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沿海州)는 국경에 가까운 곳이며 조선에서 이민해간 거래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남의 나라, 여러 민족들이 잡거하되 백인종의 땅인 것은 틀림없고 오랜 세월을조선과는 거의 접촉이나 교류를 꾀한 일조차 없이 생활권(生活圈)은 차단된 채 전혀 이질(異質)의 문화와 종교와 역사를 가진 땅으로서 비록 연해주가 그 나라에서는 망각된 시베리아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동양과 서양에 걸쳐 국토나 국력이 비할 수 없이 막강한 제정 러시아의 영토인 것이다. 사철이 음산한 바람과 빛깔에 덮여 있는 것 같았고 두텁고 무거운 외투자락과 털모자와 썰매의 북국(國)에서 이동진은 그네들의 문물제도를 착잡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바라보면서 생각한 것은 겨울 여름이 다 온유하게지나가는 고향 땅, 철 따라서 물빛이 변하는 아름다운 섬진강 백사장의 솔내음 실은 바람은 아니었다. 능소화가 담장 옆에 피어 있던최참판댁 사랑에서 최치수와 담소하며 두견주를 마시던 광경도 아니었다.  - P12

뜨락에서 싸락눈같이 떨어진 감꽃을 줍고 있는 형제의 모습도 아니었다. 외줄기 가늘다가는 황톳길에 흙먼지를 날리며 가난한 등짐장수가 지나가던 땅, 척박한 포전(圃田)을 쪼는 농민들이 살고 있는 그 땅덩어리가 가지는 의미였던 것이다. 국호(國號)는 비대해져서 대한제국(大韓帝國)이요 왕은 황제로, 왕세자는황태자로 승격한 동방의 조그마한 반도를, 어마어마한 현판 뒤에서 찌그러져가고 있는 초옥과 다름없는 나라의 주권(主權)을 생각했던것이다. 그러나 그런 시초의 생각들은 조선에 있었을 때의 상태와 별반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 P12

유교를 바탕한 근왕(勤王) 정신이 굳어버린 관념으로 되어버린, 그것은 비단 이동진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양반 계급의 생활 태도, 정신적 주축이기도 했었지만, 그 탓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간도에서 연해주방면으로 방황하는 동안 차츰 국가의 운명이 자기 개인의 문제와밀착해서 이동진을 어지러운 수렁 속으로 밀어넣기 시작했다. 자기자신은 무엇이며 겨레란 또 무엇이며 국토란 무엇인가 하고 자신과 연대되는 대상을 향한 감정을 캐보기에 이르렀다. 그는 냉혹하게 국가와 황실을 새로운 각도에서 인식하려 했다. 시베리아 벌판에 우뚝 선 자기 그림자, 한 인간의 모습을 처음 만난 듯싶었고 군주의 권좌의 부당성을 깨달았다. 국가나 민족의 관념도 무너지는것을 느꼈다. 그것은 불행한 이성, 그 불행한 이성이 마음속에 터전을 잡으려 했을 때 그러나 감정은 창(槍)을 들고 일어서서 아우성을 치며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강토와 군주와 민족에 대한, 오백 년 세월 유교에서 연유된 윤리, 그 윤리감은 또 얼마나 끈덕진 것이었던가. 본시 이성에서 출발하여 오늘날 굳은 감정으로 화해버린 그 윤리 도덕을 이동진은 한번 거역해보고 싶었다.  - P13

"참말이지, 애기씨 자라시는 기이 여삼추만 같십니다. 애기씨만 자라서 살림채를 잡으시믄 소인은 죽어도 눈을 감겄십니다."
수동이는 눈물을 떨어뜨리기 일쑤였다. 그러지 않는다 하더라도, 연하고 아직은 미숙한 머릿속에 거듭거듭 못을 박지 않는다 하더라도 조숙하고 영민하며 기승하고 오만한 서희가 그 동안 어려운알들을 겪어내면서 굳힌 것은 경계심과 주어진 모든 것을 지켜나가리라는 결심뿐이었다. 앞으로 자신의 신상에 변화가 있으리라는예측도 과민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터이어서 마음의 무장은 밤낮으로 불경처럼 외어대는 세 사람의 기대 이상으로 강인한 것이었다.
‘어디 두고보아라. 내 나이 어리다고, 내 처지가 적막강산이라고, 지금은 나를 얕잡아보지만 어디 두고보아라‘
그런 앙심은 이미 아이가 가지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역시 조준구다. 아침이면 봉순이를 거느리고 서희는 윤씨부인 상청에 나가 상식을 올리고 곡을 하는데 조준구는 그 곡소리가 질색이었다. 온갖 저주와 최씨 가문을 마지막까지 지키어나갈 것을 맹세하는 것 같은, 저주와 다짐을 하기 위해 해가지고 다음날이 새어 상청에 나가기를 기다린 듯, 처절한 울음이었다. 날로 새롭게 날로 결심을 굳히는 듯, 곡성을 들을 때마다 조준구는 한기를 느끼곤 했다. - P77

월선이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재는 끝났다. 위패들을 법당 밖으로 내간다. 사람들도 법당 밖으로 쏟아져나갔다. 하루가 기울면서 바람이 거실거실 일기 시작했다. 위패에 불이 붙고 연기가 피어올랐을 때 독경 소리는 한층 더우렁차게 울려퍼졌다. 망자의 유족들은 연기에 흐느끼고 울음으로흐느낀다. 허리 꼬부라진 늙은이, 부골스런 중늙은이, 아이 업은 아낙, 풀어버린 귀밑머리가 서러운 젊은댁네, 말쑥한 차림새에 염주를손목에 건 중인층의 여인들, 삼베적삼도 등바닥을 기워서 입은 촌부, 빈부귀천 할 것 없이 늙음과 젊음의 차별 없이 슬픔도 하나, 바람도 하나다. 망자의 극락왕생은 바람이요 뜬구름같이 덧없는 인연의 슬픔이다.
‘어매! 불쌍한 울 어무니! 부디 좋은 곳에서 환생하소! 그곳에서도 여자로 환생커든 한 남자를 만내서 일부종사하, 하고 아들 딸낳아서.......‘
마지막에 이르러서 비로소 월선이는 간절하게 손을 모아 정성을드린다.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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