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초상
오사 게렌발 지음, 강희진 옮김 / 우리나비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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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은 사이가 좀 유별난 편이다. 태어나 자라면서 단 한 번도 부모님이 부부싸움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을 정도로 두 분 사이는 다정하고, 사춘기를 지나면서 아빠와 어색해졌다는 주변 친구들과 달리 우리 집은 딸 셋 모두 엄마보다 아빠가 더 좋다고 말할 정도로 사이가 좋다. 서울에, 대구에, 포항에 각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는 지금도 가족 채팅방에서 매일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물론 사이가 각별하다고 해서 가족 간에 서로 마음 상하는 일이 없었던 건 아니다. 곱씹어 보면 갈등의 대부분의 원인은 의사소통에 있었다. 꼭 전해야 할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은 부끄럽고 어색하다는 핑계로 꼭꼭 묻어두기만 했고, 이해하고 보다듬어줘야 할 걱정스러운 마음은 감정을 앞세워 삐뚤게 내뱉고는 했다. 가깝다는 이유로, 편하다는 이유로, 가족이라는 이유로 최소한의 예의마저 상실한 채 던진 크고 작은 말과 행동들이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오해로 쌓였다. 가족과 사이가 좋은 것이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느낄 때도 있었다.


그러다 오사 게렌발의 신작 『가족의 초상』을 읽게 되었다. 사춘기를 겪고 있는 큰딸 마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5막 1장의 심리 드라마를 다룬 이 책은, 한 가족의 붕괴를 유발한 어떤 사건에서 시작된다. 마리의 부모인 라이프와 건에게는 절친한 친구 라그나르가 있다. 그가 친구의 집을 제 집 드나들듯 하는 속셈은 따로 있었는데, 바로 친구의 딸인 열여덟 살 마리에게 반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마리의 집에서 거하게 술을 마신 라그나르를 마리가 차로 데려다 주다가 라그나르에게 성추행을 당한다. 다음날 술이 깬 라그나르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사과하지만, 오히려 마리의 부모는 친구인 라그나르의 사과를 받아주지 않는 마리를 꾸짖으며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리고 10여 년이 흐른 후 부모인 라이프와 건, 그들의 두 딸 마리와 스티나, 그리고 이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라그나르, 이 다섯 명의 인물들이 경험한 사건의 전말과 그로 인해 초래된 결과를 저마다의 입장에서 얘기하고 있다. 공통적인 사건을 경험했음에도 모두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소통을 위한 시도와 각자의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절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P.41 엄마 건의 이야기

"마리는 결코 내가 상상했던 딸아이가 되지 못했다. 그때는 모든 엄마들이 그랬듯 나 또한 순진하게도 아이가 성장해감에 따라 사춘기 반항도 겪고 엄마와 딸 사이 관계를 더욱 친밀하게 해주는 선의의 논쟁도 벌이리라 꿈꾸었다. 함께 토론하고 조언도 하고 기운을 북돋아주고… 그렇게 해서 훗날 사위도 보고 손주들도 보고… 언젠가 한쪽 부모와 자식이 더 이상 서로 사랑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올 수 있다는 걸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 그리고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것도? 어째서 다들 엄마와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평생 조건 없이 서로 사랑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걸까? 엄마라고 해서 왜 무조건 아낌없이 아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하지? 아이들이 강아지처럼 제멋대로 날뛰어도 말이야. 엄마라고 해서 왜 자신을 지킬 권리를 가져선 안 되는 거냐고?" 


P.61-62 아빠 라이프의 이야기

마리는 자주 이런 질문을 했지. "그때 말이야, 아빠는 어떤 생각을 했어? 느낌이 어땠어? 그리고 지금은 어때?" 하지만 어째서 그런 골치 아픈 일들로 굳이 소란을 피우려 드는지 난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중략) 마리가 내게 이야기를 한다는 건 필시 우리가 비교적 가까운 사이라는 표시였을 거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그 애가 낯설게 느껴졌다. 마리와 거리를 두고 있는 게 나인지, 아니면 나에 대해 거리감을 형성하고 있는 게 그 애인지 모르겠다… 마리는 내 도움을 원치 않는 것 같다. 직접적으로 말은 안 했지만 그래 보인다. 하지만 그 애가 그렇게 자라왔기 때문에 그런 건지 아니면 꽁하니 맺힌 데가 있어서 그런 건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지 않은가! 그 점이 정말 혼란스러워 미치겠다. 그래서 차라리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싶어진다. 


