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 기자의 할 일, 저널리즘 에세이
김성호 지음 / 포르체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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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진 아나운서가 진행하던 프로그램 <저널리즘 토크쇼 J>를 챙겨보던 때가 있었다. 신문을 구독하지 않고 포털에 올라온 기사를 대충 보던 나에게 <저널리즘 토크쇼 J>는 색다른 충격과 동시에 세상이 어떤 방식으로 어떤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기자가 취재를 바탕으로 있는 사실 그대로 기사를 쓴다고 믿었던 나는 너무 순진했다. 우리가 읽고 있는 기사는 데스크나 광고주의 압력으로 원하는 방향으로 수정되기도 하고 아예 삭제되기도 한다는 걸 알았으니까. 


독자의 기자에 대한 인식은 정의감 혹은 사명감 같은 걸 부여받은 직업군이라고 여기지 않을까. 그러나 정작 그들에게는 그저 직장인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파이낸셜뉴스> 기자로 6년간 일한 김성호의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는 기자의 일상이 무엇인지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무엇인지 솔직하게 들려준다. 고백하자면 기사를 검색하거나 궁금했던 기사를 읽으면서 기자의 이름까지 읽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문학 관련된 기자의 이름과 대중문화 칼럼을 쓰는 기자의 이름만 기억한다.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는 기사가 어떻게 작성되고 어떻게 독자에게 전달되는지 그 과정을 과감 없이 들려준다. 기획하고 취재하고 진실을 보도하겠다는 기자의 마음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기사의 편집과 송고, 그에 대해 기자가 느낄 박탈감과 무기력이 서글프게 다가온다. 기자로의 신념을 지키는 일 대신 가볍게 내려놓은 일이 얼마나 쉬울까. 타사의 기사를 복사해서 그래도 기사로 내보내는 일, 광고를 교묘하게 기사(애드버토리얼)로 둔갑시키는 일, 남들이 다 쓰는 기사를 왜 쓰지 못하냐고 타박 받으면서도 자신의 글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


수없이 많은 제보를 받고 그중에서도 얼굴을 꼭 보고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제보자. 제보를 들으면서 기사가 되지 못할 거라는 알면서도 그 말을 끊지 못하는 시간. 그런 저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 사회에 많은 이들이 억울하고 속상한 것들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줄 이가 없다는 걸 확인했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기사가 될 수는 없겠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이야기까지 기사가 되지 않는다면 진실은 은폐되고 말 것이다. 


두려운 건 무책임함이었습니다. 저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생기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등 돌리고 도망치긴 싫었습니다. 시민의 ‘알 권리’에 기여하며 그로부터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는 기자의 자부심도 무적의 방패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129쪽)


저자가 가장 열심히 취재한 기자는 수술실 CCTV 사건이다. 뉴스를 통해 경악을 금치 못했던 사건, 대리 수술은 물론이고 오직 돈을 위해 수술을 감행했던 의사,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진실을 위해 모든 걸 거는 사람들을 취재하면서 저자는 세상을 변화 시키는 일에 일조했다. 법을 만드는 일의 시작은 누군가의 작은 관심에서 시작된다는 당연한 사실과 그 바탕에 언론의 힘을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서 최정규의 『얼굴 없는 검사들』이 떠오르고 최근 드라마 <트롤리>에서 법을 개정하기 위해 언론의 힘을 등에 업어야 한다는 주인공의 대사도 생각났다. 


‘단독’이라는 말로 독자의 클릭을 유도하고 똑같은 기사지만 다른 신문사에서 다룬 기사를 모두 다루고 수정할 원고도 수정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기자의 글은 더 이상 독자의 클릭을 얻을 수 없다. 일, 직업, 직장인이라는 개념에서 기자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기자가 아닌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기자 본연의 일에 대해 생각한다면 그들에게 저널리즘이란 무엇일까 궁금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기자의 할 일과 독자가 좋은 기사를 읽고 응원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 생각하게 만든다. 


