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수는 강포수도 수동이도 없는 텅 빈 산막 안에 홀로 앉아, 낯선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그런 모습으로 움직이지않았다. 머루덩굴의 집념과 최치수의 집념에는 얼마만한 거리가 있는 것일까. 귀녀의 집념이 머루덩굴을 닮았다면 치수의 집념은 덩굴에 휘감기면서 하늘로 뻗으며 제자리를 양보하지 않으려는 소나무의 의지를 닮았다 할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유물천지만물이 시작과 끝이 있음으로 하여 생명이 존재한다고들 하고 탄생은 무덤에 박히는 새로운 팻말의 하나라고들 하고 죽음에이르는 삶의 과정에서 집념은 율동이며 전개이며 결실이라고들 하고, 초목과 금수와 충류(蟲類)에 이르기까지 그 범주를 벗어나지못한다고들 한다. 인간의 죽음은 좀 사치스러워서 땅속 깊숙이 묻혀지고 혹은 풍습에 따라 영혼의 천상행(天上行)을 위해 편주(片舟)에 실어 물 위에 장사지내기도 한다. - P56
그런가 하면 짐승들같이고기밥이 되는 일도 있고 짐승에게 창자를 찢기기도 하고 까마귀밥이 될 수도 있다. 이 갖가지 죽음의 처리를 앞두면서, 헛된 탄생에 삶을 잇는 그 동안 집념의 조화(造化)는 참으로 위대하여 옷을 걸치고 언어를 사용하고 기기묘묘한 연극으로써 문화와 문명을 이룩하였다고 하는데 그것은 비극과 희극이 등을 댄 양면 모습이며 무덤의 팻말을 향해 앞뒷걸음을 하는 눈물 감춘 희극배우, 웃음 참는 비극배우의 일상(日常)이 아닌지 모르겠다. 귀녀와 평산의 경우도 그러하거니와 패륜을 다스린다는, 양반의 권위 손상에 보복을 한다는, 적어도 그만한 이유를 박아놓은 집념을 앞세우고 지금 구천이를 쫓고 있는 최치수는 웃음 참는 비극의 배우일까. 그의 집념이 설령 본능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며 정열과 욕망과도 거리가 있는 것이며 복잡한 인과관계가 따르고 있다 하더라도 풍토가 빚은 계율에의 복종이며 그 이행은 풍습의 괴뢰적 역할밖에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집념에는 다를 바가 없을 성싶기는 하다. 동학을 믿고서학을 믿는 교도들이나 성악설, 성선설을 주장하는 사상가들이나나라를 뒤엎고 권좌에 올라 만백성을 살리겠다는 혁명가나 그네들이 갖는 명확한 자각 혹은 사명감이 없었다 하더라도 풍습의 역사 - P56
는 길어서 설령 최치수의 심적 상태가 지금 완만(慢) 하지만 오히려 명확한 자각이나 사명감, 광신보다 지워버리기 어려운 것인지도모른다. 오래 묵은 때는 그것이 희미하여도 빠지기 힘든 것이다. 구천이를 발견한 후 이틀 동안 치수의 모습은 아주 발랄했으며 줄기차고 정력적으로 보이었다. 겨우 초당과 사랑 사이를 오가며 말벗도 없이 폐쇄 상태였으며 나태하고 병약하여 썩어서 괴어 있는 연못물 같았던 생활, 그렇게 살아온 최치수가 옷이 젖도록 땀을 흘렸으며 팽팽하게 긴장된 피부, 상기된 분홍빛 혈색, 눈은 햇빛을 받아보석처럼 빛나고 슬기와 아름답기조차 했던 그 모습에는 초조함이없었다. 권태로워 보이지 않았다. 냉소를 띠지도 않았다. 생명이 타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시간을 잊을 수 있었던 희열이 있었다. 지금까지 타고난 성격 때문에 보다 불행했었던 사나이가 겹겹이 싸인울타리 안의 고래등 같은 지붕 밑에서 잠이 오지 않는 한밤중이면허공에 주먹질을 하며 혼자 미치곤 했었는데 팽팽했었던 이틀을보내고 하산(下山)을 생각해보는 지금, 썩어서 고여 있는 연못물같은 망상이 다시 마약같이 핏줄을 타고 돌아오고 있었다. - P57
