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인간 - 제155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무라타 사야카 지음, 김석희 옮김 / 살림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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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인가. 일본 문학계를 발칵 뒤집어논 수상 소식이 전해졌다.  물론 이웃나라의 그 소식은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구미가 당기는 것은 분명했다.  일본 신인작가들에게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아쿠타가와상이 30대 미혼 여성에게 돌아갔다는 소식이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그는 18년 동안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뉴스 멘트는 즉각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말로만 듣던, 일본 프리터[영어의 `자유로움"을 뜻하는 프리(free)와 독어의 "노동자"를 뜻하는 "아르바이터"(arbeiter)를 합성한 일본의 신조어]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결국엔 수상에 실패했던 그 상을 움켜쥔 것이다.  더군다나, 수상작 제목이 `편의점 인간'이다.


이 깜짝 뉴스의 주인공은 18년간 편의점에서 일을 하며, 글을 써왔던 무라타 사야카다.  <편의점 인간>(살림 2016)은 일본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곧바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말할 것 없이 사람들의 호기심이 구매욕을 자극한 것이 분명했다.  재밌는 것은 작가가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도 바로 사람들의 그러한 시선에 관한 것이었다.  


주인공 후루쿠라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할 생각을 포기했다.  후루쿠라는 어린 시절부터 집단의 통념에 반대하는 방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걸 `즐겼다'. 그것이 그녀의 개성인지, 정신적인 문제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소설을 다 읽고 난 독자들은, 그것이 그저 한 사람의 개성일 뿐이라고 여길 수 있을 게다.  예를 들자면, 유치원 시절 엄마와 공원을 산책하다 죽은 새를 발견하고 엄마에게 가져가자 엄마는 여느 부모처럼, 호들갑을 떤다. "어머나, 작은 새가... 불쌍해라. 무덤을 만들어줄까?"  그러자, 후루쿠라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거 구워먹자, 아빠가 꼬치구이를 좋아하잖아" 라고 말하며, 엄마를 기절초풍케 한다.


초등학교에 막 들어갔을 때다.  체육시간에 남자애들이 맞붙어 싸우자 주위 아이들이 `누가 좀 말려줘'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선, 우리의 후루쿠라, 도구함을 열어젖히고 삽을 꺼내 난폭하게 날뛰는 아이의 뒷통수를 가격해 싸움을 `말리고 만다'.  선생님에게 끌려가 소리를 듣던 후루쿠라가 변명한다. "말리라고 해서 가장 빠를 것 같은 방법으로 말렸어요"   수업시간에 화가난 여선생님을 진정시키려고 선생님의 팬티와 스커트를 끌어내렸고 젊은 여선생님은 말문이 막히고 조용해졌으나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이 모든 예시는 그가 왜 서른 여섯에 취업도, 결혼도 포기하고 편의점 알바를 하고 있는지에 대한, 작가의 `궁색한' 알리바이인 듯하다. 


"아침이 되면 또 나는 점원이 되어 세계의 톱니바퀴가 될 수 있다.  그것만이 나를 정상적인 인간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30쪽, <편의점 인간> 무라타 사야카


사실, 그 둘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없다.   주인공은 대학시절 시작한 편의점 알바를 18년간이나 계속해 왔다.  그녀는 편의점에서 그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한다.  출퇴근 시간을 칼같이 지키며, 18년간 근태에 있어 모범적 점원으로 인정받았다. 1년이라면 모를까, 18년이라면 대단한 성실,근면의 표상이라 말할 수 있겠다. 그는 편의점이 작동하는 모든 메뉴얼을 꿰차고 있다.  그녀의 영업 노하우는 날씨,손님의 표정, 주위 상가와 건물의 개중축에 따라, 모두 대응할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하다.  과히, 그녀는 편의점이란 생태계에서 최고의 `비지니스우먼'인 셈이다.  그녀는 편의점 알바로 사는 삶에 만족한다.  누구에계 폐를 끼치지도 않고, 부모 형제에게 손을 벌리지도 않는다.  나름의 독신생활에 불만이 없고, 적은 소득에 만족하며, 알바지만 사회속 필요한 `부속품'으로 기여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소설이 묻고 있는 지점에 다가선다.  그럼에도, `당신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돼"라는 문제의식. 내 마음속에서 이는 불만과 의혹이 아니라, 나와 관계없는 그 모든 `타인들'의 마음속에서 아무때나 일고마는 `관심'과 `참견',  그것 말이다.


" 모두가 보조를 맞춰야만 하는 거죠. 30대 중반인데 왜 아직도 아르바이트를 하는가. 왜 한 번도 연애를 해본 적이 없는가. 성행위 경험이 있는지 없는지까지 태연히 물어봅니다. `창녀와 관계한 것 포함시키지 말고요' 하는 말까지 웃으면서 태연히 하죠, 그놈들은. 나는 누구한테 폐를 끼치고 있지 않은데, 단지 소수파라는 이유만으로 다들 내 인생을 간단히 강간해버려요 "  105쪽


소설은 이런 문제 의식을 편의점에 취업해 매우 불성실하게 일하고 결국 잘리고야 마는 남직원 `시라하'씨를 통해 증폭시킨다. 시라하는 주인공 후루쿠라와 대척점에 선 인물이다.  그는 같은 상황속에서도 현실에 불만이 많다.  무일푼이지만 허황된 꿈을 꾸고, 근태가 불량하며, 편의점 일에 불만을 갖는다.  그가 불만을 갖는 이유를 갖가지 대는데, 그것은 역사적으로 인간이 `조몬시대(신석기)'와 비교해 그 문명의 유전자가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문제의식에 기반한다.  `커다란 사냥감을 잡아오는 힘센 남자에게 여자가 몰려들고, 마을에서 제일가는 미녀가 시집가는' 그런 문명 유전자의 반복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능력없고 미모가 달려 무리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인간'들은 무리속에서 `간섭받길 강요당하고 최종적으로 무리에서 추방된다'는 것이다. 


