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양장)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에게 처녀작은 위대하거나 미숙하거나 둘 중 하나인 경우가 많다. 명작은 쉽게 나오지 않기에 어떤 작가의 처녀작에서 나올 확률이 그만큼 높다는 얘기다. 젊은 작가들은 무엇보다 열정과 에너지가 넘치고 지적으로 충만하다. 그냥 펜을 굴리기만 해도 이야기가 술술 풀려나올수도 있다.  무엇보다 그는 이제 이야기의 둑에 작은 구멍을 낸 처지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미숙한 졸작이 될 수도 있다.  그 증거는 자기 경험을 객관화시키는 방식이 서툴러서 그것이 자전적 이야기에서 소설로 환치되지 못한 경우다. 


작년에도 노벨문학상 수상에 물을 먹고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문학사상사 2006)는 어떤 경우일까. 아무래도, 후자에 좀 더 가깝지 않나 생각한다. 유명 작가가 된 이후에 이 작품을 읽었기 망정이지, 아니라면 독자들은 심히 실망했을지 모른다. 나같은 경우가 그렇다. 이 작품을 완독한 건 몇 달 전이다.  후기를 남길까, 말까, 고심하다가 책은 책장에서 잠이 들었다. 이런 평가는 나뿐만이 아니었는가보다. 이 소설에 군조신인문학상을 안겨준 출판사의 고위 인사는 하루키에게 축하를 건네면서도 "자네 작품에는 상당히 문제가 많다"고 고까운 소릴 했다. 


무엇보다 하루키 자신이 이 소설을 다시 읽는 일이 고통스럽고 지겹단 투로 말하고 있다. 자기가 쓴 글을 다시 읽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것도 명작이라고 평가받지 못하고 미숙함이 묻어있는 처녀작은 두말할 필요 없겠다. 이 작품이 출판되고선 만나는 사람마다 한소리씩 했다. "그게 소설이라면 나도 그 정도는 쓸 수 있다"고 말이다. 하루키는 이 말을 지금에서 회상하면서 발끈하고야 만다. 콜럼버스의 달걀이라는 우화 모르시나?  그런 말을 하고 있는 인사치고 자기 소설을 써서 완성했다는 사람 못봤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초야에 잠들어 있는 고수들이 한 둘인가. 그들이 실력을 갈고 닦았다면, 즉 말을 행동으로 옮기는 인내심만 보여줬어도 세상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테니까.


이 소설을 읽고 후기를 남기려고 하는 이들은 난관에 봉착한다.  별 쓸 이야기가 없다는 점 때문이다.  이야기를 읽었는데 이야기에 대해 할 말이 없고, 이야기를 요약할 수도 없다면?  독자는 소설을 읽었다고 할 수 있나?  하루키의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소설로서 애매모호한 이야기인 것은 이 역설에서 시작한다고 본다. 특히, 소설에서 삶을 보고 느끼고 교훈을 얻고 효용을 생각하고픈 독자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야기의 앞,뒤 맥락을 분석해 뭔가 그럴듯한 비평에 다가서려는 서평가들에게 하루키의 이 작품은 애물단지다. 


나또한 이 서평을 쓰면서 그런 접근은 포기했다. 하지만, 이 작품에 대한 서평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역시 하루키다운 `한방'은 작가로서 막 발을 디딘 그때나 지금이나 비장의 무기로 기능하며, 그의 문장속에 살아 있었다. 특히, 하루키가 이 작품을 쓰기 시작한 1979년에는 누구도 하루키처럼 소설을 쓰지 않았다.  이야기가 발단에서 전개되고,  위기를 지나 절정을 넘어, 결말로 치닫지 않는다.  그는 소설 쓰기의 정석을 우회하면서 전혀 다른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문장들은 무겁지 않고, 수사는 문학적으로 세심하지 않고, 파격적인 사건은 없으나 신선하고 가벼운 문장들로 누군가의 경험치의 유사성에 기대, 소설을 이끌어 나간다.  


하루키다운 상상력과 스타일의 출현, 그것이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오늘의 독자들이 한번쯤 읽어봐야할 핑계다. 특히, 이 소설에는 하루키의 30대 이전의 삶이 곳곳에 배어나온다.  즉, 대학시절 결혼해 일찍 가정을 꾸리고 생계를 위해 음악주점 사장으로 20대를 온통 보내고 만, 젊은이 말이다. 연극을 전공했지만 시나리오 쓰는 재능은 없다는 자책감과 어린 시절부터 보이는 책은 몽땅 먹어치운, 굶주린 독자였지만, 글쓰기에서는 항상 두려움을 갖고 있었던 희망속의 작가.  맥주를 좋아하고, 야구 경기를 즐기며, 수많은 이성과 연애를 하고 실패를 맛보며, 또 그것을 즐겼던 평범한 청년.  그런데, 그 어디에도 소설이 될만한 화끈한 주제는 없다.


