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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 - 30년간 정신과 의사로 일하고 15년간 파킨슨병을 앓으며 비로소 깨달은 인생의 지혜 42
김혜남 지음 / 갤리온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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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을 읽는 내내, 지난 달에 읽었던 구작가의 <그래도 괜찮은 하루>가 떠올랐다. 마흔세 살의 나이에 파킨슨병을 진단받고 15년간 투병생활을 하고 있지만 이 병 덕분에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았다고 말하는 이 책의 저자는, 청각을 잃은 것도 모자라 시각까지 잃어야 하는 불행 앞에 아직 사라지지 않은 감각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앞으로도 계속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라고 말하는 구작가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파킨슨병에 걸려 몸이 점점 굳어가지만, 청각을 잃은 걸로도 모자라 시각까지 잃어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꿈꾸고 할 수 있는 일들을 즐기며 재미있게 살고 있는 그녀들.

 

문득 올초 신랑과 떠난 오키나와 여행이 생각났다. 오키나와는 대중교통 수단이 부족한 자동차 중심 사회라 짧은 일정 안에 여러 곳을 돌아다니려면 렌트카를 빌리는 것이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신랑이 운전면허를 딴 지는 꽤 됐지만 평소 운전을 할 일이 없어 운전석 위치가 바뀌는 일본에서 운전을 하는 것이 심히 걱정되는 상황이었다. 다른 여행객들의 렌트카 이용 후기를 샅샅이 찾아보고 일본 영화에서 운전하는 장면까지 찾아보면서 운전대 방향이 바뀌는 상황에 대비한 후 오키나와로 떠났다.

 

첫날은 깜빡이 대신 와이퍼를 켜기도 하고, 자신도 모르게 왼쪽 차선에 바짝 붙여대는 습관 때문에 고생했지만 우려와는 달리 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마음이 풀려서일까, 여행 셋째날 주차를 하다가 벽에 살짝 차를 박고 말았다. 그때부터 신랑은 얼음이 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나는 핸드폰으로 오키나와 여행 카페에서 사고 발생 시 물어야 하는 위약금에 대해 찾아보았다. 신랑은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있었고, 나 역시 위약금 걱정에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아직 우리의 여행은 하루가 더 남아 있었다


그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위약금이 얼마나 나올 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서 렌트카 안심 보험도 가입해두었고, 다른 차와 부딪힌 게 아니라 주차하다가 벽에 긁힌 거라 추가 피해 상황도 없다. 게다가 살짝 부딪힌 거라 차량 기스도 크지 않고. 어차피 사고는 일어났고 신랑도 낯선 환경에서 운전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이것 때문에 내가 잔소리를 해서 남은 하루를 망친다면 그건 더 속상하지 않을까?

 

까짓 꺼 위약금은 내면 되고, 사고 신경 쓰지 말고 남은 하루 재밌게 놀자!” 


걱정하지 말라고 내가 되려 큰소리를 치자 신경이 곤두서 있던 신랑도 조금 누그러진 듯 했다. 우리 둘 다 위약금이 신경 쓰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미 일어난 사고에 대해 전전긍긍하기보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하면서 화끈하게 받아들이고 나니 남은 일정도 즐겁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천만다행으로 아무런 위약금 없이 안심 보험으로 사고를 처리하고 홀가분하게 한국으로 돌아왔다.

 

p.19

아니, 내가 왜 이러고 있지? 나는 그대로인데, 단지 달라진 게 있다면 내 미래가 불확실하고 현재가 조금 불편해진 것밖에 없는데,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야? 내가 왜 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느라 현재를 망치고 있는 거지?’

 

p.21

만약 그때 침대에 계속 누워 병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며 지냈다면 어땠을까.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치매에 걸리고, 우울증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나를 상상하며 그 시간을 보냈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테고, 그저 의미 없는 하루하루가 반복되었을 것이다. 살다 보면 예기치 않은 불행이 닥쳐올 때가 있다. 그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 하지만 그 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는 내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똑같은 12년이라도 그 결과가 확실히 다른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내가 2001 2월에 파킨슨병 진단을 받고 깨달은 삶의 진실이다.

