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드 1 - 가난한 성자들 조드 1
김형수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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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죽고 살면 살리라.‘ (48)

"하늘에는 기러기들의 세상이 있고, 물에는 물고기들의 세상이 있어. 초원에는 사내들의 세상이 있지. 그걸 지켜야 하기 때문에 다들 고통을 참으면서 자기 자리를 견디는 걸 좀 봐. 이럴 때 한 명이 인간의 도리를 져버리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하찮은 자리로 떨어지고 말 거야. 너는 누구와도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에게 확인시켜주었어. 그래,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가라." (62)

"물보고 싫다는 사람은 없지? 당연히 다투듯이 샘을 찾다 보니 비슷한 곳에 닿는다. 한데, 사람이건 동물이건 발자국이 많아지면 초원이 파괴돼. 이걸 발자국 조드라 하자. 처음에는 인정에 끌려 보살피던 주민들도 발자국 조드 때문에 점점 폭력을 쓰는 거야. 그래서 충돌이 커지다가 나중에는 서로가 서로를 사냥하게 돼. 지금 오논 강 주변에서 싸우는 것들을 가만히 두면 이렇게 될 거야." (119)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다. 세상은 따뜻하다고 믿는 순간에 너무 차고, 차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온기가 나온다. 어떤 것이 참모습일까? 테무진은 잠시 혼란을 느꼈다. 보르지긴의 흰 뼈들, 친척과 지인들은 왜 그토록 가혹하고, 어쩌면 흰 뼈를 미워해야 옳을지 모르는, 부족의 혜택이라고는 보지 못한 사람들은 왜 그리도 인정이 많은지, 그러나 낯 뜨거워서 친구에게 고맙다고도, 미안하다고도 말하지 못한다. (155)

그런데 왜 못 죽였을까? 칼을 쥔 손에 몇 번이나 힘이 들어가 근육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는데, 왜 휘두르지 않고 돌아갔을까? 테무진에게는 그것이 언제나 수수께끼였는데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의문이 풀렸다. 매번 남들이 보고 있었다는 것, 비겁한 이웃을 원망할 일이 아니라 감사해야 된다는 말이 백번 옳다. 아버지를 잃고 죄도 없이 붙들려온 어린 소년을 뚜렷한 잘못도 없이 죽였다가 인심을 잃게 되면 키릴툭의 권세는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 이목이 자신을 살린 것이다. 그 이목을 일컬어 사람들은 세상이라 부른다. (174)

어머니는 며느리가 행복해하는 표정에 안심이 되면서도 염려스러웠다. ... 하지만 행복에 예민한 가슴이면 불행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다. 테무진은 초원의 모든 위험에 노출된 사람. 이웃도 없지만 다른 쿠리엔에 들어갈 생각도 없는 망명 부족장의 후손이니, 그의 아내라면 마땅히 누가 보호해주지 않아도 스스로 존엄을 지켜야 한다. 빈털터리이면서 왕비 같은 품격을 가지려면 절망에 눈멀어야 하고, 슬픈 감정이 엄습해도 푸른 하늘을 원망하지 않도록 수양해야 한다. 간이나 허파, 쓸개 같은 신체 기관처럼 너무도 명백하게 존재하는 절망, 낙담, 후회 같은 감정 기관을 잘라야 하는 것이다. (234)

어머니 안에는 언제나 그가 가보지 못한 대륙이 있었다.
"울 생각 마라. 자신의 생애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 이해하기에 인간은 너무 작아. 인간은 아주 크단다. 우리는 자기 발밑도 온전하게 볼 수가 없어. 사랑의 생명이 끝나버린 잿더미 속에서 새로운 사랑이 시작될 걸 누가 알아? 한데 그것도 하나의 생명이란다." (290)

"보오르추가 물안개 피는 언덕에 게르를 쳤을 때, 나는 말이나 치면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어. 이제 깨달았지. 초원에 그런 삶은 없다는 거. 혓바닥에 고기 한 점이라도 올릴 수 있으려면, 그리고 제멋대로 찾아오는 적에게 천창이 불타고 하늘이 지붕이 되는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스스로 지키는 수밖에 없어. 흩어진 부족을 모으자." (303)