"완벽한 문장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중략) 그러나, 그래도 역시 뭔가를 쓰려고 하면 언제나 절망적인 기분에 사로잡혔다.  내가 쓸 수 있는 영역은 너무나도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코끼리에 대해서는 뭔가를 쓸 수 있다해도, 코끼리 조련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그런 뜻이다. 8년 동안 나는 계속 그런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8년 동안. 긴 세월이다. "  9쪽, 무라카미 하루키 <바람의 노래륻 들어라>


독자들의 이목을 단번에 집중시킬 화끈한 주제, 그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모든 소설가란 직업의 아이러니다. 그런 주제를 알지 못하면서 찾아나서야 하는 것 말이다. 하루키는 이 소설에서 소설 쓰는 방법을 터득한다. 이 방법이 결국 하루키를 하루키답게 만들고, 독자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던 `비밀병기' 같은 것이 될 것은 하루키 자신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피츠제럴드는 "타인과 다른 뭔가를 얘기하고 싶다"면 "타인과 다른 언어로 얘기하라"고 조언한다.  하루키는 이 조언을 바탕으로 자신의 기분을 정직하게 환치하는 소설을 쓰고 싶어했다. 그런데, 정직하게 쓰려할 수록 정직하지 않은 문장들이 만들어진다는 깨달음에 이른다.


문장을 문학적인 언어로 심화시킬수록 거기에 담기는 생각은 부정확해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해서, 하루키는 그 누구도 만들어 쓰지 않았던 심플한 언어와 심플한 문장을 만들어서, `심플하지 않은 현실'을 그려보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루키는 소설가가 되는 첫번째 관문, 문학적인 문장구사라는 난관을 벗어나, 독창적인 하루키만의 문장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방법을 터득한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속에 등장하는 하트필드라는 20세기 작가가 딱 그런 경우다.  그의 문장은 "읽기 힘들고, 스토리는 엉망이고, 테마는 치졸했다."  하루키는 작중인물의 대사를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트필드는 글을 무기로 싸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뛰어난 작가였다"고 구술한다.


하트필드는 이 소설 속 주인공을 글쓰기의 세계로 인도한 작가로 나온다. 하트필드는 누구인가.  인터넷 검색망에도 걸리지 않는 그는, 하루키가 창조해낸 허구속의 작가다.  하루키는 그에 대한 애정을 소설 곳곳에서 언급한다. "8년 2개월, 하트필드는 그런 불모의 싸움을 계속하다가 죽었다"고 언급한 것에서 8년이란 숫자에 주목해보면 하루키가 글을 쓰기 위해 딜레마에 빠졌던 시간과 겹친다.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등장인물들의 뒷이야기가 전해진다. 


소설 속 `나'와 제이스 바에서 맥주를 나눠마시고 땅콩껍질을 바닥에 5센치 높이로 쌓아올린 쥐란 친구는 본래, 소설이 뭔지도 모르는 친구였다. 그런데, 그는 막 서른이 되었을 때 소설을 취미삼아 쓰며 매년 자신이 쓴 소설을 보내온다.  그의 소설 특징은 `섹스장면이 없고, 등장인물은 단 한 사람도 죽지 않는 것'이다. 왜냐면, 쥐가 그런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막 가정을 꾸렸고 도쿄에 살고 있다. 나는 쉬는 날이면 아내와 샘 페킨파 감독의 영화를 즐겨 본다.  돌아올 때는 히비야 공원에 들러 맥주를 마시고 비둘기에게 팝콘을 던져준다.


한 때 연애 상대였던 왼쪽 손가락이 네 개밖에 없던 레코드 가게의 점원 여자는 그곳을 그만두고, 자취를 감췄다.  그 누구가의 젊은날에 등장할만한 인물들, 연애담이자, 약간의 허구에 기댄 작가의 분신 하트필드까지.  존재할 것 같지만,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 그것을 모두 한 냄비속에 넣고 담박하게 졸여내는 것, 이게 문학 아닐까.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일은 즐거운 작업이기도 하다. 삶이 힘든 것에 비하면 글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너무나도 간단하기 때문이다.  십대 무렵이었을까, 나는 그런 사실을 깨닫고 일주일쯤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란 적이 있다. 조금만 약삭빠르게 굴면 세상은 내 뜻대로 되고, 모든 가치는 전환되고, 시간은 흐름을 바꾼다....그런 느낌이 들었다"  14쪽


하루키의 젊은 날을 상상하게 해주는 소설이자 문학상을 안겨주며 소설가로 발딛게 해주었던 행운의 작품, 아마도 작가에게 이 작품은 여러모로 의미깊을 듯하다. 비록, 평론가와 짓궂은 독자들의 야유를 받을지언정말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은 대단한 일일까. 그것이 인간으로서 품격을 높이고, 인격을 높이는 일일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이들 가운데 고약한 `악당'들이 더 많다.  청문회에 나온 그 뻔뻔한 인간들을 보라. 거짓말의 고수들은 표정을 봐선 그 속마음을 읽을 수가 없는 경지에 올라서 있다.  책읽고 글쓰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알고 인정하는 게 우선이다.  그후,  꿋꿋하게 그 일에 상상력을 더해 계속해 나가는 일.  소설 속 하트필드가 재능의 불모를 깨닫고도서도 멈추지 않았던 것처럼.  콜럼부스가 달걀을 깨서 탁자위에 세웠던 것처럼, 그렇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