 

오키나와에서 일어난 렌트카 사고와 파킨슨병을 진단 받은 저자의 상황을 비교한다는 게 부끄럽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는 똑같지 않을까. 여행지에서의 하루든, 12년의 투병생활이든,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하루는 똑같으니 말이다. 낼 지 안 낼 지도 모르는 위약금 때문에 신랑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여행지에서의 특별한 시간을 망쳤다면 우리 부부에게 오키나와는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됐을 것이다. 앞으로 여행지에서 운전을 하게 될 때마다 쓰린 기억이 떠올라 싸움으로 번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살다 보면 예기치 않은 불행이 닥쳐올 때가 있다. 그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 하지만 그 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는 내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자세.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저자가, 그리고 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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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에 관하여 - 나를 살아가게 하는 가치들
임경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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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근래 생각이 참 많았다. 책을 만드는 편집자에서 책을 파는 서점원이 된 지 만 3년이 다 되어가는 시기에 찾아온 고민이었다. 편집자로 일할 땐 엄청난 업무량에 체력적으로도 힘들고 스트레스도 컸지만 독자들의 피드백이나 서점에서 내가 만든 책이 사랑받는 모습을 보면서 쌓인 피로를 모두 잊을 만큼 책 만드는 보람이 컸다. 그에 비하면 서점원으로서의 일상은 큰 스트레스도 없는 대신 매일매일 소소하게 흘러가는 그런 나날. 물론 내가 애정을 갖고 소개한 책이 독자들에게 사랑받을 때 느끼는 행복도 무시할 순 없지만 편집자로 일할 때 느꼈던 크나큰 보람과 성취에 많이 목말라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읽게 된 한 권이 방향감각을 잃고 어디로도 가지 못한 채 제자리에 빙글빙글 맴돌기만 하던 내게 북극성이 되어주었다.

 

p.242

자기가 취할 수 있는 부분의 여유는 취하되, 열심히 할 부분에선 이 악물고 열심히 해볼 필요는 분명히 있어요. 심리적 안정성취는 고루 조화를 이뤄야 하고, 그 밸런스는 자기가 잘 잡아가야겠지요.

 

오랫동안 바라왔던 일이었고 하는 일도 재밌었지만 편집자를 그만 둘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내 안의 모든 것이 소진되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정신적·체력적으로 모든 것이 탈탈 털린 느낌. 무엇보다 심리적 안정을 취하여 인풋을 채워야 할 시기였다. 회사를 그만두고 스스로 100일 동안의 안식일 프로젝트를 통해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다. 휴식을 취하고, 여행을 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들으며 바닥났다고 생각했던 내 안의 에너지를 채워나갔다.

 

안식일 프로젝트가 끝나갈 무렵, 나는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다시 편집자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일을 찾을 것인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일한다는 즐거움에도 불구하고 편집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지만, 그중에서도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건 마감이 있는 일의 특성상 반복되는 야근 때문이었다. 스스로 일정을 컨트롤할 줄도 몰랐던 나는 스트레스를 풀 여유조차 없어 받은 스트레스를 고스란히 끌어안고 또다시 출근해야 했다. 그렇다면 지금 나에게 가장 간절한 한 가지는 심리적 안정이었다.

 

책과 관련된 여러 가지 직업을 후보에 놓고 하나씩 따져 물은 끝에 내가 내린 선택은 서점원이었다. 그동안 책 만드는 일을 했으니 이제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책이 어떻게 독자를 만나게 되는지 배우고 싶기도 했고, 야근이 잦았던 편집일과는 다르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서점 영업시간이 근무시간인 규칙적인 생활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3년을 지내면서 심리적 안정을 취하고 나니 이제 다시 성취에 목마른 시기가 온 것이다.

 

다시 편집일을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체력이 약한 나는 보나마나 업무량에 눌려 힘들어 할 게 뻔한데, 성취를 원하는 갈증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누구보다 나 자신을 잘 돌보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고, 누구보다 내면에 귀 기울이고 있다고 생각한 내게 요즘의 고민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 같았다. 그때 읽게 된 책이 임경선 작가의 <태도에 관하여>였다. 이게 답이야 하고 정답을 알려주는 책은 아니지만, 나는 이 문제를 이렇게 풀어봤어. 너는 어떻게 풀고 싶어?라고 물어보는 것 같은 책이랄까.

 

p.30

절대적으로 즐겁고 보람찬 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일의 재미는 스스로 찾아야 하는 주관적인 문제다. 일이 내게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 탓하기 전에 내가 먼저 일의 가능성에 기회를 줄 생각을 해보면 안 되는 것일까. 회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나를 위해서 말이다. 일이 지루하다라고 투덜대기 전에 그럼 즐겁게 할 수 있는 방법은?이라며 고민을 해보면 안 되는 것일까.

