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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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묻는다.  왜 잊혀질만한 하면 우리는 누추하고 추악한 역사를 끄집어 내, 사람들의 기분을 망쳐놓는 것일까.  벌써, 30년이 한참 지난 일이지만 왜 선거때만 되면 유력 대권주자들은 그곳을 찾아, 영정앞에서 눈시울을 붉히며 카메라 셔터의 소음을 들어야 하는 걸까. 매년 그 날만 되면, 역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한 이들이라면 저 남쪽 어느 도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 하는 것일까.  `부채의식'이다.  30년 동안, 역사서의 몇 줄 문장으로만 모면하려 했던 추념의 예식 같은 것 말이다.   어쩌면 `양심'일지도 모른다.  권불십년, 10년을 못갈 그깟 권력의 달콤함에 젖어서라도 그런 짓은 상상속에서만 가능해야 했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난 것이다.  나는 그래도 그 자리에 없어서 화를 모면했다는 이 면목없는 안도감이 당혹스럽다.  한강의 소설은 1980년 5월 18일로부터 1주일간, 대한민국의 어느 봉쇄되고 포위된 한 도시속 믿기어려운 사건과 그 사건에 맞닥뜨린 사람들의 이야기다.  

한강의 소설로서는 <채식주의자> 이후, 두번째 만남이다.  첫 만남이 중요한데, 이 작가와는 좀 인연이 닿지 않았나보다.  그의 문장들에 적응하는데 애를 먹은 나는 <채식주의자>의 알 수 없는 고단한 필체에 피로감을 느꼈다.  주제의식은 선명하였다.  그런데, 문장이 왜 그리 자기 멋대로인지, 소설 문장이 일기장처럼 읽힐 때의 독자로서의 소외감 때문이었을까.  세상 모든 고통을 혼자 짊어진듯한 작가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다고나 할까.  그런 고통을 형용하는 것이 문학이란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채식주의자가 그 고통을 대변하기엔 세상이 그리 한가롭지 않지 않나?   아무튼 내게 <채색주의자>는 썩 와닿지 않았다.  육식을 순수성의 파괴, 인간의 본능적 폭력성의 상징으로 되돌리는 작업은 이해하였지만, 우리는 매일 고기를 뜯어먹는게 일상사이지 않나?  그래서 뭐 어쨌단 건가? 

<소년이 온다>(창비,2014)를 읽고 이 오해는 조금 풀렸다.  이 작가의 지문같은 문장은 존중받아야 할 그의 개성이었음을, 더군다나 맘에 들지 않던 그녀의 문체가 이 소설에서 시의적절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 또 소설 혹은 시, 많은 소재로 사용되었던 그날의 사건은 장르의 형식에 매몰돼, 매번 제대로 표현되지 못하였다.  기성복을 입은 듯, 고통과 슬픔을 묘사하는 매너리즘에 빠져버렸다고나 할까.  그에 비해, 한강의 소설은 정교하게 재단된 맞춤복이다.  픽션이라면 분노하고 공감하며 애도하지 않겠는가. 그들을 폭도나 빨갱이로 바라보는 당신까지도 인간이라면 눈시울 붉어지지 않겠는가.  그는 사뭇 부채의식 같은 거라곤 알 바 없는, 시큰둥한 독자들에게 그 낯선 이야길 건넬 때, 어떻게 다가서야 하는지 알고 글을 쓰는 듯했다.  

"네 중학교 학생증에서 사진만 오려갖고 지갑 속에 넣어놨다니.  낮이나 밤이나 텅 빈 집이지마는 아무도 찾아볼 일 없는 새벽에, 하얀 습자지로 여러번 접어 싸놓은 네 얼굴을 펼쳐본다이. 아무도 엿들을 사람이 없지마는 가만가만 부른다이....동호야"  192쪽, 한강 <소년이 온다> 

십수년이 흘러, 엄마는 앳된 나이에 시민군 오빠,누나들과 함께 도청안에 있다 희생된 동호의 어린 시절의 기억 하나하나를 되짚는다. `꽃 핀 쪽으로'라는 장에서다.  이 소설이 실제의 사건들의 처절한 묘사와 등장인물들의 가상적인 고통에서 빗겨나, 문학이란 이름으로 독자의 넋을 빼놓고 슬픔을 극대화하는 장이다.  한강의 작가로서의 자질과 능력이 응축돼 있는 소설의 압권!   삼형제 가운데, 중학생 막내 동호를 그날, 그 무시무시한 밤에 잃어버리고 온통 혼이 나간 상태로, 그 기분으로 이생을 살아가는 자신의 허깨비 같은 삶을, 더이상 삶도 아닌 삶을, 살아온 시간들을 넋두리처럼 읊고 있는 엄마의 독백의 장이다.  여기에 무슨 정치와 협잡과 빨갱이와 보수와 진보의 다툼이 섞여들 여지가 있는가.  눈물 혹은 공분이면 족하질 않나?  

역사는 상상의 산물이기 마련이다. 현장의 목격자요, 주인공이 아니라면, 모두가 누군가의 기록과 기억을 살피며 자신의 머릿속에서 복원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역사가 거짓이라는 오명을 혹은 누명을 쓸 때는 이때가 아닌가.  한 편의 소설은 증언이 될 수도 있고, 역사서술이 될 수도 있다. 한강은 자신의 소설을 통해, 다양한 인물들에게 관찰자의 시선을 허락한다.   희생자와 참여자로 빙의한다.  참살돼 트럭에 실려가고 매장되는 시신이 혼이 되어 자신의 이생에서의 처참한 육신을 바라보는 경험에 독자들을 참여시킨다. 칼과 총에 찢힌 육체의 고통과 자신을 죽인 자(군인)의 그 평범한 모습을 이생과 저승의 중간쯤에서 목도하는 정경은 섬뜩하다.

소설은 이같은 기법을 통해, 독자들을 그날 현장의 이곳저곳으로 끌고 다닌다. 민주주의를 목청껏 외치며, 시민이 하나가 된 시위 현장의 매큼한 최류탄 냄새 속으로 입장한다.  애국가가 흘러나오는 정오에 철수가 예정된 공수부대원들의 집단 발포의 총성이 귀를 찢는다. 나뒹구는 시신들과 신음하는 부상자들의 아비규환을 골목에 숨어 목도하는 이들의 가뿐 호흡소리가 들려온다. 병원 복도까지를 점령해버린 부상자들 사이에서 자발적인 헌혈을 위해 모여든 시민들의 짠한 표정이 선명히 잡힌다. 도청의 시민군을 학살(진압)하기 위해,  계엄군이 진군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새벽 방송 차량의 스피커에서 울려오는 여성 시민군의 절박한 목소리가 애처롭다.  