P.89 동생 스티나의 이야기

때때로 난 언니 자신이 바로 그 파괴적인 경험들을 자초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언니는 무슨 얘기든 훨씬 더 부정적으로 만들어서 최악의 상태까지 밀고 나가야 직성이 풀린다. 어쩌면 주제 넘은 소리일지 모르겠지만 이런 생각도 해본다… 어째서 언니는 나처럼 될 수 없는 거지? 현재 우리 상황에서 볼 때 어닌는 내가 자기보다 더 행복하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언니는 조금이라도 나를 본보기로 따라야 한다고! 게다가 무슨 권리로 언니가 내 인생 계획을 비판할 수 있지? 그것도 자기 입으로 매장돼 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삶을 가지고서! 그게 제정신으로 할 소리냐고!


오사 게렌발은 각 인물들에 대해 개개인의 감정을 면밀하게 연구하고 심리를 파헤치고 분석하는 과정을 통해 한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의사소통 불능과 좀처럼 치유되지 않는 상처들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 딸의 고통을 외면하는 부모와 서로에게 무관심한 부부, 매사 비관적인 언니와 낙관적인 동생의 불가피한 갈등. 처음에는 막장 드라마 같은 이야기에 화가 치밀어 오르다가, 이 책을 덮을 때쯤에는 모두가 가해자이면서 피해자라는 생각에 안타까움이 들었다. 가장 많이 사랑하기에 가장 깊은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 가족.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가족의 초상이 이와 같지 않을까.


『가족의 초상』은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 서로 간의 관계를 짚어볼 기회를 마련해주는 책이다. 같은 피를 나눈 가족이라고 해도 각자 성격과 성향이 다르고, 처한 상황이 다르고, 맡은 역할이 다르다는 것을, 그로 인해 서로 간의 다름과 서로 간의 입장을 좀 더 이해하게 된다. 가족으로 인해 상처받고, 지금도 그로 인해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책을 읽어봤으면 좋겠다. 이미 생긴 상처를 없애주지는 못해도, 생채기 난 마음에 연고 같은 책이 되어줄 것이다.


추천사 / 박세현 (만화문화연구소 엇지 소장, 상명대학교 만화학과 외래교수)

집이란 물리적 공간은 인간에게 가장 평온하면서도 행복을 주는 안식처다. 하지만 그 집에 사는 가족은 사랑스럽지만 때로는 거추장스럽고, 누구보다 더 잘 통할 것 같지만 때로는 도통 속마음을 모르겠고, 지원사격하는 아군인 것 같지만 때로는 폐부를 칼로 찌르는 살인마나 다름없어 보인다. 이렇듯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그리고 성장하면서, 나아가 죽을 때까지 함께하는 가족은 천사와 악마의 얼굴을 모두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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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엔 돌아오렴 - 240일간의 세월호 유가족 육성기록
416 세월호 참사 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엮음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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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이 책의 출간 소식을 알고도 읽고 싶지 않았다. 제목만 보고는 세월호를 이용해 돈벌이나 하려는 속셈 정도로 여기고 무시했다. 희생자들의 억울한 죽음을 잊지 않겠다 다짐했지만, 세월호 특별법을 놓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세력들과 이를 보도하는 자극적인 뉴스들로 인해 더 이상 세월호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알라딘 신간평가단에서 이 책이 리뷰도서로 선정되었고, 집에 도착한 책을 받아보고서야 내 생각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책은 240일간의 세월호 유가족의 육성 기록을 담았다. 우리 아들은 이런 아이였어요, 우리 딸이랑은 사이가 어땠어요 하는 엄마 아빠들의 이야기. 그런데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로 그 예쁜 아이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려야 했고, 그런데도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고, 유가족들은 오히려 벼랑 끝으로 몰렸고, 그렇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잊어가고 있는 이야기. 그래서 더 미안하고 미안했다. 나의 섣부른 오해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나, 잘못된 무관심이 얼마나 잔인한 것이었나, 나와 같은 이들의 오해와 무관심이 유가족의 가슴에 두 번 상처를 입혔다는 것을 깨닫고 내내 후회하고 반성했다.

 

P.211

부모로서, 신앙인으로서, 시민으로서 끝도 보이지 않는 고통과 혼란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철이 지났다며 부랴부랴 짐을 싸는 이들이 보여준 애도의 깊이가, 잊지 않겠다던 약속의 호흡이 얼마나 얄팍한 것이었나 돌아보게 된다.

 

P.342

피할 수 있고 막을 수 있었던 사건인데 미안해하는 책임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허락도 구하지 않고 카메라를 들이대는 언론과,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가족들의 이야기를 엿듣는 정보경찰은 있었으나, 아무도 상황에 대한 신중하고 신속한 정보를 가족들에게 전하지 않았다. 침몰의 원인을 되짚기 위한 항적도도 완성되지 않았고, 교묘하게도 침몰 시점에 즈음해 멎은 각종 기록장치들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다. 이제 밝혀야 할 진실도 물어야 할 책임도 더는 없는 듯 세상이 굴러간다. 그러나 4 16일은 떠나온 과거가 아니다. 시간은 흘러가다가도 다시 그날로 붙들려간다.


