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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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묻는다.  왜 잊혀질만한 하면 우리는 누추하고 추악한 역사를 끄집어 내, 사람들의 기분을 망쳐놓는 것일까.  벌써, 30년이 한참 지난 일이지만 왜 선거때만 되면 유력 대권주자들은 그곳을 찾아, 영정앞에서 눈시울을 붉히며 카메라 셔터의 소음을 들어야 하는 걸까. 매년 그 날만 되면, 역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한 이들이라면 저 남쪽 어느 도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 하는 것일까.  `부채의식'이다.  30년 동안, 역사서의 몇 줄 문장으로만 모면하려 했던 추념의 예식 같은 것 말이다.   어쩌면 `양심'일지도 모른다.  권불십년, 10년을 못갈 그깟 권력의 달콤함에 젖어서라도 그런 짓은 상상속에서만 가능해야 했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난 것이다.  나는 그래도 그 자리에 없어서 화를 모면했다는 이 면목없는 안도감이 당혹스럽다.  한강의 소설은 1980년 5월 18일로부터 1주일간, 대한민국의 어느 봉쇄되고 포위된 한 도시속 믿기어려운 사건과 그 사건에 맞닥뜨린 사람들의 이야기다.  

한강의 소설로서는 <채식주의자> 이후, 두번째 만남이다.  첫 만남이 중요한데, 이 작가와는 좀 인연이 닿지 않았나보다.  그의 문장들에 적응하는데 애를 먹은 나는 <채식주의자>의 알 수 없는 고단한 필체에 피로감을 느꼈다.  주제의식은 선명하였다.  그런데, 문장이 왜 그리 자기 멋대로인지, 소설 문장이 일기장처럼 읽힐 때의 독자로서의 소외감 때문이었을까.  세상 모든 고통을 혼자 짊어진듯한 작가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다고나 할까.  그런 고통을 형용하는 것이 문학이란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채식주의자가 그 고통을 대변하기엔 세상이 그리 한가롭지 않지 않나?   아무튼 내게 <채색주의자>는 썩 와닿지 않았다.  육식을 순수성의 파괴, 인간의 본능적 폭력성의 상징으로 되돌리는 작업은 이해하였지만, 우리는 매일 고기를 뜯어먹는게 일상사이지 않나?  그래서 뭐 어쨌단 건가? 

<소년이 온다>(창비,2014)를 읽고 이 오해는 조금 풀렸다.  이 작가의 지문같은 문장은 존중받아야 할 그의 개성이었음을, 더군다나 맘에 들지 않던 그녀의 문체가 이 소설에서 시의적절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 또 소설 혹은 시, 많은 소재로 사용되었던 그날의 사건은 장르의 형식에 매몰돼, 매번 제대로 표현되지 못하였다.  기성복을 입은 듯, 고통과 슬픔을 묘사하는 매너리즘에 빠져버렸다고나 할까.  그에 비해, 한강의 소설은 정교하게 재단된 맞춤복이다.  픽션이라면 분노하고 공감하며 애도하지 않겠는가. 그들을 폭도나 빨갱이로 바라보는 당신까지도 인간이라면 눈시울 붉어지지 않겠는가.  그는 사뭇 부채의식 같은 거라곤 알 바 없는, 시큰둥한 독자들에게 그 낯선 이야길 건넬 때, 어떻게 다가서야 하는지 알고 글을 쓰는 듯했다.  

"네 중학교 학생증에서 사진만 오려갖고 지갑 속에 넣어놨다니.  낮이나 밤이나 텅 빈 집이지마는 아무도 찾아볼 일 없는 새벽에, 하얀 습자지로 여러번 접어 싸놓은 네 얼굴을 펼쳐본다이. 아무도 엿들을 사람이 없지마는 가만가만 부른다이....동호야"  192쪽, 한강 <소년이 온다> 