잔혹하게 도청의 시민군을 진압하며, 그날 새벽 항복하는 어린 학생 시민군을 향해 발포하며 마지막까지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오지 못한 계엄군의 잔혹함이 심장을 파고드는 비수같은 문장으로 눈에 와 박힌다.  시민을 지키고 보호하라고 준 총기로 그 시민을 학살하는 계엄군에 대항하기 위해 총을 든 시민군은 폭도와 빨갱이로 낙인찍혀 체포되고, 고문 받는다.  그 고문과 치욕의 시간이 얼마나 깊고 예리했던지, 그 누군가는 평생을 후유증에 시달리며,  정신병자나 자살자로 생을 마감한다.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불과 30여년 전 이땅의 어느 도시에서 벌어진 픽션아닌 `현실'이다.   그 모든 거짓말 같은 시간들을 작가 한강은 특유의 예민한 문장과 감성으로 그려낸다. 

"지금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까. 태극기로, 고작 그걸로 감싸보려던 거야, 우린 도륙된 고깃덩어리들이 아니어야 하니까.  필사적으로 묵념을 하고 애국가를 부른 거야.  그 여름으로부터 이십여년이 흘렀다.  씨를 말려야 할 빨갱이 연놈들.  그들이 욕설을 뺕으며 당신의 몸에 끼얹던 순간을 등지고 여기까지 왔다.  그 여름 이전으로 돌아갈 방법은 길은 끊어졌다. 학살 이전,  고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174쪽 

어떤 소설은 읽는 일이 고통스럽고 회피하고 싶다. 내가 왜 이런 소설을 읽겠다고 했을까. 후회가 밀려온다.  빨리 읽고 책장을 덮고 싶다. 아마도, 그것은 마음을 다치게 하는 일이나 생각들과는 좀 더 거리를 두고자 하는 본능 때문일 게다. 새벽 나절, 책장을 넘기는 것이 가장 공포스러웠고 남은 페이지를 쳐다보며 이 고통스런 체험이 끝나기를 은근 바랐다.  소설이 독자를 고문시킬 수도 있구나. 매년 어김없이 기념일로 되돌아오는 그날이 결코 반갑지 않다.  과거, 어느 도시에 살던 까까머리 중학생은, 임산부는, 평범한 회사원은, 대학생 언니 오빠들은, 예배가던 젊은 부부는 계엄군의 총과 칼에 무참히 학살되었다.  나라를 지키는 씩씩한 군인들에게 어린시절, 위문편지를 보냈던 군인 아저씨들에게, 우리 이웃의 아들들에게, 바로 지금 거리를 스쳐 지나칠 그 평범한 사람들에게 무참히 도륙당했다.  이런 상상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픽션이 아니고 역사이며 진실이다.  

"오로지 진실만이 과거를 잠재울 수 있다"  "용서한다. 하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 민권운동가이자 대통령이었던 사람, 백인정권의 인종주의 정책과 흑인 학살에 저항하며 무장투쟁을 이끌었고,  고문과 27년간의 무고한 복역을 이겨내며 훗날 그 나라의 대통령 자리에 올랐던 민주투사, 故 넬슨 만델라. 그는 과거 자신과 동료 흑인들을 학살하고 고문했던 모든 백인들을 용서하며 이같은 말을 남겼다. 그의 용서 정책은 `공짜점심'이 아니었다.  진실화해 위원회를 통해, 철저하게 진상을 파악하고 책임자를 가렸다. 사면을 받은 한 백인은 이런 말을 남겼다. " 흑인들이 나를 천만 번 용서하고,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이 천만 번 나를 용서한다 해도 나는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의 머리속에 나의 양심이 있기 때문이다 "

비슷한 역사를 거친 두 나라의 가해자와 피해자는 지금 어떤 모습인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과거의 상처를 딛고, 새로운 역사에 한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던 건, 바로 진실의 가치를 아는 피해자와 양심의 존재를 인정한 가해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린 아직도 그날, 그 도시의 학살의 책임자를 찾지 못하고 있다. 37년이란 시간이 지나고, 민주화 운동을 한 경력의 두 지도자가 선출되고, 민주주의가 성숙의 단계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우리는 수백,천의 사상자를 낸 그날 그 잔혹한 역사에 아직도 발 묶여 있다.  왜, 다시, 또, 그 이야기냐고?  지겹다고? 그만하라고?  그렇게 말할 수 없고 말해선 안 된다.  한강의 소설은 그날의 역사를 비교적 잘 형상화한 의미있는 텍스트다.  이런 텍스트가 계속해 나와야 한다.  조금더 규모를 갖춘, 자본력이 투자된, 좋은 시나리오가 영화화 되어야 한다.  정치와 정치인이 찾지 못한 진실을 문학과 예술은 더 잘 찾고, 더 잘 해명할 수 있다.  거짓말로 남을 속일지는 모르지만, 나를 속일수는 없다.   예술은 양심을 북돋는다.

아직 역사의 진실은 잠들지 못했다.  아직 그 상처의 기억을 간직한 피해자들이 두 눈 부릅뜨고 살아가고 있다. 그 형제자매들이 마음 한 켠에 죽음의 그림자와 함께 이 생을 흘려보내고 있다.  그 어떤 고백과 반성도 있었던 역사의 상처를 과거로 되돌릴 수 없다. "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길은 없다 "  하여, 아직 고백과 반성의 대상조차 선별하지 못한 이 기이한 역사 앞에 우린 모두가 죄인이다.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는 치유되지 못한 역사에 맞닥뜨린 독자들에겐 위로와 각성을 던지는 소설이자,  아직도 학살의 이유를 알지 못하고 이생을 떠돌 망자들에겐 그 슬픈 넋을 달래는 레퀴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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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할 권리 - 품위 있는 삶을 위한 인문학 선언
정여울 지음 / 민음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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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일종의 서평집이다.  개중 영화평도 몇편 삽입 돼 있으나 저자의 다양한 독서경험을 바탕으로 한 서평이 주가 됐다. 여느, 서평집과는 좀 다른 면이 있다.  형식적인 서평의 얼개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 좋은 서평은 무엇일까.  책 이야기보다는 서평가의 생각이 좀 더 많이 녹아난 서평이라고 본다.  많은 책을 읽고, 자주 서평을 써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책과 저자의 이야기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 생각을 있는 그대로 풀어내는데 집중할 것이다.  정여울은 그런 내공이 있는 서평가다.  