아직도 그날 아침이 또렷이 기억난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 준비를 하며 뉴스를 틀어 놓았는데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다는 속보가 나왔다. 출근해서는 걱정되는 마음에 시시각각 핸드폰으로 뉴스를 확인하다가 전원 구조라는 소식을 접한 뒤 안도의 숨을 내쉬고 다시 업무를 보는데, 이럴 수가, 전원 구조가 오보였다니. 시간이 지날수록 사망자 수와 실종자 수는 점점 늘어났다. 그때의 충격과 슬픔이란. 문득,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내가 막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내가 살고 있는 포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대구에서 지하철 화재 참사가 일어났을 때가 떠올랐다. 어떤 이는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떠올렸다. 수많은 생명을 잃고 나서 10, 20년이 더 지났지만 우리는 그때로부터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P.206 / 2학년 4반 박수현 학생의 아버지 박종대 씨 이야기 

지금 정부가 내놓은 대책이라는 게, 사실은 부처를 저기서 빼다가 여기에 갖다붙이는 수준이잖아요. 그게 어디 모양새만 바꾼 거지, 씨스템을 고쳤다고 할 수 있나요? 그럼 이런 참사가 생겨나도 결과는 똑같을 거예요. 공청회도 열어서 뭐가 문제였는지 이야기도 좀 들어보고, 이원화돼 있는 것이 문제라면 일원화하고, 교육·훈련이 필요하다면 정부가 나서서 좀 도와주고, 뭔가 종합적인 변화가 있어야 하잖아요. 근데 그런 게 전혀 보이지 않아요. 5 19일에 대통령 대국민담화에서 해경 해체라는 말이 처음 나왔을 때, 제가 CBS랑 인터뷰하면서 문패 바꿔달기로 끝나는 거 아니냐고 한 적이 있었거든요. 지금도 생각이 똑같습니다. 근원적인 문제 해결이 안 된 건, 진상규명이 허술했기 때문이에요.

 

P.273-276 / 2학년 9반 임세희 학생의 아버지 임종호 씨 이야기 

내가 서해 페리호 사고를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에요. 그런데 21년 후 세월호 사건을 또 겪은 거지, 내가. 그 얘기를 하는 건 지금이나 그때나 바뀐 게 없어서야. 아무 것도. (중략) 21년이 지났는데 사람 구조하는 면에서 바뀐 게 전혀 없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그때 만일 특별법이 제정됐더라면 세월호 참사가 났을까. 지금 와서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때는 특별법 요구는 안 했잖아요. 2003년 대구지하철 사고의 유가족들이 와서 그랬다고 하던데 우리가 특별법을 못 만들어서 이런 사고가 난 것 같다고, 죄송하다라고요. (중략) 누구는 진실을 밝히는 게 뭐 중요하냐. 앞으로 안전한 나라를 만드는 게 중요하지라고 하는데. 썩은 데가 있으면 그곳을 파내고 새 살이 돋아나게 해야 하는데 그냥 두고 새 살이 돋길 바라는 것은 말도 안 돼요. 제대로 된 진상규명을 못하고 의문만 남기는 법이라면 제2, 3의 세월호 참사가 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어요. 그때 가서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겠냐고. 안전에 대해서도 자기들 일이라고 생각을 못하는 거야. 내 자식이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 못해. 간담회 가면, 내가 우리 자식 물에 빠져 죽지 않게 하려고 수영 가르쳤다고 그런 얘길 해요. 한데 그게 개인이 노력해서 수영 잘해서 될 게 아니잖아. 왜 법이 만들어져 하는지 말하는 거지.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자식 일이라고 생각 안 해요. 소를 잃어본 사람이 외양간을 고치지, 소가 멀쩡하게 있는 사람은 모르더라고.

 

P.310 / 2학년 10반 김다영 학생의 아버지 김현동 씨 이야기 

돌이켜보면 내 삶은 우리 현대사의 급류에 휩쓸려왔고, 그 끝에서 참사의 당사자가 되어 이렇게 길거리에 앉아 있어요. 87 6월항쟁부터 거의 30년이 지났는데도 세상은 그때하고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요. 어떻게 이렇게 변한 게 없을 수 있을까 싶어요. 오히려 더 나빠진 거 같아요. 사회의 모순은 더 고착되고 견고해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동안 허울만 좋은 민주주의에 국민들이 완전히 속았어요. 참담하죠. 내 딸을 잃고 나서야 그런 생각이 간절해졌어요. 우리가 꼭 진실을 밝힐 거예요. 이 문제를 지금 해결하지 못하면 30년 후에 나 같은 사람이 또 가족을 잃고 이 자리에 앉아 있지 않겠어요?