진정 신비에 찬 순간은 새로운 통치력이 탄생하는 때이다. 호기심에 가득 찬 영혼들에게 한번 자극된 기대가 저절로 사라지는 법은 없다. 자무카는 사만의 용사들을 완벽하게 휘어잡았다. 눈앞의 모든 것이 그의 생각과 의지에서 나온다. 자무카가 속도를 높이면 대열이 빨라지고 그가 멈추면 거대 집단이 마치 하나의 몸체처럼 따라서 멈춘다. 생명체는 하나인데 그 움직임은 천지를 진동시킨다.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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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드 1 - 가난한 성자들 조드 1
김형수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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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것 아닌 대자연을 문자로 실감나게 창조한 것이 귀함! 대자연(조드)-운명(푸른하늘)-인간 관계에 대한 좋은 사유. 늑대는 늘 인간에게 영감 주는 멋진 존재. 단 대자연이라는 강력 캐릭터에 비해 인물의 매력 및 인물간 갈등은 약함. 몽골에 어두운 독자 위한 설명적 부분은 필요하지만 부자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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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1960년대 - 도쿄대 전공투 운동의 나날과 근대 일본 과학기술사의 민낯
야마모토 요시타카 지음, 임경화 옮김 / 돌베개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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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본 일본인의 반성 중 가장 철저한 것 중 하나. 파시즘과 민주에 동시 복무하는 ‘가치중립적‘ 과학이라는 최면이 3.11까지 이어진 것과 그런 과학의 온실인 도쿄대 이학부의 해체까지 생각했던 전공투를 보여줌. 그 난폭한 세월의 본질을 평이한 언어로 무척 담담하게 서술하는데 밀려드는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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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1960년대 - 도쿄대 전공투 운동의 나날과 근대 일본 과학기술사의 민낯
야마모토 요시타카 지음, 임경화 옮김 / 돌베개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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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출구가 보이지 않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위험한 배외주의 사상의 침투는, 평화헌법을 지켜 왔다고는 하나 과거의 제국 일본에 대한 진지한 비판과 반성을 결여한 채로 경제성장을 추구했던 전후 일본에 대한 통절한 반성을 우리 일본인들에게서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제 경제성장과 국제경쟁을 대신할 새로운 길, 저성장 속 민중 국제연대의 길을 찾아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9)

당시의 논의를 회고해 보면, 현실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대신에 무엇이든 곧바로 미국에 대한 일본의 종속과 식민지화라는 상투어로 정리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경향은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그러한 안이함이 그 이후 사태의 진행을 전망하는 것을 방해했다.(...) (23)

그러나 이미 1960년대 단계에서 히로시게 데쓰는 지적했다. ‘이공계 붐‘이라는 이름으로 화학이나 물리뿐만 아니라 수학 같은 순학문적인 학과에 이르기까지 이학부 졸업생들에게 민간기업들이 수많은 유혹의 손길을 뻗치던 이 시기에 "이미 이학부는 옛날처럼 학문이 밥보다 좋은 은자가 가는 곳이 아니게 되었"고, "1956년 무렵부터 표면화되어 더욱더 격렬해진, 과학기술에 대한 독점자본의 요구 앞에 대학 연구자들은 급격히 자주성을 상실하고 있"었으며 "‘학문의 자유‘, ‘대학 자치‘라는 관념은 그저 빈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역으로 학문의 독점에 대한 복무를 변호하는 슬로건으로까지 영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53)

26 과거 장기간에 걸쳐 식민 지배를 한 한반도 국가에 대한 국교 수립은 무엇보다도 35년간의 식민지 지배 책임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고 전후 일본에게 중요한 과제인데, 1965년에 일본 정부는 한반도가 분단국가가 된 가운데 당시 반공군사정권 지배하에 있던 남부 대한민국하고만, 분단을 고정시키는 식으로 조약 체결을 도모했다. 그것은 또한 이후 동아시아 개발독재형 친미반공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만들어 그들을 일본의 수출시장에 편입시킨다는 일본 자본주의의 일관된 목표에 기초한 것으로, 한일조약 반대 투쟁은 그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과거에 식민지 지배를 했던 한반도 북구국가와 여전히 국교가 없다는 것은 역시 비정상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68)