나는 그의 서평을 좋아했다.  몇 해 전, 인터넷 강의로 인문학 수업을 들은적도 있다. 신문지상에 연재된 서평도 많이 읽었다.  그가 쓰는 글은 서평,영화평,여행에세이 정도다.  대학에서 독문학을 전공했고, 대학원에선 국문학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에서도 강의를 했다.  그의 글을 읽으면 참 편안하다.  인문학을 깊게 공부하고, 많은 책을 읽은 사람으로서 삶의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고 있는 인문학 해설은 충만하고 알차다. 특히 자신의 인생에 대한 고백이 양념처럼 발렸다.  <공부할 권리>(정여울, 민음사 2016)는 작년 4월에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렀다 가져온 책이다. 그때 약 2개월간, 나는 승진공부에 빠져 있었다. 그 날 아침 승진시험을 보고 홀가분한 마음을 어디서 풀까 하다 서점에 들렀고, 그곳에서 나를 반겨준 책이기도 하다. 


정여울의 글은 위안과 위로로 가득하다. 인문학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가장 적당한 글모음이자, 적절한 서평모음이다. 그리고 책 목록이다. 누군가의 서평집을 읽는다는 것의 최고 장점은 당장 펴보고 싶은 책의 발견에 있다.  더군다나 유려한 서평가의 유혹적인 문장들로 소개된 책이라면 더욱 그렇다.정여울은 특유의 섬세한 문장으로 독자들을 유혹한다. 너무 유명해서 딱딱할 지경인 호메로스의 고전들 <일리아드>로부터 <안티고네>를 넘어서, <월든>의 소로우와 만나 자연의 위대함과 시민의 불복종에 대해 고민한다.  알베르 카뮈의 미스터리한 살인자 뫼르소를 거쳐, 이타적인 작가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를 논한다.


역시 그 유명세에 짓눌려 펴볼 생각조차 않은 세익스피어의 <리어왕>의 서평을 읽다보면, 예나 지금이나 금전관계에서 파생된 가족간의 불상사는 여전함을 느낀다.  이 서평집이 여정을 끝마치는 지점에서 나는 굉장한 발견에 기뻤다.  심리학자인 아들러와 융의 책 서평에서 개인심리학과 신화의 세계에 대한 저자의 깊은 애정과 인문학 공부의 터닝포인트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의 문제는 곧, 독자들의 문제이고, 나의 관심이자 모두에게 흥미로울 듯했다.  인문학이란 큰 그림에서 시작해,  심리학과 신화로 이어지는 공부의 밑그림은 작가가 인문학을 공부해온 과정이다.  그가 이 책에서 소개한 작가와 책의 목록을 수첩에 적는다. 밀턴 에릭슨의 <심리치유수업>, 우치다 타츠루의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 알프레드 아들러의 <인간이해>, 자크 아달리의 <등대>,  D.리크의 <내 그림자가 나를 돕는다>.


이 책을 읽은 후, 변화된 내면을 이야기하는 저자의 흥에 저절로 빠져들었다.  그는 서평과 영화평, 여행에세이에 주력하는 작가다.  이런 분야는 누구나 도전하고 글을 써볼 생각을 품는다.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하고도 물론 관계없다. 그런 공부가 배경지식이 된다면 책과 영화를 이해하는데 분명 도움을 줄 순 있을 것이다.  세가지 분야의 진입은 쉽지만, 잘 하기는 무척 어렵다.  서평가와 영화평론가는 분명 다른 존재다. 하지만, 서평을 쓰다 영화평론을 쓰는 전문작가들은 훨신 더 깊이 있게 잘 쓴다. 정여울이 그런 경우다.   하지만, 나는 정여울의 글에서 `먹물'이 보여줄 수 있는 지식인의 자만감 같은건 느끼지 못했다.  다만, 자기 앞에 놓인 이 삶을 이해하고 극복하려는 노력과 열정, 그리고 고뇌를 읽었을 뿐이다. 


"나에게 공부란 주어진 아픔을 견디는 수동적인 무기가 아니라 현실에 맞서는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무기입니다. 저는 공부할 권리를 지킴으로써 끝내 행복할 권리를, 더 깊이 세상을 사랑할 권리를 되찾았습니다. 공부란 나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 이 차가운 세상을 포기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사랑하는 길이었습니다."   8쪽, <공부할 권리>, 정여울  


인문학은 셀프 학습을 필요로 한다.  르네상스 이후, 인문학이 부흥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신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중세 이전의 세계에선 그다지 공부가 필요치 않았다. 모든 것은 경전에 다 나와 있었으니까. 인간의 존재 목적,가치,미래가 정의되어 있었으니 그것에 궁금증을 가질 필요도 없고, 세계의 탄생과 우주의 정체에 의심을 품을 이유도 없었다. 만약, 가르침 끝 마음속에 질문이 돋는 순간 인간은 신이 가장 싫어하시는 `의심'이라는 배반에 들어선다.  오늘날이라고 다를게 없다.  과거, 종교에 잠깐 심취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책읽기에 대한 열망도 동시에 잃었다.  책은 오직 경전 하나면 충분했다.


하지만, 세계를 자기의 이성과 언어로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의문을 품을 것이고, 반드시 책을 찾아보며 `공부'의 과정에 들어서야 한다. 그때, 공부라고 하는 것은 학창시절 우리가 몰두했던 수동적인 교과서의 독서가 아니다. 스스로의 의문을 풀어보고, 삶의 돌파구를 찾아보려고 하는 적극성을 담보한 독서행위가 이루어진다. 이때, 독자는 읽을 책을 발견하고, 목록을 정리하고, 책을 섭렵하며 궁구하는 과정을 거친다.  인문학 공부는 삶을 지탱시키는 실물경제와는 하등 관계가 없다.  다만, 세계와 타인,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시각을 교정하고 그 깊이를 확장시키는 것이다.  내가 이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아직, 나와 세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과 일치한다.  정여울은 공부와 동떨어진 삶이 주는 품격없는 인생의 처방전이 바로 `공부할 권리'를 각자가 깨닫고 찾는데 있다고 선언한다.