세월호 유족들이 참사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애쓰는 이유. 처음엔 내 자식 일이라서 돌아다녔지만 이제는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려서 포기가 안 된다, 억울하게 떠나보낸 아들에 대한 의리이자 스스로 하는 치유이며, 너무 많은 진실을 알아버린 한 인간의 저항이라는, 책 속의 문장이 가슴을 때렸다. 아까운 생명을 잃어야 했던 수많은 사건사고가 일어났음에도 우리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데에는, 모든 것을 제대로 일하지 않는 정부의 탓으로 돌리고 내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쉽게 잊어버리는 국민들의 무관심이 더 큰 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P.231 / 2학년 2반 길채원 학생의 어머니 허영무 씨 이야기 

그래도 이 일을 겪고 나서 남의 일을 돌아보게 된 것 같아요. 밀양이든 쌍용자동차든 사회문제가 됐던 것들. 나는 그들의 외침에 하나도 관심 없었는데 지금은 내가 사건의 한가운데 있지만,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남들도 똑같이 그렇겠구나 싶어요. 너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데 변한 게 별로 없고.

 

P.329 / 2학년 8반 김제훈 학생의 어머니 이지연 씨 이야기 

제가 한창 슬픔에 젖어 있던 무렵에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로 딸과 아들을 잃은 부모를 만났어요. 그분이 고맙게도 위로를 해주시고 가시더라구요. , 그 당시에 나는 뭐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는 남의 얘기였고 나와 먼 얘기였는데 이렇게 내가 위로를 받는구나 다른 사람의 아픔을 껴안는다는 거 그전에는 전혀 생각 못했어요. 내가 경험하지 않았다고 모른 체하고 살았던 게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도 잘못한 게 있어요. 밀양 송전탑, 강정마을 주민들, 쌍용자동차 해고자들 , 그 사람들이 부르짖을 때 저희는 뭐 하고 있었나요? 전혀 생각을 안 했어, 그런 거에 대해서. 나만 보람있게 잘살면 된다는 그런 거였지. 다른 사람의 고충이나 힘든 것들을 우리가 보려고 하지 않았던 거예요. 의를 망각하고 있었던 거야. 그랬기 때문에 이런 이들이 여기서 터지지 않았나 생각이 들어요.

 

"정치에 무관심한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플라톤)

"모든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그들의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가진다." (윈스턴 처칠)

 

나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썩은 정치에 구역질 난다고 눈 감고 귀 막은 채 외면하며 살아가다 보니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다. 우리가 그동안 정치에 무관심했던 대가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였고,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였고, 세월호 사고였다. 국민의 필요를 관철시키려면 국민이 나서야 했다.

 

P.184 / 2학년 1반 문지성 학생의 아버지 문종택 씨 이야기 

어떻게 보면 일반 시민들이 이런 데서 서명작업을 하고 저희 유가족들에게 서명해달라고, 함께해달라고 요청하는 게 맞는 겁니다. 저희는 이미 죽은 자식들 돌아오지 못합니다. 산 자식들이 있는 일반 시민들이 이런 사고 다시는 안 나게 해달라고 서명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주변의 지인들에게 이 책을 꼭 읽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더니 돌아오는 대부분의 대답은 눈물 날 것 같아서 못 읽겠어 혹은 세월호가 너무 정치적인 이슈가 되어 버려서, 이제 좀 피곤해였다. 내가 그러했듯 그들도 비슷한 오해와 비슷한 무관심으로 세월호를 잊어가고 있었다. 개인 SNS 계정에 『금요일엔 돌아오렴』 표지 사진과 함께 짤막한 글을 올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사소하지만 영향력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벌써 일 년. 엉엉 울 것 같아서 못 읽겠다는 사람도, 세월호 얘기는 이제 그만 듣고 싶다는 사람도, 모두 다 읽어봤으면, 읽고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을 읽기 전과 읽고 난 후가 같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기에. 내가 바로 그러하듯이.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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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좀 많습니다 - 책 좋아하는 당신과 함께 읽는 서재 이야기
윤성근 지음 / 이매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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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을 살 때'가 좋다. 좋아하는 책을 읽어나가는 느낌도 좋지만 서점에 가서 책을 사는 행위가 좋다. 책이라고 하는 키워드를 고르는 느낌. 그때 '' 하고 떠오르는 것들이 좋다."