후루쿠라와 시라하는 그러한 점에서 공통점을 발견하고 `계약관계'를 만들어 낸다.  이 소설의 유머와 페이소스(연민)이 발생하는 지점이 여기다. 집세도 못내 길거리로 내앉은 시라하를 편의점 18년 경력의 알바생 후루쿠라가 자신의 집 욕실을 내주며, 품어준다. 그들은 이상한 동거를 시작하는데 그 계약의 조건을 시라하는 내건다.  "나는 당신이 사람들로부터 시집도 못하고, 연애경력도 없고, 서른 중반에 편의점에서 일한다는 그런 편견을 제거해줄 구원자다."  나에게 잠잘 공간과 끼니때마다 굶어죽지 않을만큼의 먹이를 주면, 내가 그 역할을 해주겠다.  나를 통해 당신은 이제 편의점을 나와 어엿한 직장에 이력서를 낼 것이고, 나와 동거함으로써 연애한번 못해본 노처녀라는 편견에서 벗어날 것이다.  서글프게 그럴듯하지 않은가.  


" 후루쿠라 씨, 당신은 운이 좋아요. 처녀에다 독신에다 편의점 알바라는 삼중고를 겪고 있는 당신이 내 덕분에 기혼자 사회인이 될 수 있고, 누구나 당신이 처녀가 아니라고 생각할 테고, 주위에서 보기에 정상적인 인간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게 모든 사람이 가장 기꺼이 받아들이는 당신의 모습이에요. 잘 됐어요! "  165쪽


이런 내용의 작품에 일본문학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아쿠타가와상이 주어졌다는 건, 무슨 뜻일까?  무라타 사야카라는 무명 작가는 자전적인 이야길 소설로 만들어내며, 2016년 일본 문학계의 스타로 발돋음했다.  하지만, 왠지 씁쓸하다.   얼마 전, 행복지수 순위가 발표된 적이 있다.  의외의 결과에 깜짝 놀랐다.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사람은 직장인 독신 남자, 반면 행복지수가 가장 낮은 사람은 애가 두,서너명 딸린 맞벌이 직장맘이었다.   우리가 상상했던 것처럼 이 조사에서 `결혼'은 행복에 별 영향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주위 독신남녀들을 보는 기혼자들의 질문이란게 `결혼안해?' 정도다.  천편일률적이자 집단적인 사고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질문들은 그 자체가 관심이나 애정이 아니라 그냥 타인에 대한 `폭거'다. 


학창시절 우리가 귀가 아프도록 듣는 말이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 사회를 벗어나서는 살 수 없다. 정말 그럴까?  그 사회를 벗어나 살아가는 `자연인'들이 한 둘 인가?  교과서는 집단주의적 삶을 가르치고 그 집단을 벗어나는 인간을 `비정상'으로 규정한다. 어린 시절부터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랐기에 우리는 개인이 가진 주체로서의 삶, 나와 다른 라이프 스타일과 철학을 인정하지 못한다.  개인이라고 하는 것은 근대의 발명품이라고 한다.  인간은 수천년 동안 집단속에서 노예의 삶을 살았다.  즉, 개인이 아니라 신민[臣民]으로서 살았다. 신민이란 `전통적 신분제 사회안에서 권력과 재산을 소유하지 못한 채 의무만으로 그 권력자에게 복종과 착취의 대상으로만 존재했던 계급'이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사고는 여전히 신민인 사람들이 21세기의 대로를 활보한다.  그들은 개인이라는 발명품이 개발된 것도 잊은채,  조먼시대의 사냥꾼에서 한발짝도 진화하지 못한걸 알기나 할까?


<편의점 인간>은 타인의 시선과 그들이 가진 편견의 폭력을 정면에서 문제삼은 작품이다.  무척 잘 읽히고, 공감이 가며, 사람들의 잘못된 사고를 꼬집고 있는 작품이다. 또, 사회구조적인 이유로 위기에 내몰린 젊은이들의 삶을 단지 개인의 잘못으로 치환하고야 마는 편견을 폭로하고 있다.  우리가 문학작품을 읽는 이유는 그 어떤 삶에서 위로를 얻기 위해서기도 하다.  모두가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멋진 삶을 살 수는 없다. 현실은 냉혹하고 쓸쓸하며, 비참하고 슬프다.  행복한 사람들은 행복을 논하지 않는다. 인생이 불만으로 가득찼기에 우린 행복의 파랑새를 계속해 찾고 있는 것이다.  


그때, 어딘가에서  `그렇게 살아도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그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가.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의 신화>라는 에세이에서 자살을 논하며 이런 말을 했다.  그의 언설은 <편의점 인간>의 문제의식을 그대로 함축한다.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쪽박은 깨지 말아야 한다는 것!  시선과 편견의 폭력은 그 누구에게도 예외없이 작동하는 원시적인 집단주의의 악습이다.  그것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이 공포스럽지 않은가. 


" 자살에 관해 신문은 종종 `슬픔'이나 `불치의 병' 등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이러한 설명은 수긍이 갈 만하다. 그러나 바로 그날, 절망적인 사람의 한 친구가 그에게 무관심한 어조로 말하지나 않았는가를 알 필요가 있다. 바로 그 자가 죄인이다.  왜냐하면 아직도 유예 상태에 있던 그 모든 원한과 온갖 권태를 재촉하여 떠밀기에 충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알베르 카뮈, <시지프의 신화>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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