" 사실 제가 하고 있는 모든 강의가 `우리의 자존감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에 대한 기나긴 답변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저는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내 손이 닿을 수 있는 모든 책들과 사람들과 사건들 속에서 찾아내고 싶습니다."  347쪽


갈수록 책을 읽는 인구가 줄어들고, 더군다나 새해들어 출판계를 강타한 송인서적 부도 사태로 영세한 출판산업이 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스마트 폰, 인터넷 방송, TV , 게임 등 책이 없어도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는 엔터테인먼트가 여가를 보장하는 시대다.  하지만, 잠시 엔돌핀을 분비하는데 도움이 되는 `뇌쇄적인' 매체는 시간을 소비하는데만 유용할 뿐이다. 모든 종교의 화두는 `나와 세계'간 실체를 찾는 과정이다.  인문학은 종교라는 도그마를 거치지 않고, 책이라는 `불쏘시개'를 통해 인간과 세계의 실상에 다가서려는 몸짓이다.  주어진 도그마가 아닌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그 경지에 이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렇다고,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과정이 고통스럽지만, 과정 가운데 열매를 바로 확인할 수도 있다.  앎이라는 보답은 인간을 어제보다 자유롭게 한다.  삶의 끝에서 모든 비밀을 풀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하더라도,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인 척 믿고, 자기 위안으로 삼는 것보단 낫다.  "내 삶을 풍부하게 해준 것은 여행과 꿈이었다. 내 영혼에 깊은 골을 남긴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꼽을 것이다.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조르바"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말이다. 또, 알베르 카뮈는  "나는 부조리에서 나의 반항, 나의 자유, 그리고 나의 정열이라는 세 가지 결론을 이끌어낸다" 고 썼다.  부조리는 공부해야할 인생이었고 반항과 자유, 정열은 카뮈에겐 해답에 이르는 도구였다.


이 두 작가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스스로의 노력에 의한 구원을 믿었다. 이때, 구원은 종교가 아닌 인문학 공부를 통해 성사된다.  인문학 공부는 자신의 좁은 세계관을 넘어서, 타인이 바라보는 세계, 그가 살고 있는 세계를 경험하며 삶이라는 미스터리에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굳어 그 밖을 상상금지하는 종교적 교조주의가 아닌 자유롭게 사고하고, 여행하며, 찾아 읽고, 무언가를 쓸 때, 우리는 인문학의 세계에 발딛게 될 것이다.  정여울의 깊이 있는 독서와 글쓰기는 인문학을 통해 인생을 공부해보려는 독자들에게 좋은 본보기이자 길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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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위의 작업실
김갑수 지음, 김상민 그림, 김선규 사진 / 푸른숲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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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둑컴컴한 지하실에서 우아한 포즈로 커피를 내리는 표지 사진이 인상적이다.  뒷 배경은 더군다나 책인지 음반인지 벽 전체를 꽉 채우고 있는 분위기가 커피향과 잘 어울리는듯 하다.  저런 곳에서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신다면, 어떤 기분일까.  사람마다 취향이 좀 다르겠지만, 그 무언가에 집중하는 힘만큼은 강렬할 것 같다.  제목이 그러고보니 표지 사진을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지구 위의 작업실>, 시인으로 데뷔해 지금은 종편 시사프로그램이나 예능에 가끔 얼굴을 내밀고 사는 김갑수 작가다.  

종편에 나와 진보진영의 편에서 보수인사들과 논쟁을 할 때 은근히 그가 이겨주길 바랐다.  해박한 지식과 교양에 기초한 말빨로 매번 진보 진영을 선방하던 그,  때로 거침없이 자신의 정치적 편향성을 드러내며 독자와 시청자를 민망하게도 했던 그.  수년 전에 쓴 이 책을 통해 김갑수는 자신의 정체성을 만천하에 공개하고야 만다.  그것은 정치나 시사 혹은 세계관 따위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순전히 호불호, 기호, 취향, 취미에 관한 내향적인 보고서를 책 한 권으로 써냈다.  그것도 쉰이 막 넘은 나이에 말이다.  이 취향에 관한 보고서에 그 누가 시비를 걸겠는가. 뭔가에 미쳐 있다는 것은 그것이 사회통념을 어긋나지 않는 한,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김갑수는 세가지에 미쳤다.  커피, 책, 음악....!  감초주사나 보톡스, 프로포폴 같은게 아니라서 다행이다.  따지고 보면, 교양인과 문화인들에게 필수적인 세가지 아이템이다.  미친다는 것은 좋아한다는 것과 개념이 다른 말이다.  다들 음악이나 커피나 책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미친다는 것은 그에 관해 뿌리까지 `탐구하고, 탐욕하며, 탐험'하는 일이다. 소위 말해서 아마추어의 경지를 넘어, 전문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단계에서 우리는 미쳤다는 말을 건넨다.  이 책은, 이 세가지에 탐심한 인생을 그린다.  인생이란 무얼까요? 라는 물음에 저자는 이 세가지 단어로 대답할 것이다.  커피, 책, 음악!  끝!

형이상학적인 얘기 따윈 집어치워라.  그 대신 김갑수는 " 내 지하작업실에서 커피를 내려 하루 종일 홀짝이며, 가끔 활자에 코를 박고 있다가, 대부분의 시간 음반을 닦거나 듣는 일로 시간을 보냅니다. 그게 내 삶이 흘러가는 방식이며 과정이지요"  멋지지 않은가.  단순히 멋지다고 표현할 일은 아닌 듯하다. 보통인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절차와 투쟁이 이 삶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독신남도 아니고, 부유한 갑부도 아니면서, 어떻게 고가의 커피머신, 그보다 더 고가인 골동품에 가까운 스피커들을 모셔오고,  3만장의 희귀 LP를 수집하면서, 가정을 꾸린 부부가 생이별을 감수하고,  별도의 작업실을 마련해 놓고 주말부부 노릇을 한단 말인가?

뭐, 상상은 가능하다. 그의 아내는 의사다. 저자는 방송일과 인세수입, 강연 등으로 사는데 지장이 없다. 문제는 그의 아내가 집안 살림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퇴근 후에는 책만 본다는 것이다.  그 정도를 상상할 수 있는 일화 한가지!  작고 하기 전 소설가 이청준과 함게 여행을 떠난 저자, 선생께 "밥도 안 해주는 마누라 섬기는 자랑을 했더니 사근사근하고 온화한 노작가께서 주위가 놀랄 만큼 큰소리로 발끈했다" "기럼 좆 빨라고 장가갔냐?" (194쪽)  결혼식 축의금을 계산 하고, 결혼 전에 고가의 스피커를 구매한 저자도 만만찮다.  결혼후 3년만에 취향의 다름을 확인하고 스위트홈 대신, 따로 공간을 마련해 독립한 저자는 이렇게 묻는다. " 왜 부부는 언제나 붙어 지내야만 하나요?" (195쪽)

`줄라이 홀'은  저자 지하작업실 애칭이다.  독특한 이름은 작업실을 첫 방문한 외국 여성 게스트의 이름에서 차용했단다.  그리고 십 수년 저자는 지하공간에 자신만의 폐쇄적인 공간을 만들어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음악을 듣고, 스피커를 부둥켜 안고 살아간다.  그것이 저자의 인생이다. 이 자유로운 영혼에 시비를 걸 사람이 누구던가.