기사는 독자에게 다가가 비로소 완성됩니다. 기자의 목표는 제가 공들인 기사가 마땅히 읽을 만한 이에게 읽혀 의미 있는 정보가 되는 겁니다. 좋은 기사와 좋은 독자의 만남이지요. 말하자면 쏟아지는 단독 기사의 홍수 속엔 언론의 절망과 희망이 모두 깃들어 있습니다. (226~227쪽)


나 역시 <단독>이란 말머리가 붙은 기사를 클릭하는 경우가 많고 기사의 제목만 보고 기사 내용을 읽지 않을 때도 많다. 포털에 구독한 언론사의 기사만 보게 된다. 내가 알지 못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세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때로 그 모든 일들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싶은 마음이 든다. 지난해 일어난 이태원 참사를 말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진실을 향한 기자의 취재가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 수없이 많은 장벽이 있더라고 그 앞에 여전히 문을 두드리는 기자가 많기를 바란다. 


일반 독자에게도 좋은 눈이 필요하다.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란 책이 그 눈을 키울 수 있도록 도와준다. 막연하게 기자라는 직업군에 대해 혹은 기자 정신에 대해 궁금한 이들에게 현장에서의 하루하루를 담담하게 들려주는 이 책은 훌륭한 교과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혹자는 겨우 6년의 기자 생활이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저자의 진실한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글을 읽는다면 달라질 것이다. 


기자는 남의 억울함을 풀 수 있는 일입니다. 언제나 풀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귀를 기울이고 함께 돌을 던질 수는 있지요. 그런 직업이 세상에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들이 멀찌감치 떨어져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차가운 세상에서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직업이란 얼마나 귀한가요. (1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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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1-17 14: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경계해야할 책 영업사원이 여기 또 계셨네... 이 글 읽고 보관함에 넣었습니다. 😆

자목련 2023-01-18 11:31   좋아요 0 | URL
은오 님의 눈에 영업사원으로 보이다니 영광이에요!

서니데이 2023-02-07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자목련 2023-02-09 10:35   좋아요 0 | URL
서니데이 님, 감사합니다.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지난주 중반부터 심드렁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심드렁하다는 말에 기대고 있는 게 맞다. 의욕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저 아래로 떨어지는 기분이다. 따지고 보면 계기가 있다. 다만 그것을 모른척할 뿐이다. 이러다 말겠지 싶은 거다. 내가 나를 챙기지 않으면 누가 챙기겠어 하는 마음 말이다. 읽고 있는 책들이라 제목을 달았지만 이제 정신 차리고 읽어야 하는 책 들이라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몇 주째 예배 참석도 하지 않고 온라인으로도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다. 나의 흩어진 마음이 좀처럼 모이지 않는다. 어제는 참석을 할 수도 있었는데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가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컸던 것 같다. 어영부영 시간을 끌다가 결국 집 소파에 안착하고 말았다. 아무튼 요즘 내가 좀 그렇다.






그래도 책들을 읽으려고,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기 위해 포스팅을 한다. 기자의 일상에 대해 들려주는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는 거의 다 읽어가고 있고, 겨울과 잘 어울리는 『눈』은 지금 읽어야 제 맛일 것 같은데. 리뷰대회 참여도 하고, 읽을 수 있을까? 『어른 이후의 어른』이란 제목이 끌리는데 살짝 넘겨보니 저자가 글을 쓰는 나이가 나보다 한참 어려서 살짝 고개를, 그러다 어른 이후의 어른을 찾거나 만나는 건 각자 다르니 미리 편견을 갖는 거구나 싶고. 














그러나 오래전 어떤 언니와의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당시 나는 어려운 상황에 있었고 그때 내 형편을 살피고 도와준 언니였는데 우리 큰언니와 나이가 같았다. 그런데 당시 도움을 주었던 언니는 결혼을 했고 딸아이가 둘이 있었는데, 그 언니와 같은 나이의 큰언니는 결혼을 하지 않아서 큰언니를 언급할 때마다 아가씨 언니라는 말을 했었다. 이제는 연락이 끊겼고 도움을 받았던 그 언니는 나를 잊었겠지만 나는 여전히 고맙고 감사하다. 아마도 어른이라는 말 때문에 그때가 생각난 것 같다. 힘든 일이 있을 때 나는 큰언니라면 어떻게 할까,라고 생각한다. 내게 어른은 큰 언니였던 것일까. 심드렁한 나에게 큰언니는 뭐라고 할까. 정신 차리라고 할까, 아니면 그냥 내버려 둘까. 