 

인생 선배의 풀이과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다시 한 번 문제를 풀어보기로 했다. 그제서야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문제는 직장이 아니라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아니라 바로 나에게 있었다. 환경 탓을 할 게 아니라 내부에서 원인을 찾았어야 했다. 편집일을 하더라도 스케줄 조정을 하며 스스로 지치지 않도록 숨 쉴 틈을 줬어야 했고, 서점원으로 일하는 지금도 주어진 일이 소소하다고 핑계를 댈 것이 아니라 이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스스로 성취했어야 했다. 맹목적인 심리적 안정, 맹목적인 성취가 아니라 그 둘은 고루 조화를 이뤄야 하고, 그 밸런스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잘 잡아야 했다.

 

p.250

경선: 저는 그저 상대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자극을 주는 게 그나마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해요.

현철: 100퍼센트는 없는 거예요. 그 사람의 삶을 아는 사람은 그 사람밖에는 없으니까요. 우리는 대충 100분의 1도 모른다고, 제가 늘 얘기하거든요.

 

p.300

저는 이 책을 통해서 저에게는 이런 태도가 중요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묻고 싶어요. 이 책을 읽는 독자 한 분 한 분에겐 각자 어떤 태도가 중요하게 다가오는지. 물론 서둘러서 스스로를 마주하고 바로 답을 내! 이런 건 아니고요. 사실 시간과 품이 많이 드는 일입니다.

 

나침반조차 발명되지 않았던 시절, 사막을 여행하던 탐험가들과 바다를 여행하던 선원들은 별자리를 보고 길을 찾았다고 한다. 별자리는 일정한 주기를 따라 변하지만, 북극성만은 일주운동의 범위가 작아서 거의 같은 자리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기준점으로 삼을 수 있었다. 게다가 북극성은 매우 밝기 때문에 날씨가 쾌청하지 않아도 찾기에 용이했다. 사막에서든 바다에서든 북극성만 찾을 수 있다면 길을 잃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우리 인생에도 북극성과 같은 기준점이 필요하다. 이 책에서 말하는 다섯 가지 태도가 바로 그러한 기준점일 것이다.

 

<태도에 관하여>는 일, 사랑, 인간관계 등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수많은 인생 미로에 대해 저자가 생각하는 기준점, 북극성을 풀어 담은 책이다. 저자의 길이 이 방향이었다고 해서 내가 가야 할 길이 같은 방향일 순 없다. 자신의 삶을 아는 사람은 자신밖에는 없듯이, 자신이 가야 할 목적지를 아는 사람도 자기 자신뿐이다. 저자의 말처럼 시간과 품이 많이 드는 일이다. 때론 헤매기도 하고 때론 지치기도 하겠지만 가끔 막막할 때는 이 책을 꺼내보기도 하면서 자신만의 북극성을 찾아 나가자. 네비게이션의 안내에만 길들여진 사람은 사막 한가운데, 바다 한가운데에 떨어지면 꼼짝 없이 죽을 수밖에 없겠지만, 자신만의 북극성을 찾은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 테니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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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의 말 - 파리와 뉴욕, 마흔 중반의 인터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수전 손택 & 조너선 콧 지음, 김선형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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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이라는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녀를 자세히 접한 건 이 책이 처음이었다. 수전 손택의 작품을 읽어본 것도 아니었고, 그녀의 삶이나 행보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지만, 이 책을 보는 순간 왠지 모르게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책들 사이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보라색에,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수전 손택의 사진이 실린 표지에 저절로 손이 갔다는 게 맞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이 책을 읽기로 결심한 건 인트로 텍스트 때문이었다. 마음산책 출판사에서 출간하는 모든 책에는 본문에서 발췌한 문장이 인트로 텍스트로 들어가는데, 이 인트로 텍스트를 보는 순간 읽고 있던 책을 제쳐두고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책은 <롤링스톤>지의 에디터 조너선 콧이 수전 손택을 인터뷰한 책이다. 다양한 매체의 인터뷰를 엮은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긴 인터뷰를 원래의 호흡대로 담았다. 인터뷰어인 조너선 콧은 그녀가 컬럼비아대학교에서 강의하던 시절 학부 수업을 들은 학생이었다. 졸업 후에도 꾸준히 수전 손택과 교류를 이어갔던 그는, 오랜 기다림 끝에 『은유로서의 질병』 출간을 앞두고 인터뷰를 제의했다.