"사람들은 어떻게 타인과 함께 일을 하고 모임을 이루고 가족을 구성하는 것일까. 다들 그렇게 살고들 있는데 그렇다면 타인과 섞이는 그 순간에 온전한 자아는 증발된 상태라고 보아야 한다.  나로서 충만한 상태라면 단 한 사람의 타자도 수용할 수가 없다. 자아 또는 자의식의 증발, 그것은 고통일까 즐거운 휴식일까."  91쪽, 김갑수 <지구 위의 작업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아니 좀 더 어른스러워 진다는 것을 사람들은 자기 공간을 없애는 것으로 착각하곤 한다.  결혼 생활이 시작되는 순간, 부부 모두 자기 공간은 사라지고 공통의 공간(침실,거실,부엌)만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아이가 생기면 아이에게 공부방을 양보하고, 아이의 공부방을 잘 꾸며주는 것은 신경쓰면서도 부부 자신만의 공간을 만드는 일은 상상 밖이 되곤 한다.  경제적, 공간 배치, 유용성 이란 측면에서 어른에게 자기만의 공간은 쓸모없다는 인식이 앞서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전혀 다른 이야길 하고 있다.  소란스런 세계, 벅적거리는 인간들을 피해, 지하작업실로 내려가는 순간, 저자는 "15살 이전 온 세계가 그 자체로 작업실 이었던 시간"으로 흘러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어른이란 이름으로 우린 15살 이전의 작업실을 세상에 반납하고 살아가는건 아닌가.  취미생활이라고 하는 모든 것이 실은 작업실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음악을 듣는 일, 영화를 보는 일, 글을 쓰는 일, 책을 읽는 일, 그것은 사사로운 공간에서 할 수는 없다.  일정한 시스템이 완비된 장소에서 해야 제대로 된 즐거움에 다가설 수 있는 것이다.  저자의 작업실이 벅찬 것은 사실이겠지만, 집안을 잘 살펴보면 어른들의 작업실로 꾸밀만한 공간이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사람들이 그런 작업실을 만들 생각을 하지 않고, 필요성도 느끼지 않을 뿐이다.  작업실이 왜 필요한가. 온전한 자아가 방해받지 않고 숨쉴 수 있는 공간이라서 그렇다.  그러니까, 자아 따위는 사춘기에 반납하고만 어른들에게 불필요한 공간인 것이다. 그런데, 휴가철이 되면 그때쯤엔 자아가 부활을 선언한다.   여름 휴가 며칠동안 되살아난 자아는 나를 찾아 떠나겠다고 법석을 떨곤 하니까 말이다.

완벽한 작업실을 소유한 표준 모델인 저자를 통해 깨달은 몇가지가 있다.  일단, 내가 가진 조그마한 작업실의 가치를 다시한번 소중히 여기게 됐다는 점 하나다.  김갑수의 작업실만큼 화려하고, 넓고, 조용하진 않지만 나는 그곳에서 저자가 즐기는 모든 일을 약간이마나 흉내내고 있다.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며, 가끔 졸면서 상상에 잠긴다.  저자의 작업실이 부러운 것은 사실이다.  이 책이 그런 부러움을 독자들의 뇌리에 각인시켜놓은 점을 높게 사줘야 한다.   김갑수는 이 책을 통해,  모든 독자들에게 작업실의 가치와 쓸모를 설파하고 안내한 선구자로 자리매김 할 것이다.  

또,  "깊이 아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이란" 저자의 말에서 받은 충격 또한 크다.  저자는 명실상부한 커피의 대가요, 오디오의 귀재요, 클래식 음악의 거장이었다. 또, 그 이전에 그는 시인이자 작가였다.  작업실에서 그는 자신만의 취향에 빠져들며 그 세계의 대가 대열에 올랐던 것이다. 좋아하는 단계에서 미치는 단계로 진입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은 수박 겉핥기가 단 몇 발자국 차이임을 깨닫고 원통할 것이다.  왜 좋아하면서 미칠 생각은 못했을까? 

" 서정은 서정을 가능하게 하는 별도의 환경과 공간을 찾는다. 그것이 내게는 자연 대신 작업실이다."  120쪽

커피를 좋아했지만, 커피를 제대로 마셔보겠다는 생각은 해본적이 없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지만, 공부하며 듣겠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책을 좋아하고 글쓰기를 계속해 왔지만 제대로 잘 쓰는 일이 무엇인지, 체계적으로 배울 생각은 없었다.  모든 것이 이런식이라면, 우리는 영원히 아마추어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 제대로 된 컨텐츠를 생산할 수 없다.  우리의 취미 생활이란게 대개 이런 식이다.  김갑수는 달랐다.  좋아하는 그 무엇을 위해 열정을 불사를 때, 그것은 더이상 기호의 세계가 아닌 지식의 반열에 오른다.  깊이 알지 못하면 아는 것이 아니요, 깊이 파고내려갈 때에야 우리는 진정 앎의 세계에 입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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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인간 - 제155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무라타 사야카 지음, 김석희 옮김 / 살림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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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인가. 일본 문학계를 발칵 뒤집어논 수상 소식이 전해졌다.  물론 이웃나라의 그 소식은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구미가 당기는 것은 분명했다.  일본 신인작가들에게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아쿠타가와상이 30대 미혼 여성에게 돌아갔다는 소식이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그는 18년 동안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뉴스 멘트는 즉각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말로만 듣던, 일본 프리터[영어의 `자유로움"을 뜻하는 프리(free)와 독어의 "노동자"를 뜻하는 "아르바이터"(arbeiter)를 합성한 일본의 신조어]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결국엔 수상에 실패했던 그 상을 움켜쥔 것이다.  더군다나, 수상작 제목이 `편의점 인간'이다.


이 깜짝 뉴스의 주인공은 18년간 편의점에서 일을 하며, 글을 써왔던 무라타 사야카다.  <편의점 인간>(살림 2016)은 일본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곧바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말할 것 없이 사람들의 호기심이 구매욕을 자극한 것이 분명했다.  재밌는 것은 작가가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도 바로 사람들의 그러한 시선에 관한 것이었다.  


주인공 후루쿠라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할 생각을 포기했다.  후루쿠라는 어린 시절부터 집단의 통념에 반대하는 방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걸 `즐겼다'. 그것이 그녀의 개성인지, 정신적인 문제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소설을 다 읽고 난 독자들은, 그것이 그저 한 사람의 개성일 뿐이라고 여길 수 있을 게다.  예를 들자면, 유치원 시절 엄마와 공원을 산책하다 죽은 새를 발견하고 엄마에게 가져가자 엄마는 여느 부모처럼, 호들갑을 떤다. "어머나, 작은 새가... 불쌍해라. 무덤을 만들어줄까?"  그러자, 후루쿠라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거 구워먹자, 아빠가 꼬치구이를 좋아하잖아" 라고 말하며, 엄마를 기절초풍케 한다.


