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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 굿바이
이시다 이라 지음, 김해용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시라 이라. 이 일본작가를 주목하게 된것은 '이케부쿠로 웨스트게이트 파크'라는 추리소설을 읽고서였다. 기존의 추리소설과는 또 다른 느낌을 주는 이책을 읽으면서 아 이사람 글쓰는 재능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추리작가로써 명성을 얻을줄 알았던 이 작가가 확 다른 스타일의 소설들도 쓰고 있는게 아닌가. 알고봤더니 추리소설만 쓰는게 아니라 기업소설, 청춘소설, 연애소설, 가족 소설등도 쓰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하나 하나의 작품들이 묘한 재미를 주고 있다.
이번에 새로 나온 이 책 '슬로 굿바이'는 청춘들의 사랑이야기를 모은 단편집이다. 그런데 이 짧은 이야기들의 내공, 장난아니다.
띠지에 있는 광고 문구처럼 '이야기의 귀재'라고 할만하다. 어떻게 보면 사랑이야기는 진부하다. 인간이 있는 한 끝까지 이어질 이야기고 새삼스러울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단순하고 진부한 사랑이야기를 이시라 이라는 참 맛깔스럽게 잘 포장해서 만들어냈다. 사랑이란게 참으로 다양한 빛깔을 띄는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하는 이야기들이었다.
제목은 슬로 굿바이. 뭐 천천히 이별한다는 그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지만 10편의 이야기들이 다 이별이야기는 아니다.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도 있고 이별을 하는 이야기도 있고 이별을 했다가 다시 이루어지는 것도 있고 사랑을 확인하는 이야기도 있고 여러가지 형태의 사랑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이 아주 특별난건 아니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있을수 있는 이야기들인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을 지은이는 참 천연덕스럽게 잘 이야기하고 있다. 마음에 참 잘 와닿아서 얄밉게 글을 쓴다고 할 정도다.
첫 이야기인 '울지 않아'는 이별을 한 어떤 여성이 진정으로 자신을 좋아해주는 사람을 가까이에서 얻는다는 이야기이다. 편하게 알던 친구인데 이별을 하고 나중에 봤더니 괜찮은 사람이더라 이런 이야기는 그리 새로울꺼도 없고 주위에서 제법 봤을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시라는 그 과정을 참 깔끔하면서도 담백하게 잘 그려내고 있다. 울지 않던 사람이 결국 울음으로써 마음을 정리하게 되는 장면이 참 인상깊었다.
'15분'은 참으로 도발적인 이야기다. 그리 친하지 않은 남녀가 어느 순간 섹스를 하게 되고 불꽃같은 사랑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인데 여름의 한 기간을 참으로 강렬하게 그려내었다. 요즘말로 '쿨'하게 헤어지게 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참으로 소중한 추억으로 남게 될것이다. 어떻게 보면 야한 소설인데 그것이 묘하게도 귀엽게 느껴지게 잘 그렸다.
오래된 연인의 이야기를 그린 '꿈의 파수꾼'은 믿음이란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준다. 여자친구가 몇번의 고배끝에 인기작가로 발돋음하게 되는 순간 혹시나 자신을 버리지 않을까란 생각을 하는 남자.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고 멋지게 청혼을 받아들이는 여자. 뒷바라지 열심히 했는데 사법고시 합격하고 다른 여자에게 가버린 남자이야기 같은 소설인지 현실인지 구분안가는 것들을 많이 들어서인지 이런 소설을 보니 더 따뜻함을 느끼게 하는거 같았다. 사랑은 곧 믿음일것이다.
그 믿음이 깊지 않으면 결국 사랑도 한때의 불장난이 되고 마는것이 아니겠는가.
이 책의 제목인 '슬로 굿바이'라는 이야기는 제목 그대로 이별이야기이다. 그런데 좀 독특한게 그냥 이별이 아니라 이별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이다. 전에 그들이 연애를 했던 장소를 다시 가보면서 이별여행을 하는건데 두사람이 헤어지게 되는것이 서로가 원해서라기보다 남자의 무성의로 인해서 여자가 떠나주는 상황이랄까.
얼마든지 남자가 좋게 잘 해서 헤어지지 않을수 있었는데 그렇게 헤어지게 된것이 좀 안타깝게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의 사랑이 없어진건 아닌것 같았다. 사랑하므로 헤어진다랄까. 아무튼 그런 사랑도 있을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 제일 맘에 들었던 단편은 '진주 컵'이었다. 돈을 주고 몸을 사고 몸을 파는 관계에 있던 어떤 두 남녀가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면서 결국 서로에게 마음을 주게 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인데 비현실적이 아니냐고 할수도 있을것이다. 하지만 남자가 여자에게, 여자가 남자에게 마음을 쓰는 것들이 참 기분이 좋게 했다.
비현실적이라도 실제로 일어났으면 하는 생각도 있었고. 내가 과연 저 남자의 처지라면 어떨까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과연 그 남자처럼 마음 넓게 사랑할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밖에 다른 단편들도 흔한 소재지만 독특하게 잘 가공을 해서 세련되고 달콤한 사랑이야기를 보여주었다.
이 책의 배경이 되는것이 일본이라서 우리와는 정서상 좀 어색하게 여겨질만한 대목도 있긴 했다. 성의식면에서 우리나라와 일본과는 또 다른게 사실일것이다. 대놓고 섹스 이야기를 다룬 '15분'뿐만 아니라 다른 이야기들에서도 많이 표현이 되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런 야한듯하면서도 적나라한것같은 이야기이지만 그리 외설적으로 느껴지지 않은것은 그 속에 흐르는 '진정성'과 '따뜻함' 때문이었다. 참으로 따뜻한 사랑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외적으로 표현되어지는 것들보다 그 내면의 마음이 편하게 전해져서 우리와는 낯선 나라의 사랑이야기라도 해도 재미있고 기분 좋게 읽을수있었다. 역시 사랑이란건 나라가 달라도 보편적인 어떤것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솔로들은 옆구리시릴 계절이라서 이런 이야기 읽기 싫을지도 모르겠다. 뭐 사실 좀 그런면이 있는건 사실. 하지만 사랑에 대한 '따뜻한'이야기를 다루었기 때문에 옆구리를 더 시리게 하진 않을것이다. 오히려 마음을 데우면서 흐뭇한 느낌을 들게 할것이다. 물론 커플들은 읽으면 더 좋고.
이야기꾼인 이시라 이라의 솜씨가 잘 발휘된 이책은 오랫만에 보는 따뜻한 연애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