인터뷰가 이뤄진 1978년은 수전 손택에게 중요한 시점이었다. 1977년에 대표작인 『사진에 관하여』를 출간해 한창 주목을 받고 있었고, 1974년 유방암 선고를 받고서 수술과 투병으로 보낸 2년여 동안 구상한 또 다른 저서 『은유로서의 질병』이 출간된 시점이었다. 마흔다섯, 죽음을 관통해 생의 한가운데로 돌아온 그녀는 모두 열두 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인터뷰에서 자신의 글과 철학과 취향과 생활을 꾸밈없이 풀어놓았다. 수전 손택에게 가장 중요한 시기에, 사제 간의 끈끈한 교집합을 통해 그 어떤 인터뷰보다 '군더더기 없고, 정확하고, 요란하지 않고, 꾸밈없'이 수전 손택의 모습을 담게 된 것이다.


P.203 '옮긴이의 말' 중에서
이미 그해 <롤링스톤>지에 인터뷰 기사를 게재한 바 있는 콧이 손택의 사후에 편집도 논평도, 그 어떤 다른 매개도 없이 열두 시간에 걸친 긴 대화 속에서 포착한 그녀의 '육성'을 그대로 다시 한 번 '옮겨 적어'야겠다고 결심한 건, 아마도 인터뷰어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첨언과 해석의 권리를 포기하고 불필요한 신화의 양산에 동조하지 않겠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하여 이 책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몰개성적 '글'이 아니라 1978년 싱그러운 어느 여름날, 파리와 뉴욕이라는 특수한 시공간에서 발화된 사적이고 특수한 '말'을 성실하게 포착한다. 추임새와 웃음소리를 포괄하는 이 대화 속 수전 손택의 말에는 목소리가 있고, 체온이 있고, 감정이 배어난다. 그녀의 삶을 종단하는 서사는 없지만, 그녀 삶의 짧은 한 순간을 함께 횡단하는 체험이 있다. 


여느 인터뷰들이 근황을 묻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듯, 그녀의 투병 생활과 저서 『은유로서의 질병』 이야기로 시작한 인터뷰는 대표작들의 표지를 어떻게 골랐는지에 대한 소소한 에피소드서부터, 수전 손택의 글쓰기론에 대해 진중하게 풀어내기도 하고, 그녀가 좋아하는 작가와 뮤지션 같은 예술적인 취향, 성과 사랑, 영감이 되는 도시들의 이야기 등 다양한 주제에 걸쳐 손택의 모습을 담고 있다.


P.16-17 '서문' 중에서
"나는 인터뷰라는 형식을 좋아해요." 그녀는 언젠가 내게 말했다. "대화를 좋아하기 때문에, 문답을 좋아하기 때문에 인터뷰를 좋아하는 거죠. 그리고 내 사고의 상당 부분이 대화의 소산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어떤 면에선 글쓰기에서 가장 어려운 점이 혼자 해야 하고 그래서 나 자신과의 대화를 꾸며내야 한다는 사실이에요. 이건 본질적으로 자연스럽지 못한 활동이거든요. 저는 사람들에게 말하는 걸 좋아해요. 그래서 은둔자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거죠. 그리고 대화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낼 기회를 주죠."


P.33-34
콧: 베트남 방문에 대한 에세이에서 선생님은 수치와 죄책감의 문화가 어떻게 다른지를 논하시죠.
손택: 뭐, 분명히 겹치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요. 어떤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거니까요. 그렇지만 사람들은 병들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낍니다. 개인적으로는 책임감을 느끼고 싶어요. 사생활에서 곤경에 빠졌다는 느낌이 들면, 예를 들어 잘못된 사람과 얽혔다든가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이 되면 – 누구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일들 있잖아요 – 나는 항상 상대의 잘못을 탓하기보다는 책임을 지는 쪽을 선호합니다. 나 자신을 희생자로 보는 게 정말 싫어요. 차라리 뭐랄까, 내가 이 사람과 사랑에 빠지기를 선택했는데 알고 보니 개새끼였어, 이렇게 말하는 게 나아요. 그건 '내가 한' 선택이었으니까요. 더욱이 다른 사람을 탓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남을 바꾸기보다는 나 자신을 바꾸는 게 훨씬 쉽거든요. (…) 제가 보기에는, 병이 들어서 치명적인 질환을 앓는 건 마치 자동차에 치이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무엇 때문에 이렇게 앓아눕게 됐나 걱정해봤자 별로 의미가 없다는 거죠. 의미가 있는 행동이라면, 최대한 합리적으로 올바른 치료를 모색하고 진심으로 살고자 원하는 것입니다.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질병과 공범이 될 수도 있어요.


P.66
그래요. 독서는 제게 여흥이고 휴식이고 위로고 내 작은 자살이에요. 세상이 못 견디겠으면 책을 들고 쪼그려 눕죠. 그건 내가 모든 걸 잊고 떠날 수 있게 해주는 작은 우주선이에요.