초등학교에 막 들어갔을 때다.  체육시간에 남자애들이 맞붙어 싸우자 주위 아이들이 `누가 좀 말려줘'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선, 우리의 후루쿠라, 도구함을 열어젖히고 삽을 꺼내 난폭하게 날뛰는 아이의 뒷통수를 가격해 싸움을 `말리고 만다'.  선생님에게 끌려가 소리를 듣던 후루쿠라가 변명한다. "말리라고 해서 가장 빠를 것 같은 방법으로 말렸어요"   수업시간에 화가난 여선생님을 진정시키려고 선생님의 팬티와 스커트를 끌어내렸고 젊은 여선생님은 말문이 막히고 조용해졌으나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이 모든 예시는 그가 왜 서른 여섯에 취업도, 결혼도 포기하고 편의점 알바를 하고 있는지에 대한, 작가의 `궁색한' 알리바이인 듯하다. 


"아침이 되면 또 나는 점원이 되어 세계의 톱니바퀴가 될 수 있다.  그것만이 나를 정상적인 인간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30쪽, <편의점 인간> 무라타 사야카


사실, 그 둘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없다.   주인공은 대학시절 시작한 편의점 알바를 18년간이나 계속해 왔다.  그녀는 편의점에서 그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한다.  출퇴근 시간을 칼같이 지키며, 18년간 근태에 있어 모범적 점원으로 인정받았다. 1년이라면 모를까, 18년이라면 대단한 성실,근면의 표상이라 말할 수 있겠다. 그는 편의점이 작동하는 모든 메뉴얼을 꿰차고 있다.  그녀의 영업 노하우는 날씨,손님의 표정, 주위 상가와 건물의 개중축에 따라, 모두 대응할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하다.  과히, 그녀는 편의점이란 생태계에서 최고의 `비지니스우먼'인 셈이다.  그녀는 편의점 알바로 사는 삶에 만족한다.  누구에계 폐를 끼치지도 않고, 부모 형제에게 손을 벌리지도 않는다.  나름의 독신생활에 불만이 없고, 적은 소득에 만족하며, 알바지만 사회속 필요한 `부속품'으로 기여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소설이 묻고 있는 지점에 다가선다.  그럼에도, `당신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돼"라는 문제의식. 내 마음속에서 이는 불만과 의혹이 아니라, 나와 관계없는 그 모든 `타인들'의 마음속에서 아무때나 일고마는 `관심'과 `참견',  그것 말이다.


" 모두가 보조를 맞춰야만 하는 거죠. 30대 중반인데 왜 아직도 아르바이트를 하는가. 왜 한 번도 연애를 해본 적이 없는가. 성행위 경험이 있는지 없는지까지 태연히 물어봅니다. `창녀와 관계한 것 포함시키지 말고요' 하는 말까지 웃으면서 태연히 하죠, 그놈들은. 나는 누구한테 폐를 끼치고 있지 않은데, 단지 소수파라는 이유만으로 다들 내 인생을 간단히 강간해버려요 "  105쪽


소설은 이런 문제 의식을 편의점에 취업해 매우 불성실하게 일하고 결국 잘리고야 마는 남직원 `시라하'씨를 통해 증폭시킨다. 시라하는 주인공 후루쿠라와 대척점에 선 인물이다.  그는 같은 상황속에서도 현실에 불만이 많다.  무일푼이지만 허황된 꿈을 꾸고, 근태가 불량하며, 편의점 일에 불만을 갖는다.  그가 불만을 갖는 이유를 갖가지 대는데, 그것은 역사적으로 인간이 `조몬시대(신석기)'와 비교해 그 문명의 유전자가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문제의식에 기반한다.  `커다란 사냥감을 잡아오는 힘센 남자에게 여자가 몰려들고, 마을에서 제일가는 미녀가 시집가는' 그런 문명 유전자의 반복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능력없고 미모가 달려 무리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인간'들은 무리속에서 `간섭받길 강요당하고 최종적으로 무리에서 추방된다'는 것이다. 


후루쿠라와 시라하는 그러한 점에서 공통점을 발견하고 `계약관계'를 만들어 낸다.  이 소설의 유머와 페이소스(연민)이 발생하는 지점이 여기다. 집세도 못내 길거리로 내앉은 시라하를 편의점 18년 경력의 알바생 후루쿠라가 자신의 집 욕실을 내주며, 품어준다. 그들은 이상한 동거를 시작하는데 그 계약의 조건을 시라하는 내건다.  "나는 당신이 사람들로부터 시집도 못하고, 연애경력도 없고, 서른 중반에 편의점에서 일한다는 그런 편견을 제거해줄 구원자다."  나에게 잠잘 공간과 끼니때마다 굶어죽지 않을만큼의 먹이를 주면, 내가 그 역할을 해주겠다.  나를 통해 당신은 이제 편의점을 나와 어엿한 직장에 이력서를 낼 것이고, 나와 동거함으로써 연애한번 못해본 노처녀라는 편견에서 벗어날 것이다.  서글프게 그럴듯하지 않은가.  


" 후루쿠라 씨, 당신은 운이 좋아요. 처녀에다 독신에다 편의점 알바라는 삼중고를 겪고 있는 당신이 내 덕분에 기혼자 사회인이 될 수 있고, 누구나 당신이 처녀가 아니라고 생각할 테고, 주위에서 보기에 정상적인 인간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게 모든 사람이 가장 기꺼이 받아들이는 당신의 모습이에요. 잘 됐어요! "  165쪽


이런 내용의 작품에 일본문학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아쿠타가와상이 주어졌다는 건, 무슨 뜻일까?  무라타 사야카라는 무명 작가는 자전적인 이야길 소설로 만들어내며, 2016년 일본 문학계의 스타로 발돋음했다.  하지만, 왠지 씁쓸하다.   얼마 전, 행복지수 순위가 발표된 적이 있다.  의외의 결과에 깜짝 놀랐다.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사람은 직장인 독신 남자, 반면 행복지수가 가장 낮은 사람은 애가 두,서너명 딸린 맞벌이 직장맘이었다.   우리가 상상했던 것처럼 이 조사에서 `결혼'은 행복에 별 영향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주위 독신남녀들을 보는 기혼자들의 질문이란게 `결혼안해?' 정도다.  천편일률적이자 집단적인 사고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질문들은 그 자체가 관심이나 애정이 아니라 그냥 타인에 대한 `폭거'다. 