그 결과, 한편에서 군은 과학자가 19세기 SF소설에서 묘사되곤 하는 실무에 어두운 공상적 인종이 아니라 실제로는 대단히 유능하고 도움이 되는 인종이라는 것을 알고, 전후에도 과학자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과학자의 포위를 도모했다. 다른 한편에서 윤택한 연구비의 맛을 안 과학자도 전전의 빈곤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았고 통 큰 스폰서인 군과의 우호관계 유지를 희망하게 된다. 돈이라는 것은 마약과 같은 것이어서, 한번 받아들이면 이윽고 그 돈 없이는 헤쳐 나갈 수 없게 된다. 일본에서 원전을 받아들인 지자체가 이윽고 원전의 교부금 없이는 헤쳐 나가지 못하게 되어 결국 2기째, 3기째 계속해서 늘려 갈 수밖에 없게 된 것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1950년 무렵까지 미국에서 과학 연구의 전후 구조는 완성되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군산학 그리고 국가의 일체화다. (73)

전쟁을 선동한 정치가와 전쟁을 지도한 군인이 패배의 책임을 ‘과학‘에 돌린 건 전쟁책임 추궁이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것을 교묘히 회피한 것이라 불쾌한 마음이 드는데, 매스컴을 비롯해 그것을 비난하는 논조는 없었던 것 같다. 그뿐인가, 매스컴이나 지식인이나 자신들이 침략전쟁에 가담한 것에 대한 반성도 없이 ‘일본은 과학전에서 패배했다‘는 논의에 동참했다. 특히 미군에 의한 원폭 투하는 그야말로 그 ‘과학전의 패배‘를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
그것은 또한 일본의 패배가 정확히는 ‘아시아태평양전쟁‘의 패배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미국에 대해서만 패배한 것처럼 잘못된 이해를 초래함으로써 그 이전에 일본이 중국에 패배했다는 사실, 얕보았던 중국인들에게 졌다는 현실을 은폐하는 것이기도 했다. (77)

니시나는 원폭 투하 직후 히로시마의 지옥도를, 그리고 나가이는 원폭 투하 후 나가사키의 참상을 직접 목격했다. 그 학적 경력으로 보나 특이한 경험으로나 당시 일본에서는 방사선의 위험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는 입장에 있었지만, 그 두 사람조차도 20세기가 낳은 과학기술인 ‘원자력‘의 장래에 대해 이 정도의 신뢰를 갖고 있었다. 과학자가 미증유의 살상력과 파괴력을 가진 무기를 만들어 냈다는 데 대한 회한이나 죄의식, 공포의 감정 같은 것은 편린도 찾아볼 수 없다. (81)

애당초 1966년에 미국 자금 도입을 꾀한 것은 소니연구소 소장 하토야마 미치오...와 도쿄대 물리교실 교수 우에무라 야스타다...였고, 미군과의 사이를 중개한 것은 전 도쿄대 총장 가야 세이지였다. 즉 연구비가 가장 풍부한 위치에 있는 연구자들이었다. 그에 비해 연구비가 부족한 지방 대학 연구자일수록 윤리적으로 결벽했던 것으로 보인다. 연구비가 적으니까 미군에 자금 원조를 요구했다는 건 거짓말이다. 오히려 역으로 연구비가 풍부해지는 만큼 돈맛을 알아 돈에 대한 감각도 마비된 것 같다. ‘부자와 재떨이는 쌓이면 쌓일수록 더러워진다‘는데 정확한 말이다. (84)

결국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라는 건 실은 군정하의 오키나와에 미군기지를 억지로 떠맡겨 일본이 극동에서의 냉전체제 유지에 관련을 맺으며 아시아 각국 민족해방 투쟁의 암살에 가담함으로써 존립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10.8에 벌어진 야마자키 군의 죽음이 제기한 것은 그것이었다. (97)