큰언니 생각이 나는 건 명절이 가까워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잊어버리지 말고 큰언니 사진 액자의 먼지를 닦아야겠다. 알라딘 새로운 플랫폼 개설을 했다. 아직은 기존의 글을 옮기는 수준이다. 뭔가 새로운 걸 쓸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럴 수 있을까?

 https://tobe.aladin.co.kr/t/lilymagno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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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3-01-16 1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참 심드렁했어요. 지금도 다시 에너지가 올라왔다고 할 수는 없지만...그냥 사는 게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에너지 많던 과거의 내 모습이 타인처럼 느껴져요. 자목련님의 읽고 쓰는 일에 다시 생기가 더해지기를 바라봅니다.

자목련 2023-01-17 09:16   좋아요 0 | URL
단순한 즐거움을 잊어버리는 것 같아요. 말씀처럼 이게 다 뭐라고 싶은 마음도 들고. 생각이 많아서, 혹은 생각이 아예 없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좀 서글퍼요. 그래서 이런 글까지 쓰고 말았나 싶으면서도 블랑카 님의 댓글을 받으니 고맙고 감사하고요!

레삭매냐 2023-01-16 13: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난주에는 책읽기에 좀
소홀하고 심드렁했던 것 같습
니다...

어제부터 다시 ㅋㅋㅋ 읽고
있습니다.

일단 이사벨 아옌데의 <바다의
긴 꽃잎>부터 마저 다 읽은 다
음에 새로 나온 살만 루슈디의
<무어의 마지막 한숨> 읽을 계
획입니다.

자목련 2023-01-17 09:17   좋아요 1 | URL
다시, 이게 중요합니다. 다시 읽고 다시 즐거움을 찾는 일!
심드렁은 던져버리고 책을 잡아야겠지요?

은오 2023-01-16 14: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계속 쓰고 지우고 하고있네요. 아, 그럴때 너무 힘들죠. 차라리 의욕은 넘치는데 시간이 없어서 괴로운 시기가 나을 정도로요. 계기가 있으시다니... 기운 내시라고 하기도 뭐해서 얼른 그 시기가 자목련님을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자목련 2023-01-17 09:19   좋아요 1 | URL
은오 님, 감사해요. 이런 시기는 짧으면 짧을수록 좋겠지요. 곧 다시 만나더라도 말이에요. 이 댓글로 말씀드리기는 이상하지만, 어제 <누울 수 없으면 실외다> 글, 참 좋았어요!
 
쓰지 못한 몸으로 잠이 들었다
김미월 외 지음 / 다람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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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태어나고 존재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사라지고 나를 부르는 이름, 사회적 위치와 역할에 충실하게 된다. 아이였을 때에도 학생이었을 때에도 나는 조금씩 사라지고 만다. 그러다 사회인이 되고 결혼이라고 하게 되면 누군의 남편, 아내, 아빠, 엄마, 며느리, 사위로 완전히 변한다. 자의가 아닌 타의 혹은 강제적으로 말이다. 누군가 선택했으니 그만큼의 책임이 따른다고 할지도 모른다. 여성의 경우 아이를 낳으면 모성애까지 부여된다. 그러나 모성애는 준비땅 하면 바로 완성되는 게 아니다. 그러니 출산과 양육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고 관여할 수도 없다. 구체적인 도움이 무엇일까 고민하고 그에 맞는 도움을 주기까지, 사회적으로 제도를 마련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일하는 여성에게 육아는 이전과는 다른 생의 최고 어려움이다. 조력자가 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엄마라는 역할을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정확한 방법, 노하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교과서나 선배가 있더라도 아이는 저마다 기질이 다르고 양육 환경도 다르니까. 그저 누군가 아이를 키우고 돌보는 경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정신적 위안을 준다. 맘 카페의 위력을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여기 글을 쓰는 직업으로 삼은 엄마들의 이야기 『쓰지 못한 몸으로 잠이 들었다』는 전업주부 혹은 일을 하는 엄마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도 있고 반대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양육과 일을 하는 건 같지만 글을 쓰는 일의 어려움은 일하는 엄마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성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엄마라는 공통분모를 지닌 모두에게 공통적인 고충에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도 그랬어 하고 말을 덧붙이고 지금 그 과정에 있는 여성에게 일종의 동지애를 전할 것이다. 그에 반해 글 쓰는 일이 아닌 다른 직업의 엄마에게는 다른 일에 대한 이해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독자에게는 좋아하는 작가의 근황이나 한동안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던 이유가 출산과 양육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시간이다.


