서 감사하다. 생각해 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신기한 단어였다. 그것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같은 이념이나 사상으로 전달된 것이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외래종 단어로 쑥 들어왔다.

복도훈 : 포스트모더니즘이 '우체국근대화'라니······.

 

하명희 : post(우체국)-modernism(근대화)! 컴퓨터로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시대가 온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그게 어떤 걸지 상상이 안 되었다. 책이 아니라 컴퓨터로 시를 읽는다는 것이 상상이 안 되었던 것처럼. 당시에는 세계의 변화를 담은 단어가 포스트모던이었고 상상할 수 없는 세계를 현실과 접목하면서 내 식으로 이해한 해석이 우체국근대화였다. 『나무에게서 온 편지』를 읽은 주변 분들이 소설에서 웃을 곳이 별로 없는데 그 대목에서는 많이 웃었다고 하더라.

복도훈 : 아하. 나로서는 첨 듣는 얘기다. 91년도는 5월로 우선 기억되겠지만,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된 다른 문화적 경험이 더 없었나?

하명희 : 컴퓨터의 등장, 당시 인터넷이라는 건 상상도 못 했고. 조금 지나 외국 영화가 봇물 터지듯이 쏟아졌고, 여행 자유화 덕에 대학생들의 유럽 배낭여행이 유행이었다. 그중에 음악은 큰 충격이었다. 91년도부터 알려진 서태지와 아이들. 95년 노래이지만, 〈컴백 홈〉을 봐라. 이 노래를 들었던 가출 청소년들이 집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서태지 현상은 그랬던 것 같다. 노래 하나의 힘, 그게 아마 문화라고 새겼던 것 같은데, 그 노래가 가두투쟁과 같은 사회적 투쟁 이상으로 힘이 있다는 것. 그것이 놀라웠다. 우리가 그토록 바꾸려고 했던 교육 문제를 다른 문화적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복도훈 : 작가적 원체험이자 현실과 역사로 넓어져 가는 이야기인데, 91년 5월은 하명희 작가에게 무엇일까? 너무 큰 질문인가?

하명희 : 아니다. 소설에 나오는 한 단어로 이야기할 수 있다. '패륜아'. 청소년기는 가족, 학교 선생님 등과 맺는 사회적 관계가 시작되는 때인데, 그때 나는 가족도, 사회도, 국가도 버리고 싶었다. 누가 나를 보호해 주지 못할 때, 대변해 주지 못할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국가의 도덕으로부터, 가정의 굴레로부터, 학교의 제도로부터 벗어나려는 자기 선언, 이것이 패륜아다. 사회가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낙인찍은 그 이름을 우리는 저항의 이름으로 사용한 것이다.

 

    "아무도 책임져 주지 않는 삶, 우리는 그것을 책임지기 위해 노력했고, 싸웠고, 밟혔고, 종국에는 패륜아가 되었다. 패륜아란 단어를 너무 많이 듣다 보니 패륜아는 방랑자처럼 고독하고 자유로운 떠돌이로 느껴지기도 했다."(『나무에게서 온 편지』, 276쪽)
    "도은은 아름다운 것을 꿈꾸던 슬픈 물고기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들은 외치고 있었다. 그래, 우리는 패륜아들이다. 우리에게는 영혼이 없다. 영혼이 없는 자들은 신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당신들의 나라에서 쫓겨난 우리들은, 너희들을 인정할 수 없는, 패륜아들이다."(『나무에게서 온 편지』, 297쪽)

 

복도훈 : 91년 5월의 이야기는 소설가 김연수, 전성태 등도 자신의 단편에서 다룬 적이 있다. 그렇지만 대학생이 아닌 고등학생의 이야기로서는 『나무에게서 온 편지』가 아직까지는 유일하다.