- 나가오카 겐메이, 『디자인 하지 않는 디자이너』 중에서

 

나가오카 겐메이처럼 나 역시 책을 읽는 것도 좋아하지만, 확실히 사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사놓고 안 읽은 책들이 집에 잔뜩 쌓여 있는 게 바로 그 증거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라서, 북디자인이 예뻐서, 기획이나 컨셉이 재밌어서…' 등등의 이유로 나는 오늘도 책을 산다. 뭐랄까, 책을 사는 행위만으로도 이미 그 책이 나에게 흡수가 된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런 내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구입하는 책은 바로 ''과 관련된 책들. 작년에 출간된 오카자키 다케시의 『장서의 괴로움』이나 가토 슈이치의 『독서 만능』처럼 말 그대로 책과 관련된 책에서부터,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꼽은 어린이책 50권을 소개하는 『책으로 가는 문』이나 박웅현 ECD 『책은 도끼다』처럼 내가 애정하는 인물들이 쓴 독서 에세이, 『나의 아름다운 책방』『오래된 빛』처럼 서점을 다룬 책에 이르기까지, 책과 관련된 책이라면 분야를 불문하고 모두 모으고 있다. 그런 내게 『책이 좀 많습니다』는 반드시 '사야' 하는 책이었다.

 

이 책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한국판 『장서의 괴로움』이랄까. 『장서의 괴로움』에 나왔던 것처럼 책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집이 무너졌다거나 하는 만큼의 장서가까지는 아니더라도, 책을 사랑하는 우리네 주변 이웃들의 서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편집자로 2, 서점인으로 3, 책을 만들고 팔면서 일해온 지난 5년 동안 내 책장에는 700 여권의 책들이 쌓였다. 내가 만약 『책이 좀 많습니다』의 인터뷰이가 되었다면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했을까 생각하면서 읽어나가니 더욱 재미있게 읽혔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서재 이야기를 다룬 책이었기에, 서재 관리법이나 독서법과 관련해 참고할 부분도 많았다.

 



『책이 좀 많습니다』의 인터뷰이들이 말하는 서재 관리법

 

P.80 / 기자 서찬욱 

그이가 말하는 책 정리 방법이란 일단 관심이 있는 철학자를 중심으로 그 사람이 쓴 책이나 다른 사람이 그 철학자에 관해 쓴 책을 따로 분류하고, 그렇게 나눈 덩어리를 다시 활동하던 시기별로 나누는 것이다. 그렇게 나눈 다음 분야별로 큰 흐름을 갖고 다시 배치한다. 이를테면 철학사, 인식론, 역사철학, 윤리학 따위를 각각 떼어 놓는다. 그밖의 책들은 '사회과학 일반'이라는 느낌으로 책장 한쪽 공간을 차지한다. 경제학, 사회학, 인류학 따위의 책들이다. 문학 작품은 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한번에 모아 따로 정리한다.

 

P.148 / 선교 정보 전문가 김재서 

책을 사면 한두 번 읽고 나름 판단을 합니다. 이걸 내가 계속 갖고 있으면서 써먹을 책인지, 아니면 몇 년이 지나도 그냥 꽂아두기만 할 책인지를. 고민을 해본 다음 오랫동안 다시 보지 않을 것 같은 책은 과감하게 다른 사람에게 줘요. 내가 갖고 있으면 몇 년 동안 책장 안에서 빛을 못 볼 운명인데, 다른 누군가에는 당장 필요한 책일 수도 있거든요.

 

P.241 / 바리스타 김석봉 

가끔은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재미있게 정리를 해놓을 때도 있어요. 이를테면 여기 보다시피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 옆에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두는 식이죠. 두 책을 읽을 때 느낌은 완전히 다르지만, 꽃과 꽃이니까요. 그냥 옆에 나란히 두고 본다는 것 자체가 재미있어요.



 

『책이 좀 많습니다』의 인터뷰이들이 말하는 독서법

 

P.17 / 국어 교사 허섭 

허섭 씨가 책 읽는 방법은 유별나다. 어떤 책에 한번 관심이 생기면 거기에 관련한 책은 직성이 풀릴 때까지 사 모아서 읽어야 한다. 예를 들어 『삼국지』를 읽자는 생각이 들면 월탄 박종화는 물론이고 이문열, 황석영, 장정일이 쓴 것까지 다 사서 읽는다. 심지어 일본사람 요코야마 미쓰테루가 그린 60권짜리 만화책 『전략 삼국지』 세트도 갖춰 읽었다. 이렇게 폭넓게 읽으면 책에서 얻는 지식이 편협해지지 않는다.

 

선교 정보 전문가 김재서

P.151

관심사에 따라 책을 정해서 다섯 권을 동시에 읽어요. 한 권당 평균 10장씩, 모두 합쳐 50장 정도를 매일 정해놓고 집중해서 읽는 거죠. 그렇게 읽으면 한 권씩 읽을 때보다 생각하는 범위도 넓어지고 어느 한 가지에 빠지는 위험이 적어서 좋아요.