김미월, 김이설, 백은선, 안미옥, 이근화, 조혜은 여섯 여성 작가는 모두 엄마이며 글을 쓰는 작가다. 엄마와 작가로 살아가는 이야기는 아이에 대한 미안함과 글쓰기에 대한 절박함과 작가란 정체성의 고민과 삶에 대한 이야기는 때로 눈물겹고 때로 가슴이 저리고 때로 답답하다. 이혼을 하고 혼자 아들을 키우는 백은선은 닥치는 대로 글을 쓰고 시인이지만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친다. 시를 쓰는 것만으로는 생활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에게 아들은 전부다. 그러니 글에서도 밝힌 것처럼 좋은 엄마여야 하고 좋은 엄마로 보여야 한다. 왜냐면 아이의 아빠에게 양육권을 빼앗기면 안 되니까. 


나는 지금 잠든 아이 곁을 몰래 빠져나와 책상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어두운 새벽에 혼자 깨어 있는 이런 시간이 없다면 낮 시간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어떤 관계에서든 함께 있기 위해서는 홀로인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백은선, 15쪽)





누군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럼 글이 아닌 다른 일을 선택하라고 말이다. 쓰는 일이 아닌 다른 직업을 찾으라고. 어느 작가 가족에게 아직도 소설을 쓰냐는 질문을 받는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있다. 당시에도 유명한 작가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글을 쓰는 일은 돈벌이도 안 되고 살림과 육아를 잘 하면 그만이라는 숨겨진 의미를 독자인 나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글은(문학포함 모든 예술) 엄마보다 우위 할 수 없는 일로 치부되었다.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기에 나는 작가들의 마음과 고뇌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전해지는 그 간절함에는 조금 다가갈 수 있었다. 아이를 낳고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려 노력하면서도 소설 쓰는 일에 대한 갈망은 당연하다. 그 과정에서 순간순간 엄마로의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게 아니가 수없이 자책하는 마음, 당사자가 아니면 아무도 모른다. 어떻게든 소설을 쓰고 싶어서 주말마다 서울에서 친정인 춘천으로 갔다는 김미월 작가,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느끼는 감정들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전하며 그로 인한 기쁨과 함께 시를 쓸 시간이 나지 않지만 아이로 인해 배우고 성장하고 있다는 안미옥 시인.


아이가 잠들기만을 기다리며 그 이후의 시간에 무엇 쓸지 차곡차곡 새겨 넣다가 아이와 함께 잠들고 속상해하는 마음, 한 손에 아이를 안고 한 손으로 자판을 두드리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아이가 유아기를 지났다고 해서 수월할까. 그건 아니다. 엄마라면 모두 알 것이다. 어린이집에 가고 학교에 들어가고 새 학년을 맞을 때마다 챙겨야 할 것들은 늘어난다. 소설 쓰는 엄마를 둔 덕에 자신의 책장까지 침범하는 엄마의 책, 소설 쓰느라, 마감에 시달리느라 아이들에게 이해를 구했던 모든 것들이 미안한 김이설 작가. 그가 두 딸들에게 전하는 말은 세상의 모든 딸과 여성에게 건네는 말 같아 이 부분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큰아이 희원아. “너는 네가 되렴.” 작은아이 효명아. “너도 네가 되렴.” 나도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김이설은 ‘김이설’이 되고, 김지연은 ‘김지연’이 되렴. (김이설, 114쪽)


엄마로의 삶과 글 쓰는 삶,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할 수 없다. 그 두 가지 모두 ‘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두를 잘 해낼 수 있다는 건 아니다. 엄마로도 최선을 다하고 글 쓰는 이로도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저 그들이 바라는 건 그 자신으로 살기를 바라봐 달라는 것, 어떤 강요도 어떤 책임도 전가하지 말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오래 남은 저자는 바로 시인 조혜은이다. 