하명희 : 덧붙인다면 김소진, 김별아의 소설로도 나왔다. 그런데 그 어디에도 고등학생 이야기는 찾아보기 힘들더라. 내가 겪은 91년 봄은 그렇지 않은데······. 작년에 권경원 감독의 〈1991, 봄〉이 개봉되어 지금까지 독립영화관에서 상영되고 있다. 영화는 단 두 달간 13명이 국가공권력에 죽임을 당하고 스스로 죽음을 택한 1991년 봄을 강기훈의 기타 선율에 담아낸 음악영화이자 다큐멘터리이다. 권경원 감독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영화를 만드는 데 세월호가 크게 작동했다고 하더라. 감독은 우리가 그때(1991년)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충분한 애도 없이 시대를 건너뛴 것은 아닌가, 그것이 세월호를 통해 또다시 반복되는 것은 아닌가 고민했다고 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무에게서 온 편지』를 쓰던 막바지에 세월호를 겪었다. 그 막막함이 퇴고 과정에서 스며들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이야기해 줄 만한데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던 1991년 고등학생들의 이야기는 그렇게 해서 나왔다. 책이 나오고 광주의 한 단체에서 불러 주어 강연을 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한 선생님을 만났는데 그분은 1991년 봄에 분신한 김철수의 마지막 육성 테이프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누군가 찾으러 오지 않을까 하며 28년 동안 그걸 품고 있었던 거다. 권경원 감독에게 연락했더니 여태 그 테이프를 찾고 있었다고 하더라. 그렇게 해서 영화 속에 김철수의 육성이 들어가게 되었다. 기억의 문제를 짚어 보고 싶다. 다들 기억하겠다, 잊지 않겠다고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는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려 도착하기도 한다. '고등학생 운동을 다룬 소설'이라는 타이틀보다는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답하는 것이 문학으로 영화로도 규정되지 않은 또 다른 문화 형태로도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복도훈 : 음, 매우 인상 깊은 얘기다. <1991, 봄>은 꼭 찾아서 보겠다.

 

    소설집 『불편한 온도』에 실린 「그림자들의 강」을 읽어 보면 하명희 작가의 자전적 삶의 흔적이 곳곳에 어지러운 발자국처럼 찍혀 있다는 추정을 하게 된다. 중편에 가까운 이 성장소설에서 삶의 기억은 가족을 둘러싼 삶의 신산스런 자취들, 도저히 나아지지 않는 가난과 고된 노동, 가족 구성원 간의 폭력, 삶터(밤섬)에서의 내쫓김, 가족의 옥살이 등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을 그리는 서술자 '나'의 시각은 뜨거운 상처에 방금 댄 것 같은 생생함보다는 어떤 시선, 때로는 무덤덤함과 때로는 그리움의 겹눈에 의해 감싸여져 추억되고 있어 보인다. 그러한 추억 또는 기억은 소설의 정갈하면서도 시적인 문장들에 의해 한층 아련하고 가슴 아프고 돌이켜보면 쓴웃음을 짓는 표정을 닮았다. 분노가 있고, 아픔과 울분이 있는데도 어떤 따뜻함에 의해 감싸여져 있다. 생각해 보면 『불편한 온도』에 실린 대부분의 단편들이 그러한 따뜻함, 온기에 의해 감싸여져 있다. 불편한 온도란 그런 뜻이겠다. 애초에 하명희 작가와 대담을 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노동과 계급에 대한 이야기가 최근 한국 소설에서는 거의 실종된 게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하명희 작가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는 인상에. 하지만 총론이 아닌 각론으로 들어가면서 이야기는 다소 달라졌다.

 

복도훈 : 『나무에게서 온 편지』에도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하명희 소설의 출발점에는 가난 그리고 그와 불가분의 관계인 노동이 있다. 그리고 거기서 발생하는 폭력. 그것들이 때로는 추억에 의해 감싸여져 있다고 하더라도 가난, 노동과 얽힌 폭력, 가해와 피해의 문제는 중요하게 취급된다. 소설집 『불편한 온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체로 순하고 인정이 많지만, 자신의 폭력성에 대해 복잡미묘한 심경을 갖고 있기도 하다. 등단작인 「꽃 땀」에서 아이에게 욕을 하고 후회 되어 아이스크림 든 봉지를 건네주는 택배기사 청년, 「늙은 물의 사랑은,」에서 '남자가 되지 못한 남자'인 노년의 사내, 「목발」의 주인공처럼 그 자신이 구조의 가해자이기도 하며 그것의 피해자인 인물 등등. 대개는 남성들이기도 한.