P.160

여러 갈래의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은 확실히 했는데, 그렇게 여러 삶을 살면서 남편을 두는 건 아주 어려워요. 적어도 제 결혼은 그랬죠. 말도 못하게 치열한 관계였으니까. 우리는 항상 함께 있었어요. 하루 24시간 내내 어떤 사람과 함께 살면서 오랜 세월 절대 헤어지지 않으면서 동시에 성장하고 변화하고 마음 내키면 훌쩍 홍콩으로 날아가는 그런 자유를 누릴 수는 없는 법이에요… 그건 무책임한 거잖아요. 그래서 어느 시점이 되면, 삶과 기획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는 거예요.


P.187
1년 열두 달, 아니 심지어 열 달이어도 뉴욕에서만 살 수는 없어요. 이건 완전히 인위적인 삶이죠. 그렇지만 뭐 어때요? 자기 공간은 스스로 창조해야만 해요. 침묵과 책들로 가득한 공간 말이에요. 


이 책을 읽는 내내 수전 손택의 지성과 매력과 취향에 감탄하며 밑줄을 긋고 또 그었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 어떤 사유를 하는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어떤 존재로 보이고 또 기억될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나아가는 수전 손택의 모습에서 나 역시 삶의 나아갈 방향을 가늠할 수 있었다. 자신과 주변을 돌아볼 새도 없이 매일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사유와 철학을 권하고, 열정과 탐구심을 자극하는 그녀, 수전 손택. 나에게 수전 손택이라는 인생의 북극성을 만나게 해준 이 책이, 더 많은 이들의 머리맡에서 환하게 빛나길 바란다.


P.204-205 '옮긴이의 말' 중에서
마흔다섯, 죽음을 관통해 생의 한가운데 다시 선 그 순간의 그녀는, 이 인터뷰 속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의 패기를 당당히 드러낸다. 좋은 세상은 주변적인 인간들에게 너그러워야만 하며, 그 누구도 늙었다는 이유로 또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주눅 들거나 차별받아서는 안 되며, 객관적 세계의 실재를 부정하는 유심론의 신화와 폭압을 타파해야 한다고 외친다. 살기를 원하지 않는 자는 질병과 공범이라고 말하며, 삶을 긍정하고 삶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말한다. 가슴을 뛰게 만들고 세상을 바꾸는 음악과 예술의 힘은 대중•순수미술이라는 간극을 뛰어넘는다고 말한다. 그렇게 모든 이항 대립과 클리셰의 허위와 착시를 뒤흔들고, 진실을 복잡하고 심오하게 만드는 비판적 사유의 가치를 열렬히 옹호한다. 그리고 이 대화 속에서, 그렇게 마성의 매력을 지닌 사적인 사람 손택과 준엄하고 엄정한 공인 논객 손택의 무의미한 신화와 이항 대립은 허물어진다. 이 물 흐르듯 이어지는 ‘말’들의 풍요로운 향연은 그녀 자신의 말대로 준엄한 “윤리주의자”와 “정신 나간 탐미주의자”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나르시시스트와 자기 성찰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모성과 자기애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과 정전에 대한 헌신이 어떻게 한 사람 속에 어우러지는지를 날카롭게 일별하게 하고 신화의 장막을 뛰어넘어 인간 손택에게 다가가는 길을 열어준다.


"우리가 사람을 풍문으로 알 수 없듯이, 오로지 만남으로만 알 수 있듯이, 이 책의 인터뷰는 그 순간 승리자로서 생의 정점에 서 있던 손택을 '만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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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작가 글.그림 / 예담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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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책을 읽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얼굴을 보고 얘기하고, 감사함을 느끼기보다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오늘 하루.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당연한 것들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렸을 때 열병을 앓고 청각을 잃은 사람에게 이제 눈까지 볼 수 없다고 한다면? 위인전에서 읽었던 헬렌 켈러의 이야기가 아니다. 2015년을 살아가는 지금,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누군가의 이야기. 바로 귀가 큰 토끼 캐릭터 '베니'를 그린 구작가의 실제 이야기다.

 

P.24-27

귀가 들리지 않아 말을 할 수 없었던 저는 하고 싶은 말을 그림으로 그려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곤 했어요. 엄마는 말을 해보지 못한 제 혀가 굳을까 봐 설탕을 입 주변에 묻혀 빨아 먹는 연습을 하게 했어요. 계속 움직여야만 혀가 굳질 않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소리를 낼 수 있게 제 손을 엄마의 목에 갖다대고 그 울림을 느끼게 해주셨어요. 그러고선 다시 제 손을 제 목에 갖다 대고 비슷한 울림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그 연습을 쉬지 않았어요. 그냥 놀고 싶었던 저와 하나라도 꼭 가르쳐주고 싶었던 엄마. 아무도 모르는, 나와 엄마만이 아는 시간. 다른 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지루하고 힘겨웠던 시간이 이제는 추억이 되었네요.