봉순네의 조부는 운봉(雲峰) 사람이었다. 구례(求禮) 순창(淳昌)도 그러하거니와 특히 운봉에서 창극조의 명인들을 많이 낳았는데 명창 중의 명창이요 창극의 중시조(始祖)며 가왕(歌王)이라 일컬어진 오만하고 괴벽스런 송흥록(宋興祿)도 운봉 태생이다. 송흥록말고도 동생 송광록(宋光祿)과 그의 아들 송우룡(宋雨龍)에 양학천(梁鶴天) 등이 있어 모두 동편(東便)의 거장들이었다. 봉순네의 조부도 한때는 알려졌던 광대였으나 말로가 시원치 않았다. 봉순네의 기억에는 볼품없는 초라한 늙은이, 중풍이 들어서 팔을 못 쓰게 된 늙은이의 모습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가 들려주었던 많은 이야기는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었다. 햇볕이 드는 마루에 하부죽한 입술을 떨며 어린 손녀를 상대하여 곧잘 얘길 해주곤 했었다. - P98
‘옛적에 권삼득(權三得)이라는 명창이 있었는디, 그 사람은 상사람이 아녀, 향반(鄕班)의 자제니께로, 그러니께 비가비구머잉. 그 양반이 유시적부텀 허라는 글공부는 하지 않고 창극조에 미치니 부모는 수삼 그걸 버리라 권유했든 기여. 아 생각혀보더라고? 양반허는 일이간디? 그래도 듣질 않은게로 가문에 수치라 문중에서 모여갖고 직이기로 의논이 됐던 기여. 그 양반도 죽기로 작정을 허고서 거적을 썼는디 마지막 가는 길에 하나 소청이 있노라 허드랑게. 그게 뭔고 허니 가조 일곡을 부르고 죽겠노라 허는 거 아니겠어? 기왕지사 직이기로 작정은 혔이니 죽는 사람 소원 하나 못 풀어주랴 허락을 하고 모두 빙 둘러서 듣는다 거적 밑에서 새나오는 가조일곡이 그만 사람으 오만간장을 다 녹이지 않았더라고? 울음바다가 됐당게로. 그래 하도 가긍하여 문중이 다시 의논을 혔지야. 족보에서 활적하고 내쫓기로 혔다이. 참말이제, 장혀. 대장부여. 목심을버렸이믄 버렸지 창극은 안 버맀인게로. 말이 쉽지. 그런게로 천하명창이 된 거 아니더라고?‘ 이 밖에도 조부는 괴팍하고 오만한 송흥록 못지않게 괴팍하고 기상이 센 기생 맹렬(孟烈)이, 그들의 곡절 많았던 정사 얘기며, 굶주리며 헐벗으면서도 끈으로 상투를 천장에 매달아놓고 각고 끝에 명창이 되었다는 염계달(廉季達)의 얘기며…… - P96
‘허 명창이 절로 되는 줄 아나? 어림없는 소리여. 명산대천에 가서십년 이십 년 피를 동우로 쏟아감서 목을 다듬는디, 그래가지고도 목을 못 얻은 사람이 있인게로 예삿일이간디? 참말이제 뻬를깎고 피를 쏟고 났이야, 어떤 명창은 절 기둥을 안고 돌믄서 소리를 지르는디 제 목소리 터지는 거를 천둥이 떨어진 줄 알고 까물어졌이야. 예삿일 아니랑게로‘ 늙은이는 봉순네 철이 들기 전에 죽었다. 봉순네 부친은 뜻을 펴보지 못하고 병들어 중도에서 업을 폐한 늙은이의 생애를 애석히여겨 눈물을 글썽이곤 했었다. 비록 창극의 길에 들어서지는 않았으나 소질은 불행한 늙은이보다 부친에게 더 있었던 모양으로 이따금 목을 가다듬고 가조 일곡을 일창하는 모습을 봉순네는 여러번 보았으며 지금도 그 청담한 목청이 귀에 쟁쟁했다. - P97