하명희 : 가공의 인물을 만들고 그 인물을 형상화하고 그렇게 그를 쫓아가다 보면 반드시 구조적인 문제와 맞닥뜨린다. 소설에서 구조를 재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오히려 피해 돌아가기 쉽지만, 나는 되도록 그곳으로 가고자 한다. 그렇지만 구조를 다루다 보면 소설은 읽기 힘들어지고 또 어려워진다. 나는 피하지 않으려고 한다. 구조를 어떻게 다룰 수 있는지를 계속 고민할 것이다. 다만 도식적이거나 사회학적인 대답이 아니어야 하겠다. 「불편한 온도」의 여성 크레인 조종사, 「꽃 땀」의 택배기사 청년, 「목발」의 실업자 이야기는 개인의 이야기이면서 구조의 이야기이다. 싸움의 막다른 현실에서 한 발 더 내디딜 수 있을까. 이것이 내 고민이다.

 

    "도은에게 노동은 불편한 것이었다. 가난한 것이었고, 더러운 것이었다. 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안 하고 싶은 것,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이었다. 쓸모없는 자들의 쓸모없는 몸부림이었고, 새벽에 일어나 밤늦게 귀가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일해도 판자로 지은 집은 박스로밖에 바뀌지 않는 굴레였고, 벗어날 수 없는 함정이었다. 노동은 돈을 벌기 위한 것이었고, 한평생 몸뚱이를 굴려도 돈은 없고, 남들이 버린 쓰레기나 뒤지고 다녀야 하는 빈 수레였다. 고물 리어카였다. 쓰레기를 놓고 다투는 욕이었고, 그것마저 빼앗기고 속으로 욕을 삼키는 고인 침이었다. 어디든 뱉어버리고 싶은 썩은 물이었다."(『나무에게서 온 편지』, 64~65쪽)

 

복도훈 : 한편으로는 노동현장에서 젠더의 문제도 부각시키고 있다. 「불편한 온도」의 주인공은 크레인을 조종하는 여성 노동자 '나'로, 이 소설은 계급과 노동 연대의 이야기이면서 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남성 노동자 '당신'과 '나'의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다. 단편으로서의 완성도도 높고, 아프면서도 따뜻하다. 그런데 소설에서 '당신'은 크레인 조종이 여성이 하기에 어려운 일 아니냐는 흔한 질문을 '나'에게 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그 일이 여성에게 더 어울린다고까지 말하는 인물이다.

하명희 : 나는 계급과 젠더의 문제는 겹쳐져 있다고 생각한다.

복도훈 : 물론이다. 그 문제를 본격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실은 얼마 되지 않는다. 거슬러 올라가면 임인애 감독의 다큐멘터리 〈밥.꽃.양〉(2001)에서 재현된 현대자동차노조 식당여성조합원들의 정리해고 이야기가 괴로운 역사적 분기점이었던 것 같다. 계급문제에서 정체성(젠더)의 문제를 분리시키는 사태를 초래한 이들은 결국 남성 노동자들이었다. 또한 다큐멘터리가 상영된 그해에 남성 노조 간부들의 성폭력을 공개 고발한 백인위 사례도 있었다. 그때부터 계급과 정체성은 적대적으로 분기되기 시작한 것 같다. 그 문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이제 어떤 경우에는 계급문제가 정체성(젠더)의 하위항목으로 다뤄지기도 한다. 「늙은 물의 사랑은,」에서 병든 남성 주인공의 통한에 가까운 고백이 인상적이었다.

하명희 : 「늙은 물의 사랑은,」은 의도적으로 젠더를 다룬 소설이다. '남자가 되지 못한 남자',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남자는 되지 못했지만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 사이의 어긋난 자리, 그의 고백과 회한의 이야기다. 그러나 나는 누군가의 폭력을 고발하기보다는 그것을 우선 이해하고 싶다.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게 내겐 문학이다.

