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구 위의 작업실
김갑수 지음, 김상민 그림, 김선규 사진 / 푸른숲 / 2009년 6월
평점 :
어둑컴컴한 지하실에서 우아한 포즈로 커피를 내리는 표지 사진이 인상적이다. 뒷 배경은 더군다나 책인지 음반인지 벽 전체를 꽉 채우고 있는 분위기가 커피향과 잘 어울리는듯 하다. 저런 곳에서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신다면, 어떤 기분일까. 사람마다 취향이 좀 다르겠지만, 그 무언가에 집중하는 힘만큼은 강렬할 것 같다. 제목이 그러고보니 표지 사진을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지구 위의 작업실>, 시인으로 데뷔해 지금은 종편 시사프로그램이나 예능에 가끔 얼굴을 내밀고 사는 김갑수 작가다.
종편에 나와 진보진영의 편에서 보수인사들과 논쟁을 할 때 은근히 그가 이겨주길 바랐다. 해박한 지식과 교양에 기초한 말빨로 매번 진보 진영을 선방하던 그, 때로 거침없이 자신의 정치적 편향성을 드러내며 독자와 시청자를 민망하게도 했던 그. 수년 전에 쓴 이 책을 통해 김갑수는 자신의 정체성을 만천하에 공개하고야 만다. 그것은 정치나 시사 혹은 세계관 따위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순전히 호불호, 기호, 취향, 취미에 관한 내향적인 보고서를 책 한 권으로 써냈다. 그것도 쉰이 막 넘은 나이에 말이다. 이 취향에 관한 보고서에 그 누가 시비를 걸겠는가. 뭔가에 미쳐 있다는 것은 그것이 사회통념을 어긋나지 않는 한,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김갑수는 세가지에 미쳤다. 커피, 책, 음악....! 감초주사나 보톡스, 프로포폴 같은게 아니라서 다행이다. 따지고 보면, 교양인과 문화인들에게 필수적인 세가지 아이템이다. 미친다는 것은 좋아한다는 것과 개념이 다른 말이다. 다들 음악이나 커피나 책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미친다는 것은 그에 관해 뿌리까지 `탐구하고, 탐욕하며, 탐험'하는 일이다. 소위 말해서 아마추어의 경지를 넘어, 전문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단계에서 우리는 미쳤다는 말을 건넨다. 이 책은, 이 세가지에 탐심한 인생을 그린다. 인생이란 무얼까요? 라는 물음에 저자는 이 세가지 단어로 대답할 것이다. 커피, 책, 음악! 끝!
형이상학적인 얘기 따윈 집어치워라. 그 대신 김갑수는 " 내 지하작업실에서 커피를 내려 하루 종일 홀짝이며, 가끔 활자에 코를 박고 있다가, 대부분의 시간 음반을 닦거나 듣는 일로 시간을 보냅니다. 그게 내 삶이 흘러가는 방식이며 과정이지요" 멋지지 않은가. 단순히 멋지다고 표현할 일은 아닌 듯하다. 보통인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절차와 투쟁이 이 삶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독신남도 아니고, 부유한 갑부도 아니면서, 어떻게 고가의 커피머신, 그보다 더 고가인 골동품에 가까운 스피커들을 모셔오고, 3만장의 희귀 LP를 수집하면서, 가정을 꾸린 부부가 생이별을 감수하고, 별도의 작업실을 마련해 놓고 주말부부 노릇을 한단 말인가?
뭐, 상상은 가능하다. 그의 아내는 의사다. 저자는 방송일과 인세수입, 강연 등으로 사는데 지장이 없다. 문제는 그의 아내가 집안 살림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퇴근 후에는 책만 본다는 것이다. 그 정도를 상상할 수 있는 일화 한가지! 작고 하기 전 소설가 이청준과 함게 여행을 떠난 저자, 선생께 "밥도 안 해주는 마누라 섬기는 자랑을 했더니 사근사근하고 온화한 노작가께서 주위가 놀랄 만큼 큰소리로 발끈했다" "기럼 좆 빨라고 장가갔냐?" (194쪽) 결혼식 축의금을 계산 하고, 결혼 전에 고가의 스피커를 구매한 저자도 만만찮다. 결혼후 3년만에 취향의 다름을 확인하고 스위트홈 대신, 따로 공간을 마련해 독립한 저자는 이렇게 묻는다. " 왜 부부는 언제나 붙어 지내야만 하나요?" (195쪽)
`줄라이 홀'은 저자 지하작업실 애칭이다. 독특한 이름은 작업실을 첫 방문한 외국 여성 게스트의 이름에서 차용했단다. 그리고 십 수년 저자는 지하공간에 자신만의 폐쇄적인 공간을 만들어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음악을 듣고, 스피커를 부둥켜 안고 살아간다. 그것이 저자의 인생이다. 이 자유로운 영혼에 시비를 걸 사람이 누구던가.