나는 엄마로서도 시인으로서도 자주 실패한 하루를 산다. (조혜은, 152쪽)


두 아이를 낳고 양육하며 시를 쓰는 시인. 조금이라도 엄마가 더 같이 있기를 원하는 아이들, 엄마와 시인이 아닌 아내 역할을 해주기를 원하는 남편. 솔직하게 자신의 하루 일과를 낱낱이 드러내며 쓴 글은 뽀족한 송곳이 되어 가슴에 박힌다. 시를 쓰는 삶을 꿈꾸며 문학 안에서 만난 이와 꾸린 가정에서 어떤 순간 어떻게 자신을 잃어버리는지 들려주는 그 글에서 나는 그와 함께 절망하며 한없이 무너지는 기분이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 쓸 거라는 걸 알기에 나는 독자로 그를 응원하고 싶다. 그리고 그의 시를 찾아 더 자주 더 꼼꼼하게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유일한 사랑을 묻는 아이에게, 온전한 사랑을 바라는 아이에게 언젠가 말해주고 싶다. 모든 사랑은 불안을 껴앉고 사는 거라고, 불안하니까 서로를 꼭 껴안는 거라고. 오늘도 아이를 꼭 껴안은 가슴으로, 당신과 잡았던 손으로, 아프고 망가진 몸으로 쓴다. 나에게도 내가 필요해서, 나는 나를 데리고 가는 중이다. (조혜은, 185쪽)


어디 글 쓰는 엄마에게만 엄마로 사는 게 어려울까. 결코 아니라는 걸 안다. 쓰지 못한 몸으로 잠든 엄마들, 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하고 잠든 모든 엄마들, 나만을 위한 시간이 간절한 엄마들. 더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해 자책하는 엄마들은 잠들어도 잠들지 못할 것이다. 엄마가 아닌 ‘나’로 살아가는 시간에 그들이 더 행복하면 좋겠다. ‘나’로 사는 일이 건강하고 행복해야 엄마로 살아가는 일도 가능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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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삶을 살고 있다. 내적으로 외적으로 모든 게 불안하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는 세계의 것들에게 포위된 느낌이다. 내가 결심한다고 해서 거대한 환경이 달라지는 게 아니라서 때로 절망하고 무기력에 빠진다. 그럴 때 신은 절대적인 존재로 다가온다. 신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그런 존재가 있다. 든든한 어른, 기도를 올릴 수 있는 믿음 같은 것 말이다. 그러다 인간은 왜 이리 나약한 존재인가, 알 수 없는 물음에 빠져든다. 


정말 오랜만에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나를 둘러싼 세계와 내가 만드는 세계를 생각했다. 예전에 받았던 느낌과는 전혀 새로운 느낌이었다. 어린 소년 싱클레어가 너무도 안타까웠다. 부모와 주변 어른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얻을 수 없어 하루하루 불안한 시간을 보내는 그를 그곳에서 탈출시키고 싶었다. 너무도 빨리 세상의 이치를 알아버린 소년의 복잡한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기억 속 「데미안」은 그저 성장소설이었고 알에서 나와야 새로운 세계를 갈 수 있다는 그런 메시지로 남은 소설이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다른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건 더 나은 세계, 이전과는 같을 수 없는 세계를 갈망하는 간절함이었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혼란과 내적 성숙함을 헤세는 아름답고도 경이롭게 들려준다. 유년 시절 부모와의 관계, 학교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맺어지는 친구들과의 관계, 그 안에서 갈등하는 자아를 만난다. 누구나 겪는 느낌이고 누구나 지나온 과정이라기엔 싱클레어는 너무 빨리 세상을 지배하는 어떤 힘을 알아버렸다. 그건 데미안을 만났을 때에도 마찬가지다. 나를 꿰뚫어보는 사람, 한 차원 높은 곳에서 사유하는 데미안. 그가 말하는 카인의 징표는 무엇일까. 


