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에게만 결코 늙음이나 질병이 찾아오지 않을 것처럼, 칠성이는 똥이 말라붙은 소 엉덩이를 다시 한 번 갈겼다. 임자도 아닌 주제에 왜 이러냐고 악다구니를 하듯이 소는 움모어하고 운다. 솜뭉치 같은 구름이 뭉게뭉게 피는 하늘은 더없이 평화스럽다. 들판을 오는 농부들의 모습에서도, 강을 따라 흘러 내려가는 뗏목, 개천가에는 어미소를 따라다니는 송아지, 모든 것은 다 평화스럽다. 아무것도 더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더 잃지 않으려는 농부들은 또한 아무것도 더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더 잃지 않으려는 자연과 더불어 이 한때는 평화스런 것이다. 두만네 집앞에까지 온 간난할멈은 삽짝에 기대어 숨을 돌린다. 개가 쫓아나왔다. 개 짖는 소리와 함께 맷돌 돌리는 소리가 마당에서 났으며 삽짝에 가까운 까대기 겸 외양간에서 거름 썩는 냄새가 풍겨왔다. 집안은 맷돌 돌리는 소리뿐 아이들도 없는가, 개는 꼬리를 내리고 후퇴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아무도 내다보는 사람이 없다. 응석부리는 어린애같이 누가 나와서 부축해주기를 바라던 간난할멈은 할 수 없이 잔기침을 하며 마당에 들어섰다. - P116
모두 바빠서 날뛰는 계절이다. 꿀벌은 알을 까고 누에는 애기잠에서 깨어나 물신물신 크다가 다시 한잠으로 접어들었고, 그러고나면 뽕잎 따는 손이 바빠질 것이다. 목화씨를 뿌리고 논에는 풀을베어넣고 삼밭의 삼은 무릎만큼 자라고 날따라 뜨거워지는 햇볕에모든 생물은 생장을 향해 달음박질이다. 비만 좀더 와주면 푸성귀밭의 진딧물을 씻어줄 것을. 마을 아낙들은 보리타작까지, 누에치기도 그러려니와 끝장을 내야 하는 봄길쌈에 매달려 있었다. 보리타작도 멀지는 않았다. 파아란 떡보리를 맛보았으니. 햇볕 바른 곳에서부터 보리는 익어갈 것이다. 간난할멈은 별당 뜰로 들어간다. 마루에 윤씨가 오도마니 앉아있었다. 그러나 간난할멈은 윤씨 모습을 보지 못하고 연못가에 가서 "임자가 없이니 마당에는 풀만 우묵장성이네." 군지렁거리며 엎드려 풀을 뽑는다. 해당화가 연방 피고 진다. 분홍 꽃잎이 마당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 P154
"어머니가 그랬는데 그것 다 나 준댔어. 구슬이랑, 가락지랑, 비녀랑 그것 다 나 준댔어." 길상은 말이 없다. 서희는 실망한다. 요즘 서희는 엄마 데려오라하면서 패악을 부리지는 않았다. 차츰 엄마의 일은 뭔지 모르나 불가한 것이며 입 밖에 내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아지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보고 싶은 마음이 솟으면 아무것도 아닌 일을 꼬투리잡고 울부짖었고 누구든 어머니에 관한 얘기를 해주었으면 싶을 때그는 겉돌려가며 방금 길상에게 한 것처럼 더듬어보지만 아무도 그에게 어머니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서희의 마음이 자란 것이다. 슬픔은, 다른 아이들보다 그에게 더많은 지혜를 주었던 것이다. "길상아." "예." 서희는 공연히 불러보고 나서 등에 볼을 대고 구름을 본다. 구름은 강 건너 산봉우리에서 자꾸 피어올랐다. - P164