"사람들은 어떻게 타인과 함께 일을 하고 모임을 이루고 가족을 구성하는 것일까. 다들 그렇게 살고들 있는데 그렇다면 타인과 섞이는 그 순간에 온전한 자아는 증발된 상태라고 보아야 한다. 나로서 충만한 상태라면 단 한 사람의 타자도 수용할 수가 없다. 자아 또는 자의식의 증발, 그것은 고통일까 즐거운 휴식일까." 91쪽, 김갑수 <지구 위의 작업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아니 좀 더 어른스러워 진다는 것을 사람들은 자기 공간을 없애는 것으로 착각하곤 한다. 결혼 생활이 시작되는 순간, 부부 모두 자기 공간은 사라지고 공통의 공간(침실,거실,부엌)만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아이가 생기면 아이에게 공부방을 양보하고, 아이의 공부방을 잘 꾸며주는 것은 신경쓰면서도 부부 자신만의 공간을 만드는 일은 상상 밖이 되곤 한다. 경제적, 공간 배치, 유용성 이란 측면에서 어른에게 자기만의 공간은 쓸모없다는 인식이 앞서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전혀 다른 이야길 하고 있다. 소란스런 세계, 벅적거리는 인간들을 피해, 지하작업실로 내려가는 순간, 저자는 "15살 이전 온 세계가 그 자체로 작업실 이었던 시간"으로 흘러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어른이란 이름으로 우린 15살 이전의 작업실을 세상에 반납하고 살아가는건 아닌가. 취미생활이라고 하는 모든 것이 실은 작업실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음악을 듣는 일, 영화를 보는 일, 글을 쓰는 일, 책을 읽는 일, 그것은 사사로운 공간에서 할 수는 없다. 일정한 시스템이 완비된 장소에서 해야 제대로 된 즐거움에 다가설 수 있는 것이다. 저자의 작업실이 벅찬 것은 사실이겠지만, 집안을 잘 살펴보면 어른들의 작업실로 꾸밀만한 공간이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사람들이 그런 작업실을 만들 생각을 하지 않고, 필요성도 느끼지 않을 뿐이다. 작업실이 왜 필요한가. 온전한 자아가 방해받지 않고 숨쉴 수 있는 공간이라서 그렇다. 그러니까, 자아 따위는 사춘기에 반납하고만 어른들에게 불필요한 공간인 것이다. 그런데, 휴가철이 되면 그때쯤엔 자아가 부활을 선언한다. 여름 휴가 며칠동안 되살아난 자아는 나를 찾아 떠나겠다고 법석을 떨곤 하니까 말이다.
완벽한 작업실을 소유한 표준 모델인 저자를 통해 깨달은 몇가지가 있다. 일단, 내가 가진 조그마한 작업실의 가치를 다시한번 소중히 여기게 됐다는 점 하나다. 김갑수의 작업실만큼 화려하고, 넓고, 조용하진 않지만 나는 그곳에서 저자가 즐기는 모든 일을 약간이마나 흉내내고 있다.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며, 가끔 졸면서 상상에 잠긴다. 저자의 작업실이 부러운 것은 사실이다. 이 책이 그런 부러움을 독자들의 뇌리에 각인시켜놓은 점을 높게 사줘야 한다. 김갑수는 이 책을 통해, 모든 독자들에게 작업실의 가치와 쓸모를 설파하고 안내한 선구자로 자리매김 할 것이다.
또, "깊이 아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이란" 저자의 말에서 받은 충격 또한 크다. 저자는 명실상부한 커피의 대가요, 오디오의 귀재요, 클래식 음악의 거장이었다. 또, 그 이전에 그는 시인이자 작가였다. 작업실에서 그는 자신만의 취향에 빠져들며 그 세계의 대가 대열에 올랐던 것이다. 좋아하는 단계에서 미치는 단계로 진입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은 수박 겉핥기가 단 몇 발자국 차이임을 깨닫고 원통할 것이다. 왜 좋아하면서 미칠 생각은 못했을까?
" 서정은 서정을 가능하게 하는 별도의 환경과 공간을 찾는다. 그것이 내게는 자연 대신 작업실이다." 120쪽
커피를 좋아했지만, 커피를 제대로 마셔보겠다는 생각은 해본적이 없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지만, 공부하며 듣겠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책을 좋아하고 글쓰기를 계속해 왔지만 제대로 잘 쓰는 일이 무엇인지, 체계적으로 배울 생각은 없었다. 모든 것이 이런식이라면, 우리는 영원히 아마추어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 제대로 된 컨텐츠를 생산할 수 없다. 우리의 취미 생활이란게 대개 이런 식이다. 김갑수는 달랐다. 좋아하는 그 무엇을 위해 열정을 불사를 때, 그것은 더이상 기호의 세계가 아닌 지식의 반열에 오른다. 깊이 알지 못하면 아는 것이 아니요, 깊이 파고내려갈 때에야 우리는 진정 앎의 세계에 입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