 

    도은이 처음 만난 인생의 책, 바실리 예로센코의「슬픈 물고기」에서
    "「슬픈 물고기」에는 물고기들이 가고 싶어 하는 나라가 나와요.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붕애는 착하고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고요. 그런데 어느 날 물고기들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전해 듣지요. 그 나라의 신의 말을 적은 책에 물고기들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영혼이 없는 자들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나와 있다는 것을 알게 돼요. ······ 그 나라의 신의 말을 적은 책이 있다면 물고기들의 책도 있어야 하는 거예요. 나무에게는 지금 그게 필요할 거고요. 절실하게 필요할 거예요."(『나무에게서 온 편지』, 56~57쪽)

 

    난지도에서 온 '편지'의 '나무'
    "나뭇잎 하나에 나무 한 그루가 박혀 있었다. 외롭고 쓸쓸한 마음 한 장, 그 속에는 한 그루의 마음이 간신히 서서 버티고 있었다. 태풍에 사라진 바위도 있었고, 웅덩이도 있었다. 웅덩이 속에 거꾸로 박혀 있던 숙자도 있었다. 죽은 숙자의 털을 쓸어 주던 바람도 있었다. 그 위에 내려앉던 저녁도 있었다. 그 옆에서 울어버린 도은이도 있었다. 울다가 지쳐 혼자 언덕을 내려가던 쓸쓸함도 있었다. 그리고 나무는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한 자리에 서 있었다."(『나무에게서 온 편지』, 48쪽)

 

복도훈 : 그래서 그런지 하명희 소설의 메시지는 직접적이거나 투박하지 않다. 은유적이며, 시적이다. 식물이나 동물 상징이 많다. 『나무에게서 온 편지』에는 나무의 식물 이미지, 물고기 은유가 등장하며, 『불편한 온도』에는 코끼리, 기린, 지렁이 등의 동물 은유가 등장한다. 예를 들어 「꽃 땀」의 택배기사 청년은 자신의 배달용 트럭을 '코끼리'로 부르는데, 꽤 실감난다. 「불편한 온도」에서 주인공의 연인이 되는 크레인 기사는 크레인을 '기린' 같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 소설은 동물 이미지와 은유가 많다. 예를 들면 물고기의 산소조절장치, 즉 원더넷(괴망)과 새가 한 발을 드는 이유가 불편하지만 살기 위한 자세라고 말한다. 「저녁의 목소리」의 두 연인은 서로를 '물고기의 남동생', '새의 여동생'이라고 말한다. 왜 그런 상징을 많이 쓰게 되는가?

하명희 : 그런가? 그렇구나. 음, 나는 어린이대공원 근처에 살고 있다. 가끔씩 동물원에 가서 동물들을 본다. 동물들을 보면 재미있다. 그들은 부러 찾아가야 만날 수 있는 존재다. 나는 동물들 안에서 사람을 본다. 즉 사람 안에서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기린을 보면서 기린 같은 사람을 본다. 그래야 사람이 더 잘 보인다. 말하자면 바깥, 인물의 바깥, 사건의 바깥에서 인물과 사건을 보는 것이다. 소설가로서 나는 사람의 내면으로 들어가기보다는 그 인물이 처해 있는 정황, 상황, 제스처를 통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하는 게 더 흥미롭다. 가령 목소리라든지 걸음걸이 같은 것을 통해서 그 사람을 말하는 것. 작은 것들이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쓰고 싶은 욕구가 있다. 쉽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을 어렵게 얘기하고 싶지는 않다.

복도훈 : 곧 출간될 소설집 『고요는 어디 있나요』를 포함해 하명희 작가의 문체는 대단히 서정적이다. 지금부터는 비평가로서 애정 어린 쓴소리로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다. 작가의 서정적인 문체가 환기하는 현실은 어찌 보면 지극히 산문적인 노동현장이다. 이것은 단편에서는 성공적일 수 있겠지만, 장편을 쓰기 위한 동력으로는 힘에 부치지 않을까 염려된다. 그렇게 보면 『불편한 온도』는 전반적으로는 '불편'보다는 '온도' 쪽으로, 불편하기보다는 따뜻한 이야기 쪽으로 흐른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명희 : 파편화된 진실이 보편적 가치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불편한 온도』는 공통의 과제, 공생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것은 소설화된 각 개인을 통해서다. 하룻밤의 대화에서도 치유와 공감, 화해가 도출된다면 나는 그쪽을 취하겠다.