십수년이 흘러, 엄마는 앳된 나이에 시민군 오빠,누나들과 함께 도청안에 있다 희생된 동호의 어린 시절의 기억 하나하나를 되짚는다. `꽃 핀 쪽으로'라는 장에서다.  이 소설이 실제의 사건들의 처절한 묘사와 등장인물들의 가상적인 고통에서 빗겨나, 문학이란 이름으로 독자의 넋을 빼놓고 슬픔을 극대화하는 장이다.  한강의 작가로서의 자질과 능력이 응축돼 있는 소설의 압권!   삼형제 가운데, 중학생 막내 동호를 그날, 그 무시무시한 밤에 잃어버리고 온통 혼이 나간 상태로, 그 기분으로 이생을 살아가는 자신의 허깨비 같은 삶을, 더이상 삶도 아닌 삶을, 살아온 시간들을 넋두리처럼 읊고 있는 엄마의 독백의 장이다.  여기에 무슨 정치와 협잡과 빨갱이와 보수와 진보의 다툼이 섞여들 여지가 있는가.  눈물 혹은 공분이면 족하질 않나?  

역사는 상상의 산물이기 마련이다. 현장의 목격자요, 주인공이 아니라면, 모두가 누군가의 기록과 기억을 살피며 자신의 머릿속에서 복원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역사가 거짓이라는 오명을 혹은 누명을 쓸 때는 이때가 아닌가.  한 편의 소설은 증언이 될 수도 있고, 역사서술이 될 수도 있다. 한강은 자신의 소설을 통해, 다양한 인물들에게 관찰자의 시선을 허락한다.   희생자와 참여자로 빙의한다.  참살돼 트럭에 실려가고 매장되는 시신이 혼이 되어 자신의 이생에서의 처참한 육신을 바라보는 경험에 독자들을 참여시킨다. 칼과 총에 찢힌 육체의 고통과 자신을 죽인 자(군인)의 그 평범한 모습을 이생과 저승의 중간쯤에서 목도하는 정경은 섬뜩하다.

소설은 이같은 기법을 통해, 독자들을 그날 현장의 이곳저곳으로 끌고 다닌다. 민주주의를 목청껏 외치며, 시민이 하나가 된 시위 현장의 매큼한 최류탄 냄새 속으로 입장한다.  애국가가 흘러나오는 정오에 철수가 예정된 공수부대원들의 집단 발포의 총성이 귀를 찢는다. 나뒹구는 시신들과 신음하는 부상자들의 아비규환을 골목에 숨어 목도하는 이들의 가뿐 호흡소리가 들려온다. 병원 복도까지를 점령해버린 부상자들 사이에서 자발적인 헌혈을 위해 모여든 시민들의 짠한 표정이 선명히 잡힌다. 도청의 시민군을 학살(진압)하기 위해,  계엄군이 진군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새벽 방송 차량의 스피커에서 울려오는 여성 시민군의 절박한 목소리가 애처롭다.  

잔혹하게 도청의 시민군을 진압하며, 그날 새벽 항복하는 어린 학생 시민군을 향해 발포하며 마지막까지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오지 못한 계엄군의 잔혹함이 심장을 파고드는 비수같은 문장으로 눈에 와 박힌다.  시민을 지키고 보호하라고 준 총기로 그 시민을 학살하는 계엄군에 대항하기 위해 총을 든 시민군은 폭도와 빨갱이로 낙인찍혀 체포되고, 고문 받는다.  그 고문과 치욕의 시간이 얼마나 깊고 예리했던지, 그 누군가는 평생을 후유증에 시달리며,  정신병자나 자살자로 생을 마감한다.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불과 30여년 전 이땅의 어느 도시에서 벌어진 픽션아닌 `현실'이다.   그 모든 거짓말 같은 시간들을 작가 한강은 특유의 예민한 문장과 감성으로 그려낸다. 

"지금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까. 태극기로, 고작 그걸로 감싸보려던 거야, 우린 도륙된 고깃덩어리들이 아니어야 하니까.  필사적으로 묵념을 하고 애국가를 부른 거야.  그 여름으로부터 이십여년이 흘렀다.  씨를 말려야 할 빨갱이 연놈들.  그들이 욕설을 뺕으며 당신의 몸에 끼얹던 순간을 등지고 여기까지 왔다.  그 여름 이전으로 돌아갈 방법은 길은 끊어졌다. 학살 이전,  고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174쪽 