대학에서 싱클레어가 술에 취하고 방황하면서 끝내 도달한 그곳에는 데미안이 있었다. 그와 닿고자 하는 바람, 그건 자신의 내면에 닿고자 하는 것과 같았다. 알 수 없는 끌림, 꿈으로 나타나는 욕망, 그 모든 것을 통해 싱클레어가 원했던 건 데미안과 같은 세계를 바라보는 일이었다. 그것은 사회개혁을 위한 토론으로 이어졌다. 소설 곳곳에 등장하는 신에 대한 생각들, 카인에 대한 해석은 편협한 세상을 향한 일침 같았다. 현재를 사는 우리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우리 속에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하고자 하고, 모든 것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해내는 어떤 사람이 있다는 것 말이야.” ( 「데미안」중에서)


물론 내가 생각하는 게 헤세가 전달하는 그것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 헤세의 소설과 에세이를 읽으면서 현재 우리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 그러니까 코로나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것들이 겹쳐 보였다. 전쟁을 통해 그들이 얻고자 하는 건 무엇일까. 우리가 바라는 세상, 우리가 깨뜨리고 나아가야 할 세계는 과연 무엇일까.





『디 에센셜 헤르만 헤세』에 수록된 다른 단편과 에세이에서도 헤세는 그런 세계를 말한다. 알이라는 세계를 깨뜨려야 하는 이유를 찾는다. 헤세가 경험한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특수 상황과 연결할 수 있지 않을까. 잔혹한 현실의 도피처 같은. 「전쟁이 두 해 더 계속된다면」이나 「남쪽의 낯선 도시」에서도 찾을 수 있다. 다른 곳으로 사라질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전쟁이 두 해 더 계속된다면」 속 화자 ‘나’가 돌아온 고향은 낯선 체계로 가득하다. ‘나’를 맞이한 세계는 오직 문서와 서류로 증명되는 곳이며 죽음을 위해서도 허가증이 필요하다. 전쟁의 상흔은 인간의 고유성을 말살한다. 현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상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에 반해 환상소설 「룰루」은 황홀하다. 여관 주인의 조카로 등장하는 룰루는 사라진 왕국 ‘아스크’의 공주 ‘릴리아’로 소설은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오간다. 룰루는 사랑하는 시인과 그의 친구들은 헤세 자신과 그의 친구들이라 할 수 있다. 룰루를 향한 사랑은 시가 되고 노래가 된다. 그리하여 「룰루」는 한 편의 연극이나 뮤지컬로 다가온다. 어쩌면 헤세가 원하는 건 전쟁으로 폐허가 된 현실이 아니라 환상 속 아스크 왕국 같은 건 아니었을까. 물론 「룰루」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쓰인 소설이지만 그 후 겪게 된 전쟁을 생각하면 말이다. 


전쟁의 실체를 정확히 알지 못하기에 헤세가 견뎌야 할 사회를 나는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소설에서 작가를 감시하는 이가 등장하거나 시를 쓰려면 조합에 가입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통해 정부나 권력의 통제가 있다는 걸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나로 살고자 하는 게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헤세가 「데미안」에서 그토록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삶을 살아내고자 했던 건 아닐까.


모든 사람에게 진실한 직분이란 단 한 가지였다. 즉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 (…) 누구나 관심 가져야 할 일은 아무래도 좋은 운명 하나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찾아가는 것이며, 운명을 자신 속에서 완전히 굴절 없이 다 살아 내는 일이었다. ( 「데미안」중에서)


철학적인 헤세의 글은 에세이 「까마귀」에서도 만날 수 있다. 어디서 왔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야곱이란 이름을 가진 까마귀 한 마리에 대한 그의 통찰은 놀랍다. 재주를 부리는 까마귀를 향한 보통의 시선과는 다른 헤세만의 시선. 모두가 사랑하는 까마귀의 이면에 숨겨진 비밀을 상상한다. 까마귀를 통해 삶의 근원과 죽음까지 사유한다. 결국 까마귀의 인생은 우리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헤세의 글은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게 만든다. 아니, 지금 나에게 가는 길을 살고 있을까 묻는다. 우리는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그저 가고 있는 건 아닐까. 그 길에 우리는 수많은 ‘데미안’을 지나쳐 온 건 아닐까. 여전히 알에 갇혀 있는 건 아닐까. 갑자기 조급함이 밀려온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을 나는 마주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온전히 직시할 때 진정한 나를 만나 불안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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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1-09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변의 모든 것들이 불안을
자극하지 않나 싶습니다.