어느덧 사방에 땅거미가 지고 맞은켠 섬진강 너머, 꺼무끄럼해진 산에 이승한 저녁안개가 내리덮이기 시작한다. 집집마다 송판으로 얽어놓은 굴뚝에서도 저녁 짓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이들은 모두흩어진다. 배고픈 아이들은 피어오르는 연기를 따라 제가끔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새끼를 여러 배 뽑아내어 이젠 형편없이 늙어버린 두만네의 개 복실이는 삽짝에 오도마니 나앉아 있더니 허둥지둥 뛰어가는 거북이 동생 한복이를 보고 우우 하며 짖어댄다. 막딸네한테 직사하게 악담을 듣고 집으로 돌아온 평산은 저녁이다 되었느냐고 고함을 질렀다. 함안댁은 급히 부엌으로 쫓아들어가고 거복이는 아비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면서 뒷걸음질쳐 집 밖으로 뺑소니를 친다. 호박은 분명 제 한 짓이 아니나 전죄가 있었기때문에 막딸네의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를 숨어 들었지만 억울타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노릇이며 아비가 추달을 한다면 호박의 경우는 물론 전죄까지 잡아뗄 수는 있지만 우선 매가 무섭다. - P184
귀녀는 순간 막연해지는 모양이었다. 평산도 내심 막연함을 느끼었다. 황금의 더미가 소리도 없이 무너져서 흐트러져가는 것 같았고 희한한 꿈을 깨고 난 늙은이가 뼈다귀 같은 천장의 서까래를 바라보는 허무한 마음, 그러나 절망은 아니었다. 손을 뻗치기만 하면, 좀더 안간힘을 쓰기만 하면, 뭔가가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귀녀와 평산은 꿈이 무너질 것 같은 허망함에서, 그 공통적인 심리 때문에 그들은 말로보다 더 강하게 손을 잡았음을 느꼈다. 손을 잡고 공동의 이익을 위해 노력한다는 기대만이 이들의 허망한 순간을 구해줄 수 있었던 것이다. "되는 수가 있다. 너하고 나하고 의논이 맞기만 하면, 알겠나? 좀기다려보면은 되는 수는 반드시......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알겠나? 내가 주선할 테니 니는 어떡허든 애만 배면 된다. 종년이 그만큼 큰마음을 먹었다면 끝장을 내야지, 아암." - P188
"대단한 욕심이군 그래." 어처구니없다는 듯 뇌다가 준구는 "아아니 이 사람아 자네 저년을 건드렸군 그래." 하고 껄껄 웃는다. 치수도 따라서 껄껄껄 소리를 내어 웃어젖힌다. "썩 재미있지 않소?" "허허어 참, 그년 허파에 바람이 들어도 대단하게 들었구먼." "만석꾼 살림이 눈앞에 얼른얼른했을 게요." "자네도 죄가 많네." 치수는 웃던 웃음을 멈추었다. 껄껄 하던 웃음은 맥이 차츰 빠져서 허허허 하다가 눈에 독기가 번득 섰다. "그년을 내가 건드려요? 안 건드리고 바라보는 재미가 어떻다고 건드립니까?" "뭐?" 더 이상 부언하지 않고 "집념이요." "......?" "계집의 집념에는 사내가 따를 수 없지요. 욕심도 많지만, 그렇지않을 때도...... 조그만한 욕심, 조그만한 원한, 미움만으로도 살인하는 일이 허다하죠." "그게 무슨 소린가?" "최씨 집안의 살림은 여자 집념의 상징 아닙니까?" - P214
뜨거운 햇볕을 받으며 나귀 등에 흔들리며 ‘오래 사는구나‘ 문의원은 아까부터 그 말을 되고 있었다. 돌이는 빈 나룻배가 올라가지 않나 하며 강 쪽으로 시선을 보내며 말고삐를 잡고 간다. 지나간 고는 다 꿈과 같고 당장의 고초 역시 보내고 나면 꿈이될 것이외다. 참으시요, 하며 윤씨부인에게 말한 그 꿈, 지나간 칠십 년을 꿈으로 친다면 문의원은 참으로 긴 꿈속에 있었던 셈이다. 수많은 죽음을 지켜본 의생으로서의 칠십 평생, 아니 오십 평생, 약수(藥水)가 무효하여 죽은 생명이나 늙어서 가버린 생명, 액질에 넘어진 생명, 그 숱한 생명말고도 흉년에 죽고 민란에 죽고 동학전쟁에다 서학교도들의 학살, 그 소용돌이 속에서 문의원은 무참한 죽음들을 목도했었다. 최참판댁과의, 아니 정확하게 말하여 윤씨부인과의 인연도 하나의 죽음을 지켜본 데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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