어떤 소설은 읽는 일이 고통스럽고 회피하고 싶다. 내가 왜 이런 소설을 읽겠다고 했을까. 후회가 밀려온다.  빨리 읽고 책장을 덮고 싶다. 아마도, 그것은 마음을 다치게 하는 일이나 생각들과는 좀 더 거리를 두고자 하는 본능 때문일 게다. 새벽 나절, 책장을 넘기는 것이 가장 공포스러웠고 남은 페이지를 쳐다보며 이 고통스런 체험이 끝나기를 은근 바랐다.  소설이 독자를 고문시킬 수도 있구나. 매년 어김없이 기념일로 되돌아오는 그날이 결코 반갑지 않다.  과거, 어느 도시에 살던 까까머리 중학생은, 임산부는, 평범한 회사원은, 대학생 언니 오빠들은, 예배가던 젊은 부부는 계엄군의 총과 칼에 무참히 학살되었다.  나라를 지키는 씩씩한 군인들에게 어린시절, 위문편지를 보냈던 군인 아저씨들에게, 우리 이웃의 아들들에게, 바로 지금 거리를 스쳐 지나칠 그 평범한 사람들에게 무참히 도륙당했다.  이런 상상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픽션이 아니고 역사이며 진실이다.  

"오로지 진실만이 과거를 잠재울 수 있다"  "용서한다. 하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 민권운동가이자 대통령이었던 사람, 백인정권의 인종주의 정책과 흑인 학살에 저항하며 무장투쟁을 이끌었고,  고문과 27년간의 무고한 복역을 이겨내며 훗날 그 나라의 대통령 자리에 올랐던 민주투사, 故 넬슨 만델라. 그는 과거 자신과 동료 흑인들을 학살하고 고문했던 모든 백인들을 용서하며 이같은 말을 남겼다. 그의 용서 정책은 `공짜점심'이 아니었다.  진실화해 위원회를 통해, 철저하게 진상을 파악하고 책임자를 가렸다. 사면을 받은 한 백인은 이런 말을 남겼다. " 흑인들이 나를 천만 번 용서하고,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이 천만 번 나를 용서한다 해도 나는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의 머리속에 나의 양심이 있기 때문이다 "

비슷한 역사를 거친 두 나라의 가해자와 피해자는 지금 어떤 모습인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과거의 상처를 딛고, 새로운 역사에 한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던 건, 바로 진실의 가치를 아는 피해자와 양심의 존재를 인정한 가해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린 아직도 그날, 그 도시의 학살의 책임자를 찾지 못하고 있다. 37년이란 시간이 지나고, 민주화 운동을 한 경력의 두 지도자가 선출되고, 민주주의가 성숙의 단계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우리는 수백,천의 사상자를 낸 그날 그 잔혹한 역사에 아직도 발 묶여 있다.  왜, 다시, 또, 그 이야기냐고?  지겹다고? 그만하라고?  그렇게 말할 수 없고 말해선 안 된다.  한강의 소설은 그날의 역사를 비교적 잘 형상화한 의미있는 텍스트다.  이런 텍스트가 계속해 나와야 한다.  조금더 규모를 갖춘, 자본력이 투자된, 좋은 시나리오가 영화화 되어야 한다.  정치와 정치인이 찾지 못한 진실을 문학과 예술은 더 잘 찾고, 더 잘 해명할 수 있다.  거짓말로 남을 속일지는 모르지만, 나를 속일수는 없다.   예술은 양심을 북돋는다.

아직 역사의 진실은 잠들지 못했다.  아직 그 상처의 기억을 간직한 피해자들이 두 눈 부릅뜨고 살아가고 있다. 그 형제자매들이 마음 한 켠에 죽음의 그림자와 함께 이 생을 흘려보내고 있다.  그 어떤 고백과 반성도 있었던 역사의 상처를 과거로 되돌릴 수 없다. "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길은 없다 "  하여, 아직 고백과 반성의 대상조차 선별하지 못한 이 기이한 역사 앞에 우린 모두가 죄인이다.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는 치유되지 못한 역사에 맞닥뜨린 독자들에겐 위로와 각성을 던지는 소설이자,  아직도 학살의 이유를 알지 못하고 이생을 떠돌 망자들에겐 그 슬픈 넋을 달래는 레퀴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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