P.151-152

특히 『코스모스』는 대학 다닐 때하고 20년 넘게 지난 지금 다시 읽을 때 느낌이 많이 다르다. 책을 한 번 읽고 그냥 덮어두면 안 되는 이유가 이것이다. 책은 바뀌지 않지만 사람이 바뀌기 때문이다. 사람이 만드는 책이지만, 그 책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만들어간다는 말이 맞다.

 

P.168 / 대안 학교 교사 전희정 

그래서 책을 읽으면 맨 앞 속지에 느낌을 간단하게 적어요. 그림으로 그려두기도 하죠. 다음에 그 책을 또 읽으면 이미 적어놓은 것 뒤에 이어서 적거나 그리고요. 그렇게 하면 같은 책을 여러 번 읽을 때 매번 다른 느낌을 받는다는 걸 알게 되고, 책이라는 게 정보를 얻는 것만 목적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죠.

 

P.200 / 자유기고가 전영석 

『위대한 개츠비』와 『호밀밭의 파수꾼』은 여러 번역본을 구해서 비교하며 읽었어요. 『위대한 개츠비』는 김욱동 씨 번역, 『호밀밭의 파수꾼』은 공경희 씨 번역이 탁월했어요. 책을 읽을 때, 특히 번역서를 읽을 때는 줄거리만 생각하지 말고 더 깊은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서라도 몇 가지 번역본을 비교하며 읽으면 좋아요.

 

P.284 / 수학 교사 조종호 

특히 책을 읽는 한편으로 그 책을 평가한 서평도 함께 읽으면서 많은 것을 얻는다. 여러 시각에서 쓴 서평과 평론집을 읽는 경험은 나하고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많은 사람하고 함께 책을 읽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이제는 반대로 책을 읽으면 늘 그 책에 관해 누가 어떤 평가를 하는지 궁금해요. 그래서 서평을 많이 찾아봅니다. 저하고 같은 생각을 하든 완전히 다른 방향이든 상관없어요. 책 한 권을 읽은 다음 그게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는 걸 보는 게 또 다른 즐거움이니까요."

 

P.324 / 대학원생 이시욱 

요즘은 밑줄을 치거나 포스트잇을 붙이기 전에 한번 생각을 합니다. "정말 중요한 대목인가?", "만약 누군가 내 책을 보고 왜 여기에 표시를 해뒀냐고 묻는다면 잘 대답할 수 있을까?"를 자문하는 거죠.

 



잘 모르는 사람의 집에 처음 초대되어 그들의 서재를 살펴보며 어떤 취향을 가진 사람인지 추측하는 느낌으로 책을 읽었다. 누군가의 서재를 들여다보는 일은 흥미로운 경험이다. 책장의 책들만으로도 주인의 취향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코지 미스터리, 고양이, 요괴와 도깨비에 관련된 책 등등, 책에 등장하는 23명의 인터뷰이들의 사적인 셀렉션은 매력적이고 흥미로웠다. 


게다가 이 책의 저자인 헌책방지기인 윤성근님이 인터뷰이의 셀렉션과 어울리는 추천 도서를 골라주니, 한 권의 책에서 다른 책으로 가지 뻗어나가는 걸 좋아하는 내게는 단순히 애서가의 서재를 들여다보는 즐거움을 넘어서 좋은 책을 소개받는 기쁨이 큰 책이었다. (이 책을 덮은 뒤에 인터넷서점 장바구니가 더욱 묵직해졌다는 것이 함정.)

 

덧. 이 책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건 편집에 대한 부분인데, 오탈자 실수가 종종 눈에 띄었다. 마지막 인터뷰이인 '대학원생 이시욱' 원고에는, 기존의 톤앤매너와 다르게 문답 형식으로 인터뷰가 정리되어서 읽다가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고. 애서가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책인만큼, 책에 대한 애정이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을 것인데, 책의 완성도가 떨어지니 그만큼 아쉬움이 컸다. 2쇄에는 이런 점들이 반영되어 좀 더 꼼꼼한 책으로 나와주기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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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이유 - 가슴 뛰는 여행을 위한 아홉 단어
밥장 글.그림.사진 / 앨리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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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여행과 관련된 책을 살 때는 두 가지 중 하나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그 나라 혹은 도시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읽는 가이드북과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 대리만족을 위해 읽는 에세이. ​물론 이 책은 후자에 속하는 책이지만, 뭐랄까. 단순히 대리만족을 얻기 읽는 책은 아닌 것 같다. 