 

이 책을 읽는 내내 상대적 행복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남의 불행에 위로를 얻고 남의 행복에 좌절한다. '이 사람은 나보다 처한 환경이 불우하니까, 이 정도면 난 행복한 편이야.' 혹은 '누군 나보다 이만큼 더 가진 게 많은데, 그에 비하면 나는 너무 불행해.' 이 책이 내 마음에 와 닿았던 건,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행복과 불행을 저울질한 게 아니라, 자신의 가진 조건 안에서, 내 안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찾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남들에겐 다 있는 것들이 왜 나에겐 없느냐고, 자신에게 없는 것만 찾으며 처한 환경을 불평하고 따져 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에게 없는 나만의 것을 찾아 가꾸고 만들어가는 모습에 존경심마저 들었다.

 

P.58

남의 조건과 환경을 부러워하다보니 부러움이 비교가 되어버리고, 자존감이 낮아지고, 행복지수가 낮아진 게 아닐까. 내가 가진 것이 남보다 없다고 생각한 건 단순한 비교가 아니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얼마든지 많은데 스스로 포기한 것은 아닐까. 사실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다른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행복과 불행은 절대적인 기준과 잣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느끼는 만족과 불만에서 행복과 불행의 명암이 나뉜다. 구작가는 귀가 들리지 않고 눈까지 보이지 않게 된 불행 앞에 포기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불행을 출발점으로 삼아 소리를 못 듣는 자기 대신 잘 들어주었으면 하고 귀가 큰 토끼 캐릭터 '베니'를 만들었다. 청각을 잃은 것도 모자라 이제 시각까지 잃어야 하는 불행을, 오늘부터 당장 버킷리스트를 실천할 수 있는 자극제로 삼는다. 눈이 안 보이면 안 보이는 대로의 또 다른 인생이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아직 사라지지 않은 감각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라고 말하는 그녀를, 어찌 응원하지 않을 수 있을까.

 

P.246

세상에 시각장애인 화가가 생각보다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들에게는 자기만의 방법이 있는 것 같아요. 어떤 화가는 물감의 온도를 느끼면서 색을 고르고, 또 어떤 화가는 다른 한 손으로 더듬어가며 그리기도 하더라고요. 저는 귀가 안 들리지만 짧은 순간 많은 부분을 스캔하는 능력이 있고, 깊은 관찰을 할 수 있는 능력도 있으니, 눈이 안 보이면 촉각과 후각이 굉장히 예민해질 것만 같아요. 물감의 온도, 그런 걸 섬세하게 느낄 수 있을지 아직은 상상이 안 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눈이 보일 때 수많은 색깔을 보았으니, 그 색들을 모두 기억해서 칠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 손바닥이나 손에 쥐어진 붓으로 감정을 색으로 표현하는 화가가 될 것 같아요. 슬픔 감정도 기쁜 감정도 더 잘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불행을 불행으로서 끝을 내는 사람은 지혜가 없는 사람이다. 불행 앞에 우는 사람이 되지 말고, 불행을 하나의 출발점으로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 불행을 모면할 길은 없다. 불행은 예고 없이 도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불행을 밟고 그 속에서 새로운 길을 발견할 힘은 우리에게 있다. 불행은 때때로 유일한 자극제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하여 불행을 이용할 수 있다."

- 오노레 드 발자크

 

발자크의 말처럼 불행을 모면할 길은 없다. 귀가 안 들리는 구작가에게 어느 날 갑자기 시력을 잃은 불행이 찾아왔듯이, 불행은 예고 없이 도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녀처럼 불행 속에서 새로운 길을 발견하는 힘을 가질 수 있다면 언제나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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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괜찮겠네
이사카 고타로 지음, 오유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하루키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본업은 소설가이고 자신이 쓰는 에세이는 '맥주 회사가 만드는 우롱차'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고. 세상에는 '나는 맥주를 못 마셔서 우롱차밖에 안 마셔' 하는 사람도 많으니, 이왕 그렇다면 일본에서 제일 맛있는 우롱차를 목표로 하겠다고 말이다. 나 또한 맥주보다는 우롱차 타입의 하루키를 더 좋아하는 독자 중 한 명인데, 최근 하루키의 우롱차만큼이나 따뜻하고 고소한 우롱차를 만났다. 일본의 젊은이들이 가장 따뜻한 작가로 꼽은 이사카 코타로의 산문집 『그것도 괜찮겠네』가 바로 그것이다. 하루키의 에세이가 일상의 사소한 경험도 놓치지 않고 거기서 삶의 행복을 찾는 맛의 우롱차라면, 이사카 코타로의 에세이는 답지 않게 착한 미스터리 소설가의 인생을 다독이며 사는 맛이 나는 우롱차라고나 할까. 산문집으로 그를 처음 접한 나는 '정말 미스터리 작가라고? 아동문학 작가가 아니라?' 하고 생각할 정도로 다정다감한 글이었다.