되짚어 보면 불안 없이 살
수도 없겠지만요. 그냥 그
렇게 살아지는 게 아닌지
싶습니다.

책과 만나는 시간, 적어도
불안하지 않고 사유에 오
롯하게 집중할 수 있어 애
정하는 바입니다.

인간은 불안정한 존재, 공
감합니다.

자목련 2023-01-12 12:01   좋아요 1 | URL
맞아요, 더 편리해진 시간에 불안은 더 커졌어요.
뭔가에 빠지는 일이 그래서 더 필요하고 중요한 것 같기도 하고요!

서니데이 2023-02-07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자목련 2023-02-09 10:35   좋아요 1 | URL
^^*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 소설, 잇다 1
백신애.최진영 지음 / 작가정신 / 2022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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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대를 쓰는 일은 어렵다. 그럼에도 그것은 필요하다. 문학의 역할 중 하나로 생각한다. 문학, 예술을 통해서 시대를 읽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잊히고 마는 일들, 시의성 있는 소설로 우리는 기억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정신의 ‘소설, 잇다’의 첫 번째 백신애, 최진영의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는 남다르게 다가온다. 이 시리즈는 근대 여성 작가의 소설을 현대 여성 작가가 이어 쓰는 형식을 지녔다. 근대와 현대라는 시대 차이를 생각하면 어떻게 이어 쓸까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백신애의 단편을 읽고 그런 의문은 사라졌다.


시대가 지나도 여전한 우리 사회의 문제(여성을 향한 차별적 시선, 폭력, 부당한 대우, 가부장제)는 근대를 지나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서글픈 현실이다. 우선 백신애(1908~1939)가 쓴 세 편의 단편을 보자. 1938년 발표한 「광인수기」부터 「혼명에서」, 유작인 「아름다운 노을」까지 주인공 여성의 삶은 시대상을 반영하다. 


열일곱 살에 혼례를 치른 「광인수기」의 ‘나’의 남편은 일본으로 공부를 하러 떠났고 시누이와 시어머니와 살게 된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그들에게 내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남편은 편지를 보내고 대학교를 그만두고 남편이 돌아오자 시댁으로 들어온다. 남편은 가정을 돌보지 않고 ‘주의자’에 빠져 맘 고생을 시키고 나중에는 바람까지 피우고 ‘나’를 정신병원에 가둔다. 어느 누구 자신의 말을 들어줄 이가 없는 ‘나’가 하느님께 고하는 독백 형식의 이야기. 


나를 영 사람으로 여기지 않더라. 내가 모두 팔자로 돌리고 좋으나 궂으나 좋다고만 하니까 아주 나를 바보로 아는 모양이지, 이 지경으로 만드는 것을 보면…… (「광인수기」, 17쪽)


당시에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었던 백신애가 대단하다. 어디 소설뿐이었을까. 모든 잘못은 아내의 탓으로 돌리는 일이 흔했던 시대. 그러니 이혼 후 돌아온 「혼명에서」 속 ‘나’의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그런 어머니를 지켜보며 ‘나’는 아플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혼이 뭐 대수라고 말이다. 그런 ‘나’를 위로하고 앞으로 나갈 방향을 제시한 이가 있었으니 우연하게 만난 ‘S’였다. 운명처럼 세 번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나’는 건강을 회복하고 먼 앞날을 검토하라며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 일본으로 떠났다. 하지만 돌아온 건 ‘S’의 사망 소식이다. 소설에서 ‘나’와 ‘S’가 연애 감정을 지녔거나 호감을 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둘 사이에 흐르는 감정은 분명 사랑이다. 