이 책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글 쓰는 일러스트레이터 밥장의 여행 에세이'다. ​일반적인 여행책과 다른 점이 있다면,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여행지나 여행의 감상과는 좀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 ​대부분의 여행책은 특정한 장소와 여정 위주로 쓰여지는데, 이 책은 여행에 필요한 아홉 단어를 중심으로 밥장식 여행을 풀어가는 방식을 취했다. 


그가 여행에서 찾은 9가지 키워드는 행운, 기념품, 공항+비행, 자연, 사람, 음식, 방송, 나눔, 기록이다. 해외여행을 세 번 정도 다녀온 지금에야, 이 책에서 말하는 아홉 가지 단어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첫 해외여행 때는 너무 긴장해서 공항을 즐길 여유도 없었거니와 비행기에서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면 좋은지, 기념품은 어떤 걸 사 오는 게 좋은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만약 내가 단 한 번의 해외여행 경험도 없이 이 책을 보게 되었다면 아무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몇 번의 해외여행 경험이 쌓이고 어느 정도 나만의 여행 방식이 생기기 시작할 무렵, 이 책을 만난 게 다행이다 싶었다. 밥장의 여행 키워드를 통해 나의 여행은 어땠는지 되돌아보고, 내가 꼽은 여행에 필요한 단어들은 무엇인지 정리하게 만드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그동안 읽어본 적 없었던 여행책의 새로운 유형, 여행에서 돌아온 후 읽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을 읽다가 얼마 전에 봤던 <꾸뻬씨의 행복 여행>이란 영화가 떠올랐다. <꾸뻬씨의 행복 여행>의 주인공 헥터는 매일 같이 자신이 불행하다고 외치는 사람들을 만나는 정신과 의사다. 일상에 지친 헥터는 어느 날 문득 행복의 비밀을 찾기 위해 목적지도 없고, 귀국일도 모르는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한다. 오로지 '행복이 무엇일까'라는 질문만 가지고. 그리고 여행지에서 매순간 자신이 경험하고 느낀 행복에 대해서 수첩에 기록해나간다. 헥터의 수첩에 '행복의 비밀'에 대한 대답이 담겨 있다면, 밥장의 수첩에는 '떠나는 이유'에 대한 대답이 담겨 있다.




P.311-312

마음껏 돌아다니고 마음껏 그리워하기 위해 집을 나와 길을 나서는 순간부터 여행은 시작됩니다. ​하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고 해서 여행이 끝나는 건 아닙니다. 마지막 장을 넘겼다고 책을 다 읽은 게 아니듯 말이죠. ​책을 읽고 독후감을 남기듯이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고 남겨야 비로소 여행은 끝나게 됩니다. ​여행에서 남긴 기록이 여행이 되는 셈입니다. 


이 책을 덮고 나서 내가 생각하는 여행에 필요한 단어들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가 여행하려고 하는 나라나 도시가 배경으로 등장하는 영화와 OST, ​여행지마다 꼭 들리는 서점과 기념품으로 사 오는 책, ​서투른 외국어라도 먼저 길을 묻고 말을 거는 용기 등등… ​앞으로는 이 단어에 나만의 여행 기록을 담을 노트 한 권을 추가하려고 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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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한 소설들 - 빨간책방에서 함께 읽고 나눈 이야기
이동진.김중혁 지음 / 예담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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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금요일 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퇴근 후 몇 시간과 출근 전 몇 시간을 이용해 짬짬이 다 읽었다. 보통 적게는 두세 권, 많게는 열 권 정도를 왔다갔다 그때그때 읽고 싶은 책으로 골라 읽는 내게는, (정말 그 책에 빠진 경우를 제외하고서) 한 권의 책을 집중해서 끝까지 읽는 경우가 드문데 이 책은 오랜만에 한 호흡으로 끝까지 읽은 책.

2년 전, 팟캐스트 빨간책방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두 사람의 대화를 그냥 듣고 흘려보낼 게 아니라 녹취 풀듯이 기록으로 정리해놓고 꼼꼼히 읽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 막연했던 생각이 진짜 책으로 나왔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부담없이 읽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책값을 9900원으로 매겼다고. 330페이지에 다다르는 볼륨감 있는 책치고는 저렴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기존의 팟캐스트 방송 내용을 옮겨 다듬고 보충해서 만든 책이고 특별히 제작 과정에서 들었을 만한 품이나 요소도 없어 순전히 제작 단가가 놓고 봤을 때는 이 정도 가격이 적당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 안에 든 내용, 무려 7권의 대단한 소설을 담았고, 거기에 이동진 영화평론가와 김중혁 소설가가 각자의 해석을 곁들인 이 지적 가치를 생각하면, 게다가 이 책을 평생 소장해서 간직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책값 만 원은 저렴하다 못해 거의 공짜로 얻은 듯한 느낌이다. 카페에서 먹은 커피 한 잔, 케이크 한 조각보다 저렴한 책이라니.