돈벌이라는 점에서, 일본의 고도성장은 1954년 말에 시작된 진무경기부터 74년 오일쇼크까지 실로 20년 가까이 지속되었고 그것은 세계사적으로 보아도 드문 사건인데 그 고도성장의 시작을 뒷받침한 것이 한반도 특수, 그리고 그 후반을 뒷받침한 것이 베트남 특수였다. 66년부터 71년까지 베트남 특수로 일본 기업에는 매년 10억 달러의 돈이 들어왔다. ...
오컨대 전후 일본의 ‘평화와 번영‘은 한반도와 베트남 사람들이 흘린 피로 얻어졌으며, 오키나와를 미군정하에 맡겼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99)

즉 그 학생은 마루야마 마사오를 사상과 행동이 일관된 인물로 간주한 후에 비판하라고 한 것이다. 그에 비해 나는, 아아 마루야마도 도쿄대 안에서는 법학부장과의 개인적인 관계, 동료와의 관계, 오코치 가즈오나 문학부 교수와의 교우관계, 그러한 것을 고려해 결국 그러한 굴레 속에서 사는구나, 쉽게 말해 도쿄대는 편한 곳이구나 생각했다. 그는 요컨대 보통사람이었던 것이다. (120)

진정한 의미의 ‘전공투‘를 만들어 낸 것은 니혼대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1968년 6월에 투쟁이 시작된 후 극히 단기간에 각 학부에 강력한 행동대를 조직했을 뿐만 아니라, 11개 학부로서 사실상 11개 대학이 있다고 일컬어지는 초매머드 대학의 전학적인 사령탑으로 정보국을 형성한 역량은 괄목할 만한 것이다. 니혼대 전공투만의 데모로 니혼대 경제학부 앞 미사키초... 도로가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실제 물리적으로 흔들렸는데, 니혼대 전공투는 단순히 그 압도적인 동원력이나 기동대, 무장 우익을 상대로 한 실력행사에 강했다는 점에서만 대단했던 게 아니다. 니혼대 투쟁은 학생 대중의 정의감과 잠재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시킨 투쟁이었으며, 그 의미에서 에누리 없이 전후 최대의 학생운동이자 최고의 학원투쟁이었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대단했다. 지금도 눈물이 난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전투에서뿐만 아니라 운동을 조직하는 면에서도 대단히 유능했다. (149)

즉 19세기 중엽에 물리학은 교과서화되는 중이었고, 무에서부터 흡수할 수 있는 문호가 형성되어 있었다. 바로 그 타이밍에 일본이 근대화를 개시하여 서구 과학 학습을 시작했던 것이다. 더욱이 그 시기는 완전히 새로운 20새기 물리학인 원자 원자핵 물리학,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이 출현하기까지는 아직 조금 시간이 있었다. 마침 그 시기에 서구 물리학의 저작과 흡수에 착수한 일본에게는 서루에 비교적 빨리 다가갈 기회가 남겨져 있었던 셈이다. 이리하여 일본의 이론물리학 제1세대라고 할 만한 나가오카 한타로...나 이시하라 아쓰시...가 정말 겨우겨우 첨단에 손이 닿을 정도의 작업을 할 수 있었고, 후속세대인 유카와 시대키나 아사나가 신이치로가 최첨단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일본의 개국이 반세기 빨랐다면, 혹은 반세기 늦었다면 일본의 물리학이 이토록 급속히 서구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167)

전시하에서는 많은 이공계 학생이 절대적 천황제와 국가주의 사상 아래 국가를 위해 일신을 바치도록 교육받았다. 전후에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사회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아마도 대다수 학생은 일신을 바칠 대상을 기업으로 바꾸어 의욕을 가지고 정력젹으로 일했을 것이다. 기술자란 기술 자체에 관심을 가지므로 사상적인 갈등도 별로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이렇게 제국헌법에 의한 전시 중이든, 신헌법의 전후든 상관없이 눈앞의 일에 자기 지식과 재능을 쏟은 ‘성공자‘의 ‘성공담‘이 각광을 받고, 전전과 전중의 과학 교육이 전후에 과실을 낳았다는 이런 식의 값싼 스토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되고, 나아가 전시의 기술자 교육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흔히 외치곤 한다. 그에 대해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이렇게 해서 전전과 전중에 발생한 공학 이학 교육의 전쟁책임을 불문에 부치고 있다는 점이다. (211)