학창시절 우리가 귀가 아프도록 듣는 말이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 사회를 벗어나서는 살 수 없다. 정말 그럴까?  그 사회를 벗어나 살아가는 `자연인'들이 한 둘 인가?  교과서는 집단주의적 삶을 가르치고 그 집단을 벗어나는 인간을 `비정상'으로 규정한다. 어린 시절부터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랐기에 우리는 개인이 가진 주체로서의 삶, 나와 다른 라이프 스타일과 철학을 인정하지 못한다.  개인이라고 하는 것은 근대의 발명품이라고 한다.  인간은 수천년 동안 집단속에서 노예의 삶을 살았다.  즉, 개인이 아니라 신민[臣民]으로서 살았다. 신민이란 `전통적 신분제 사회안에서 권력과 재산을 소유하지 못한 채 의무만으로 그 권력자에게 복종과 착취의 대상으로만 존재했던 계급'이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사고는 여전히 신민인 사람들이 21세기의 대로를 활보한다.  그들은 개인이라는 발명품이 개발된 것도 잊은채,  조먼시대의 사냥꾼에서 한발짝도 진화하지 못한걸 알기나 할까?


<편의점 인간>은 타인의 시선과 그들이 가진 편견의 폭력을 정면에서 문제삼은 작품이다.  무척 잘 읽히고, 공감이 가며, 사람들의 잘못된 사고를 꼬집고 있는 작품이다. 또, 사회구조적인 이유로 위기에 내몰린 젊은이들의 삶을 단지 개인의 잘못으로 치환하고야 마는 편견을 폭로하고 있다.  우리가 문학작품을 읽는 이유는 그 어떤 삶에서 위로를 얻기 위해서기도 하다.  모두가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멋진 삶을 살 수는 없다. 현실은 냉혹하고 쓸쓸하며, 비참하고 슬프다.  행복한 사람들은 행복을 논하지 않는다. 인생이 불만으로 가득찼기에 우린 행복의 파랑새를 계속해 찾고 있는 것이다.  


그때, 어딘가에서  `그렇게 살아도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그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가.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의 신화>라는 에세이에서 자살을 논하며 이런 말을 했다.  그의 언설은 <편의점 인간>의 문제의식을 그대로 함축한다.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쪽박은 깨지 말아야 한다는 것!  시선과 편견의 폭력은 그 누구에게도 예외없이 작동하는 원시적인 집단주의의 악습이다.  그것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이 공포스럽지 않은가. 


" 자살에 관해 신문은 종종 `슬픔'이나 `불치의 병' 등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이러한 설명은 수긍이 갈 만하다. 그러나 바로 그날, 절망적인 사람의 한 친구가 그에게 무관심한 어조로 말하지나 않았는가를 알 필요가 있다. 바로 그 자가 죄인이다.  왜냐하면 아직도 유예 상태에 있던 그 모든 원한과 온갖 권태를 재촉하여 떠밀기에 충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알베르 카뮈, <시지프의 신화>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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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양장)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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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게 처녀작은 위대하거나 미숙하거나 둘 중 하나인 경우가 많다. 명작은 쉽게 나오지 않기에 어떤 작가의 처녀작에서 나올 확률이 그만큼 높다는 얘기다. 젊은 작가들은 무엇보다 열정과 에너지가 넘치고 지적으로 충만하다. 그냥 펜을 굴리기만 해도 이야기가 술술 풀려나올수도 있다.  무엇보다 그는 이제 이야기의 둑에 작은 구멍을 낸 처지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미숙한 졸작이 될 수도 있다.  그 증거는 자기 경험을 객관화시키는 방식이 서툴러서 그것이 자전적 이야기에서 소설로 환치되지 못한 경우다. 


작년에도 노벨문학상 수상에 물을 먹고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문학사상사 2006)는 어떤 경우일까. 아무래도, 후자에 좀 더 가깝지 않나 생각한다. 유명 작가가 된 이후에 이 작품을 읽었기 망정이지, 아니라면 독자들은 심히 실망했을지 모른다. 나같은 경우가 그렇다. 이 작품을 완독한 건 몇 달 전이다.  후기를 남길까, 말까, 고심하다가 책은 책장에서 잠이 들었다. 이런 평가는 나뿐만이 아니었는가보다. 이 소설에 군조신인문학상을 안겨준 출판사의 고위 인사는 하루키에게 축하를 건네면서도 "자네 작품에는 상당히 문제가 많다"고 고까운 소릴 했다. 


무엇보다 하루키 자신이 이 소설을 다시 읽는 일이 고통스럽고 지겹단 투로 말하고 있다. 자기가 쓴 글을 다시 읽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것도 명작이라고 평가받지 못하고 미숙함이 묻어있는 처녀작은 두말할 필요 없겠다. 이 작품이 출판되고선 만나는 사람마다 한소리씩 했다. "그게 소설이라면 나도 그 정도는 쓸 수 있다"고 말이다. 하루키는 이 말을 지금에서 회상하면서 발끈하고야 만다. 콜럼버스의 달걀이라는 우화 모르시나?  그런 말을 하고 있는 인사치고 자기 소설을 써서 완성했다는 사람 못봤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초야에 잠들어 있는 고수들이 한 둘인가. 그들이 실력을 갈고 닦았다면, 즉 말을 행동으로 옮기는 인내심만 보여줬어도 세상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테니까.


이 소설을 읽고 후기를 남기려고 하는 이들은 난관에 봉착한다.  별 쓸 이야기가 없다는 점 때문이다.  이야기를 읽었는데 이야기에 대해 할 말이 없고, 이야기를 요약할 수도 없다면?  독자는 소설을 읽었다고 할 수 있나?  하루키의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소설로서 애매모호한 이야기인 것은 이 역설에서 시작한다고 본다. 특히, 소설에서 삶을 보고 느끼고 교훈을 얻고 효용을 생각하고픈 독자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야기의 앞,뒤 맥락을 분석해 뭔가 그럴듯한 비평에 다가서려는 서평가들에게 하루키의 이 작품은 애물단지다. 


나또한 이 서평을 쓰면서 그런 접근은 포기했다. 하지만, 이 작품에 대한 서평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역시 하루키다운 `한방'은 작가로서 막 발을 디딘 그때나 지금이나 비장의 무기로 기능하며, 그의 문장속에 살아 있었다. 특히, 하루키가 이 작품을 쓰기 시작한 1979년에는 누구도 하루키처럼 소설을 쓰지 않았다.  이야기가 발단에서 전개되고,  위기를 지나 절정을 넘어, 결말로 치닫지 않는다.  그는 소설 쓰기의 정석을 우회하면서 전혀 다른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문장들은 무겁지 않고, 수사는 문학적으로 세심하지 않고, 파격적인 사건은 없으나 신선하고 가벼운 문장들로 누군가의 경험치의 유사성에 기대, 소설을 이끌어 나간다.  