추리소설가인 이사카 코타로는 데뷔 직후 이런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10주년 되는 해에는 에세이집 한번 내보는 게 어떨까요?" 그때 그는 10년 뒤에도 이 일을 계속하고 있지는 않겠지, 막상 그때가 되면 흐지부지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선선히 대답했다고 한다. 그런데 웬걸. 그가 등단할 때 담당 편집자였던 신초사의 아라이 씨가 "에세이집 말인데요, 어차피 쓸 거 데뷔작이 발매된 날에 맞춰 출간합시다."라고 선언한 것. 그렇게 해서 이사카 코타로의 등단 10주년을 기념해 그동안 썼던 산문들은 모아 낸 책이 『그것도 괜찮겠네』다. 


이사카 코타로의 산문집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고소함 중 하나는 바로 '덧글'이다. 에세이집이 나올 걸 생각지 않고 에세이를 썼다가 나중에 한 권으로 묶는 과정에서 일종의 후일담이랄까, 어떤 제안으로 이 글을 쓰게 됐는지, 그 당시 상황은 어땠는지, 어떤 생각으로 썼는지 덧붙이고 싶은 내용을 덧글 형식으로 쓴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을 읽을 때가 가장 재밌어서 키득키득 소리 내어 웃을 정도였다.


P.15 '지루해? 그럼 제가 한번…'

독창적인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마음은 늘 한결같지만 다른 이의 손으로 빚어진 영상과 문장들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도 사실입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가능하면, 그것들을 모두 담아내면서도 뭔가 줄 것이 더 있는 그런 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그렇게 저를 키울 자유는 저 자신에게 있으니까요.

덧. 이 글은 『오듀본의 기도』가 출간되기 전 신초 미스터리 클럽상을 수상하고 나서 바로 쓴 에세이입니다. 처음 받은 원고 청탁이다보니, 이 에세이를 제대로 쓰지 못하면 다음부턴 전화 한 통 없을 거라는 생각에 나름의 취향을 드러내려고 애썼습니다. 그 후로도 에세이를 쓸 때는 꼭 저만의 취향을 담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습니다!


P.76 '원숭이 때문에 얼굴이 빨개져'

덧. 어느 날 센다이에 온 친한 기자 한 분이 선물을 가져왔다며 큰 상자와 작은 상자를 내놓더니,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죠. "어느 게 좋은 겁니까?" 겉만 크고 속이 빈 것보다는 작지만 실속 있는 것이 좋겠다 싶어, 저는 작은 상자를 골랐습니다. 그랬더니 열고, 열고, 또 열어도 작은 상자들이 계속 나오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게 대체 뭔가 하면서 계속 열다가 마침내 제일 작은 상자를 열었더니 '에세이 의뢰'가 들어 있지 뭡니까. 당시 에세이는 무조건 사양할 작정이었는데 이것 때문에 웃음이 터져, 승락했습니다. 그것이 이 에세이를 쓰게 된 사연입니다. 


에세이는 소설과 달리 창조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실제로 보고 체험한 일에 대한 마음을 쓰는 것이다. 이사카 코타로의 에세이는 그게 무엇인지 잘 드러나 있다. 소소한 일상도 진심으로 대하는 법들이 가득한 이 책은 남들한테는 중요하지 않은 일에 신경을 쓰고, 작은 일에도 나다운 게 뭘까 골똘하게 생각하고, 잘해보겠다고 일을 벌였다가 흐지부지되고 만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저자의 아버지에 대한 에피소드다. 캐러멜 콘에 들어 있는 땅콩의 양이 포장지에 나온 이미지와 다르다며 '모든 소비자를 위해 싸우겠다'고 제조사에 항의 전화를 한다거나, 어딜 가나 주머니에 개 사료를 넣고 다닌다거나, '개의 코가 촉촉이 젖어 있는지의 여부는 건강의 척도'라면서 코가 바싹 마른 개를 보면 손가락에 침을 묻혀 발라준다거나 하는 것들. 크고 대단한 사건이 아니라 소소한 위안을 주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어서 이 책을 읽다 보면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넓고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착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의 글 속에 담긴 따뜻한 인생관을 보면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만큼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 수 있다면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116-117 '나그네 비둘기'

