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을 묵고 떠날 줄 알았는데 최치수는 연곡사에서 사흘 밤을 보내었다. 사흘 동안 우관은 외떨어진 암자에서, 최치수는 칠성당 가까운 처소에서 좀체 밖으로 나오질 않았으며 서로 대면하는일도 없었다.
홀로 앉은 우관은 상좌 명신이 끓여다 놓은 차 한 모금을 마시고 잠시 바깥 기척에 귀를 기울이더니 눈을 감는다. 눈을 감아도 최치수의 얼굴은 사방에서 우관의 망막을 어지럽힌다.
실눈을 뜨고 웃던 얼굴이, 수백 수천의 얼굴이 암자 가득히 들어차 우관을 향해 괴물체같이 움직이는 것이다. 흡사 지옥도를 보는 느낌이다. 우관은 감았던 눈을 떴다. 문살이 뚜렷한 장지가 밝게 눈부시다. 가을이 오고 있는 것이다. 마을보다 한걸음 앞서 산사의 가을은 도라지꽃에서부터 시작된다. 엷은 장지(障紙)를 통하여 느껴지는 바깥 풍경, 우관은 하늘과 숲과 사찰의 여러 건물, 바위와 오솔길이 일시에 숨을 죽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곳 그자리에 모든 것은 미동도 없이 거리(距離)를 굳게 지키며, 지렛대와도 같이 완강한 거리를 지키며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한치도 다가설 수 없는, 결코 접근을 용서치 않는 삼엄한 공간.  - P22

하나의 사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리였음에도 이미 최치수에게는 엄연한 사실로서 굳어버린 것이었다.
어느 누구에게서도 자신의 추리를 확정지을 만한 일을 밝혀내지못하였으나 여전히 하나의 사실로서 굳어버린 일이었다. 그는 그것이 추리였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는 일이 많았다. 목마른 나그네가 사막에서 신기루를 보는 이상으로 추리가 빚은 형태는 치수에게있어 명명백백한 일이었다. 그러나 치수는 공상가는 아니다. 망상하는 것은 더욱더 아니었다. 그는 추리의 세계에서 갈 수 있는 한의 가장 좁은 길을 헤치고 들어가보았으며 추리에 동원된 지나간 일의 기억은 운명적이랄 수밖에 없을 만큼 선명하였었다.  - P26

왜 치수는 막연하게 기약도 없이 산속을 헤매려 왔던가. 분노하고, 추상같이 마을이 떠들썩하게, 그게 싫었던 것일까. 자기 혼자 자신을 납득시킬 수 있으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자기 혼자서 손상된 권위를 찾았다 생각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 절대적인 권위 의식, 그러나 전부를 투신할 정열을 잃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고, 우관선사에게 사실을 규명치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 것은 결정적인 포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끝장을 내기 전에는 그 문제는 괴로운 숙제다. 끝장을 낸다는 것은 의무이기도 했었다. 싸움터에서 등을 돌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라를 사랑하는 정열도 없으면서 적병을 향해 치달릴 수밖에 없는 하나의 관념, 굳어져버린 관념이란 고질, 거의 윤곽을 잡을 수 있게 된 윤씨부인과 구천이, 우관선사와 김개주, 문의원과 월선네와 바우와 그의 아낙을 엮어서 형태가 만들어진 있을 법한 사실, 그 사실로 인하여 지금 추적하고 있는 구천이를 어떤 방향으로 몰고 가게 될지 그것은 치수 자신도 알 수없는 자신의 감정이었다. 확증을 회피하고 연곡사를 떠나왔으나 확증을 얻음으로써 구천에 대한 응징이 보다 가혹해질는지 응징을 포기하게 될는지 그것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P40

구천이를 도망가게 한 짓이 실수 아닌 고의였었다는 것을 안 이상, 의당 수동에게 어떤 조처가 있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동정도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초록은 동색이라는 말 한마디 내뱉은 이외, 치수의 얼굴에서 노여워하는 기색조차 볼 수 없었다. 구천이 찾는 데 정신이 팔려 그랬다고 할 수는 없었다. 닦달을 하려면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할 수 있는 일이요, 그 괴팍한 성미에 배신한 종 하나쯤 총으로 쏴 죽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최치수는 수동의 행위를 용서한 것 같기도 했다. 어떻게보면 그 일을 까맣게 잊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럴수록 수동이는 오히려 두려움을 갖는다. 죄책감도 컸었다. 설령 상전이 너그럽게 용서한다 치더라도 수동이는 자신의 행위를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구천에 대하여 절도를 잃은 연민과 숭배의 감정은 그러나 또다시그런 경우를 당했을 때 상전을 배신 안 하리라 장담 못한다. 그럼에도 수동의 뼛속 깊이 박힌 종으로서의 상전에 대한 충성심에는아무런 동요가 없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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