당신은 살아서 나에게 ‘힘’을 가르쳐주었으면 죽어서 나에게 희망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혼명에서」, 107쪽)


백신애의 단편 중 가장 아름답고 여운을 남긴 건 「아름다운 노을」이다. 남편이 죽고 아들 하나를 둔 삼십 대 여성 ‘순희’는 재혼을 해야만 했다. 시집의 대는 아들이 잇고 재혼으로 친정의 자산을 받기 위해서다. 의사인 재혼 상대는 순희의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 자리에서 그의 동생 ‘정규’를 본다. 자신이 원했던 이상향의 모습, 그림을 그리는 순희가 절실하게 원했던 모습이다. 집으로 돌아와 단숨에 화폭에 그릴 수 있는 얼굴. 단지 모델로 반한 거라고 다짐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순희를 향한 정규의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둘 사이의 감정은 진정 사랑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뤄지는 건 불가능하다. 아들보다 세 살 많은 정규를 어찌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최진영이 이어 쓴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은 백신애의 「아름다운 노을」 변주한 소설이다. 이혼 후 십 대 딸을 키우는 사십 대 ‘순희’와 낮에는 공부를 하고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십 대 여성 ‘정규’의 이야기. 소설은 화자인 ‘나’ 정규의 불안으로 시작된다. 여자 혼자 일하는 공간에서 벌어질 수 있는 사건, 귀갓길의 위험, 데이트 폭력과 스토킹. 여성이 조심해야 할 문제가 아닌 범죄.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불안. 그 안에서 사랑은 가능할까. 최진영은 순희와 정규를 통해 가능성을 제시한다. 


정규가 일하는 편의점에서 순희를 처음 만났다. 여학생 사진을 보여주며 본 적이 있냐고 묻는 순희에게 정규는 본 적이 있지만 없다고 말한다. 그 뒤 정규가 일하는 펍에서 순희를 다시 만난다. 자연스럽게 친해진 둘은 서로가 좋아하는 것들과 고민을 나눈다. 비 오는 날 달리기를 좋아하는 일, 퇴근하고 집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걷는 일. 


따뜻한 바람이 우리 뺨을 어루만졌다. 천천히 다가갈 것이다. 오래오래 바라볼 것이다. 정성을 다해서 내 마음을 전할 것이다. 당신이 빗속을 달릴 때 나도 그 빗속에 있어요. 어딘가에서 나도 당신처럼 혼자 달리고 있어요. 홀로 달리고 있는 당신을 걱정하고 있어요. 심심하고 외로운 당신이 그 사실을 기억해주면 좋겠어요. (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 229쪽)


더 나은 쪽을 향하여 시대가 변한다고 믿는데 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변하지 않는 것일까.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는 나날이 늘어나고 세상은 혐오와 증오가 가득하다. ‘소설, 잇다’에 참여하고 에세이 「절반의 가능성, 절반의 희망」에서 최진영이 “백 년을 사이에 두고 선생과 나는 같은 생각을 품고 소설을 쓰는 것만 같다. 여성을 비롯하여 소수자를 억압하는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분노와 공포”(240쪽)라고 말하는 이 사회가 참으로 갑갑하고 답답하다. 그러나 이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런 소설을 읽고 응원하고 함께 나가야 한다. 앞으로 여성이 살아갈 시대에는 이런 주제가 아닌 다른 이야기로 이어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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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3-01-06 09: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근대 여성의 문학을 현대 여성 작가가 이어서 쓴 이야기라니 흥미가 생기네요. 자목련님 책 소개 감사합니다.

자목련 2023-01-06 10:02   좋아요 2 | URL
네, 풍성한 이야기와 생각을 안겨주는 책이었어요. 근대 여성 작가의 소설을 통해 그때의 실상도 마주하고요.

책읽는나무 2023-01-06 1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백신애 작가가 근대 여성작가였군요?
그래서 제목이 더 와 닿네요^^

자목련 2023-01-09 09:00   좋아요 2 | URL
말씀처럼 그래서 더 남다르게 다가오기도 했어요^^