복도훈 : 그럼에도 악인, 부정적 인물이 별로 없다. 엄마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도 그리움의 대상으로 그려져 있다. 르포르타주 또는 그를 바탕으로 한 소설의 산문적 현실로 넘어가면 복잡해지겠다. 부러 만나자고 해놓고 계속 불편한 얘기를 해서 미안하다.

하명희 : 아니다. 그게 나의 과제다. 그렇지만 내가 아프고 쓸쓸한 순간에 위무가 되었던 것이 문학의 원초적 경험, 불씨였다. 나는 그것이 문학이라고 어렴풋이 새기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한 소설가가 지나가는 말로 슬쩍 나를 찌르더라. 자기가 잘하는 거, 좋아하는 것만 쓸 거니? 뒤섞어 봐야지. 좋아하는 것 속에서도 그 속으로 더 들어가면 복잡미묘해지는데 그걸 풀어낼 때 또 다른 소설적 재미가 있지 않을까. 굉장히 뜨끔했다. 다른 작가들도 그런 욕구가 있을 것 같은데, 이럴 때 페소아처럼 여러 이름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복도훈 : 와, 페소아는 나도 무척 좋아하는 작가이다. 페소아에 대해서는 저녁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그런 면에서 나는 『고요는 어디 있나요』를 작가 자신의 다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소설로 읽었다. 짧은 이야기 모음집이지만, 완결성을 기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곳곳에 적지 않다. 결코 가볍게 읽을 수 없으면서도 어디서부터 펼쳐 읽기 시작하더라도 좋을 것 같았다. 『고요는 어디 있나요』에 대해 독자들에게 소개해 달라.

하명희 : 『불편한 온도』에 힘이 들어갔다면, 『고요는 어디 있나요』는 힘 빼고 쓴 일상의 이야기다. 짧은 이야기에서는 사건 그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이다 보니 완결성이 중요하다. 새 단편집에서는 가벼운 이야기, 무거운 이야기, 유쾌한 이야기를 자유자재로 섞고 싶었다. 오히려 그게 단편집이 아닐까 싶다. 읽다가 덮어도 상관없는 그런 단편집.

복도훈 : 장편소설을 계획하고 있다고 들었다. 어떤 장편소설인지 조금만이라도 이야기해 달라.

하명희 : 아까도 말했지만, 악인이 없다는 것은 내게는 갈등 지점이다. 내가 말하는 악인은 다시 말하면 문제적 인간인데, 내 삶에도 그런 지독한 인간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들 가운데 골라서 소설화한 것은 아닌가. 지독한 인물들,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적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싶다. 갈등을 만들어 가는 소설을 써보고 싶다. 지금 계획하는 장편소설은 실제 사건을 소재로 삼은 이야기로, 자료도 상당히 확보했다. 사실을 소설화할 때 발생하는 지점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이것을 실현하는 것이 지금 내 앞에 떨어진 과제다.

복도훈 : 좋은 말씀, 감사하다. 이제 밥 먹으러 가자.

하명희 : 수고하셨다. 감사하다.

 

후기

 

