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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초상
오사 게렌발 지음, 강희진 옮김 / 우리나비 / 2015년 2월
평점 :
우리 가족은 사이가 좀 유별난 편이다. 태어나 자라면서 단 한 번도 부모님이 부부싸움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을 정도로 두 분 사이는 다정하고, 사춘기를 지나면서 아빠와 어색해졌다는 주변 친구들과 달리 우리 집은 딸 셋 모두 엄마보다 아빠가 더 좋다고 말할 정도로 사이가 좋다. 서울에, 대구에, 포항에 각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는 지금도 가족 채팅방에서 매일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물론 사이가 각별하다고 해서 가족 간에 서로 마음 상하는 일이 없었던 건 아니다. 곱씹어 보면 갈등의 대부분의 원인은 의사소통에 있었다. 꼭 전해야 할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은 부끄럽고 어색하다는 핑계로 꼭꼭 묻어두기만 했고, 이해하고 보다듬어줘야 할 걱정스러운 마음은 감정을 앞세워 삐뚤게 내뱉고는 했다. 가깝다는 이유로, 편하다는 이유로, 가족이라는 이유로 최소한의 예의마저 상실한 채 던진 크고 작은 말과 행동들이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오해로 쌓였다. 가족과 사이가 좋은 것이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느낄 때도 있었다.
그러다 오사 게렌발의 신작 『가족의 초상』을 읽게 되었다. 사춘기를 겪고 있는 큰딸 마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5막 1장의 심리 드라마를 다룬 이 책은, 한 가족의 붕괴를 유발한 어떤 사건에서 시작된다. 마리의 부모인 라이프와 건에게는 절친한 친구 라그나르가 있다. 그가 친구의 집을 제 집 드나들듯 하는 속셈은 따로 있었는데, 바로 친구의 딸인 열여덟 살 마리에게 반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마리의 집에서 거하게 술을 마신 라그나르를 마리가 차로 데려다 주다가 라그나르에게 성추행을 당한다. 다음날 술이 깬 라그나르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사과하지만, 오히려 마리의 부모는 친구인 라그나르의 사과를 받아주지 않는 마리를 꾸짖으며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리고 10여 년이 흐른 후 부모인 라이프와 건, 그들의 두 딸 마리와 스티나, 그리고 이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라그나르, 이 다섯 명의 인물들이 경험한 사건의 전말과 그로 인해 초래된 결과를 저마다의 입장에서 얘기하고 있다. 공통적인 사건을 경험했음에도 모두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소통을 위한 시도와 각자의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절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P.41 엄마 건의 이야기
"마리는 결코 내가 상상했던 딸아이가 되지 못했다. 그때는 모든 엄마들이 그랬듯 나 또한 순진하게도 아이가 성장해감에 따라 사춘기 반항도 겪고 엄마와 딸 사이 관계를 더욱 친밀하게 해주는 선의의 논쟁도 벌이리라 꿈꾸었다. 함께 토론하고 조언도 하고 기운을 북돋아주고… 그렇게 해서 훗날 사위도 보고 손주들도 보고… 언젠가 한쪽 부모와 자식이 더 이상 서로 사랑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올 수 있다는 걸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 그리고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것도? 어째서 다들 엄마와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평생 조건 없이 서로 사랑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걸까? 엄마라고 해서 왜 무조건 아낌없이 아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하지? 아이들이 강아지처럼 제멋대로 날뛰어도 말이야. 엄마라고 해서 왜 자신을 지킬 권리를 가져선 안 되는 거냐고?"
P.61-62 아빠 라이프의 이야기
마리는 자주 이런 질문을 했지. "그때 말이야, 아빠는 어떤 생각을 했어? 느낌이 어땠어? 그리고 지금은 어때?" 하지만 어째서 그런 골치 아픈 일들로 굳이 소란을 피우려 드는지 난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중략) 마리가 내게 이야기를 한다는 건 필시 우리가 비교적 가까운 사이라는 표시였을 거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그 애가 낯설게 느껴졌다. 마리와 거리를 두고 있는 게 나인지, 아니면 나에 대해 거리감을 형성하고 있는 게 그 애인지 모르겠다… 마리는 내 도움을 원치 않는 것 같다. 직접적으로 말은 안 했지만 그래 보인다. 하지만 그 애가 그렇게 자라왔기 때문에 그런 건지 아니면 꽁하니 맺힌 데가 있어서 그런 건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지 않은가! 그 점이 정말 혼란스러워 미치겠다. 그래서 차라리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싶어진다.
P.89 동생 스티나의 이야기
때때로 난 언니 자신이 바로 그 파괴적인 경험들을 자초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언니는 무슨 얘기든 훨씬 더 부정적으로 만들어서 최악의 상태까지 밀고 나가야 직성이 풀린다. 어쩌면 주제 넘은 소리일지 모르겠지만 이런 생각도 해본다… 어째서 언니는 나처럼 될 수 없는 거지? 현재 우리 상황에서 볼 때 어닌는 내가 자기보다 더 행복하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언니는 조금이라도 나를 본보기로 따라야 한다고! 게다가 무슨 권리로 언니가 내 인생 계획을 비판할 수 있지? 그것도 자기 입으로 매장돼 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삶을 가지고서! 그게 제정신으로 할 소리냐고!
오사 게렌발은 각 인물들에 대해 개개인의 감정을 면밀하게 연구하고 심리를 파헤치고 분석하는 과정을 통해 한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의사소통 불능과 좀처럼 치유되지 않는 상처들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 딸의 고통을 외면하는 부모와 서로에게 무관심한 부부, 매사 비관적인 언니와 낙관적인 동생의 불가피한 갈등. 처음에는 막장 드라마 같은 이야기에 화가 치밀어 오르다가, 이 책을 덮을 때쯤에는 모두가 가해자이면서 피해자라는 생각에 안타까움이 들었다. 가장 많이 사랑하기에 가장 깊은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 가족.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가족의 초상이 이와 같지 않을까.
『가족의 초상』은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 서로 간의 관계를 짚어볼 기회를 마련해주는 책이다. 같은 피를 나눈 가족이라고 해도 각자 성격과 성향이 다르고, 처한 상황이 다르고, 맡은 역할이 다르다는 것을, 그로 인해 서로 간의 다름과 서로 간의 입장을 좀 더 이해하게 된다. 가족으로 인해 상처받고, 지금도 그로 인해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책을 읽어봤으면 좋겠다. 이미 생긴 상처를 없애주지는 못해도, 생채기 난 마음에 연고 같은 책이 되어줄 것이다.
추천사 / 박세현 (만화문화연구소 엇지 소장, 상명대학교 만화학과 외래교수)
집이란 물리적 공간은 인간에게 가장 평온하면서도 행복을 주는 안식처다. 하지만 그 집에 사는 가족은 사랑스럽지만 때로는 거추장스럽고, 누구보다 더 잘 통할 것 같지만 때로는 도통 속마음을 모르겠고, 지원사격하는 아군인 것 같지만 때로는 폐부를 칼로 찌르는 살인마나 다름없어 보인다. 이렇듯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그리고 성장하면서, 나아가 죽을 때까지 함께하는 가족은 천사와 악마의 얼굴을 모두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