생각해보면 도라에몽이 없었으면 저는 나그네 비둘기의 존재를 몰랐을 겁니다. 그 말은 결국 나그네 비둘기가 등장하는 소설도 쓰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미스터리 작가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요. 그런 의미에서 정말 『도라에몽』은 저에게 소중한 만화라 할 수 있죠. (중략) 만약 자식이 생기면 그 아이에게 읽히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제가 생각날 때마다 읽기 위해서라도 얼른 『도라에몽』 전집을 갖춰놔야겠습니다. 이것이 지금 제일 하고픈 일입니다. 아! 그런데 전집을 수납할 공간이 없네요. '도라에몽, 내게 넓은 방과 큰 책장을 보내줘.'


P.139-140 '개 코에 침 바르기'

아버지의 바지 주머니에는 늘 개 사료가 들어 있습니다. 손수건은 없어도 개 사료는 상비합니다. 캔에 든 질척한 것이 아니라 건조시킨 과자처럼 생긴 것들인데 봉투나 상자에 넣지 않고 그대로 주머니에 넣고 답니다. 대체 그 옷을 누가 어떻게 빠는지, 잔돈과 헷갈려 개 사료를 내미는 일은 없는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지만, 아무튼 아버지는 그런 식으로 개 사료를 갖고 다니다가 길에서 개를 만났다 하면 어이! 인사를 하고 얼른 주머니에서 사료를 꺼냅니다.

(중략) 그리고 '개의 코가 촉촉히 젖어 있는지의 여부는 건강의 척도'라면서 코가 바싹 마른 개를 보면 "얘야, 너 괜찮니?" 하며 손가락에 침을 묻혀 개의 코에 발라줍니다. 옆에서 보면 본말이 전도된 건 아닌가 싶지만 그 역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는 길에서 만난 어린아이의 코에도 침을 발라주는 장면도 목격했습니다. 그 아기는 할아버지가 자기한테 무슨 짓을 하는지 몰라 멍하니 눈만 깜빡이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신변잡기 같은 글을 굳이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낼 필요가 있었을까? 등단 10주년 기념? 팬 서비스 차원?’ 이사카 코타로 역시 10주년이라는 타이밍은 구실이지만, 그것을 빼면 에세이집을 낼 마음이 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모은 에세이를 다시 읽다가 자신이 얼마나 평범한 (자극 없는) 날들을 보내왔는지 알게 되었고 (당연한 일이지만) 매번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반성했다고.


물론 이사카 코타로의 팬이라면 그런 이유만으로도 충분한 책이다. 이사카 코타로가 추천하는 책과 영화, 음악들이 중간중간 언급돼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취향을 훔쳐보는 재미도 있고, 작가가 어떤 계기로 혹은 어떤 생각으로 작품을 쓰게 되었는지 집필 과정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어서 작품을 통해서만 보여지는 작가의 단면을 좀 더 확장시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P.252

또 하나는 후반부에 등장인물이 말하는 ‘오토매틱 레버(자동변속 기어-옮긴이)’ 운운하는 대사에 대한 기억입니다. 그 대사는, 당시 저 자신이 매일 육아와 글작업에 정신이 없어 조금이라도 다음 일을 떠올릴라치면 아예 다 때려치우고 싶어졌고, 또 누군가 저한테 ‘너무 부담 갖지 말고 그날그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다보면 앞으로 나갈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을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에 튀어나온 말이었습니다. 부끄럽지만, 지금도 가끔 정신적으로 패닉에 빠질 지경이 되면 이 대사를 떠올리며 마음을 가라앉힙니다.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저한테는 소중한 단편입니다.


책에서 어렵고 무겁고 진지한 의미를 찾고 싶다면, 책을 읽는 시간의 가치를 따진다면, 나는 이 책을 추천하지 않는다. 조금은 가벼워질 필요가 있을 때, 모든 일이 시시하고 따분하게 느껴지거나 혹은 기운이 쭉 빠진 어느 날, 따뜻한 우롱차 한 잔처럼 권하고 싶은 산문집이다.


덧. 이사카 코타로의 소설을 좋아하는 팬이라면 당연히 좋을 책이지만, 나처럼 『그것도 괜찮겠네』를 통해 그의 팬이 되고 소설을 찾아 읽게 되는 독자도 분명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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