하루키다운 상상력과 스타일의 출현, 그것이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오늘의 독자들이 한번쯤 읽어봐야할 핑계다. 특히, 이 소설에는 하루키의 30대 이전의 삶이 곳곳에 배어나온다.  즉, 대학시절 결혼해 일찍 가정을 꾸리고 생계를 위해 음악주점 사장으로 20대를 온통 보내고 만, 젊은이 말이다. 연극을 전공했지만 시나리오 쓰는 재능은 없다는 자책감과 어린 시절부터 보이는 책은 몽땅 먹어치운, 굶주린 독자였지만, 글쓰기에서는 항상 두려움을 갖고 있었던 희망속의 작가.  맥주를 좋아하고, 야구 경기를 즐기며, 수많은 이성과 연애를 하고 실패를 맛보며, 또 그것을 즐겼던 평범한 청년.  그런데, 그 어디에도 소설이 될만한 화끈한 주제는 없다.


"완벽한 문장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중략) 그러나, 그래도 역시 뭔가를 쓰려고 하면 언제나 절망적인 기분에 사로잡혔다.  내가 쓸 수 있는 영역은 너무나도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코끼리에 대해서는 뭔가를 쓸 수 있다해도, 코끼리 조련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그런 뜻이다. 8년 동안 나는 계속 그런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8년 동안. 긴 세월이다. "  9쪽, 무라카미 하루키 <바람의 노래륻 들어라>


독자들의 이목을 단번에 집중시킬 화끈한 주제, 그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모든 소설가란 직업의 아이러니다. 그런 주제를 알지 못하면서 찾아나서야 하는 것 말이다. 하루키는 이 소설에서 소설 쓰는 방법을 터득한다. 이 방법이 결국 하루키를 하루키답게 만들고, 독자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던 `비밀병기' 같은 것이 될 것은 하루키 자신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피츠제럴드는 "타인과 다른 뭔가를 얘기하고 싶다"면 "타인과 다른 언어로 얘기하라"고 조언한다.  하루키는 이 조언을 바탕으로 자신의 기분을 정직하게 환치하는 소설을 쓰고 싶어했다. 그런데, 정직하게 쓰려할 수록 정직하지 않은 문장들이 만들어진다는 깨달음에 이른다.


문장을 문학적인 언어로 심화시킬수록 거기에 담기는 생각은 부정확해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해서, 하루키는 그 누구도 만들어 쓰지 않았던 심플한 언어와 심플한 문장을 만들어서, `심플하지 않은 현실'을 그려보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루키는 소설가가 되는 첫번째 관문, 문학적인 문장구사라는 난관을 벗어나, 독창적인 하루키만의 문장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방법을 터득한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속에 등장하는 하트필드라는 20세기 작가가 딱 그런 경우다.  그의 문장은 "읽기 힘들고, 스토리는 엉망이고, 테마는 치졸했다."  하루키는 작중인물의 대사를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트필드는 글을 무기로 싸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뛰어난 작가였다"고 구술한다.


하트필드는 이 소설 속 주인공을 글쓰기의 세계로 인도한 작가로 나온다. 하트필드는 누구인가.  인터넷 검색망에도 걸리지 않는 그는, 하루키가 창조해낸 허구속의 작가다.  하루키는 그에 대한 애정을 소설 곳곳에서 언급한다. "8년 2개월, 하트필드는 그런 불모의 싸움을 계속하다가 죽었다"고 언급한 것에서 8년이란 숫자에 주목해보면 하루키가 글을 쓰기 위해 딜레마에 빠졌던 시간과 겹친다.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등장인물들의 뒷이야기가 전해진다. 


소설 속 `나'와 제이스 바에서 맥주를 나눠마시고 땅콩껍질을 바닥에 5센치 높이로 쌓아올린 쥐란 친구는 본래, 소설이 뭔지도 모르는 친구였다. 그런데, 그는 막 서른이 되었을 때 소설을 취미삼아 쓰며 매년 자신이 쓴 소설을 보내온다.  그의 소설 특징은 `섹스장면이 없고, 등장인물은 단 한 사람도 죽지 않는 것'이다. 왜냐면, 쥐가 그런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막 가정을 꾸렸고 도쿄에 살고 있다. 나는 쉬는 날이면 아내와 샘 페킨파 감독의 영화를 즐겨 본다.  돌아올 때는 히비야 공원에 들러 맥주를 마시고 비둘기에게 팝콘을 던져준다.


한 때 연애 상대였던 왼쪽 손가락이 네 개밖에 없던 레코드 가게의 점원 여자는 그곳을 그만두고, 자취를 감췄다.  그 누구가의 젊은날에 등장할만한 인물들, 연애담이자, 약간의 허구에 기댄 작가의 분신 하트필드까지.  존재할 것 같지만,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 그것을 모두 한 냄비속에 넣고 담박하게 졸여내는 것, 이게 문학 아닐까.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일은 즐거운 작업이기도 하다. 삶이 힘든 것에 비하면 글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너무나도 간단하기 때문이다.  십대 무렵이었을까, 나는 그런 사실을 깨닫고 일주일쯤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란 적이 있다. 조금만 약삭빠르게 굴면 세상은 내 뜻대로 되고, 모든 가치는 전환되고, 시간은 흐름을 바꾼다....그런 느낌이 들었다"  14쪽


하루키의 젊은 날을 상상하게 해주는 소설이자 문학상을 안겨주며 소설가로 발딛게 해주었던 행운의 작품, 아마도 작가에게 이 작품은 여러모로 의미깊을 듯하다. 비록, 평론가와 짓궂은 독자들의 야유를 받을지언정말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은 대단한 일일까. 그것이 인간으로서 품격을 높이고, 인격을 높이는 일일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이들 가운데 고약한 `악당'들이 더 많다.  청문회에 나온 그 뻔뻔한 인간들을 보라. 거짓말의 고수들은 표정을 봐선 그 속마음을 읽을 수가 없는 경지에 올라서 있다.  책읽고 글쓰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알고 인정하는 게 우선이다.  그후,  꿋꿋하게 그 일에 상상력을 더해 계속해 나가는 일.  소설 속 하트필드가 재능의 불모를 깨닫고도서도 멈추지 않았던 것처럼.  콜럼부스가 달걀을 깨서 탁자위에 세웠던 것처럼, 그렇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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