‘과학‘은 가치중립적이고 전쟁 때나 평화 시에나 파시즘에든 데모크라시에든 똑같이 유용하다는 논의가 가능하다는 건 인정한다. 그러나 파시점에 협력하는 것과 데모크라시에 협력하는 것은 똑같지 않다. 전시하에 전쟁 수행을 위한 과학 진흥을 운위하던 과학자가, 전후가 되어 상황이 바뀌니까 별 심각한 반성도 없이 이제는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과학 진흥을 말하는 따위는 내게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런 식이라면 상황이 바뀌면 또 간단히 바뀌게 될 것이다. (215)

...... 무리학의 기본법칙은 이와 같이 그대로의 자연에는 있을 수 없는 인위적으로 이상화된 상태, 즉 현상의 본질적인 부분만을 부각하기 위해 환경과의 상호작용, 환경과 물질 에너지 운동량 간의 교환을 차단하고 자연 과정에서 비본질적 요인으로 판단되는 요소를 제거한 상태에서 발생하는 현상의 법칙으로 만들어졌다. (229)

이러한 예를 보면 기술에 대한 유일하게 유효한 비판은 ‘외재적 비판‘, 다시 말해 ‘이해가 느린 비전문가의 완고한 비판‘이라 했던 무라오 고이치나 우이 준의 지적...이 역시 핵심을 찌르고 있는 것 같다. (238)

만약 대학의 개개 학문분야가 직접 국가 내지 기업의 보조를 받아 이러한 자금원과의 계약관계를 갖거나 확대하거나 하면 그 결과가 어떠한 것이 될지는 거의 자명하다. 이렇게 대기업체제에서 관심을 받은 테마가 대기업체제의 필요에 반응하면서 편중된 성장을 할 뿐만 아니라, 그에 관여하는 사람들은 계약 상대인 정부기관이나 기업의 목표에 갈수록 공명하게 될 것이다. ... (256)

도쿄대 투쟁의 뚜렷한 특징은 특히 대학원 차원에서 대학에 대한 어떠한 비판이든 그 비판이 동시에 대학공동체를 뒷받침하던 자신들 자신에게도 향한다는 사실을 자각했던 것, 혹은 그 자각을 요구했다는 점에 있다. (261)

따라서 우리의 투쟁은 연구실 운영의 민주화를 추진하거나, 대학 운영에 대한 대학생과 대학원생의 참가 권리를 인정해 달라는 차원의 문제에서 얼마간의 타협을 이끌어 내 승리로 총괄하고 자기당파의 세력 확대에 운동을 집약시키는 것이 아니라, 대학의 연구와 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재고를 요구했던 것이다. (265)

그리고 지금 국립대학에서 인문계, 사회학계 학부 ‘폐지‘ 전망을 비롯한 난폭한 논의가 문부과학성에서 나오는데, 그 모델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전시하에서 만들어진 오사카제대와 나고야제대이며 그것은 바로 전쟁 수행을 위한 대학이다. 그 전쟁이 군사적인 것이든 경제적인 것이든 본질적으로 차이는 없다. (272)

보석이 되었을 때 앞으로도 물리학 학습은 계속하리라고 생각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물리학 학습은 그만둘 수 없겠다고 생각했는데, 연구실로 돌아갈 마음은 없었다. 물리학 학습은 어디에 있더라도 계속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281)

원전에 대해서는 가끔 반대의 견해를 표명해 왔지만, 3.11 후쿠시마를 막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 전쟁과 파시즘의 전야처럼 되고 말았다.
젊은 시절 우리는 패전 이전을 살았던 사람들에 대해 왜 일본의 그런 전쟁이나 파시즘을 막지 못했는가를 물어 왔다. 솔직히 똑같은 말을 우리에게 지금의 10대나 20대 사람들한테서 듣지 않을까 생각한다. ...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결과적으로는 3.11의 파국을 막지 못했다. (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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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포 산토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W. G. 제발트 지음, 이경진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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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 동안 아끼며 읽었다. 좋은 문장을 적어 두려다가 많아서 이내 포기하고. 작품 전체가 ‘시‘인데 아름답다는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시시각각 흐르는 의식의 미세한 결들을 정확하게 표현해낸다는 점에서. 함께 그곳을 여행하고 그 책을 읽는 기분. 에세이란 장르, 이런 높이까지 이를 수도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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