치수는 장암선생이 하던 말을 생각해본다. "그렇습니다 선생님. 억만금을 주어도 남에게 매어 있길 싫어했었던 사냥꾼이라면 말입니다. 그 신선놀음의 사냥꾼은 지금 한 계집때문에 허깨비가 된 모양입니다. 허깨비도 좋고 신선도 다 좋지 않습니까. 산에 와도 사냥꾼이 못 되고 마을에 가도 사내가 못 되고서원에 들어서도 학자가 못 되고 만석꾼 땅문서는 있되 장자(長者)가 못 되고 어머님이 계셔도 아들이 못 되고 자식이 있어도 아비가못 되고 계집이 있을 때도 지아비가 못 된 위인이 개화당이 되겠습니까, 수구파가 되겠습니까. 가동들을 거느린 의병대장이 되겠습니까. 신선이 못 되면 허깨비라도 되어야겠습니다만 무엇에 미쳐서허깨비가 되오리까. 그럼에도 잡사(事)를 잊지 못하니..... 이적막한 산속에서 진실로 제 자신이 사람의 자식임을 잊지 못하는데어찌하여 영신이 없음을 절감하게 되는지요. 하온데 선생님, 이 무시무시한 생명의 울음이 가득 차 있는 것만 같은 산에서 한 발만, 사람 세상으로 나갈 것 같으면 사람이 아닌 자신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어인 까닭이오니까. 기름이 잦아드는 등잔 같고 곰팡이 슨 서책 같고 벌레먹은 기둥 같고 사람들의 얼굴은 온통 물건으로만 보이니 말입니다. 사람을 미워하여, 아니올시다. 미워하는 척했을 뿐입니다. 영신도 목숨도 실상이 아니며 다만 영원불멸의 세월만이 - P144
영신을 조롱하며 목숨을 딱해하는 것이겠습니까. 억만금을 주어도 싫다던 사냥꾼은 산에서 영신을 보았을 테지요. 계집을 달라고 애원하던 사내는 목숨이 있음을 알았을 테지요. 그는 세월에 눈가림당한 한 마리의 복 많은 망아지가 아니겠습니까. 선생님은 세월의 뜻을 아시고 세상과 하직하실 수 있겠습니까. 믿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지금 눈앞에는 흰 눈보다 잿빛 나뭇가지가, 그리고 푸른 소나무가 더 많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 저기, 저기 노루가 한 마리뛰고 있습니다!‘ 치수는 총의 안전 장치를 풀었다. 노루는 나목(裸) 사이에서 얼른거렸다. 그러나 주력이 강한 노루는 산등성이를 향해 뛰어오른다. 강포수도 총의 안전 장치를 풀고 노루를 쫓았으나 곧장 달리지않고 산등성이를 향해 이리저리 사선을 긋듯 하며 올라간다. 서두르지 않더라도 산등을 넘으면 틀림없이 노루는 한눈을 팔고 있을것이다. 강포수와 최치수가 산등성이를 넘지 않고 이켠에 몸을 숨긴채 산 너머를 내려다보았을 때 노루는 사정거리 밖에까지는 아니었으나 상당히 먼 곳에 가서 한눈을 팔고 있었다. 우뚝우뚝 선 나목들이 장애가 되어 위치를 옮기는데 무슨 생각을 했던지 노루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강포수 입에서 제기! 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지각(地殼)에 밀폐된 깊은 땅속같은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만 흘렀다. - P145
이동진의 얼굴은 술이 올라 불그레했다. 최치수가 술을 부어주는술잔을 내려다보며 이동진은 다시 중얼거렸다. "상민들이 부러울 때가 있지." "어려울 것 없다. 의관을 벗어버리면 될 거 아닌가. 머릴 깎으면중놈이 될 것이요, 칼 들고 푸줏간에 들어가면 백정이 될 것이요." "말 말게. 기백 년 세월 동안 골수에 박힌 생각은 어느 나무에다 걸어놓고? 수백 수천의 잔뿌리가 골수에 박혀서 이것을 치면 저것이 솟아나고 저것을 치면 이것이 솟아나고 지금의 나라 꼴이 그 모양일세. 양반들 머리통하고 흡사하지. 그러니 하나를 알면 그것이전부인 줄 아는 상민들의 우직함이 부럽다 그 말 아닌가. 지켜야할 체통이 태산 같은데,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아래 위 훑어보고, 그러다 보면 이도저도 아닌 게 양반이며 글줄이나 읽었다는 그게 또우환이라. 쇠스랑이든 곡괭이든 들고 나설 수 있는 상민 천민이 얼마나 홀가분할꼬? 그네들은 짐승이 적을 만났을 때 그것을 습격하듯이 잽싸고 교활하고 용감하거든. 삼강오륜의 법은 몰라도 그네들은 뭐가 옳고 그른가를, 무엇을 막아야 하고 무엇을 몰아내야 하는가를 심장으로 느끼거든." - P154