무튼, 내가 빨간책방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는 독서를 다양한 시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판을 짜주었기 때문인데, 만약 진행자가 책-영화-음악 등 콘텐츠의 스펙트럼이 넓은 이동진이 아니었다면 과연 이 재미가 가능했을까 싶다.

빨간책방이 생겨난 후 우후죽순처럼 쏟아진 많은 책 관련 팟캐스트들을 다 들어봤지만, 빨간책방만큼의 풍성한 재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동진 평론가만으로는 약간 부족하달까,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을 김중혁 작가가 기가 막히게 채워낸다. 둘이 함께 책을 얘기하면서 주거니 받거니 하는 호흡도 좋지만, 김중혁 작가는 책의 세계를 만드는 제작자 입장에서, 이동진 평론가는 책을 세계를 감상하는 독자 입장에서 각자의 견해를 내놓으니 책을 이해하는 시각이 훨씬 더 다채로워진다.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을 읽으면서 또 한 번 느낀 건, 빨간책방의 장점 중 하나가 책과 영화, 두 가지 콘텐츠를 융합하여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바로 이동진 평론가가 있기 때문인데, 어떤 책을 소개할 때 비슷한 맥락의, 혹은 비슷한 서사의, 비슷한 구성의 같이 보면 좋을 영화를 덧붙여 소개해준다.

P.120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아까 무지함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우스꽝스럽게 저는 두 영화가 생각났어요. 하나는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고 하나는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에요. 일단 제가 <괴물>의 프롤로그를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도입부에 일종의 돌연변이로 태어난 작은 괴물을 낚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려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옆에서 친구가 말리고 있는 와중에 자살하려는 사람이 한강을 내려다보다가 괴물을 목격하게 되죠. 옆의 사람은 못 보고요. 저기 뭐가 있다고 해도 옆 친구들은 ˝어디, 어디?˝ 그러죠. 그러니까 싸늘하게 웃으면서 한마디 남기고 한강으로 뛰어내리죠. ˝둔해빠진 새끼들.˝ 이게 어떻게 보면 이 소설 속에서 베로니카가 한 말이거든요.

P.123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 <올드보이>의 아주 인상적인 대사를 인용해볼까요. ˝조약돌이든 모래알이든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결정적인 불행과 비극에 빠뜨린다고 하면 그게 칼을 들고 난동을 부리는 정도의 엄청난 일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올드보이> 식으로 이야기하면 남의 험담을 그냥 별 생각 없이 한 번 한 거죠. 심지어 자기는 그 험담한 사실도 잊어버리고요.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나서 끔찍한 일을 당하죠. 이 소설에서도 중요한 것은 가라앉는다는 점이죠. 그것이 조약돌인지 모래알인지가 아니라요.

P.234 <파이 이야기>
마지막으로 <파이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으셨다면 영화 <더 폴>이나 <판의 미로> 또는 <빅 피시>를 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소설로는 커트 보네거트의 <제5도살장>도 권하고 싶구요. 화자와 그 화자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관계가 흥미롭고 그 둘 사이에서 새롭게 생겨나는 의미를 즐길 수 있거든요.


대체로 이런 식이다. 하나의 문학 작품을 그 작품 안에서만 곱씹고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작품, 또 다른 이야기를 가져와 좀 더 풍성하게 경험하도록 해준다. 단순히 해당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만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영화를 만나게 되고, 하나의 작품에서 뻗어나간 생각의 가지들은 다른 작품의 가지들과 만나 종으로 횡으로 마구마구 뻗어나가게 된다.

이 책을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장 먼저 이 책에서 다루는 원작 소설을 하나 읽고 나서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 속에서 이 소설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읽고,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소개하는 다른 책이나 영화를 감상해보는 것이다. 이 책을 먼저 읽고 원작을 찾아 읽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소설의 반전이나 결말을 다 알고서 보게 되니 그 재미가 덜할 것 같다. 



이동진 평론가와 김중혁 소설가가 서로 닮은 듯 다르게 쓴 저자 소개나 서문 읽는 재미도 이 책의 놓칠 수 없는 포인트.

빨간책방은 이제 팟캐스트를 넘어 하나의 복합문화공간으로 자리잡았다. 전에 빨간책방 카페를 다녀와 남겼던 포스팅에서도 썼지만, 이 모든 것은 이동진의, 이동진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가 만든 빨간책방은 자기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온전히 독자들을 위한 것이다. 이동진의, 이동진에 의한, 그러나 독자들을 위한 빨간책방. 빨간책방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통해 빨간책방의 매력을 한층 더 깊이 느낄 수 있을 것이고, 몰랐던 사람이라면 이 책이 빨간책방에 빠지는 계기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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