    번외의 이야기도 조금 나눴다. 애초의 질문은 '한국 소설에서 갈수록 노동과 계급의 이야기를 만나기가 쉽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였다. 그래서 주목했던 작가가 하명희였다. 대담에서도 언급했지만, 차별(정체성)과 착취(계급)를 명확히 나눌 수는 없겠다. 그러나 차별에 대해서는 과잉이랄 정도로 이야기와 담론이 몰려 있는 반면에, 착취에 대해서는 그만큼 이야기되거나 하지는 않는 것 같다. 이것은 직감이 아니라 실감이다. 물론 그것은 그동안 우리가 차별에 대해서 제대로 이야기해 온 적이 있나, 라는 질문을 무시하는 실감이 아니다. 또 착취에 대한 이야기가 차별을 희석시킨 사례도 적지 않았나, 라는 반문을 회피하는 실감도 아니다. 돌이켜보면 노동계급의 남성들에게 밥하고 빨래하고 그들을 위로해 주는 '밥어미'가 등장하는 식의 이야기는 물릴 정도로 얼마나 많았던가. 또 그런 이야기에 소설적 진실을 부여하고, 계급적 의미를 읽어내는 비평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이쯤 되면 작품보다는 비평에 대해 지적하는 게 아무래도 더 들어맞겠다. 차별에 쏠린 반면에 착취에는 무심한 담론, 차별과 착취가 얽혀 있는 곳에서 하나만 읽어내려는 비평. 하명희 작가는 말했다. 이런 시기에 비평가에게 중요한 몫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자기 목소리를 내서 담론을 만들고, 비록 불일치하더라도 토론을 회피하지 말고, 쟁점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지금은 일방향적으로 공격하거나 낙인찍고, 다수는 침묵하며, 그런 식으로 주류와 비주류가 나뉘어 같은 목소리만 반복할 뿐이라고. 쓰디쓴 지적이 아닐 수가 없었다.
    예외의 목소리가 주류로 올라서면 그것은 예외가 아니라 주류이다. 정확히는 예외로 읽히길 요구하는 주류. 특별한 것으로 읽으면 다르지 않다고 항변하고, 다르지 않다고 읽으면 특별함을 무시한다고 항변하는 주류. 그런 주류는 내 관심사가 아니다. 하명희 소설에 대한 나의 관심이 주목했어야 마땅했지만 주목하지 않은 작가와 작품에 대한 비평적 직무유기를 돌이켜보는 자기반성이었으면 했다. 가까운 역으로 작가를 배웅하고 돌아오면서 들었던 생각이다.(<문장웹진> 2019.5월호)

 

https://webzine.munjang.or.kr/archives/144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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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23 2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민타스 밤부소이데이아!

사내는 잠든 여자의 귀에 속삭인다.

-아민타스 밤부소이데이아.

여자가 잠꼬대로 답한다. 여자의 잠 속으로 물 소리, 흐르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물 소리, 돌부리에 걸리는 물 소리, 돌에 걸려 갈라지는 소리, 갈라져 물 속을 파고드는 소리, 그 위로 날던 물총새 소리, 물총새 머물던 시냇가 섶 풀 꺾이는 소리, 꺾인 풀을 안고 떠오르는 바람 한 점, 바람 지나가는 자리마다 허공에 파이는 무덤들, 무덤들 위로 덮이는 물 소리, 허공의 무덤을 관통하던 수리 한 마리, 허공에 길을 내는 저 먼 소리, 먼 소리들이 돌아와 시냇물에 감기면 발가락 끝에 닿는 물의 혓바닥, 물의 혓바닥이 저녁을 간질인다.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괜찮아. 괜찮아.

여자가 듣고 싶은 말만 시냇가의 크기로, 시냇가의 물살로, 밀고 차고 파고 흔들며 저녁이 말한다. 물 속에 박힌 돌의 목소리로. 그가 들어올린 돌멩이 아래 보라의 물고기, 모래무지의 목소리로. 물살의 크기로 파고든다. 새는 풀 섶을 뛰어다니며 풀을 건드리고, 시내는 돌을 건드리며 갈라지고, 새는 허공을 끌어올리며 저녁을 만든다. 멀리서 새가 늘려놓은 허공을 따라 어떤 향기가 감긴다. 세탁통 속에서 그가 나온다. 비틀거리며 찌그러진 동전을 내민다. 저녁은 너와 걷고 싶어, 기다리는 건 내가 할게, 사내가 말한다. 여자는 시냇가에 발을 담그고 돌덩이 하나를 들어올린다. 보라의 물고기가 여자를 건드리며 헤엄쳐간다.

  -<저녁의 목소리> 중

 

 https://youtu.be/MswxCuaiVO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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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8-11-29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들었습니다.

돌바람 2018-11-29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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