"싱거운 소리 그만 하게. 송충이 죽음 보고 곡하는 수작이지." "허허, 이 사람아." "양반이 썩었고 체통만 태산 같고 하지만 그놈의 체통이 있어서짐승으로 떨어지지 않아! 그것들이 천민으로 떨어지기까지는, 흥오히려 짐승 편이 슬기롭지. 제 먹이를 위해 혼자 피투성이 싸움이라도 하지만 우중이라는 것은 수가 많아야, 무리를 지어서 비로소그 속에 끼여들어 칼이든 쇠스랑이든 휘두르며 피맛을 보고 너부죽한 아가리를 벌리며 웃는 게야. 비겁하고 천한 것들이 옳고 그르고를 알어? 용감하고 잽싸고 심장으로 느껴? 흥, 혼자 일어서서 저도 당당한 인간임을 과시하고 양반한테 대항해오는 놈이 있다면 내 천 석쯤 떼어주지." - P154
"있다면 어떡헐 텐가? 무엇이든 지나치면 옹졸해지는 법, 물론 상민들이 모두 그렇다는 건 아닐세. 선비들이라고 모두가 다 지조 있는 인물이 아닌 것같이. 개중에 슬기 있는 놈도 있어서, 오늘같이어지러운 세상에는 쓸모없는 글자로써 꺼멓게 먹칠이 된 식자(者)의 머리보다 천만 가지의 이치는 모르더라도 한 가지 이치에 눈을 뜬 상민들의 외곬으로 치닫는 행동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 뜻이야. 내 예를 하나 들어서 말하지. 상민으로서 의병의 선봉장을 맡았던 김백선 말이야. 아까 자네가 말했듯이 유생 출신 의병장의 십인 몫을 한 김백선 그가 유생 출신의 어떤 의병장들보다 잘 싸운것은 한 가지 이치에 투철했던 때문이요, 안승우가 원군을 보내지 않았던 것은 심장보다 두뇌로 일처리를 하려 했던 때문이지. 원군을 보내주지 않아서 왜군한테 패하고 돌아온 김백선이 분을 못 참고 안승우에게 칼을 빼어 들이대었다 해서 엄한 군율로 다스린 의암선생의 경우만 해도 그렇지 않는가? 강직한 성품 탓이라고만 할수 있을까? 결국은 서재인(書齋人)이고 식견의 결과에 지나지 않어. 목구멍에서 손이 나올 만큼 의병의 수효가 탐이 나는 마당에서유생 출신 의병장 열 사람 몫은 넉넉할 인물을 개죽음을 시켰다는것은." - P155
의암 유인석은 강원도 사람으로서 전통적인 유학 사상을 고수한거유(巨儒)이며 관직을 탐하지 않는 청빈하고 지조 높은 선비다. 1895년 왕비 시역(逆)에 대한 보복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봉기한의병들의 중의에 따라 의병대장에 추대된 그는 전국 사림(士林)에게 개화 신법(法)의 반대와 외세 배격의 격문으로 동지들을 규합하는 한편 지방 관헌들을 피로써 숙청하고 왜병에 항쟁했던 것이다. 그 유인석이 그때 선봉장으로서 선전(善戰)하였던 평민 출신의 김백선이 원군을 보내지 않아 패퇴하게 되자 그 분함을 참지 못하고 안승우에게 칼을 뽑아들었다 하여 마지막 노모를 한 번 보게 해달라는 간절한 소원조차 물리치고 군율에 의해 김백선을 처형했던 것이다. 김백선의 죽음은 충주 황강(黃岡) 전투에서 패배한 원인이되기도 했었다. 그것을 두고 이동진이 말한 것이다. - P155
무리를 잃고 무인지경에 홀로 남은 그림자, 갈밭에 기어드는 한마리의 눈먼 뱀이었을까. 그러나 윤씨부인의 자제력은 놀랍고 훌륭했으며 헌칠한 몸을 훨씬 당목 치마저고리의 모습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입술이 터져서 피가 배어났으나 눈빛은 힘차게 빛나며그의 언동은 분명했다. 어느때부터였던지 강을 내려다보는 마을 언덕에 터전을 잡았던 영천(川) 최씨의 일가, 문벌과 재물로써 백 년을 넘게 이 지방에 군림해왔으며 특히 드센 여인들 손으로 이룩했고 지켜왔었던 최씨집안의 마지막 사내, 이 사내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따랐다. 상제는 하나, 여식 혼자였다. 사람들 속에는 평산이 있었다. 그는 평소 외면하여 인사도 없이 지내던 김훈장에게 전과 달리 공손하게 몸을 굽히며 무슨 이런 변이 있겠느냐고 말을 걸었다. 김훈장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한숨을 지으며 참으로 해괴한 일이라하며 맞장구를 칠 판인데 삐뚜름하게 자빠진 갓 모양 하며 술에 절은 듯한 김평산의 작은 눈을 보자 입맛을 다시며 몸을 비키는 것이었다. 버림받은 평산의 눈은 다시 바쁘게 남의 눈을 찾아 헤매다가 귀녀 모습에 가서 부딪쳤다. 이때만은 눈밑의 군살덩이가 푸룩푸룩떨었다. 애통해하는 많은 노비들, 그 중에서도 귀녀의 슬퍼하는 모양은 유별하였다. - P184
죽음을 당한 사람은 물론 죽인 사람도 다 함께 지금은 지하 명부(冥府)에 가 있을 것이므로 사건은 이미 끝났다고들 생각했다. 마을 사람들이나 집안 하인들은 모두 또출네의 소행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또출네가 최치수를 살해하지 않았으리라는 사건은 결코 끝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은 용이말고도 두 사람이 있었다. 그 한 사람이 윤씨부인이었다. 다른 한사람은 봉순네였다. 용이와 마찬가지로 윤씨부인의 의혹은 삼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미친 여자가 삼끈을 준비했다가 살해하는, 그 치밀한 살해 방법을 과연 생각해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처음 윤씨는 환이를 눈앞에 떠올렸다. 끝내 그들을 추적할 것이며 종말을 보고야 말 최치수를 그들 쪽에서 먼저 손을 쓸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관선사의 서신에서 환이가 은신처로부터 한 발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확신을 얻은 후 윤씨부인은 그 무서운 망상을 물리칠 수 있었다. 다음, 마음에 짚인 인물은 강포수였다. 그들 사이에 있을 거래나 약속 같은 것은 알 길이 없지만 강포수가 떠날때 노자밖에 준 것이 없었다는 김서방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믐밤 산속 화전민 집에서 술을 퍼마시고 울었다는 그간의 상세한 동태를 알게 되어 의심을 풀 수밖에 없었다. - P209
마을 초가지붕에서는 여기저기 저녁 짓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해는 넘어 산허리에 몸을 감추고 있었다. 타는 듯 붉은 놀이 들판 가득히 퍼져서 집으로 돌아오는 농부들의 얼굴을 물들였다. 한복이는 이날 하룻밤을 더 묵고 다음날 아침 두만네가 타이르는 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콩가루를 묻힌 찰밥을 싸고 엽전 다섯닢을 얻어 허리끈에 묶고, 또 새로 삼은 짚세기를 신고 여벌로 주는 새 짚세기는 어깨에 메고 길을 떠났다. "한복아, 니 소달구지 만내거든 태우달라 캐라." 두만네는 저만큼 걸어가는 아이를 향해 소리쳤다. "한복아, 또 오니라아." 영만이 소리쳤다. 그 후에도 한복이는 철새같이 평사리에 나타나곤 했다. 타작마당에서 당한 그 봉변을 잊었는가. 그 봉변을 잊지 못하고 겁내면서도 나서 자란 마을에 대한 그리움,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더 컸었는지모른다. 한복이 나타날 때마다 마을 아이들 눈에서 적의는 줄어들었다. 철이 바뀌어도 한복이 나타나지 않으면 아이들은 들먹였다. 어른들도 말을 했다. 하기는 한복이 마을에 오면 두만네 집에서만 잠을 자고 밥을 먹었던 것은 아니었다. 야무네 집에서도 하루이틀쯤 그를 재워주었고 먹여주었으며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았던 막딸네도 한복이를 불러다 점심쯤은 먹여주었다. 어린 방랑자. 철새같이 옛 둥우리를 잊지 못해 찾아오는 한복이를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다 가엾게 생각했다. 이제 그는 달구지 신세를 질 줄 알았고 오다가 날이 저물면 장터, 빈 좌판 위에 잠자는 궁리도 생기게 되었다. - P256
길상이는 언더막길을 내려가면서 연신 킬킬거리며 웃는다. 그 일이 생각나서 웃는 것이기는 했으나 웬일인지 길상이는 마음이 달뜨고 세상이 온통 훤한 것 같아서 즐거웠다. 가물가물 젖어드는 것같은 햇빛, 축축한 봄의 입김이 사방에서 길상의 가슴을 간질러주는 것 같았다. 아직은 끝이 누우렇고 옹그러든 채였으나 까치들이앉아 있는 보리밭에도 봄 기운은 완연했다. 아이들이 불을 놓아 꺼멓게 그을린 논둑길, 꾸불꾸불한 논둑길은 마치 뱀 같았으나 그 길을 가는 농부들, 보리를 밟고 있는 농부들의 흰옷이랑 머리를 동여맨 베수건이 정답고 화사하게 보였다. 햇볕 바른 언덕에 꾸부정하게 자라난 뽕나무 밑둥에는 흙이 녹아서 허물어지고, 겨우 뽕나무의 뿌리가 나머지 흙을 움켜잡고 있는 것 같았다. "참말이지 봄이 왔구나." - P261
크게 소리를 질러보려다 그만두고 대신 길상이는 얼굴을 쳐들고 하늘을 본다. 정초에는 그렇게 많은 연이 푸른 하늘에 떠 있었는데 지금은 찾아볼 수 없고 어디로 떠내려갔는지 모를 줄 끊긴 연 생각이 났다. 찾지 못한 연은 높이 올라가서 수미산에 닿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러나 길상은 떠내려가는 구름이 못 견디게 좋았다. 하늘 빛깔도 좋았고 맴을 도는 소리개의 쭉 뻗은 날갯죽지, 그 날갯죽지에 올라앉아서 꿈을 꾸었을 때처럼 넓은 하늘을 날고 싶은 기분이 용솟음친다. 길상은 왜 좋은지 그 이유를 모른다. 길상은 목소리가 굵게 터져나오는 이 시기가 자신에게 있어 봄이라는 것을 모른다. 눈은 더욱 크고 서늘해졌으며 긴 목이 좀 둥거워졌고 양어깨가 벌어졌으며 다리에는 힘줄도 생긴 이런 변모가 인생에서의 봄이라는 것을 모른다. 봄에 눈을 떴기 때문에 이 화창한 봄날씨가 좋았던 것이다. 이 소년에게 또 하나의 이유는 최참판댁의 서희가 상복을 벗은 데있었는지도 모른다. 옥색 저고리에 남치마를 입었던 서희, 제법 늘씬하게 큰 봉순이도 서회를 따라 무색 옷을 입고 입이 벌어졌던 것이다. 아이들은 모두 너무 오랫동안 암담하고 비애에 가득 찬 집속에 마음을 가두어놓고 있었다. 그것은 기나긴 겨울이었었다고 해도 좋았을 것이다.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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